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이라고 하네요...저도 이 분 기사 읽고 알았는데...
영국 프로축구 무대에 섰던 최초의 한국인은? 많은 사람이 박지성 선수를 떠올리겠지만 답은 박지성이 아니다. 2005년 6월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Manchester United)에 진출한 박지성보다 무려 33년이나 앞선 1972년, 잉글랜드 프로축구 구단인 아스날(Arsenal)과 코벤트리(Coventry)에서 활약했던 사람이 있다. 이동통신 장비를 생산하는 피플웍스의 허승표(59) 회장.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장과 부회장을 지내고 현재 한국축구연구소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는 축구인이자, 기업인이다.
“1972년에 영국 프로축구 리그요? 설마……. 혹시 주전자 들고 다니셨던 것 아닙니까?”
“우하하.” 돌아오는 웃음소리가 쾌활하다. “1970년에 잉글랜드 코벤트리 팀과 한국 대표팀이 친선게임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영국 쪽에서 ‘한국에 의외로 좋은 선수들이 있다’며 ‘몇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게 됐습니다. 그게 아스날이었어요.”
허 회장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아스날은 당시 1부 리그 최고의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땐 영국 축구계가 무척 폐쇄적이었어요. ‘자국선수보호법’이란 게 있어서 외국 선수는 바로 프로에서 뛸 수 없게 해놓았거든요. 그래서 1년간 B팀에 소속돼 아마추어로 생활한 뒤, 이듬해인 1973년 1부 리그인 코벤트리로 옮겼습니다. 그땐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죠. 1~2군을 오가며 총 34경기에 출전, 모두 17골을 넣었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당혹스러웠다. 허 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차범근 감독보다 먼저 해외 무대에 진출한 것이 된다.
확인을 위해 대한축구협회에 문의했다. 답변은 뜻밖이었다. “그 분이 국가대표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1970년대에 영국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워낙 옛날 일이어서 영국 프로 리그 출전 기록이 국내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확인이 어렵습니다.”
모호했다. 영국 코벤트리 구단에 문의했다. 지금은 챔피언스 리그(2부)에 속해 있는 코벤트리 측은 “당시 팀이 1부 리그에 속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허 회장에 대해선 “워낙 오래된 일이라 자료가 남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지금으로선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 1974년 코벤트리 구단선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원 안에 있는 사람이 허승표 회장. | |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축구협회 기술고문을 맡고 있는 이용수 KBS 해설위원에게 확인을 의뢰했다. 이 위원은 허승표 회장에 대해 “유럽 진출 1호 맞다”며 “1970년대 초반 아스날을 거쳐 코벤트리에서 선수생활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코벤트리는 당시 1군에 속한 팀이었다”며 “요즘으로 치면 허 회장이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한 셈이 된다”고 말했다.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낸 김호 숭실대 교수에게 다시 한 번 확인을 청했다. 김 교수는 “허 회장이 1부 리그 코벤트리에서 선수로 뛴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 돌이켜보면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하지만 당시엔 우리 사회가 미숙해 아무도 그 가치를 몰랐다”며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허 회장은 구씨 일가와 LG그룹을 공동창업한 고 허만정 창업자의 7남이다. 하지만 그는 소탈하다. 1969년 월급 55달러를 받고 소총수로 자원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경력이 그의 소탈함을 말해준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집안에도 알리지 않고 그냥 갔어요. 창문을 시커멓게 가린 열차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베트남으로 가는 수송선을 타기 위해서였죠. 막상 가 보니 부산항이 온통 난리였습니다. 당시 참전한 병사들은 대부분 집안이 가난했잖습니까? 먹을 것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어요.
배웅 나온 부모들이 고무줄에 떡을 묶어서 배 위로 던져주며 펑펑 울더라고요. 떠나는 자식들에게 그거라도 먹이려는 거였죠. 항구 주변엔 환송 나온 합창단이 밴드에 맞춰서 ‘잘 있거라, 부산항아~’ 하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부산이 온통 눈물 바다였습니다.”
‘참전용사’ 허 회장에게 주어진 임무는 공병 보호. 도로를 보수하는 공병들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막아내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제 눈 앞에서 하사관 하나가 부비트랩에 걸렸어요. 하반신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을 코앞에서 봤습니다.”
소총수로 활약하던 허 회장은 “전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전장에선 소총수를 제일로 칩니다. 전투를 하다 보면 전우애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거든요. 기합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이니까요.”
허 회장은 전투 중 다리를 다쳐 본국으로 후송되었다. 그가 영국으로 건너가 축구 선수로 활약한 것은 부상이 회복된 뒤의 일이다.
허승표 회장이 경영하는 피플웍스엔 정년이 없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나이에 관계없이 일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한다. 피플웍스는 기지국용 중계기, 파워 앰프 등의 이동통신 장비와 LCD TV용 인버터, 휴대폰 카메라 모듈, 그리고 미사일 부품을 생산하는 첨단 기술기업이다. 김영율 대표이사는 “건강 나이와 실제 나이는 다르다”며 “회장님도 60이 다 되셨지만 건강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김 사장은 “누구나 건강하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아예 정년 규정 자체를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독특한 회사의 경영방침은 “축구와 전쟁을 통해 사람을 대하는 시각을 갖게 됐다”는 허 회장의 인생 철학과 관계를 맺고 있다. 허 회장은 “아무리 뛰어난 선수나 병사들로 팀을 이뤘다 하더라도 조직 전체를 보는 눈이 없으면 팀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오너의 역할은 직원들을 위하는 진심을 갖고, 밑에서 올라오는 각종 건의사항을 경청하며, 전체를 조화롭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감독과 주장들을 임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사람이 제일’이란 것이다. 이런 그의 철학은 카페처럼 꾸민 경북 구미 본사 건물이나 프리미엄급 시설을 갖춘 사내 헬스장, 외국 카페테리아를 연상시키는 사내 레스토랑 등 사원 복지시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일까? 허 회장이 경영하는 피플웍스는 ‘국가균형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1월 7일 지역혁신 유공자 대통령상을 받았다.
허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 회사 사시가 ‘인간 중심’입니다. 피플웍스라는 회사 이름도 그래서 지은 겁니다. 인간답게 일하는 일터를 만들자는 것이죠. 그래서 임금도 동종업계 최고 수준으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축구나 전투나 경영이나 원리는 다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최고입니다. 그 밖에 뭐가 있겠습니까?”
첫댓글 아 이런 레전드가 있었다니~+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