雉嶽山의 石塔
조 흥 제
은평문인협회에서 5월11일 원주로 문학기행 갔었다.
코로나로 3년간 꼼짝을 못하다가 풀려나 문학기행을 떠난 회원들은 하늘을 훨훨 나는 듯 기분이 들떴다.
먼저 거돈사 폐사지로 갔다. 8000여 평의 넓은 대지에 지었던 사찰인데 지금은 탑만 몇 개 있을 뿐 건물의 흔적은 없다. 신라때 건축됐던 큰 사찰이다.
다음은 박경리 문학관으로 갔다. 박경리선생은 가족도 없이 외딴집에 혼자 사셨다. 밤이면 여우와 늑대가 내려 와 울부짖었다니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무서움과 외로움을 달랜 것은 조그만 책상과 펜 뿐이었다. 낮에는 텃밭에다 상추, 고추, 오이 등을 심느라 외로움을 잊으셨던 것 같다. 토지 20권을 쓴 원동력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는 영상을 보고 외로움도 작품 쓰는데 도움이 되는가 보다. 토지 원고 첫장이 전시되었는데 원고지 줄이 검은 줄을 인 것이 요즈음 원고지와 달랐고 글씨를 또박또박 잘 쓰셨다. 토지 20권의 원고를 기증하시어 쌓아 놓은 것이 엄청 많았다.
치악산에 있는 구룡사로 갔다. 70~80년대 치악산에 몇 번 등산 가면서도 지나치기만 했지 들어가보지 못했는데 처음 가 보는 구룡사는 상상외로 컸다. 나오다 살림집입구에 영어형 한글로 쓴 것이 눈에 거슬렸다. 하기는 절이라고 해서 영어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내 머리 속에는 불교는 우리 전통을 지키고 검소해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 있다. 80년대에 스님이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눈쌀을 찌푸렸고, 스님이 자가용을 타고 가는 것이 격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가본 원주 인근에 있는 법천사지도 2만여평이 넘는 폐사지였던 것을 볼 때 원주 지방에 불교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 인상 깊었던 원주지방의 명물은 치악산 정상에 있는 석탑 3개다. 70~80년대에 치악산에 몇 번 등산을 가 봤다. 치악산이 다른 산과 다른 것은 정상에 석탑을 쌓았는데 그 탑이 산의 높이를 변경했다.
치악산 정상에는 높이 10m 쯤 되는 원뿔형 석탑 세 개가 있다.
치악산에 오를 때마다 ‘경사가 심한 높은 봉우리에 어떻게 그 많은 돌을 날라다 탑을 쌓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가 어느 날 TV를 보니 그 탑을 쌓은 사람의 부인이 나와서 탑 축조 당시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거의 끝 부분에 보았기 때문에 앞에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급히 방송국으로 전화 하여 그 부인의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 하니 안 받는다고 손자가 알려 준다.
다른 방면으로 알아 본 결과 그 탑은 원주에 살던 과자 장수인 용진수라는 사람 혼자의 힘으로 쌓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개인이 한 일 치고는 무척 힘들었을 것 같아 용씨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가 본업을 떠나 생소한, 힘들고 어려운 일에 착수하게 된 동기는 꿈에 수염이 하얀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전국 물가에 있는 예쁜 돌을 고루 모아서 치악산 위에 석탑 세 개를 쌓으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용씨의 종교가 무엇인지 하얀 할아버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 계시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망설임 끝에 실행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 때가 1962년이었다.
60년대는 먹고 살기도 힘든 때였다.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전국을 돌면서 그것도 보통의 돌이 아니고 물가의 둥글고 색깔도 예쁜 것으로 하라는 주문이니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는가. 강릉, 부산 등 먼 곳까지 가서 첫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닷가를 헤매고 다니다 쓰러지기도 하고, 간첩으로 오인 받아 군부대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돌을 열차에 화물로 부쳤다.
용씨는 돌을 짊어지고 치악산을 수 없이 올랐다. 1200m가 넘는 급경사 길을 돌을 지고 올랐으니 얼마나 무거웠겠는가. 오르다가 발을 헛디뎌 급경사에서 굴러 떨어져 죽음 직전까지 갔던 때도 있었고, 눈 쌓인 길을 오르다 강한 바람에 몸이 얼어 움직이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허기 진 배를 움켜쥐고 오를 때였다. 간식거리가 없어 참고 오르면 속이 쓰리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그럴 때는 급격히 기운이 떨어지고, 심정은 한 없이 처량하였다. 등에 있는 돌을 굴려 버리고 뛰어 내려가고 싶은 충동도 수 없이 받았다.
주위 사람들은 용씨더러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가난한 사람이 돈을 벌어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엉뚱한 일을 하니 남 말 좋아하는 세상에 그렇게 보았던 것도 당연하다. 특히 부인은 생사를 걸고 반대했다. 노자 돈도 부인이 마련해 주어야 했고, 중풍에 걸린 아버님을 돌보아 드리며 살림을 꾸려 나가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하지만 용씨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주위와 가족들이 던지는 차가운 눈길을 느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시일이 지나자 부인이 서서히 따라 오기 시작했다. 생계 꾸려 가는 일도 기쁜 마음으로 하면서 틈틈이 같이 돌을 날랐다. 그 때 용씨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 혼자 외롭게 들고 가던 돌을 부인과 같이 가지고 가게 되었으니 그 때의 벅찬 심정을 타인이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용씨는 그 날부터 신바람이 나서 일을 했다. 그러자 일의 진척도 빨라 예정된 돌의 양을 확보하여 사람을 사서 돌을 정상으로 옮겼다. 돌을 다 올려놓고 용진수씨는 샘물가에 움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백일 간에 걸쳐서 탑을 쌓아 완성했다. 그 때가 1974년이었으니 13년이 걸렸다.
그렇게 어렵게 쌓은 탑을 무심한 등산객들은 돌의 색깔이 예쁘다고 빼어 가고, 벼락을 맞고 하여 무너졌다. 그것을 다시 쌓기를 수차례. 그는 탈진하여 병석에 누워 5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도 석탑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니 그는 생명보다도 탑을 더 사랑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차츰 잘 살게 되었다. 봄이면 연례행사처럼 겪었던 보리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되었고,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혀 경운기가 지게와 소를 대신했고, 연탄을 개발하여 산을 푸르게 만들었다. 산간벽지까지 전기가 들어가 대명천지 밝은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히 용씨의 염원도 들어 있다. 그가 하얀 할아버지의 명령이 무서워서 만이 그 어려운 일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동기는 꿈속에 나타난 할아버지이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나라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정진했을 것이다.
다행한 것은 그후에 치악산 관리사무소가 생겨 탑의 관리를 관리사무소에서 하게 된 것이다. 벼락을 맞아서 무너진 것도 다시 쌓고, 그 앞에 탑을 쌓게 된 내력을 새긴 비석도 세운다니 지하에 있는 용씨가 얼마나 기뻐할까.
용씨는 탑을 쌓았을 뿐 아니라 산의 높이를 변화시켰다. 치악산의 원래 높이는 1278m인데 석탑의 높이 10m를 보태서 1288m로 모든 지도와 안내문에 표기되었다. 탑이 산 높이를 변화시킨 예가 치악산 말고 또 있을까.
첫댓글 조홍제선생님
석탑에대한 기행기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주 문학기행 행사 치르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