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고리 겉섶을 다리다(굳은 마음을 펴다)/조혜경
고속버스가 느리게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창밖을 외면한 채 옷깃을 주섬거렸다. 아들이 싸준 간식 봉지를 홀더에 걸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둘은 씩 웃었다. 내가 버스를 탈 때, 아들은 항상 간식을 챙겼다. 그러나 버스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몇 년 전 휴게소에서, 화장실 가느라고 내렸다가 버스를 찾지 못해 혼쭐이 난 후부터였다. 갈증이 나면 병아리 오줌만큼 입만 적실 뿐이다.
아들은 승차장에 서 있었다. 나는 그만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모시 적삼의 까슬까슬한 섶 끝이 손등을 스쳤다. 언제부터인가 이별할 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으로 흐릿한 눈빛을 막았다.
버스가 엉덩이를 돌렸다. 그리고는 꽁무니를 뺐다. 팔을 늘어뜨린 채 돌아서는 아들이 힐끗 보였다. 다리를 저는 걸음걸이는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가슴을 때리는 방망이였다. 마루에서 놀던 네 살짜리 아들이 댓돌로 떨어졌다. 다친 발목을 제때 수술해 주지 못하였다. 때는 이미 늦었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도 아들은 꿋꿋했지만, 자신의 결혼식이 다가오자 눈물을 보였다. 신랑 입장 때 절뚝이며 걸어 들어가야 할 일이 신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신랑과 동반 입장했던 며느리에게 평생 빚을 졌다. 아픈 손가락이 둘이 되었다.
서울로 온 지 닷새 만이다. 함께 살자는 아들의 간청을 못 이겼다. 도착한 첫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잠자리가 바뀌어선지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들은 수십 년 동안, 한식날 두 주일 전 주말, 시골집에 왔다. 의식처럼, 아직도 집성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해마다 방문해야 하는 집의 수가 적어졌고, 빈집도 늘어났다. 저녁이 되면 심심한 듯 막걸리를 벌컥거리더니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소주와 앙증맞은 종이 술잔, 과일 두 가지를 챙겨 들었다. 성묘 후, 바로 서울로 출발할 참이었다.
아직 공사중이다야. 몰랐느냐는 듯이 아들을 붙잡아 앉혔다. 각 집의 장남들과 집안 어른들이 모였던 지난 시제 때, 선산을 봉안당으로 바꾸기로 정했다. 몇 년 전부터, 촌에서도 화장과 봉안당 유행이 들불처럼 번졌다. 화장이 관례가 된 지 몇 년이 되었다. 수목장도 늘어났다. 종가며느리로 평생을 살았던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열아홉 살에 시집와서, 시어머니에게 광 열쇠를 넘겨받던 40여 년 전부터, 도맡은 부엌살림이었다. 물론, 가난한 살림을 끌어가기 위해 남편의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 전, 종손 남편은 뇌출혈로 쓰러졌다. 금혼식 후, 두 달째 되는 날이었다. 삼베 같았던 오십 년의 삶을 모시 적삼 한 벌로 바꾸었다. 남편을 산에 묻는 그 순간부터 나를 잡아주었던 남편이라는 이승 인연의 끈이 떨어졌다. 굳건한 뒷심이 없어진 나의 의견은 시동생이나 자식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체념을 배웠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도시에서 함께 살자는 아들에게 보낸 답이었다. 그 문제만은 마을 사람들도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도시의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면, 살아서는 못 돌아온다고 여겼다. 자식을 따라간 친구들은 대부분 한 줌 가루가 되어 고향으로 왔다. 내 집에서 이웃들과 막걸리 한잔하며 사는 것이, 마지막까지 잘 사는 것이라는 믿음을 굳혀 주었다. 내 발로 걷는 순간까지만 살겠다며 시골집을 고집했다.
아들은 정년퇴직했다. 중학생이 되던 날, 도시로 유학을 갔던 그가 결혼하고, 도시살이한 지 40년이 넘었다. 연금이 나오긴 했지만, 퇴직 후에도 그리 널찍해 보이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 지원금과 노후를 위해 더욱 도시를 떠나지 못했다. 국제화를 부르짖는 나라지만 국민에 대한 복지란 노년의 삶을 기댈 정도는 아닌 듯이 여겨졌다.
젊은이들의 건강도 문제였다. 스트레스와 먹거리는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허기만 채울 뿐이었다. 허리가 꼬부라진 늙은이들보다 더 병원행이 잦았다. 어쩌다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조차 함께 도와야 했다.
아들을 따라나선 후 서울 아파트에서 닷새를 살았다. 억지였다. 우째 따라나섰을꼬. 나이 들어 혼자 사는 외로움은 견딜 만했다. 그런데, 이틀이 멀다 하는 병원 오가기가 제일 큰 문제였다. 시골집에서는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홀로 된 여인네들에게는 의무가 아닌 선택사항이었다. 어린 자식들과 부모까지 한집에서 부대끼던 시절에는 밥상을 차리느라 허리가 휘어졌지만, 오늘날은 아니었다. 혼자 있는 어미가 굶을까 봐, 아들은 먹거리를 택배로 종종 보냈다. 미안해서, 여차저차 반반의 마음으로 서울로 따라왔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들은 시설을 잘 갖춘 체육관에 다니자고 했다. 산책로와 둘레길에도 새롭게 설치된 운동기구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러나 호미와 함지박을, 쪼그려 앉기와 괭이질을 평생 운동으로 여기고 살아온 삶이 순식간에 바뀔 수는 없었다. 사들인 실내 운동기구들은 버리는 것조차 번거로운 퇴물이 되었다. 나는 아들의 처진 어깨에 짐 하나를 더 올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 틈새는 더 좁아졌다.
뭣보다 아파트라는 곳이 나에게는 감옥이었다. 드나드는 방법이나, 아파트 이름까지. 알 수 없는 비밀의 요새였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대문 자물쇠를 채울까 말까 하는 시골집과는 달랐다. 아파트 내 방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나를 위해 아들은 가까운 데이 캐어를 찾느라 바빴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듯이, 노인들을 돌보아주는 곳이 ‘데이 캐어’라 했다. 도시의 하루는 너무 길었다. 차라리, 종일 걸려 오일장을 다녀오던 게 나았다. 호미를 들고 김을 매는 것이 시간이 잘 갔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편했다. 집 앞 노인정에서 흘러나오는 수다가 환청처럼 들렸다. 나는 서울 생활 오 일만에, 시골로 내려가겠다는 나를 말리는 아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당장 짐을 쌌다.
진도로 가는 연륙교를 건널 때, 눈을 떴다. 열린 바다로부터 햇볕이 밀려들었다. 며칠 잠을 충분히 못 잔 까닭에 깊게 잠들었었나 보다. 모시 적삼이 한지처럼 구겨져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예약해 둔 요양병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적삼의 구겨진 겉섶을 다려 옷걸이에 걸었다. 비로소 옷의 함초롬한 자태가 편안한 숨을 쉬는 듯 보였다.
저녁을 먹고는 몸을 방바닥에 착 붙였다. 배꼽 밑에서부터 트림이 쑤욱 올라왔다. 더부룩했던 속이 뻥 뚫렸다. 그날 밤 날씨 예보는 평온이었다.
첫댓글 그렇죠
일상에 변화가 온다는 건 나읻르어 받아드리기 쉽지 않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주셔요
노년의 가슴아린 삶이 남의 일 같지가 않네요. 인생에서 늙음이 가장 큰 설움일 것 같아요. 섬세한 문장이 아주 좋습니다.
노후에는 요양병원으로 이어지는 아파트보다는 한복의 여유가 살아나는 생활 전원생활을 꿈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