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 |
1. 산행일시 : 2010년 12월 12일(일요일) 10:31 ~ 14:21분까지 |
※ 휴식 포함 3시간 50분 소요 |
2. 산 행 지 : 남한산(791.0m) - 경기도 광주 |
3. 참석자 : 명산산악회 회원 24명 |
김명숙 회장, 이종수 산대장, 임민호님외 1명, 종팔이, 진성, 보배파파, 산만디, |
길친구, 광야, 연꽃, 도전자, 청솔, 정자, 홍명순님, 날다람쥐, 산울림, 서호수님, |
도사, 오공, 박태곤님, 김주식님, 조계홍님, 도토리 |
4. 산행 코스 |
탑공원 → 한봉 → 벌봉 → 연주봉 → 청량산 → 남문 → 동문까지 |
5. 산행요약 |
05:25분 신복로타리 출발 |
적은 인원인 24명이 단촐하게 출발~ |
여주분기점에서 조금 더 개통된 도로가 있어 직진하는 바람에 조금 돌아서 현지도착 |
이번 기록은 산이름과 봉우리 이름보다는 그곳의 지형지물을 중심으로 적어 봤다. |
실제로 높은 산과 봉우리가 아니므로 지형지물이 더 확실할 것 같아서이다. |
10:31분 탑공원입구에서 산행 시작 |
차선이 분리되는 지점의 초입으로 '남한산성 탑공원'이란 표석과 '큰골'표석이 함께 |
설치되어 있고 식당으로 진입하는 좁은 도로가 있다. |
우리가 오르려는 한봉은 조금 내려온 지점에 희미한 길을 따라 초입이 시작된다. |
물론 식당으로 오르는 도로를 따라 진입을 해도 무방하나 그리로 오르면 한봉을 |
지나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
초입의 제법 가파른 길을 따라 얼마를 올라가지 성이 허물어져 흩어진 잔해가 확인이 |
되고 동장대 1.7Km, 벌봉 1.6Km 표지판이 있는 한봉에 오르게 된다. |
△ 산행 초입인 탑공원 입구 △ 도로에서 한봉 오르는 초입부분 - 길이 희미하다 △ 한봉 오름길 - 허물어진 성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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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2분 한봉 |
한봉에 올랐지만 주위의 조망은 없고 하얀 눈이 바닥에 깔려 있고 가는길 우측으로 성곽이 제법 |
잘 쌓여 있다. |
11:00시 한봉성 |
한봉에서 얼마를 내려오면 한봉성이란 표지판과 함께 큰골을 통해 이곳을 올라오는 |
길과 만나게 되며 진해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산행이 이어진다. △ 한봉성 표지판 지나 벌봉으로 올라가는 길 |
한봉성(漢蜂城) |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
이중에서 한봉성은 봉암성의 동남쪽에서 한봉의 정상부까지 쌓은 외성이다. |
이곳은 인조 2년(1624년) 본성 축조시에는 축성구간에서 빠진 곳으로 병자호란 |
이후 숙종 19년(1693년) 수어사 오시복이 축조하였다. |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이 한봉을 장악하고 화포를 쏘아 인조가 머물던 행궁에까지 |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
이렇듯 화포가 중심이 되는 전쟁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을 빼앗겨 곤란을 겪는 |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본성의 보강 차원에서 축조된 것으로 본성이나 봉암성과 달리 |
폐곡선을 이루지 않게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성의 길이는 1093m이다. |
※ 행궁은 임금이 나들이때 머물던 별궁으로 수어장대 아랫쪽에 있었다고~ |
11:21분 외동장대터 |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남한산성에 5개가 있다고 하며 |
그중에 하나라고 한다. |
△ 외동장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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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분 벌봉, 봉암신성신축비 |
벌봉(蜂峰) |
암문 밖에서 이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
병자호란때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있는 벌봉을 깨뜨려야 산성을 함락시킬수 있다하여 |
이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
있었으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 |
※표지판의 봉암신성(蜂巖新城)은 벌봉성을 의미하며 봉암성(蜂巖城)과 같은 곳임. |
벌봉에서 보이는 곳은 하남시 일대가 내려다 보이고 멀리 북한산이 아스라이 보였으나 |
서울 시내는 보이지 않는다. |
봉암성으로 가는 길목은 그늘진 곳으로 눈이 녹지 않고 가장 많이 보인다. |
△ 벌처럼 생겼다는 벌봉의 모습 그러나 상상력을 동원해야 될 듯~ △ 이곳에 봉암산성 신축비가 있다. △ 벌봉 조금 내려온 지점에 있는 암문 △ 봉암성으로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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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5분 봉암성 |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봉암신성(蜂巖新城) 또는 |
신성(新城), 동쪽에 위치해 있다 하여 동성(東城)으로도 불리웠다고~ |
11:49분 남한산성 여장, 동장대터 |
여장이란 성곽위에 낮게 쌓은 담장으로 그 아래에 몸을 숨겨서 총이나 활을 쏠수 있도록 |
만들었다는 안내판과 함께 남한산성의 지휘와 관측을 담당하던 동장대가 있던 터임을 |
알려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
△ 봉암성으로 위쪽에 남한산성 여장의 모습과 함께 동장대터가 있는 곳이다. △ 봉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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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3분 봉암성 암문 |
봉암성 암문은 다른 곳의 비밀통로와는 달리 본성과 봉암성을 연결해주는 주통로로 |
활용되어 다른곳에 비해 규모가 크다는 설명~ |
12:00시 제2군포터, 제4암문(북암문) |
△ 북암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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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분 제1군포터(12:10~35분까지 식사) |
12:42분 북문 |
북문(北門, 戰勝門) |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
최대의 참패였다. |
정조 3년(1779년) 성곽ㅇ르 개보수할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戰勝門) |
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
선조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었다고 기록이 |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
△ 북문 △ 북문주위 성곽 모습 △ 북장대터로 가는 오름길에서 내려다 본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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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분 북장대터 |
13:04분 매탄터 |
성내에 머물려면 곡식과 소금, 물 그리고 땔감인 숯(목탄)이 있어야 되는데 이곳에 |
목탄을 저장하였던 곳이라는 안내문이 있었고 ~ |
이곳을 지나고 나면 서울시내가 한눈에 들어 온다. |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멀리 북한산 인수봉의 위용과 함께 63빌딩 등 서울이 훤히 |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니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이곳으로 피난와서 있었던 |
인조대왕의 심중은 어떠했을까? 라는 상념에 빠져 본다. |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호란때 설정한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 하라고 했다. |
하지만 인조가 이 제의를 거부하자 청나라는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
45일만에 항복하였고, 인조는 삼전도(한강에 있던 나루터로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 |
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
보내야 했다"는 아픈 역사가 깃든 곳인데 ~ |
이때 북방을 지키고 있던 이괄이 난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
△ 매탄터 지난 지점의 성곽 모습 △ 서울시내의 모습인데 우중간 멀리 북한산 인수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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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분 우익문(서문) |
우익문(서문) 右翼門(西門) |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와 문루로 |
구성되어 있다. |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행의 홍예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판문을 설치 |
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고, |
양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 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3년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
칭하였다. |
△ 우익문에서~ △ 우익문 지나서 내려다 본 우익문 일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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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분 병암남성신수비 |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 |
병암남성신수비는 선조들의 건축실명제를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
금석문이다. 정조 3년(1779년) 6월 18일까지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의 |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
비문에는 산성을 증,개축하는데 돈 1만냥과 쌀 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였다는 것과, |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 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자와 |
보수 영역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
두개의 돌로 되어 있고 '병암'이란 글자가 선망하게 남아 있다. |
△ 병암산성신수비 △ 병암산성신수비 전문 △ 우측편에 병암이란 글자가 뚜렷이 보인다 △ 병암남성신수비 지난지점에서 뒤돌아본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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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4분 수어장대와 청량대, 매바위 |
남한산성(南韓山城) |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
문무왕 12년(672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
되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
조선 인조 14년(1636년)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
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
인조 4년(1626년)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수어장대와 청량당(守禦將臺, 淸凉堂) |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중 |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
27년(1751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守禦將臺'라는 편액을 |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1989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李晦) 장군과 그의 |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
죽임을 당했고, 이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
이회는 죽을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과연 |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 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
이곳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수 기념비도 있다. |
△ 수어장대의 위용 △ 애환이 서려 있는 전설속의 매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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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3분 제6암문(서암문) |
이곳에서 청나라 군의 습격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
13:39분 팔각정(영춘정) |
△ 남문가는 길로 멀리 검단산이 건너다 보인다 △ 좌측에 청계산 그리고 관악산이 보이고 앞쪽에 남성대 골프장이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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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분 지화문(남문) |
지화문(至和門) |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때 至和門이라 칭하였고 4대문중 가장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 |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350년 추정) |
느타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
후미에세 진행하던 우리는 이곳을 돌아 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
△ 위에서 본 남문 모습 △ 지화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남문의 위용 △ 남문에서 본 남한산성 △ 성남시와 광주시의 경계에 있는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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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분 중앙주차장 도착 산행 종료 |
첫댓글 후미에서 천천히 감상 하며 돌았는데 다시 상세하게 돌아 보며 역사 공부 잘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얼룩진 역사의 이력을 상세히도 공부하셨네요.
잘 보았고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