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엄마의 품
이제 고기를 잡고, 장만하는 데 모두 능숙해진 황 대리가 낚시꾼의 집에서 저녁상을 차렸다.
“우와 맛있겠다! 이 수제자가 온 정성을 다 해서 차렸으니 맛있게 드세요! 스승님!”
“오늘 저녁 메뉴는 학꽁치 초밥에 돌가자미 회를 곁들인 개우럭 매운탕입니다”
상을 다 차린 후 마음이 뿌듯해서 기분이 좋아진 황 대리가 낚시꾼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매끈하게 잘 장만했네! 이제 더 가르칠 게 없으니 이만 하산 하거라. 나의 수제자야!”
낚시꾼이 마치 세례 하는 신부처럼 황 대리의 어깨에 기다란 미역 줄기를 걸친 채 장난스럽게 대꾸하고는 상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식사하면서 낚시꾼이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황 대리!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겠어...”
“네? 무슨 부탁요?"
“...”
낚시꾼은 말없이 황 대리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눈이 젖어들어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서 두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밥 먹다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왜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
“아~ 아~ 안녕하십니까! 이장입니다!”
“알려드립니다! 망상동 주민 여러분께 망상동 마을회관에서 이장이 알려드립니다!”
“오늘 오전 10시경에 마을회관에서 건강검진을 합니다. 마을회관에서 오늘 오전 10시에 건강검진을 합니다.
망상동 주민 여러분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마을회관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알려 드립니다....
”봉수는 양철판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나는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요즘은 왠지 잠을 자도 통 피로가 풀리지 않고,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풀썩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쉽게 피로해져서 물일도 며칠째 쉬고 있었다.
그 날 건강보험공단에서 마을까지 찾아와서 무료로 해주는 건강검진에서 봉수는 간 기능에 비정상이 나왔다.
며칠 후 추가 검진을 받았던 봉수에게 보호자와 같이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보호자는 같이 오지 않으셨나요?”
병원에서 봉수의 보호자를 찾았지만, 봉수는 이 세상에 봉수의 보호자로 불릴만한 사람이 없는 처지였다.
혼자 진료실로 들어간 봉수와 마주앉은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간암 말기입니다. 이미 간 전체에 암이 퍼져있어서 어떻게 손을 써볼 방법도 없는 상태입니다”
봉수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에 정신아 아득해지면서 온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허청허청 병실을 걸어 나왔다.
‘내가 죽는다고. 내가 죽어. 내가 이제 죽는다고... '
'그래! 어차피 진작부터 벗어 버리고 싶은 삶이었는데 뭐가 그리 아쉬울 게 있을까 차라리 잘된 거야...’
봉수는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려 했지만 죽음의 두려움은 또 다른 것이었다.
그동안 삶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근근이 살아왔지만, 막상 죽음을 생각하니 죽음은 그보다도 더 아득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죽는다고. 이제 내가 죽는다고. 이렇게 죽는다고...”
달포 전의 어느 날 동해병원의 계단에 주저앉은 봉수는 한참동안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평생을 통털어 처음으로 자신의 깊은 속마음을 열었던 황대리에게 봉수는 그 날 마지막 유언 같은 몇 가지 부탁을 했다.
공사 중인 신항만으로 연결되는 4차선 도로가 생기면서 봉수의 집이 헐렸다.
봉수는 그 집에서 태어났고, 그 집에서 아버지를 보냈고 미역을 말리면서 평생을 살았다.
텃밭에 해바라기가 무성하게 피어난 어느 여름 날 낚시꾼이 살던 집이 무기력하게 허물어졌다.
집이 헐리는 것을 지켜본 봉수는 그 날 저녁 혼자 미늘목으로 갔다.
병으로 쇠약해진 몸은 흡사 초릿대처럼 여위었고 한걸음 걸음을 옮기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미늘목이 있던 자리를 메우고 새로 축조된 등대 가장자리의 테트라포드에 가까스로 앉았다.
봉수는 엄마의 얼굴을 몰랐다.
엄마는 자기를 낳으면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봉수는 엄마 뱃속 양수 속에서 웅크린 채 들었던 엄마의 심장고동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해녀였던 엄마가 평생 물질을 했던 미늘목 속으로 봉수가 처음 들어갔을 때 그 살아있는 바다에서
그 소리를 다시 들었고, 그 날 이후 그곳은 봉수에게 엄마의 품 같은 곳이 되었다.
그렇게 평생을 함께했던 미늘목의 파도 소리가 친근했고, 바닷속 아름다운 풍경과 한평생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인주를 처음 만났던 광경과 엄마를 잃은 상실감을 술로 버티다가 죽어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미늘목의 갯바위 위에서 그녀를 품던 순간의 두근두근 황홀했던 짧은 첫 경험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엄마 품 같았던 그곳이 매립되는 것을 막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모습과 평생을 살았던 집이 헐리는
모습이 바로 지금처럼 마음의 스크린에 펼쳐졌다.
인주를 그렇게 두 번이나 떠나보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좌절감과 무력감이 엄습했다.
‘한평생 한 번도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사람 내가 많이 사랑했으니 행복했고, 세상이
그리 공평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참 아름다운 곳에서 살았잖아.’
‘모든 것들이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네... 그 모두가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렸어...
그래도 이만하면 나름대로 한세상 잘 산거야...’
봉수는 자신의 삶과 그렇게 화해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 순간 커다란 파도가 일었고 봉수는 평화로운 표정으로 엄마 품 같은 파도에 몸을 맡겼다.
사람들은 낚시꾼이 낚시하다 파도에 휩쓸린 것으로 알았지만, 황 대리는 그가 스스로 그 바다로 들어간 것을 알고 있었다.
봉수가 미리 부탁했던 대로 황 대리가 봉수의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봉수가 알려준 연락처로 인주에게 부고를 전했다.
황 대리가 상주 노릇을 하는 빈소에 인주와 인주의 딸이 도착했고, 상복을 입었다.
두 여자는 봉수의 영정 앞에서 오래 울었다.
그 딸은 미늘목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첫 경험에서 인주가 잉태한 봉수의 아이였다.
아이가 태어나서 혈액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친자가 아닌 사실을 시댁에서 알게 되었고, 인주는 그 날로 참담하게 소박을 맞은 것이었다.
기구한 운명 속에서 인주는 봉수에게 그 사실을 평생동안 숨겼고, 그것은 마음 여린 봉수가 죄책감에
빠지거나, 아픈 딸이 봉수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려던 인주의 어리석고 가련한 배려였다.
삼일장 기간 동안 봉수의 빈소에 낯선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인근 마을에 사는 독거노인들과 집안이 어려워 밥을 굶던 여러 무리의 아이들이 찾아왔다.
봉수가 남 모르게 혼자서 돕고 있었던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봉수의 영정 앞에 엎드려 오랫동안 자신의 설움을 쏟아냈다.
한 평생 외롭게 살았지만, 선량했고 누구보다 사랑이 많았던 한 사람을 보내는 의식이 사흘간 치러졌다.
동해시의 승화원에서 한 움큼의 재로 변한 봉수의 몸은 한평생 그에게 엄마 품과 같았고, 그의 영혼이
몸을 벗어 돌려보냈던 미늘목에 뿌려졌고, 봉수의 유품도 그곳에서 태워보내졌다.
황 대리가 다니는 건설회사에서 봉수가 보살폈던 노인들과 아이들의 종신후원을 맡기로 했다.
봉수가 인주에게 남긴 통장에는 철거주택의 보상금과 봉수가 한평생 바닷속을 수달처럼 드나들며 모았던
적지 않은 돈이 들어있었고, 봉수가 남긴 유산으로 인주는 모든 빚을 갚고, 딸의 심장병도 치료할 수 있었다.
인주는 동해시 묵호항에 있는 소박한 횟집을 인수해서 딸과 함께 새로운 삶을 힘차게 시작했다.
봉수는 황 대리에게 자신의 투박한 낚싯대와 민미늘 바늘통을 남겼다.
바늘통 속에 봉수의 메모가 들어있었다!
“내가 만난 최고의 낚시꾼 춘모에게...많이 고맙다. 죽음 후의 어떤 세상에서도 그 고마움 영원히 간직할게. -봉수 형-” (끝)
첫댓글 봉수형이 그렇게 가다니 슬프네요
소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