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益山 彌勒寺址)
사적 제150호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미륵사지는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601년(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동양 최대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교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益山 彌勒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236호
높이 각각 3.95m.미륵사지 남쪽에는 현재 2기의 당간지주가 동서로 약 90m의 간격을 두고 원위치에 남아 있는데,
양쪽 지주는 크기가 같고 양식이나 조성수법도 같으므로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
국보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의 3원(三院) 가운데 서원의 금당 앞에 있는 탑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너져 거의 절반 정도만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며 동시에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기도 하다. 2009년 1월 해체수리 중에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에는 금제사리호, 유리사리병, 청동합 6점, 은제관식 2점, 은제과대장식 2점, 금동덩이(金銅鋌) 3점, 금제 족집게 1점, 유리구슬 외 다수 유물이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기해(己亥)년명 탑지를 통해 당시 왕비가 639년(무왕 40)에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대에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로, 규모로는 백제 최대 사찰에 속한다. 석탑 역시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고려시대 초 혜거국사의 비문에 후백제 견훤대인 922년에 “견훤이 미륵사탑의 개탑(開塔)을 계기로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여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패망 이후에도 여러 차례 탑의 수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문신 소세양(蘇世讓)의 『양곡집(陽谷集)』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이 나와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영조 때 강후진(康候晋)의 『와유록(臥遊錄)』에 탑의 붕괴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의 훼손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다니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탑의 촬영과 실측조사가 실시된 후 1915년 시멘트 모르타르로 보수되었다.
2001년 10월부터 해체 · 보수작업이 이루어졌으며 2009년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가람배치를 보면 동탑(東塔)과 서탑(西塔)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木塔)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回廊)이 있어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이라는 개념의 삼원식(三院式)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고대가람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전혀 새로운 형식의 특수한 가람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미륵사지 가람배치를 보면, 자북(磁北: 자침이 가리키는 북쪽)에서 약 25° 서쪽으로 기울어진 축선상(軸線上)에 중원을 배치하여 남에서부터 중문(中門), 좌우로 복도의 성격을 띤 남회랑(南回廊)·목탑·금당이 배치되어 있고, 주위는 동회랑(東回廊)·서회랑(西回廊)·북회랑(北回廊)으로 둘러져 있다.
또, 중원의 동서 양측에는 중원의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동원·서원을 같은 방식으로 배치하고 있다. 또, 이들의 동회랑과 서회랑은 중원의 회랑과 겸하여 사용하도록 되었다. 즉, 회랑의 전체배열로 보아 남회랑은 동원의 동쪽 끝에서부터 서원의 서쪽 끝까지 중문과 연결되어 일직선상에 놓였다.
각 원(院)의 동측 또는 서측에 놓이는 측랑(側廊)은 동원 또는 서원과 중원 사이에서는 중원의 측랑과 겸용하도록 배치하였다. 특히 이들 각원의 내랑(內廊)을 한정지어 주는 동서회랑의 중심거리와 그 내랑에 있는 금당의 기단 앞면 길이와는 비례가 맞아, 각 원의 건물규모에 따라 내부공간이 잘 조화되도록 구성되어 있음이 특기할 사실이다.
또한, 남회랑과 각 측랑과는 기단(基壇)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떨어져 있어 건물이 각각 독립된 것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를 주로 하여 총 6,500여 점으로 백제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기와가 수습되었으며, 특히 서까래[椽木] 끝에 붙이는 녹유연화문연목와(綠釉蓮花文椽木瓦)는 백제기와로서 다수 출토되었다. 문자가 새겨진 기와에는 ‘彌勒寺(미륵사)’, ‘國五年庚辰(국5년경진)’, ‘姚奉院(요봉원)’, ‘至元四年(지원4년)’, ‘天曆三年(천력3년)’ 등 다양하게 수습되었다.
탑 1기와 금당이 짝을 이뤄 3개의 원(院)으로 구성된 배치이면서, 중앙에는 목탑, 좌우 양쪽에는 석탑으로 주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미륵사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삼탑삼금당이 배치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백제 무왕이 세운 곳으로서 최근 발굴된 사리기를 통해 창건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백제사와 불교미술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