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 동리목월 (계간 2018. 겨울호. NO.33)
출-동리목월 기념사업회
독정-2019년 4월 7일
· <모비딕>을 쓴 허먼 멜빌스는 소설을 쓰려면 자신의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만을 연료로 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항해를 혼자 해야 하는 외로움과 초조함과 기원 간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거기에 격려가 있어주면 더 좋다.
·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점에서는 누구보다 잘 듣고 가장 잘 듣는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의 위중을 말하는 사람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 말은 해야 할 말이었을까. 들어야 할 그의 말이었을까. 그때 내가 들은 말은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었다.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나아기기 위한 처세라는 것도 어머니가 초점을 맞춘 것은 무엇으로부터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그리고 누구와 함께였다. 어디로 누구와 함께 떠났는가. 그러자 불명료하던 것이 명료해지고 오리무중이던 길이 환해졌다. 말하자면 쉽고 단순해졌다. 아버지가 서재로 들어가고 나면 그곳을 갑자기 집에서 뚝 떨어져 나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겼다. 깊은 숲이나 어두운 물속과도 같이, 다른 공간이었으므로 접근할 수 없었다. 투명한 막이 생겨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접근할 생각을 차마 하지 못했다.
·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위험한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쉽지만 이것은 사실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하는 방법이라 이해하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다. 어머니는 쉽고 위험한 방법을 택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 방이 팔을 벌려 나를 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속 깊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울음이 끌려 올라왔다. 나는 조용히 아버지를 불렀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팔에 머리를 기댄 것 같은 평온이 찾아왔다. 나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오래 깊이 울었다. 내가 흘린 눈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아늑함 속에서 나는 아버지가 왜 이 방에 들어와 지냈는지, 무얼하고 지냈는지, 왜 이 방에 들어오면 나가지 않았는지 저절로 알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 굽힐 때 굽히고 밟을 때 밟아야지, 그게 세상 이치인데, 굽힐 대서는 뻣뻣하게 머리 쳐들고 있고, 밟아야 할 데서는 굽신굽신,
“무슨 바보짓이야. 밟지 않으면 밟히는 건데. 어떻게 맨날 그 모양이야. 발전이 없어 발전이”
· 내가 판단하건데 우리 식구는 명목상의 크리스천이었다. 처음부터 그 길로 갈 것이지, 라는 문장이 밥알과 함께 씹혔다. 밥알과 함께 씹히기만 할 뿐 밥알과 함께 넘어가지는 않고 입안에서 굴러다니기만 했다.
· 나를 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나를 통과해 더 먼곳에 닿아 있었다. 나를 지나 어디에 닿은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거지 있었지만 거기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가 거기를 없애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를 없애고 모르는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가 만든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양옆의 나무들이 우리와 보조를 맞춰 걷는 것 같기도 했다. 색 바랜 몇 부위 선교회보와 여러 권의 노트와 얇은 책 한 권을 꺼내 보여 주었다. 아버지가 남긴 것들이라고 했다. 사진에는 산이 겹쳐 있고 넓은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풀을 뜯는 양들과 소가 나오고, 원뿔 모양의 집이 보이고, 망토 같은 것을 걸친 검고 두꺼운 피부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찍혀 있었다.
· 그 시선을 맞받고 있기가 불편해 몸을 일으켜 그만 돌아가겠다는 뜻을 표했다. 나는 어쩐지 내 뒷모습이 도망가는 것처럼 보일까봐 의연하게 걸으려고 애썼다.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아주 많이 애를 써야 했고, 무리를 해야 했고, 덩달아 험악해져야 했고, 그러나 잘되지 않았고, 그래서 잘 살지 못했다. 살면서 자주 내가 참으로 살기를 갈망했던, 살지 못하고 있는 다른 삶을 그리워했다. 세상을 견디는 것은 나를 견딘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결단을 해야 했다. 그 결단의 내용, 감쪽같은 아버지의 실종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세상으로부터 나를 떼어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건드리지 않고 내 모습만 정교하게 도려내듯 주변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없어지는 것, 그렇다고 해도 세상은 내가 떨어져 나간 사실도 모를 거라는 최면과 실망하거나 비난할 소수의 사람들을 의식에서 배재할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가장 모르는 사람이다.-이승우 단편. ‘모르는 사람’2018. 동리문학상 수상 작품
-심사평(이채형): 문장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사려 깊어서, 그 행간이 마치 동족을 잡아먹는 뱀의 몸부림처럼 숨 막힐 정도다. 그만큼 그의 문학은 오해를 부르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가식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그동안 오해했던 아버지를 다시 이해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오해하며 살아왔다. 아버지의 삶은 당연한 희생이라고 아니 마땅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원래 집안의 기둥이자 가장이기 때문에 그의 고통을 보통의 수준이라고 여겼다.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일가를 꾸리고 살 때에서야 아버지의 고독을 알았다. 내가 아버지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했다고 아니 통째로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다는 것이 왜 나를 견디는 일인지 그때서야 알데 됐다. 내가 한 일에 내가 책임을 진다 .아버지는 다르다. 아버지는 내가 한 일까지 본인의 책임으로 돌렸다. 아버지는 아버지 그 가체였는데 나는 나 자체로 서지 못하고 아버지 품속에 숨어 있었다. 어린 나를 대신 견뎌줬던 사람들을 고단함을 알고 미안해하는 것, 그래서 나도 다시 사랑하는 누군가의 삶을 대신 견뎌줄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운명을 아는 것, 이승우의 소설은 ‘오해하는 일생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문학’이다.
· 할머니 품처럼 푸근한 언덕은 바람을 안으며 해송을 건강하게 지켜 냈다. 숲은 항상 윤기를 뿜어냈고, 푸름을 잃지 않았다. “저 해송군락지는 어릴 때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하도 울창해서 대낮에도 어두웠지. 겁 많은 아이들은 숲 속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알록달록 공깃돌을 뿌려 놓은 듯 자리 잡은 펜션들은 자연과 다투지 않았다, 모두 해송군락지의 일부가 되어 조화를 이루었다. 건축물이 들어서고 펜션이 산재하였지만, 훼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샅(마을의 좁은 골목길)으로 들어서자 볕이 들지 않는 곳에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추슬렀다. 건물은 퇴락했지만 남쪽 마당과 동쪽 빈처가 넓어서 넉넉했다. 집 뒤편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바짝 들어와서 포근했다. 마당에 승용차가 주차해 있다. 아이와 김인구 사이에 이 년이라는 세월이 거대한 협곡으로 막아섰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마트로 출근했다.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했다. 그도 아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았다. 입술을 굳게 물고 눈빛으로 아내를 배웅했다. 한겨울 새벽 다섯 시는 아직도 깜깜한 밤이다. 걷는 동안에도 코가 떨어져 나갈 듯 추위가 매서웠다. “오늘은 글렀소!‘
그의 한마디에 태엽이 풀린 장난감처럼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롯가에 앉아 잡답을 나누던 사내들이 “해장국 한 그릇 할 건데 생각 있으며 같이 갑시다.”했다.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봇대에 꽂힌 생활정보지를 가져왔다. 모두들 애둘러 거절하였다. 날씨가 풀려야 일감이 들어온다며 느긋하라고 충고했다. 재작년에도 늘 이 지경이었다며 노는 것을 일 삼아야 시간이 간다고도 했다. 오후에는 생활정보지를 뒤지며 구직활동을 계속하였다. 면접 마치고 나면 더러 측은함을 표시하며 동정심을 보이기도 했다. 백 번의 동정심보다 한 번의 일자리가 필요했다. “속도가 빠르면 목적지에 일찍 도달하겠지만, 속도만큼 위험은 배로 높아진다. 가끔 숨을 고르는 여유도 필요하겠다.” 쇠붙이가 가라앉듯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를 조적공으로 이끌어 주신 분계서 그와 같이 말씀하셨네. 그 가르침을 자네에게 그대로 전하는 걸세. 벽돌 쌓는 일도 노동이니 육체적으로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지, 그렇지만 벽돌 한 장이 면을 이루고 형태를 잡으며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뿌듯해. 일테면 작은 성취감이라고 할까. 하라. 그 맛에 아직도 이 일을 하고 있지.”
“내일이라고 그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연락처를 알려 주십시오.”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아버지 일세 찾아뵙게나.”
다음난 아들은 고시원을 정리하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에 미리 나와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의 짐을 트럭에 실었다. 머지않아 건설현장은 긴 겨울에서 깨어난다. 아버지는 든든한 조공을 얻었다. 내일부터라도 빈터에 기초를 놓고 시간 날 때마다 아들과 함께 한 장씩, 한 장씩 벽둘을 쌓아 올릴 계획이다 더는 이장네가 부럽지 않았다.
“벽돌을 일정 높이까지 쌓으면 더 이상 쌓을 수 없다고 하던데, 그 높이가 얼만지 궁금했습니다.”
김진수(아버지)가 빙긋 웃었다.
“하루에 쌓을 수 있는 높이가 대략 1.5미터 정도다. 그쯤에서 멈추고 다음날을 기다려야 한다.” -이선규 작 ‘1.5미터’ 2018 동리목월 신인상 단편소설 당선작
· 구두 만들 때 모양이 매끈하면 발이 불편하고 발이 편하면 모양이 별로였다. 이 둘이 딱 맞게 떨어지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함께한 시간이 이십 년을 훌쩍 넘겼는데도 서로 마음은 교차로가 없는 고속도로의 양 차선을 달리는 것 같았다. 커피 향은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으면서도 이내 녹아들 듯 사라졌다.
· 뽑힌 건 이빨인데 온몸이 들썩거린다.
· 스스로 老(노)童(동) 곧 늙은 애가 되니 하나씩 나누는 것이 즐겁고 귀한 것이 없음이 편하다 옆에 있는 사람마다 예뻐 보이고 그냥 좋다. 사람만이 제일 귀하다.
· 한눈에 반하는 운명적인 사랑이 있듯이 첫눈에 빠져 버리는 운명적 장소도 있다. 순천만이 그런 곳이다. 망망한 갈대밭과 만곡의 강, 넓은 갯벌과 갯풀들이 꾸민 울긋불긋한 갯벌 정원, 아스라한 바다와 불게 타는 일몰, 누구나 단박에 빠질 만한 비경이지만 특히 갈대와의 조우가 그러했다. 바람이 분다. 그러나 내 안의 풍향계는 오랫동안 돌지 않을 것 같다.-순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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