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빛 비춤의 역학
보통의 삶에서, 에고는 행위의 저자임을 주장한다.
내적 실상으로 경험되는 이 자기 본위적 주장은, 측석 편집이라는 에고의 인지 되지 않은 기능에 기초한 망상이다.
이 즉석 편집 현상은 어떤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지 만분의 1초 뒤에 벌어진다.
에고의 이 기능에 대한 최상의 비유는, 카세트 녹음기의 재생 기능에 대한 비유이다.
소리가 테이프에 녹음될 때, 테이프의 재생 기능 덕분에 사람은 찰나 전에 막 녹음된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원본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지체와 더불어 녹음본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체는 보통의 삶에 대한 모든 에고 경험에 내재해 있으며,
이로써 마음은 실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지체된 즉석 재생을 지각의 필터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600 수준에서 이 지체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이것' 혹은 '저것'이라는 망상 또한 사라지는데,
그것은 처리하는 지체가 없을 때 '이것'과 '저것'은 인위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일체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에고의 심사 장치라는 내적 위치가 없다면, 현상들은 관객 환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경험된다.
현상과 분리되는 대신 현상과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전부(All that Exists)로 표현된 현존(Presence)의 살아 있음과 전부임(Allness)의 경험으로 귀착된다.
존재를 갖는 전부는 그저 수동적으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고의적 의도로서가 아닌 존재의 한 성질로서 그 자체를 표면적으로 앎에 드러낸다.
그리하여 우주눈 신성으 내재적 광휘(Radiance)와 함께 빛을 발하는,
절묘하게 아름답고 완벽한 선물처럼 보인다.
현상적으로, 목격함은 모든 움직임이 슬로 모션으로 일어나는 듯 목격되는 것처럼 황홀하다고 묘사될 수 있다
이전에 에고/자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현상, 움직임, 행위는 이제 자율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겨기에는 특정한 기점(起點)이 없으며, 더구나 독립된 '나'라는 초점이 없다.
대신 '나임(I-mess)'의 감각이 확장하는데,
그것은 분리된 정체들로서가 아닌 본질로서 보다 원초적이고 전부를 감싸며,
본유적인 어떤 수준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포괄한다..
결과적으로 관계에 대한 이러한 지각 또한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분리를 지각하는 것과 관련되는 정신적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불리에 대한 지각은 비선형적 포괄성에 대한 앎으로 대체된다.
그래서 설명되어야 할 지각된 분리가 없을 때 관계 개념은 무의미해지고 적용할 수 없게 된다.
참나는 세계와 '관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존재는 참나의 불가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과학은 우주에 확인 가능한 '중심'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비록 기억의 데이터 뱅크는 게속해서 이용 가능하지만
그것의 가치는 묘사적 인지 능력에 있고,
인지 능력은 육체 기능의 지속이 카르마적 선택지일 경우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육체는 그때 대략 타성에 비길 만한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듯하다.
이전의 책에서 기술한 것처럼, 육체는 '카르마의 태엽을 감아 놓은 인형'처럼 저 혼자서 예정된 길을 간다.
600 수준과 그 이상에서의 변형은 에고의 자기애적 핵심이 녹아버린 결과인데,
그것은 스스로를 통치권자로, 따라서 제일의 원인적 행위자이자 의지 작용을 갖는 저자로 그릇되게 추정한다.
이러한 추론은 '에고 중시적'이라는 용어의 의미에 포함된다.
이렇듯 에고의 핵심은 그 기본 추정에 있는데,
에고는 그것으로써 스스로를 존재 행위, 결정의 일차적 근원으로 보고 그리하여 신성의 통치권을 찬탈한다.
이 원시적 추정은 '악성 메시아적 자기애'라는 병리적 상태에서 공공연하게 전시되는데,
여기서 에고의 핵심은 사실상 숭배된다.
이러한 자기 신격화는 자기 자신을 말 그대로 신으로 선언했던 로마 황제들의 시대에서부터,
과대하고 전능한 에고 팽창을 보여 준 현재의 세계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전 역사에 걸쳐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악성 메시아적 자기애 증후군(측정 수준30)은 『진실 대 거짓』15장에 자세히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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