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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 冥) 조식(曺 植) 선생(先生)
남명 조식 선생 초상
처사로 곧게 살아간 남명 조식 선생 묘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西山)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이 시조는 교과서에 있는 것으로 시험에 자주 나와서 지금도 달달 외우고 있다. 1554년 제13대 임금 명종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슬픔에 겨워 지은 시라고 참고서는 해석한다. 당시 참고서 내용을 살펴보았다.
『 `삼동(三冬)`은 겨울 석 달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어지러운 세상을 뜻하고, `베옷`은 삼베옷이지만 실제로는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암혈(巖穴)`은 바위틈의 조그만 거처 즉 매우 작고 누추한 집`을 나타내며 `볕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은 임금으로부터 벼슬이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라는 뜻이다. `해`는 임금인 명종을 나타내며, `서산에 해지다`는 임금이 승하했다는 뜻이다. 즉 어지러운 세상에 누추한 집에서 아무 벼슬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선비가, 나라나 임금으로부터 입은 은덕은 아무것도 없지만, 임금이 돌아가셨다 하니 몹시 슬프다는 뜻이다. 』라고 적혀있다. 그러면서 남명이 지었다는 시 두 수를 소개 해놓았다.
두류산 양당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세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덕산복거(德山卜居)
춘산저처무방초(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느 곳엔들 꽃다울 방초 없으랴만
지애천왕근제거(只愛天王近帝居) 다만 천왕봉이 하늘과 가깝다는 것이 좋아서라네
백수귀래하물식(白手歸來何物食) 백수로 돌아와서 무얼 먹을 건가
은하십리끽유여(銀河十里喫有餘) 은하수 맑은 물을 내 언제 다 마실까
이 시는 남명이 부귀와 영달을 다 버리고 오직 인간이 가야할 진리를 찾기 위하여 지리산에서 읊은 시로 깨끗한 선비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고교시절로 대표되는 청소년시절 비록 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이러한 시들을 읽고 외웠지만 남명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참고서에 소개한 짧은 글이 전부였지만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장부의 기개가 느껴지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 그리고 무릉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 할 수 있다는 여유로움 등이 공상(空想)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남명 선생이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하였는지를 알고는 그러한 공상은 하지 않았다.
남명 선생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된 것은 대학교 시절이다. 80년대 대학생들 대부분은 소위 이념서적이라는 것을 한 두 권씩은 읽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그것을 읽지 않으면 괜히 친구들과 대화가 안될 것 같았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서로 사회주의 바이블로 평가되는 칼 막스(Karl Marx)의 자본론(資本論)은 가장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앞장 몇 장을 넘기곤 읽는 것을 포기했다.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고 일단은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민중(民衆)이라는 단어가 유행했기 때문에 민중과 관련된 책을 한 권은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른 책이 정동주의 소설 `백정`이다.
조선후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가장 천시 받고 학대받던 백정들이 항쟁을 통하여 자신들도 인간이라는 것을 절규하는 그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도 다 읽지 못했다. 책 주인공들의 이념적 바탕이 남명사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이해하고 싶었다. 안빈낙도한 청빈한 선비로만 기억되던 남명 조식 선생이 민중사상으로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선생은 늘 관(官)에 짓밟히던 민중(백성)들을 `민위방본(民爲邦本,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의 위치로 제고하려고 노력했다. 남명사상이야말로 마르크스를 들먹이지 않아도 친구들과 대화하는데 충분한 자료가 되었다. 그렇다고 깊이 있게 선생의 사상이나 행적을 연구한 것은 아니다. 정식 세미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떠드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써먹던 대목이 있다.
"치자(治者)들은 민중(백성)이 정권을 추대할 수도 뒤엎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민중(백성)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민중)은 배(정권)를 띄울 수도 엎을 수도 있다. 물은 평탄하고 잠잠할 때도 있지만 격랑일 때도 있다. 물에 의해서 배가 순항할 수도 좌초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배는 물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배가 있기 때문에 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배의 선장은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지성이 아니다` 등 당시 유행했던 구호들이 따지고 보면 선생의 `지행합일(知行合一)`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식은 능력과 정신으로 승화해서 자신의 인격도야는 물론 세상과 인류에 대한 사명감을 투철하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로운 행동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접한 남명 선생은 내 인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직장에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조용히 직장생활이나 잘하라는 주위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것이 의로운 행동이라고 믿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사명감이라고 생각했다.
유혹에 타협하지 않은 나는 강성으로 낙인 찍혔다. 치열한 싸움(당시 노동자 투쟁이라는 표현을 썼다) 끝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노조위원장이라는 전력은 더 이상 취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개인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뭔가 뜻 있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90년대 초 우루과이라운드로 수입소고기 개방은 현실화되었다. 연일 농민들은 반대시위를 했다. 농촌출신인 나는 한우만 전문으로 유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질 좋은 한우를 가지고 거래처를 확보하면 값싼 수입고기가 몰려 온다해도 경쟁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농민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국민들의 애국심 덕분에 내 사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5분의1 가격도 안 되는 수입소고기가 몰려오자 거래처들은 마진폭이 좋은 쪽으로 기울었다. 같은 사업을 한 사람들은 발빠르게 수입소고기로 업종을 전환했다.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도 여러 제안이 들어왔으나 끝까지 한우만을 고집했다. 거대한 물결은 누구도 막지를 못했다. 농민들의 권익을 지켜야될 축협마저도 수입고기 쿼터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사업이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고 결국 올해 초 문을 닫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나무라지만 나름대로 사명감에 투철했고 의로운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글로벌(세계화)시대에 너무 국수주의(國粹主義)적인 사고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명 선생의 글을 읽고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한 동안 선생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이맘때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웅기 팔도풍수지리사랑회 고문님께서 지금 산청 남명 선생 묘소에 와 있다고 전화가 왔다.
무슨 예감이랄까 김웅기 고문님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혼자 여행하면서 풍수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답사지에 도착하면 꼭 나한테 전화를 해서 그곳 지세를 설명해주셨다. 그 첫 번째가 공교롭게도 남명 선생 산소였다. 산소까지 차를 가지고가다 갓길이 무너지는 바람에 바퀴가 빠져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았다는 일도 이야기 해주셨다.
순간적으로 아직 내가 남명 선생 산소를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꼭 가보아야지 하면서도 하루만에 갔다올 거리가 아니어서 미루어왔다. 작년 말에 대전에서 진주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경남 산청은 서울에서 3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는 곳으로 다가왔다. 유난히 지리산을 사랑하는 유영봉 교수가 팔도풍수지리사랑회 답사코스로 지리산 자락을 가보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남명 선생이 떠올랐다.
2002년 7월21일 경남 남부지방에 장마로 호우주의보가 내렸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오늘도 우리가 가면 비가 그칠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우산을 챙겨들었다. 나중 이야기지만 신기하게도 우리가 답사하는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우리의 전설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대전에서 합류한 유 교수는 차안의 내 우산을 보고 겁먹었냐며 깔깔 놀려댔다.
단성 나들목(IC)에서 지리산 중산리로 이어진 20번 도로를 따라 10Km 정도 가면 산청군 시천면 사리가 나온다. 가는 길 왼쪽에는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장마 비에도 불구하고 맑고 시원하게 흘러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서울에서 일찍 출발했고 오는 길에 단성의 성철스님 생가, 문익점 선생 묘, 그리고 면화시배지를 둘러보았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이쪽 지리를 잘 아는 유 교수는 점심 먹을 장소로 덕천서원(德川書院) 앞 세심정(洗心亭)으로 안내를 했다.
남명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은 작고 아담한 일자문성 아래 자리잡고 있는데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바로 앞 강가에 세워진 세심정에서 남명 선생은 혼탁한 마음을 씻고 고고한 인품을 호흡했다고 한다. 우리는 세심정 위에 올라가 시원한 강물을 보면서 점심으로 준비한 김밥을 먹었다. 음성에서 농사를 짓는 최대규 선생님께서는 직접 가꾼 참외를 한 보따리 가져와 회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곳은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발원한 내대천이 천왕봉에서 발원한 덕천강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물살이 세고 커서 풍수적으로 좋다고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이곳에서 남명이 지리산을 보면서 지었다는 시 한 수가 떠올랐다.
저 무거운 종을 좀 보오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하나 그것이 어찌 지리산만 하겠소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점심을 마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남명 선생이 61세에 지어 72세로 돌아가실 때가지 머무르면서 후학을 가르친 산천재(山天齋)로 향했다. 덕천강변 절벽 위에 돌담을 둘러 경계를 표시한 산천재는 작고 남루한 건물 한 채가 전부였다. 이곳에서 오덕계, 정한강, 최수당, 곽재우 등 100여명의 인재가 배출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경치는 좋을지 몰라도 풍수지리적으로는 역시 좋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리가 그러함에도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 된 것은 지리를 뛰어넘는 남명의 경륜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산천재 맞은편 산자락 중턱에 남명 선생 산소가 있다. 선천재에서 도로를 건너면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가 비각 안에 있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의 묘지 입구에 죽은 사람의 행장(行狀)을 기록한 커다란 비석이다. 신도비문을 누가 짓고(撰), 썼느냐(書)에 따라 죽은 사람의 교유관계나 학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우암이 찬(撰)한 신도비가 세워진 사연은 뒤에 설명하겠다.
도로에서 마을 안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산 쪽 묘지로 오르는 길이 있다. 남명 선생 묘지의 우백호에 해당되는 능선을 따라 난 길이다. 여기서부터 약100m 정도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이 능선은 묘소 안쪽을 감아주지 않고 묘지를 반배(反背)하여 시천면 소재지 쪽으로 향해 있다. 외백호도 아닌 내백호가 싸주지 못할 정도면 남명 선생 묘는 혈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가 있다.
묘지 옆에는 남명의 죽마고우인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찬(撰)한 비석이 반절은 습기를 머금고 있어 글씨가 묘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주변 덕산이 한눈에 다 조망되는 이곳은 일단 높은 곳이고 그렇기 때문에 묘 양옆은 깊은 골짜기다.
산고곡심(山高谷深) 한 곳에서는 혈을 맺지 못한다. 백호는 반배했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청룡은 이곳을 앞까지 완전히 감싸주지 못하고 있다. 덕천강 건너편에 있는 안산 역시 이곳을 향해있지 않고 능선들을 강물 따라 비주(飛走)시켰다. 강물은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기는 하나 환포(環抱)하지는 않는다.
묘지에서 지기를 뭉친 입수도두, 선익, 순전을 찾을 수가 없다. 내려오는 용은 크고 두꺼우나 기세 있게 변화를 못하고 있으며 탁하고 연약하다. 혈을 맺을 수 있는 용맥은 작더라도 단단하고 기세 있는 변화를 해야한다.
좌측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덕천강과 합수하는 지점을 내파구로 보고 덕천강이 돌아나가는 곳을 외파구로 본다면 내파구는 정미(丁未)고 외파구는 손사(巽巳) 방위다. 묘지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하였다. 내파구 기준하면 길향인 좌왕향(自旺向)이 되겠지만 외파구를 기준하면 향상(向上)으로 충파관대( 破冠帶)하고 충록( 祿)한다.
이에 대한 용어가 있지만 남명 선생에게 불경스러워 차마 입에 올리기 거북하다. 향법(向法)만 가지고 길흉화복을 따진다면 처음은 좋을지 霽A嗤?나중은 좋지 않다고 하겠다.
좋은 자리이기를 바랬는데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생전에 선생께서는 부귀와 영달을 멀리하셨는데 사후엔들 욕심이 있었을까 싶다.
선생의 묘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선생에게 여쭈었다.
"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의롭게 살자면 많은 희생이 따르는데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요. 본인은 그렇다하지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겪어야 할 불편과 고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
이상스럽게도 큰 도학자(道學者)들 치고 좋은 자리에 묻힌 분이 드물다. 안동 도산에 있는 퇴계 이황 선생 묘가 그렇고, 경기도 파주에 있는 율곡 이이 선생 묘가 그렇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분들은 손수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잡으셨다고 한다. 풍수지리는 전문성을 요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고 현장실습이 동시에 이루어져야한다.
퇴계 선생이나 율곡, 남명 선생은 성리학자로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풍수지리는 학적취미 정도의 지식이었을 것이다. 그 분들이 풍수에 관한 책은 읽었겠지만 간산(看山)이나 구산(求山)을 하지는 않았다. 전문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풍수지리는 전문성을 요한다. 그래서 조선은 과거를 통해서 전문 관리인 지관을 뽑았다.
다음 답사지인 청학동으로 떠나면서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천왕봉 산줄기들을 바라다보았다. 남명 선생의 고고한 기상만큼이나 기품이 서려 있는 곳이다. 지리산만큼이나 무거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는 남명 선생이다. 이와 같은 분이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은둔하기에 알맞은 장소다.
나도 61세가 되면 이와 같은 곳에서 고고하게 살아보았으면 좋겠다. 한가지 남명 선생과 다른 점은 그야말로 안빈낙도하면서 살기를 바랄 뿐이다.
처사로 곧게 살아간 남명 조식 선생 행장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연산군 7년 신유(辛酉, 1501)년 6월26일 이웃한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나셨다. 승문원 판교(정3품)를 지낸 강직하기로 이름난 아버지 조언형(曺彦亨)과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의 3남5여중 2남이시다. 토동(兎洞)은 선생의 외가이고 본가는 합천군 삼가면 판현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토동 외가 집터는 명당으로 유년(酉年)에 태어나는 아기라야 자라서 현인(賢人)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조식이 태어나자 외조부는 자기네 이씨 운이 조씨 집안으로 넘어갔다고 아쉬워했다.
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벼슬이 보국장군(輔國將軍) 대도독(大都督)과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라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진 조계룡(曺繼龍)을 시조로 한다.
설화에 의하면 조계룡 어머니가 처녀 때 병을 얻었는데 창녕의 화왕산(火王山) 정상에 있는 용지(龍池)에 가서 기도를 하면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던 중, 용의 아들 용자(龍子)를 만나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병이 낳게 된 그녀는 집에 돌아와 아들을 낳았는데 아기의 겨드랑이에는 `조(曺)`자와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이 신기하여 진평왕에게 고하니 왕이 아이에게 조씨(曺氏) 성과 용의 혈통을 잇다는 뜻의 계룡(繼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조계룡은 매우 총명하게 자랐으므로 진평왕이 사랑하여 여러 벼슬을 주고 부마로 삼았다. 그는 왜구의 침입을 물리쳤고,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춘추와 김유신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창녕 조씨는 신라와 고려조에 고관대작들을 많이 냈다. 고려 공민왕 때 조민수(曺敏修)는 홍건적의 침입을 맞아 이를 섬멸하였고, 우왕 초에는 경상도 일대에 들끓는 왜적을 토벌한 명장이었다.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까지 이르렀으나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이성계의 야심에 반기를 들었다가 귀양가서 죽은 지조 있는 장군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조에 그의 후손들은 초야(草野)로 들어가 벼슬을 멀리하였다고 한다.
남명 선생의 증조부 조안습(曺安習) 역시 생원(生員)으로 서울에 살다가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조부 조영(曺永)도 벼슬살이를 하지 않아 가세(家勢)는 기울어져 갔다. 그러다 남명의 부친과 숙부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게 되면서 가세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다섯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선생은 아버지가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해서 아버지한테서 글을 배웠다. 이때 이윤경(李潤慶), 이준경(李浚慶) 형제, 이항(李恒)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홉 살 때는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어린 조식은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은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 일 것이므로 요절할 리 없다"라면서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고 한다.
15세가 되던 중종10년(1515년) 아버지가 단천 군수로 부임하자 그곳에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노장서적, 불법서적 등 폭넓고 다방면의 독서를 하였다. 또 지방행정에 대해서도 아버지를 통해서 살피게 되었다.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이때가 남명에게는 남아가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과 재능을 익힌 시기라 할 수 있다.
18세가 되던 중종 13년(1518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장의동으로 돌아와 살았으며 이때 이웃한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년)과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년) 종형제와 사귀어 평생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지낸다.
성운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중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명종 즉위 년인 1545년 형이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화를 입자 보은 속리산에 은거하여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은 인물이다. 토정(土亭) 이지함,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남명(南冥) 조식(曺植)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만 전념했는데 남명이 별세했을 때 그 묘비명을 썼다. 지금도 묘지의 비석은 새로 만들어 졌으나 내용은 대곡의 것이다.
성수침은 성운보다 4살 위인 종형으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다. 중종14년(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파주(坡州)의 우계(牛溪)에 은거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을 떨치고 문하에서 많은 석학(碩學)들을 배출하였다.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된 인물이다.
20세가 된 남명은 중종15년(1520년) 별거초시에 나가 생원과 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한다. 남명은 고문(古文)에 능하여 시문(時文)이 아닌 고문(古文)으로 시권(試卷)을 써서 시관(試官)들을 놀라게 했다. 그 글은 사람들이 전송(傳誦, 암송)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숙부인 조언경(曺彦卿)이 멸문(滅門)의 화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하여 벼슬을 단념하게 된다.
세상을 업신여기며 학문적, 정신적인 방황을 하고 있던 남명은 25세 때 산사(山寺)에 가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중국 원나라의 유학자 노재(魯齋) 허형(許衡, 1209-1281년)의 글에 크게 감명을 받아 이를 평생의 나아갈 지표로 삼았다.
"지이윤지지 학안자지학 (志伊尹之志 學顔子之學) 출칙유위 처칙유수 (出則有爲 處則有守)"
- 이윤(伊尹)의 뜻(志)을 뜻으로 하고, 안자(顔子)의 학(學)을 학으로 하여, 벼슬에 나가면 유익한 일을 하고, 처사로 있으면 지조를 지킨다. -
노재 허형은 원(元) 세조 때 사람으로 경조제학(京兆提學), 국자제주(國子祭酒) 등의 요직을 맡았으며 벼슬에 물러나서는 제자들에게 실천도덕을 주(主)로 한 강학(講學)을 연 인물이다.
26세가 되던 중종21년(1526년) 3월에 정3품 통훈대부까지 올랐던 아버지가 기묘사화로 파직된 후 58세로 세상을 떠나자 합천군 삼가면 관동 선영 아래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3년 동안 초막을 짓고 여묘생활(廬墓生活)을 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했던 아버지는 장사치를 비용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남명은 가난과 싸우면서 민중(民衆)들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남명사상(南冥思想) 속에 항상 민생을 잊지 못한 것은 이 때 어려움을 실제로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여묘생활을 마치고 생계가 어려워진 남명은 30세 때 중종25년(1530년) 살림이 넉넉한 김해 처가(妻家)를 찾아갔다. 그리고 김해 신어산(630m) 아래 탄동에다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안정된 가운데 18년 간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 양성에만 힘을 기울였다.
이때에 대곡(大谷) 성운, 청향당(淸香堂) 이원, 송계(松溪) 신계성, 황강(黃江) 이희안 등 명류들이 모여들어 기묘사화 이후 퇴상(頹喪)했던 사기를 응집 재기를 도모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38세 때인 중종33년(1538년) 경상감사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 참봉(종9품)에 제수(除授)되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5년 뒤인 43세가 되던 중종38년(1543년) 경상관찰사로 승진 부임하면서 편지로 남명을 만나자고 하였다.
그러나 남명은 답서에서 "나으리께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강으로 돌아간 후에 찾아뵈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거절하였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년)은 본관이 여주(驪州)로 경주 안강에서 태어났으며 조광조의 학풍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좌찬성을 지냈으며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主理的) 성리설(性理說)은 그 다음 세대인 퇴계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며 문묘배향(文廟配享)된 해동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48세 때인 명종3년(1548년) 18년 간 학문기반을 닦던 김해를 떠나 다시 고향인 토동에 돌아왔다. 이 때 선생은 부인을 김해에 남겨두시고 혼자 돌아왔다고 한다. 토동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처사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왕권에 대항해 잘못된 국정을 극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계복당(鷄伏堂)은 글자 그대로 닭이 알을 품는다는 뜻으로 공부와 인재양성을 말하는 것이고, 뇌룡정(雷龍亭)은 연못처럼 고요했다가 때로 용의 꿈틀거림처럼 뇌성(雷聲)을 발한다는 뜻이다. 이는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냉정하게 세상을 굽어보다가 강렬하게 국정을 비판하고 국책을 헌상(獻上)하겠다는 의미다.
이를 계기로 사림(士林)의 기풍을 다시 진작하는 힘이 되었다. 사림은 그를 영수(領首)로 추앙하기 시작했고 선생의 명망은 극치를 이루었다. 오건(吳健),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와 같은 학자들이 문하에 들어와 자연히 선생은 사림의 종사(宗師)로 추대되었다.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1535-1623년)은 경남 합천 출생으로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남명의 수제자가 된다.
조정은 사림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더욱 예우를 하고 선생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하여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55세 때인 명종10년(1555년)에는 단성 현감에 제수되나 이를 받지 않고 바로 사직한다.
이때 선생은 사직에 관한 상소 즉 `사직소(辭職疏)` 일명 `단성소(丹城疏)`를 올리면서 조정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까지도 직선적인 표현으로 비판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의 정치제도는 왕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규정짓던 시대였다. 남명은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극언으로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
" ...... 전하의 국사가 그릇된 지는 이미 오랩니다. ...... 나라가 이지경이고 보면,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선왕(先王, 중종)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저 많은 천재(天災)와 천가래 만 가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 전하의 국사는 이미 틀렸고 나라의 근본은 사라졌으며 하늘의 뜻은 떠나고 인심도 흩어져 거두어들일 길이 없습니다....... "
명종과 문정왕후는 진노하였고 조정 중신들은 놀라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명종은 즉각 불경군상죄(不敬君上罪)로 다스리라고 승정원에 명한다. 그러나 승정원에서는 남명은 일사(逸士)로 조정에 추천된 사람이며 그의 소(疏)는 우국 충정의 발로(發露)라고 극구 말려 가까스로 무마되었다.
대비를 한낱 과부로, 임금을 고아로 표현한 것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소리였던 것이다.
61세가 된 명종16년(1561년) 선생은 토동의 재산은 모두 아우에게 물려주고 일생의 마지막 도장(道場)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사륜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었다. 그리고 60년 동안 갈고 닦고 쌓아올린 자신의 학문과 도덕과 인격과 정신, 사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영재들을 모아 가르쳤다. 진주, 산음(산청), 함양, 거창 지방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였다.
이 산천재에서 남명은 만년 10년(61∼72세)을 잘 장식하여 우리나라 선비로서는 최고 최선의 전형이 되었다. 여기서 길러진 제자들은 선조 때 정치, 학술계를 움직이는 주역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절의지사들은 대부분 선생 문하에서 나온 제자들이다. 그들은 무려 57명이나 되었으며 왜병들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는 "배운 것을 행하지 않으면 이는 배우지 않음만 못하고, 오히려 죄악을 범한 것이 된다"는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72세가 되던 선조5년(1572년) 2월 8일 선생은 천수를 다하고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륜동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다. 운명 전 임종을 지켜본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 칭호를 처사(處士)로 할 것과 자기의 학문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집약되는데 이는 하늘의 일월(日月)과 같은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니 힘써 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선생은 정실 김해 남평조씨 부인과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차산은 요절하였다. 둘째부인 은진송씨는 선비집안의 딸로서 3남1녀를 낳았으며 차석(현감), 차암(주부), 차정(만호) 모두정실 소생과 다름없이 벼슬을 하였다.
선생의 부음을 들은 조정에서는 제물과 제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사림은 모두 곡하여 만장과 제문을 올렸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모두 인품이 고결한 도학자였다. 두 분은 평생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편지만 주고받으면서 교류하였다. 같은 해(1501년)에 태어나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학문적으로나 현실 인식에 있어서 의견이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경상좌도(경북)를 대표하는 퇴계와 경상우도(경남)를 대표하는 남명 두분 사이는 상당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여름에 물고기를 잡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는 것을 두고 퇴계는 아예 강가를 피해 계상(溪上)으로 옮겨 살았다. 반면에 남명은 스스로 고기를 잡아먹지만 않으면 상관없는 일이라며 피하지 않았다. 이 일화에서 두 분의 성격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남명은 초학자에게 심경(心經),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心性)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李滉)의 교육방법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소학, 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명보다 1년 일찍 세상을 떠난 퇴계가 "내 명정과 비석에는 처사(處士)라고만 쓰라"고 유언을 남기자 이 소리를 들은 남명이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동안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갈등은 이들의 사후에 나타났다.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 합천, 함안 등을 방어하면서 왜병을 격퇴하였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퇴계의 제자인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여 사직하게 하고, 홍여순(洪汝諄) 등과 함께 대북정권(大北政權)을 세웠다.
그는 스승인 남명의 추존 사업에 적극 나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과 춘추관 관상감사 세사자`에 추증되게 하고 문정(文貞)의 시호를 받게 했다. 그리고 남명을 문묘(文廟)에 배향시키기 위해 성균관과 8도 유생들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하나 끝내 실현시키지는 못한다.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였는데 대부분 퇴계 계열이었던 유생과 언관들이 항의하면서 두 학파는 서로 상대방을 헐뜯기 시작했다.
인조 반정으로 정인홍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자 대개 북인 계열의 남명 제자들은 그 후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남명의 문집도 훼손되었다. 남명 선생의 존재가 퇴계 선생에 비해 빛을 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명 선생의 신도비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 신도비는 그의 수제자 정인홍이 세웠지만 그가 실각하자 넘어뜨렸다. 후손들이 다시 명사의 글을 구하였는데, 어쩌다가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의 글이 동시에 당도하였다.
두 사람 모두 산림처사인 남명을 추앙하였지만 각각 남인과 노론의 지도자 격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이 각각 찬(撰)한 비를 함께 세울 수가 없었다. 난처해진 자손들은 미수의 비를 덕산에 세우고 우암의 비는 남명의 고향인 삼가에 세웠다.
그런데 기축옥사를 계기로 정세가 퇴계 제자들이 주축인 남인들에게 기울었다. 자연히 라이벌이었던 남명 계열은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후손들은 퇴계 계열인 미수 허목이 찬(撰)한 비석을 무너뜨리고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찬한 비석을 남명 묘 아래에 세웠다. 산천재 도로 건너 있는 신도비가 이때 세워진 것이다.
곧 남인 정권도 노론에 밀려났다. 그러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 남명 선생을 떠받드는 것도 아니어서 남명은 점차 잊혀지고 말았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퇴계나 율곡, 우암처럼 남명을 잘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선생의 그 고고한 뜻과 기상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 남명학연구원(www.nammyung.org)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남명사상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남명학연구원 홈페이지를 참고하기 바란다.
남명의 단성소(丹城疏) - 남명의 상소문(上疏文)
[제수된 벼슬을 사직하면서 단성(丹城)에서 올린 상소라 하여 단성소(丹城疏), 사직소(辭職疏)라고도 한다.]
선무랑으로서 단성현감에 새로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중종)께서는 신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1538년임)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 주부로 제수하신 것이 두번이었는데 지금 또 제수하여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언덕과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감히 황종(?) 한 자쯤 되는 땅에 나아가서 하늘의 해와 같은 은혜에 사례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과 커다란 못 어느 곳에 있는 것이든 재목을 버려두지 않고 그것을 가져다가 커다란 집을 짓는 일을 이룩하는 것은 훌륭한 목수가 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시는 책임 때문입니다. 제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저 혼자 누릴 수는 없습니다만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끝내 측석(어진 신하의 자리)아래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저의 나이는 예순에 가깝고 학문은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시험에 끝자리에도 뽑힐 수 없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제대로 해 내기에도 모자랍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10여 년 동안에 세 번이나 떨어진 뒤 물러났으니 애초부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마음 좁은 평범한 백성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큰 일을 할 만한 온전한 인재는 아닙니다.
하물며 그 사람 됨됨이가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는 과거를 보려고 하느냐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잘것없는 신이 이름을 도둑질하여 집사(추천관원)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게 했고 집사는 이름만 듣고서 전하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과연 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며 도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신처럼 이렇지는 않습니다. 신에 대해 다만 전하께서 아시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재상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 지 못하면서 등용하여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어찌 죄가 보잘것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파느니 알찬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이 차라리 신의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는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첫 번째 까닭입니다. 또 전하의 國事가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컨데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 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지가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가운데 충성된 뜻 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小官들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大官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입니다.
고기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오라 내신들은 파당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外臣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이 생각해 보면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 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오랩니다.
나라가 이지경이고 보면, 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先王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저 많은 天災와 , 천가래 만 가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국어) 곡식이 비처럼 내리니(회남자) 그 조짐이 무엇이겠습니까. 노랫가락이 구슬프고(예기) 입는 옷이 흰색이니 나라가 어지러울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재주가 公과 公을 겸하여 三公의 위치에 있다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微臣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리이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며, 아래로 터럭만큼도 백성들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되기 또한 어렵지 않습니까.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전하의 벼슬을 도적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두 번째 까닭입니다.
또 제가 요즈음 보건대 변방에 일이 있어 여러 대신들이 밥도 제 때에 먹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신이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찌기 20년 전부터 이 일이 생겼던 것을 전하의 靈明하심에 힘입어 이제야 발각된 것이요,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닙니다.
평소 조정에서는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민심이 흩어져 결국 쓸만한 장수도 없게 되고 성안의 병사 한 사람 남아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적이 무인지경으로 쳐들어 온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에도 대마도 왜노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는 치욕스러운 짓을 하였건만 왕의 신령한 위엄이 떨치지 못하여 마치 절하듯 하였습니다.
이는 옛 신하를 대우하는 의리가 혹 주나라 예법보다 엄하면서 원수를 총애하는 은덕이 도리어 망한 송나라보다 더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성종께서 북벌하신 일을 보아도 어디에도 오늘날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속의 병은 이 보다 더 심각합니다. 가슴과 배의 통증이란 걸리고 막히어 위아래가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곧 공경대부가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 들어가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수레는 달리고 사람은 달아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근위병을 불러모으고 나라 일을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치나 형벌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방촌(마음)의 사이에서 말이 땀을 흘리는 것처럼 노력하여 만 마리의 소가 밭을 갈아야하는 너른 땅에서 공을 거두는 그 기틀은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입니다.
유독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學問을 좋아하십니까? 聲色을 좋아하십니까? 弓馬를 좋아하십니까? 君子를 좋아하십니까? 小人을 좋아하십니까? 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활연히 깨달으시어 분연히 학문에 진력하사 明德.新民의 도를 얻으신다면 거기에 萬善이 갖추어져 있어 백가지 應策이 연이어 나올 것이니 그것으로 조치를 취하신다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백성을 평화롭게 위기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해서 간직하시기만 해도 마음이 비지 않음이 없으며 저울질이 고르지 않음이 없으며 사특한 생각이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이란 것도 다만 마음을 간직하는 데에 달려있을 뿐이니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게 되는 데 있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 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의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다리가 없이 땅을 밟고 있는 형국이므로 우리 유가에서는 본받지 아니할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시니 그것을 학문하는 대로 옮기신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유가의 일입니다. 이는 어렸을 때 집을 잃었던 아이가 자기 집을 찾아 부모 친척 형제 친구를 만나보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고 사람을 쓰는 것은 몸으로써 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로서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쓰는 데에 몸으로써 하신다면 유악 안에 있는 사람은 사직을 보위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아무 일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저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눈으로만 뽑으신다면 잠잘 때 이외에는 모두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이 경우에도 앞뒤가 막힌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이겠습니까.
다른 날 전하께서 왕 천하의 지경에 이르도록 덕화를 베푸신다면 저는 마구간의 말석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그 마음과 힘을 다해서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어찌 임금을 섬길 날이 없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 하는 것으로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점으로 삼으시고 몸을 수양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쓰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완도의 법을 세우십시오.
왕도의 법이 왕도의 법답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합니다. 밝게 살피시길 엎드려 비옵니다. 신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께 아룁니다.
출처 카페 > 氣感풍수지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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