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KBS 강연(1981년 9월) 녹취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힘든 일을 했기 때문에 저는 오늘날 그냥 그늘 밑에 서서 시원한 바람만 쐬어도 나처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드물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조샛별(조갑제닷컴) *'내일’이 너무 기대되고 가슴 벅차 새벽에 일어났던 ‘긍정맨’…매번 실패하고 매번 일어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은 자식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심어준다."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부지런함으론 따라갈 자가 없었던 농사꾼 아버지, 그러나 가난이 역겨웠다.> 오늘 KBS에서 주어진 강연의 제목은 ‘한 기업인으로서의 경영철학’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에게 무슨 경영 철학이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 기업인으로 생각하는 바를 중심으로, 또 한 기업인의 성장 과정과 많은 체험에서 현재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계획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기업이 과거 조그마한 중소기업에서부터 중기업, 국내 대기업, 현재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커진 과정을 얘기하기 위해서, 먼저 어렸을 때부터 저의 어떤 성장 과정이 현재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했느냐 하는 순서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다 농촌에서 가난하게 성장을 했습니다. 나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라고 하는 한 50호 되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1915년 겨울에, 시골 촌에서 7남매, 아들 여섯에 딸 하나 있는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아버지 역시 7남매, 아들 여섯 딸 하나, 우리 고모가 한 분 계십니다. 아버지도 역시 우리 집안의 장손이고, 나도 또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시골에서는 어린 시절 서당에 한 3년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천자문에서부터 결국은 소학, 논어, 맹자 이런 걸 배웠는데, 삼강오륜은 서당에서 어렸을 적에 여섯 살에서 아홉 살까지 3년간 배우고 또 소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서당에서 그 어려운 글을 배우고 매일 아침 선생님한테 외워서 책을 덮고 외워 바치고 또 외워 바치지 않으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고 했기 때문에, 굉장히 엄격히 배웠기 때문에 어렸을 때 배운 글은, 지금 학문을 생각하면 지금 대학에서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윤리 모든 걸 다 배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사실 소학교에 들어가니까 배울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소학교에서 배운 것은 구구법하고 일본말 이런 것밖에 없고, 사실 배울 게 없어서 1학년 들어가서 다녔는데 1학년에서도 무슨 창가나 이런 거는 낙제점이지만 다른 것은 다 100점이고, 2학년 배울 게 없으니까 또 3학년 올라가라 그래서 3학년 올라가도 사실은 배울 게 없었습니다. 아주 실컷 놀고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은 이 소학교 5년간이었습니다. 배울게 없으니 아주 실컷 놀았던 겁니다. 그렇게 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동네에서는 아주 소문난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는데, 또 가난했기 때문에 이 농사를 짓는데 아주 근검절약해서 여러 동생들을 건사했습니다. 농사를 지어가지고, 논에다가 보를 만들고 논을 일구고 또 화전을 일구고 해서, 그 많은 동생들을 장가보내고, 또 논을 만들고 밭을 만들고 해서 분가를 시키고 했는데,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참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부지런한 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농촌에서 아버지께서는 내가 맏아들이니까 아주 가장 제일 부지런하고 우수한 농군을 만들기 위해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데리고 다니면서 농사를 시켰습니다. 우리 농촌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아침에 어두워서 집을 떠나 그 밭이나 논에 나가면 환하게 밝고, 밝자마자 그 일을 시작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으면 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그렇게 부지런해도 또 흉년이 들면 아침에는 죽 쒀 먹고, 점심은 안 먹고 저녁에는 밥 해먹고,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조반석죽(朝飯夕粥)’입니다. 근간에 모든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그 ‘조반석죽’이란 말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건 아침에는 밥을 해 먹어야지 점심을 안 먹으니까 시장기를 모르고, 밤에는 잘 테니까 죽을 쒀먹고 그냥 자면 또 되기 때문에, 농촌에서 대부분 흉년이 들거나 어려운 집에서는 대부분 겨울에 일 안할 적에는 그 ‘조반석죽’을 다 하는 겁니다. 제가 어렸을 적 지난 얘기를 하는 것은 이 KBS 시청자 중에 가난하고 어려운 그 젊은 사람들에게 다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될까 해서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일제 하인데 일본 총독 통치하에는 우리 모든 농촌이 다 그랬습니다. 흉년이 들면 굶었지 총독부에서 무슨 대책을 해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봄이 되면 초근목피 나무뿌리로,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고, 그리고 또 너무 어리고 잘 먹지를 못해서 황달병이 들고 또 부황(浮黃)이 나서 붓고, 또 거기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총독부 조정 유도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가고 북간도로 가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 시골에서 저희가 농사를 짓고 가난하게 이렇게 크는데 어린 나이지만 너무 그것이 역겨웠습니다. 그래서 이 고생스러운 역겨운 그것을 어떻게 벗어날까 하는 것이, 어린 생각에도 절실히 느껴졌습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그래서 그 다음으로 농촌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우리 동네가 한 50호 있는데, 구장네 집에서 신문을 봤습니다. 동아일보를 봤습니다. 그 신문을 보기 시작해서부터는 농촌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여러 가지 그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얘기가 쓰여져 있고 도시의 생활, 모든 여러 가지 정치, 사회면… 그때는 우리가 경제면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신문이 오면 사회면 또는 재밌는 소설 이런 것을 제일 많이 봤습니다. 그 당시 아침 조간은 방인근 씨가 쓰는, 우리가 열여섯 살쯤에 그걸 봤는데, 그 ‘마도의 향불(魔道の香)'이라는 소설을 썼고, 석간에는 이광수 씨가 쓴 ‘흙’이라는 소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감명도 받고 도시를 동경하게 되고, 또 도시에 나가서 농촌에서 사는 걸 떠나 도시 생활을 하고 싶은 열렬한 동경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가서 어떤 생활을 해보겠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못하고 어쨌든 그 농촌을 떠나기 위해서 맨 처음은 그 당시 청진, 성진, 그쪽에 일본제철이 조그마한 용광로 제철소를 만든다고 해서 그런 공장에라도 가서, 일을 해볼까 하고 거기를 갈 생각을 했습니다. 여비가 없으니까 첫 계획은 동네에 나보다 두어 살 더 먹은 지주원이란 사람하고, 우리 둘의 계획이, 가면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가거나 또는 어디서 일을 하면서 갈 생각으로 처음 떠났습니다. 떠나서 처음에, 그 사람은 나보다 두세 살 더 먹었기 때문에 자기가 부끄러우니까, 새벽에 떠나 한 50리쯤 가서 어느 농촌에서 법을 얻어오라고 나에게 시켰습니다. 여러 집을 기웃기웃하는데 한 집이 아침 조반을 먹어서 그걸 들여다보면서 “길가는 사람이 노비가 떨어졌으니 밥을 좀 달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주인이 조반을 먹다가 쳐다보면서 “노비가 떨어지지 않게 붙들어 매야지 꼭 잡아매지 않아서 떨궜느냐”고. 그 말에 그냥 부끄러워서…사실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밥을 줄 사람인데, 그땐 부끄러워서 거기서 밥 먹는 걸 포기하고 도망갔습니다. 그 다음 원산을 지나서 고원이라고 갔는데, 그때 고원에서 태안까지 철도를 닦았습니다. 평원선이라고. 철도를 닦았는데, 그때 열여섯 살인데 공사판에 가서 그 흙을 담는 밀구루마를 밀면서 일을 하는데, 장마가 졌습니다. 45전을 주는데 밥값은 32전이었기 때문에 비오는 날이 많으면 외려 밥값은 더 부족해지고 옷은 점점 해지고 신발은 떨어지고…그래서 외려 빚을 져가지고 떠날 수도 갈 수도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있다는 소문이 들렸는지, 아버지께서 찾아와 고향에 다시 붙들려갔고 또 농사를 짓고 또 한 해를 지내고. 그리고 그 다음해 아버지께서 소를 팔아 집에다 궤짝 속 밑에다 감춰둔 것을 훔쳐서 서울에 왔습니다. 서울 와서, 그때는 그래도 그 돈을 조금 가지고 있으니까 ‘부기(簿記) 학교’라고, 이를테면 경리 장부 정리하는 학원에 등록하고 며칠 다녔는데, 어떻게 또 집에서 서울에 부기학원에 있다는 것을 편지로 받아 그것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께서 또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찾아와서 아버지는 이제 내려가자 그러고, 전 안 내려가겠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통사정을 해서 할 수 없이 고향에 내려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왕 서울 왔으니 아버지께서 동물원 구경을 시켜주겠다 그래서 동물원에 갔습니다. 창경원. 아버지께선 동물원을 거저 구경시켜 주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가니까 바깥에 대인, 어른은 10전이고 소인은 5전이라고 입장료가 쓰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아주 구두쇠로는 일등이니까, 자기는 ‘시골에서 호랑이들 다 봤으니 난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너가 들어가서 호랑이 보고 나오라’고. 그래서 뭐 ‘나도 호랑이 안 봐도 좋다고’, ‘나도 그림에서 다 봤으니 안 봐도 좋다’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그러면 이왕 왔으니까 동물원 들어가서 호랑이나 보자’고 해서 아버지가 10전 내고 내가 5전 내고 들어가서 보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고향에서 도저히 평생을 농사일을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흉년이 들면 굶고 그렇게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시골에 있을 생각을 안 하고, 그 다음 해 봄, 그때는 아버지가 철통같이 돈을 잘 감추고 하니까 어디서 훔칠 수도 없고 꿀 수도 없어서 내 친구 한 사람하고 서울을 걸어 올라왔습니다. 그분은 서울로 떨어지고 나는 인천에 갔습니다. 인천 가서 그냥 세 끼 밥을 먹기 위해서 모든 닥치는 일, 그러니까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물론 부두에서 짐을 내리고 나르는 일부터 모든 일을 다 하고, 또 거기서 얼마 지내다가 서울에 올라와서는 또 채석장에서 일을 하고,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동은 다 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힘든 일을 했기 때문에 저는 오늘날 그냥 그늘 밑에 서서 시원한 바람만 쐬어도 나처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드물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태양 밑에서 모든 힘든 노동을 했기 때문에. <쌀장사로 자리를 잡다> 그렇게 모든 일을 해 나가고 그러면서도 아주 근검절약해서, 좀 있다 안정된 직장을 처음 얻었습니다. 정미소에 들어가서 쌀을 배달하는 일을 맡으면서, 한 달에 12원씩 받았습니다. 그때 쌀값이 15원 했으니까 쌀 한 가마값 조금 안되게 받고, 그리고 세 끼는 그 집에서 먹고. 이렇게 안정된 직장을 잡아가지고 그 다음에는 자리가 잡히기 시작한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정미소에서 한 3년 있으면서 쌀장사 하는 것을 배워가지고 쌀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장사를 시작한 맨 처음입니다. 쌀장사를 하기 때문에 모든 배달을 직접 하는데, 가게에서 정미소 값하고 똑같이 팔고, 배달을 해주기 때문에 배달료를 좀 벌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당시에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 무악재 고개 넘어 그 당시 서울여자상업학교, 그때는 경성여자상업학교, 그 기숙사에 쌀을 대고, 또 배화여학교 기숙사에도 쌀을 대고, 그래서 쌀장사가 곧 잘됐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그 당시에는 일본 사람들이 ‘대동아전쟁’이라고 하는 2차 대전이 일어나서 쌀이 통제가 되면서 개인은 쌀장사를 못하게 됐습니다. 쌀은 정부가 관리하고 배급제도가 시작돼 또 그만뒀습니다. 거기서 조금 얻은 돈을 가지고선 가장 적은 돈을 가지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게 뭐냐 생각해서 여러 군데를 쫓아다녔는데 그때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때 경성서비스를 다녔는데 그 사람 얘기를 들으니까,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면 참 돈이 잘 벌릴 것 같아서, 그 사람을 데리고 일을 하는데…얼마 안 되는 돈으로는 도저히 안되어서, 그 전에 쌀을 외상으로 얻어다 팔고 외상을 갚고 하던 삼청정미소의 오윤근씨라고 하는 그 영감님을 찾아가 고리대금을 얻었습니다. 그분은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그 전에 내가 쌀장사를 할 때 쌀을 외상으로 얻어서 쌀값을 잘 갚았기 때문에 아주 날 신용했습니다. 거기서 2천 원을 얻어가지고 아현동 고개 넘어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수리공장을 샀는데, 그것을 산다고 해봤자 공장 권리금만 샀지 그 땅은 딴 사람 것이고, 함석집에 자동차 4대 들여놓고 수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련의 연속. 손대는 것마다 잘 되고, 또 망했다> 그것을 그해 3월 초순에 사서 열심히 해가지고, 자본은 자동차 돈 치른 것밖에 없고 돈이 없으니까 모든 부속은 외상을 들여서 자동차 4대를 들여놓고 수리를 해가지고 그 돈을 받을 때쯤 되었는데.. 한 25일 있다가 새벽녘에, 일하는 칠하는 직공이 손을 씻으려고 칠에 쓰는 신나를 불에다 던져서 물을 데우려다가 불이 나가지고 공장이 아주 삽시간에 다 탔습니다. 거기 수리하던 자동차도 다 타서 자동차 공장 산 2천 원 빚, 그 다음 부속품 외상 들여온 빚, 그 다음에 자동차를 물어주어야 할 빚, 아주 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어려울 때 쌀장사를 하다 전쟁이 일어나서 통제가 되고, 또 자동차 공장에도 불이 나고 아주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 상태였는데도, 한 달 동안 해보니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고리채를 준 영감님을 찾아가 ‘불이 다 타고 돈을 못 갚게 되었는데, 돈을 더 꿔달라. 이 자동차 공장을 해보니 돈은 벌 것 같으니까 자동차 수리공장을 더 하도록 돈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감님이 참 우리도 무식하지만, 우리보다도 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영감인데, 그런 영감이 크게 정미소도 하고 한편으로는 남는 돈을 가지고, 쭉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영감님이 골패짝을 툭툭 띠면서 뭐라고 하냐면 ‘자기는 여지껏 오랫동안 그 많은 고리대금업을 해도 누구든지 저당을 잡지 않고 전부 신용으로 줬어도 한 푼 떼인 일이 없다’, ‘모두 틀림없이 갖다 갚을 사람들한테 저당잡는 거, 자긴 수속하는 것도 모르고 그래서 전부 신용으로 주고도 다 한푼 떼이지 않고 잘됐는데, 정주영 너한테 처음 돈을 떼게 생겼다’고 말이야. ‘아주 사람을 잘 못봤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돈을 안 떼이는 기록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없이 돈을 또 줘야겠다’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그 영감님이 정말 큰 맘 먹고 3500원인가 얼마를 더 줘서 그것으로, 그 다음에는 수리공장 허가라는 게 참 어려워서 어떻게 되든지 간에 저 신설동 뒷골목 빈터에다가 함석으로 자동차 앞대가리만 들여놓고, 엔진 뜯어 수리할 수 있게 해놓고 대장간 하나 차려놓고서는 이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아주 곧잘 됐습니다. 그래서 영감님이 돈을 안 떼이는 기록을 또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재밌게 잘 했는데 2차 대전이 격동하기 시작해서 모든 공장을 다 폐쇄시켰기 때문에 자동차 공장을 폐쇄하고, 그 일본 사람들이 지금 남산공원 거기다 신궁인가 신사를 만들어놓고 하늘처럼 위하는 그곳 길 옆의 난간 쇠부스러기까지 죄 뜯어갈 때입니다. 그래서 또 할 만하고 자리잡을 만하니까 그게 또 폐쇄됐습니다. 그 다음에는 황해도 보광광업 주식회사라고 있는데, 거기 회사 차를 우리 수리공장에서 수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장이 그 당시 총독부 당시 식산은행 유하광풍의 아들 유하광칠의 맏아들인데, 그 사람이 날 착실히 봐가지고선 ‘그 수리공장을 못하게 되었으면 수안 광산에 와서, 광석을 태안 삼거리역에 실어가면 진남포 제련소로 자기네가 철도로 가져가는데, 그 광석 운반하는 것을 하청을 해라’고 했습니다. 그때 총독부 법이 운송 하청이 안 되게 되어 있는데, ‘교사 직원 형태로 위장을 해가지고 하청을 시켜줄 테니 하청을 하라’고 해서, 거기 내려가 한 3년간 하청을 했는데 참 돈벌이가 잘 됐습니다. 잘 됐는데 1945년 8월 해방이 되던 그해 봄에 한 5월 돼가지고, 그 현장 광산 소장 친구가 군대에서 수송부대를 맡아가지고 하다 돌아와서 거기 감독을 하는데, 어떻게 일본 사람이 잔소리가 심한지 견딜 도리가 없어서, ‘내가 없어도 여기에는 광석수송이 잘 될 테니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일본사람 소장이 자기 친구한테 넘기려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만두라고 해서, 거기서 5월에 나와 한 서너 달 일거리를 찾는다고 하는 동안에 해방이 됐습니다. 만약 내가 광산에 있었다면, 거기 있는 일본 사람들 전부 소련으로 붙들려 갔습니다. 시베리아로 전부 붙들려 갔습니다. 만약 내가 거기 있었으면 그 수많은 운전사, 노동자, 뭐 그때는 모든 사용주는 적(敵)이니까, 소련 군대가 들어와서 한 삼백여 명 사람을 썼기 때문에 나도 또 일본놈 틈에 붙들려 갔을지 모릅니다. <현대건설의 시초> 8·15 해방이 되어서 다시 자동치 수리 공장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건설업체도 청부업자들과 똑같이, 자동차 수리도 그 자동차를 얼마에 고치겠느냐 하는 견적을 내서 고쳐가지고 돈을 받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각 관청에 돈을 받으러 다녀보면, 우리는 쥐꼬리만한 금액을 받고, 건설업자들은 큰 금액을 받고 하는 걸 봤습니다. 똑같은 시간을 쓰면서 자동차를 수리해서 돈을 받느니, 건설업을 해서 금액을 크게 받는 게 좋겠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 현대건설의 시초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데 그때 사람들 대여섯을 모아놓고 간판을 걸고,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해체하고 현대건설을 시작한 겁니다. 그 다음 한 2년 후 전쟁이 나니까 일이 있는 곳은 전선이든 후방이든 총탄이 터지든, 어디든지 쫓아다니면서 공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공사의 이윤은 나았습니다. 어느 위험지구든지 쫓아다니면서 공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 미군 공사를 하는 것이 참 좋아서 거기에서 많은 걸 쫓아다니면서 건설업을 하는데, 거기에서 재정적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수도가 부산에 피난 중에 있을 적에, 정부에서 화폐를 개혁해서 100대 1로 내렸습니다. 전쟁 중에 화폐를 100대 1로 내렸는데, 3년 동안 물가는 100배 뛰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대구에서 고령 쪽으로 가는 낙동강의 다리가 다 부서졌는데, 그 다리를 계약해서 맡아 2년이 걸렸는데 3년 동안 물가가 100배 뛰었기 때문에 아주 회사가 결딴이 나서, 빚을 얻을 수 있는 빚은 다 얻어서 거기다 대고, 그때 한달 이자가 18%니까, 이를테면 100만 원을 쓰면 200만 원을 이자를 내야 하는 그런 곤경을 치렀기 때문에, (공사를) 끝내긴 했지만 일 끝난 후 현장에서 장비를 철수할 기력도 없는 그런 큰 곤경을 당했습니다. 그 어려운 곤경과 사채는 오랫동안 현대건설이 일어나는데 크고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그 빚을 이기고 그래도 한국 국내에서는 꽤 우수한 건설업자로 성장했습니다. 그 당시 대동공업, 대림산업, 극동건설, 조흥토건 등이 우수한 업자였는데, 그 틈에 현대건설도 꽤 우수한 업자로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4·19를 만났습니다. 4·19 이후 신민당 정부가 부정축재를 지적하는데, 그 당시에는 민간 자본이나 민간 기업의 발전이 없기 때문에, 공사다 하면 정부에서 발주하는 공사밖에 없었습니다. 큰 건설업자가 정부를 끼고 이를테면 치부를 했다 뭐 이래서 상당히 사회적 논란의 대상의 됐습니다. 거기에서 나의 생각과 현대건설의 모든 전환점이, 거기서 생긴 겁니다. 모든 기업이 과거나 현재나, 그 기업가가 자기 능력에 의해 발전하지 않고 어떤 권력과 부정하게 결탁해서 성장했다 하는 얘기는 모든 기업인이 다 원치 않을 것입니다. 또 그런 말을 듣는 것에서 해방되려고 온갖 힘을 다하는 것이 기업인일 겁니다. 우리는 그때 경험도 부족했는데, 국내 일도 한국건설업자의 건설 능력으로는 다 안돼서 무슨 발전소 하나를 지어도 외국의 벡텔 회사가 들어와서 짓고 비료 공장이나 다른 공장을 짓더라도 외국 회사들이 많이 산업 플랜트에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경험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 공사를 많이 하게 되면, 저런 국민의 비난을 면할 수 있다’, ‘완전히 자기 힘으로 컸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1960년 초부터 해외에 나갔습니다. <해외로 나가 온갖 시련 겪으며 발전의 토대를 닦다> 태국의 도로공사, 저 알래스카 산 속 영하 40도 되는 곳에서 교량, 태평양 괌에 나가서는 주택과 군사기지, 그리고 식인종들이 사는 파푸아뉴기니에 가서 지하 수력발전소, 그리고 월남 전쟁이 나서 군사기지, 메콩강의 준설, 여러 가지 군사 시설 등 이런 곳을 또 쫓아다녔고, 호주에 가서 항만 준설공사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언어문제, 기술의 미숙함, 외국 노동자를 쓰는 문제, 기후·풍습 등 생소한 곳에서 일하느라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해외에 나가 일할 수 있는 능력은 길러졌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호주에서 준설공사를 할 때 제일 큰 고통을 겪고 말할 수 없이 많은 결손을 보고 거기서 떠났습니다. 첫째, 준설공사를 시작할 때 ‘준설선에 탄 선원은 거기 가서 일할 수 있다’는 계약문제. 호주는 유색인종을 차별하는데, 더욱이 외국 노동자, 게다가 유색인종이 거기 들어가서 일하는 건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준설선은 해상에 있는 배에서 일을 하니까, ‘그건 준설선 선원이지 육상 노동자가 아니다. 그러니 허용해달라’고 해서, 첫 계약 당시 그걸 허용하는 것이 양해사항이 됐고, 그 다음 준설을 해서 흙을 파서 육상에 올리는 걸 정리하는 것은 호주 노동자가 하는 조건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엔 순조롭게 잘 됐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되었던 것이, 우리 노동자들이 육상에 가서 호주 노동자들이 준설터를 정리하는 데에서 조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얘기했다고 호주 노동자가 한국 노동자를 주먹으로 냅다 쳐서 싸움이 생겼습니다. 먼저 호주 노동자가 주먹으로 때리니까, 이 한국 노동자가 냅다 일어나서 받아버렸는데 그게 잘못되어서 그 호주 사람 앞니가 그냥 몽땅 다 부러졌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어서 호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고, 한국 준설선이 모두 호주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아주 큰 손해를 보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이 끝날 무렵에 중동 건설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준설선은 대부분 중동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많은 해외에 나가서 시련을 겪고 인재가 양성되었기 때문에, 중동 건설이 터지자 현대는 눈부신 발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설을 바탕으로 겁 없이 조선업에 뛰어들다> 현대는 건설 회사를 좀 했기 때문에 건설 자재를 좀 생산했습니다. 현대시멘트 등 건설 자재 관련 사업을 조금 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현대조선을 만든 동기가 됐습니다. 현대조선이 어떻게 시작되었느냐.. 해외에 나가 많은 공사를 하면서 제가 생각한 것은, 이 배 만드는 것, 조선은, 그 설계 도면대로 크게 철판을 용접하면 되고, 그 안에 큰 탱크 즉 30만 톤 되는 탱크는 약 4~5만 마력 발전소를 하나 그 안에 집어넣어 발전을 해서 프로펠러를 돌려 나가게 되는 것인데, 그 세부를 얘기하면 굉장히 복잡하지만, 크게 얘기하면 종합건설회사가 그 분야에 조금만 교육을 시키면 배를 만드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기계는 그 속에 있는 기계 분야를 교육시키고, 전기도 약전(弱電) 강전(强電)을 구별해서 교육시키고, 용접하는 것도 큰 산업 플랜트에서 큰 탱크도 용접하고 여러 가지 형태를 용접해봤기 때문에. 물론 세분해서 어렵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지만, 세심하게 생각을 배려할 것 같으면 어려운 게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렇게 판단해서 ‘풍속과 습관이 다른 데 가서 공사를 하러 다니느니 국내에 조선소를 지어서 해외에서 배를 주문 받아 국내에서 내보내는 것이 더 편안할 것 같다’는 이 생각이 조선소를 만들게 된 동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60년대 후반기에 조선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돈을 빌려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돈을 빌리는 일이 참으로 용이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처음 일본을 생각했고 일본에다가 조선소를 할 수 있는 차관과 모든 기술을 요청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은 현재 유치한 기술의 단계에서 조선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거부당했고, 또 그 다음엔 우리 우방인 미국을 쫓아다녔지만, 미국 사람들도 한국의 유치한 기술 단계에서는 조선소는 안된다고 또 거부당했습니다. <영국에서 돈 빌리기 위해 맨 땅에 헤딩하듯 고군분투!> 그 다음에는 유럽을 쫓아다니다가 영국으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다루고, 식민지 사람들의 능력을 고도로 활용해서, 오늘날도 모든 식민지 사람들한테 호감을 얻고 그 유대관계를 잘 하고 있는, 아주 우수한 정치·경제를 가진 아주 세련된 사람들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영국의 우수한 기술회사를 찾아가서 설명을 하니까, 그 양반들이 한국에 와서 모든 걸 조사했는데 우리가 하고 있는 화력발전소·비료공장 등을 전부 조사해서, ‘현대건설의 모든 임원과 기술자는 재교욱을 시키고 훈련을 하면 배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해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술회사의 추천서를 붙여가지고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에다가 자금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기 저리 융자이기 때문에 결국 영국 정부가 보증을 하고 영국 정부의 재정자금을 얻어야 합니다. 영국정부의 경우, 조선소를 설치할 수 있는 기계를 파는 수출이기 때문에 영국 수출보증기구에서 보증을 서줍니다. 그래서 바클레이스 은행에서 모든 것을 심사하고, 그 마지막 단계에서 은행 책임자들이 저와 우리 기술자들을 불러 얘기를 들어보겠다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월요일이었는데, 그 전날 ‘내일은 우리가 큰 시험대에 오르는 날이니까 하루 푹 쉬자’고 해서 세익스피어 생가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옥스포드 대학 박사학위를 주는 강의실도 구경하고, 석양에 윈저성도 보고 돌아와 푹 잤습니다. 그 다음날 점심 때 만났는데, 해외담당, 이를테면 총 책임자인 바클레이스 은행 부총재가 자리에 앉자마자 “정 사장은 전공이 뭡니까”하고 질문 했습니다. 당신은 현재 그 큰 기업을, 바클레이스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큰 조선소를 만들어서 세계 시장에 배를 팔아 자기네 돈을 갚겠다고 하는데, 당신 전공이 경영학이냐, 이공학이냐 이렇게 묻는 겁니다. 저는 이공학도 경제학도 전공한 게 없고 소학교밖에 다니지 않았다는 그 구구절절한 얘기를 늘어놓기 싫어서, “당신 은행에 낸 사업계획서를 봤냐”고 물었더니, ‘봤다’고 하더라구요. “사실은 어제 내가 어제 옥스포드 대학교에 가서 학위를 달라고 하니까 툭 보더니 그냥 학위를 줘서, 옥스포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어제 받아가지고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웃으면서 “확실히 옥스포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이 사업계획서를 못 만든다”며 “옥스포드 대학이 아주 영리하다. 아주 좋은 학위를 주었다”고 웃으면서 말해 아주 어려운 고비를 넘겼습니다. 거기서 인정을 해 줘서 영국 수출보증기구 장관에게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이런 조선 얘기를 하는 것은 현대가 커진 근본이 조선소고 중동 건설이기 때문에 조금 얘기를 한 겁니다. <영국 정부의 의문, ‘누가 경험도 없는 너희에게 배를 주문하겠나’> 그 영국의 장관이 저를 불러서는 ‘영국의 그 우수한 기술회사가 현대가 한 번도 배를 안 만들어 봤지만 배를 만들 수 있다고 인정을 하니까 그걸 믿겠다. 둘째, 영국의 바클레이스 은행에서 너희가 채산이 맞아서 원리금을 은행에 갚을 수 있다고 하니까 그것도 믿겠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자기가 만약 선주라고 하면 세계 선진 각국에 좋은 조선소가 많은데, 그 배를 많이 만들어 본 곳에 주문을 하지. 당신네들 보면 20만 톤, 30만 톤짜리 배를 만들어서 3천만 불, 4천만 불, 5천만 불에 팔아 거기서 나는 이익을 가지고 영국 정부에 빌릴 원리금을 갚겠다고 했는데, 내가 선주라면 한번도 배를 안 만들어본 현대건설에 배를 주문할 일이 없다’, ‘당신이 아무리 배를 만들어놔도 누가 사질 않으면 자기네 원리금을 갚을 수 없지 않느냐. 현대건설이 만든 배가 세계시장에서 팔린다는 증명을 가지고 오기 전에는 돈을 줄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참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기술회사와 의논을 해서 이제 배를 팔러 다니는 겁니다. 사실은 뭐, 우리가 울산에 지금의 현재 조선소 땅을 사 놓은 것도 아니고, 그 백사장 바닷가에 소나무 서 있는 사진을 찍어가지고 팔러 다닌 건데, ‘당신이 배를 사주면, 영국 정부에서 배가 팔렸다는 증명을 가지고 영국정부에서 돈을 빌려서, 여기에 조선소를 만들어서 당신네 배를 만들어준다’…참 긴 얘기죠. 그러나 하여튼 미친 듯이 쫓아다닌 겁니다. 우리의 방어논리는 ‘너희가 하나도 의심할 게 없다. 배를 만드는데 다른 조선소보다 좀 더 싸게 만들어 준다. 싼 것이 당신에게 이익이다. 그리고 만일 선주의 뜻과 같이 좋은 배가 안될 때에는 우리나라 은행에서 반대 급부 보증서를 떼서 우리에게 지불한 계약금과 중도금의 원금과 이자를 알아서 은행이 보상해준다. 그러니 너희에겐 손해가 하나도 없지 않느냐’, 뭐 이렇게 설득을 해서 나보다 더 미친 사람 하나가 걸려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레바노스 씨라고 그리스의 우수한 선주인데, 오나시스의 처남입니다. 지금 그 생질 하나가 오나시스의 유일한 딸입니다. 그 레바노스 씨가 영국에서 대학을 나온 신사인데, 26만 톤짜리 배 두 척을 주문하고 그 당시 계약금으로 14억 원을 현금으로 지불했습니다. 우리는 외환은행에 송금을 하고 배 계약서와 배 계약금 받은 것을 영국 정부에 들고가서 결국 영국 정부는 꼼짝 못하고 승인했죠. 배가 팔린다는 증거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다음 돈을 빌려서, 저는 부랴부랴 돌아와 현재 미포조선소의 땅을 사고 그냥 그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공정이 먼저 되는 공장을 먼저 짓고, 도크도 다 파기 전에 배 엉덩이만 들어갈 데에다가 배 엉덩이를 들이밀면서. 그렇게 배를 주문받아 조선소를 하면서, 2년 만에 그 배 명명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랑 같습니다만 세계 조선소를 짓는 건설사에, 또 조선사에 그렇게 빨리 조선소를 짓고 그렇게 빨리 조선을 만든 것도 참 드문 일입니다. <시련을 극복하는 힘은 ‘교육’에서 나온다> 우리가 현재 조선소를 지은 지 11년 됐습니다. 또 중동에 나가 일을 시작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현대 조선소가 되었기 때문에 현대건설의 모든 가능성, 국제 공신력이 올라가서, 우리가 사우디에 나가서도 강재가 13만 톤이 들어가는 산업항을 주문을 맡아서 9억 3천만 불의 공사를 했는데, 세계 항만사에 몇 세기에 한 번씩 나오는 큰 항구입니다. 바다속으로 16km나 되는 깊은 바다에다가 50~60만 톤 대형 탱크를 한꺼번에 6척씩 대고 기름을 싣도록, 그런 산업항을 만든 겁니다. 현대건설이 커진 것은 현대조선, 그리고 중동건설 여기서 획기적으로 커졌지, 과거 10년 전에 우리 선배들이 하는 회사, 잘 자리잡힌 삼성물산 같은 곳과 비교하면 이름도 성도 없었습니다. 현대조선과 현대건설이, 또 현대조선이 세계적인 경쟁을 할 수 있는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조선소를 지었다고 해서 오늘날 현대가 국내에서 또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경쟁업체가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많은 일을 해 오면서, 많은 문제점을 잘 극복하고 이겨내면서 여기까지 왔다라는 점을 잘 생각해보면, 사람은 교육, 물론 체계적으로 받는 교육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이것은 보편성을 띄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정상적인 겁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생은 ‘부모’> 우리같이 정상적인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 그 많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생님은 ‘부모’다. 부모는 물론 학문적으로 조리있게 정리해서 가르칠 능력은 없지만, 부모의 정신과 행동은 자손에게 무한한 모든 가능성을 전달해주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학교 선생들이 더 말할 나위 없이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에서 잘 선도하고 있지만, 아무리 훌룡한 은사라고 해도, 자기 부모처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지도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체계 있게 지도를 안 하더라도, 모든 부모의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은 자식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심어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로부터 평생 무엇을 어떻게 하라거나, 무엇을 잘한다 하는 칭찬을 평생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농촌에서 소학교 졸업하고 농사일을 하는데 일하기 싫어하다 매나 맞고 그랬지, 한번도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다시 없을 훌륭한 농군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그 생각과 마음을, 우리는 어리지만 다 읽을 수 있었다 이겁니다. 어머니께서는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당시 부인들은 여간한 도시 양반집, 서울의 명문대가 아니고선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거나 하지 못했는데, 시골 농촌 어머니이기 때문에 글은 한 자도 배운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하는 것, 모든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대자연, 이를테면 큰 바위를 봐도 높은 산을 봐도 큰 나무를 봐도 깊은 물을 봐도, 그 자손들이 잘되기 위해서 비는 그 마음은 아무도 당할 수가 없는 것이죠. 마음 속으로, 길을 가면서도, 자나깨나 자식을 위해 비는 마음, 그것이 자식들한테 전부 마음속에 흘러내리게 했기 때문에,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저에게 안겨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우리가 모든 일을 해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느 미국의 정형외과 선생님의 얘기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찾아와서 국회의원 선거를 나가서 자꾸 떨어지는데 자기 코가 다른 사람처럼 높지 못하기 때문에 떨어진다고 그래서 수술을 해줬더니 그 다음 나가서 당선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코가 낮기 때문에 안 될 거라는 그 생각이 크게 위축감으로 작용해서 장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 선천적인 불구자가 아닌 모든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다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 많은 일을 하는데 골치가 아프고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냐’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거나 현재나, 제가 불행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미래를 향해서 항상 희망에 차있기 때문에, 또 자기가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꼭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그런 희망에 차있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 ‘소풍가는 날’의 벅찬 기대와 흥분 속에서 일어난다> 과거 가난해서 노동판에서 일을 할 때에도 아침 6시에는 모두 아침 일찍 나가니까 그땐 일을 위해서 그렇게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아침에는 언제든지 그날 할 일이 아주 기쁘고 즐거워서 흥분 속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아침 5시 전에는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일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날 할 일이 너무 기대되고 기뻐서. 어떤 사람들은 골치 아픈 일이 많지 않느냐고 묻는데, 저는 좋은 일이 있어서 좋은 일을 더 잘되게 밀고 나갈 때에는 물론 한없이 좋지만, 또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그 기쁨은 다시 없이 좋습니다. 시골에서 일본 경찰에 독서회 문제로 늘 불려 다니는 동네 사람 얘기를 들은 게 있습니다. 매일 독서회 사건으로 불려 들어갔는데, 그 사람 얘기가 “경찰서에 불려 들어가는 것은 골치 아프지만, 그 나오는 기분이 좋아서 살 맛이 있다”고. 어려운 일을 해결할 때의 그 기쁨은 좋은 일이 추진될 때의 기쁨 못지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평생을 흥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를테면 소학교 학생들이 소풍 갈 때 흥분 속에서 일찍 일어나는 기분과 같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선천적으로 건강한 면도 있지만, 전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 건강하면 육체는 항상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실의에 차있고 복잡하고 알력이 있고 이렇다면 건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신이 성실하고 건전하면, 육체는 항상 건강하고 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특별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되도록 회사에 걸어나오고, 어쩔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 6시쯤부터 정구도 치고. 그러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회사 아침 간부회의를 7시 반부터 하는데 아직 시간이 남으니까 자연히 걸어 나오면서 시간을 소비하든지 정구하면서 소비하든지 매일 일과같이 그렇게 합니다. 생각만 건전하게 가지고 부지런하면 다 자기가 뜻하는 대로 성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현대는 금년도 약 4조8천억 원의 매출을 가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가 너무 커져서 문제가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현대는 현재 대외 지향적이며 외국 시장에서 파는 것이 79%이고, 국내 시장에서 파는 것이 21%입니다. 물건을 팔아도 세계 시장 위주로 현대가 커졌고, 이익을 내도 세계 시장 위주로 이익을 냈고, 또 국내 시장에서 우리의 기틀을 잡아준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기업은 국내 시장에서 기틀을 잡아서 해외 시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이런 것은 처음부터 국내에서 그 큰 배를 살 사람이 없어서 해외 시장에서 기틀을 잡았습니다. 오늘날 현대를 주도하고 있는 현대건설, 현대조선 등 기타 모든 상품은 해외경쟁 지향적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투자하고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
[ 2023-01-25, 15:3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