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의 전사] 정형근의 폭탄증언(하) - 남한 내 친북세력(2) "對南공작은 더 대담해지고 집요해진 반면, 우리의 對共전선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趙甲濟 *"북한은 文益煥, 徐敬元, 황석영 등의 밀입북 공작으로 남한 사회를 흔들면 체제가 붕괴할 것으로 생각" *"'공안정국', '공안통치'란 말은 徐敬元 사건으로 인해 태어난 정치 유행어" *"언론은 체제와 체제의 싸움 땐 안기부의 편, 체제 내 갈등 때는 안기부에 비판적" <『국민은 안기부에 대해 愛憎의 감정을 갖고 있다』> ―다시 이야기를 1989년으로 되돌려 계속하도록 합시다. 그해 3월 文益煥씨 밀입북 사건이 터졌을 때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안기부가 사전에 밀입북을 감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질타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언론들이 이럴 때는 국가체제를 보위하는 보수적 시각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 때 일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언론은 항상 일만 있으면 안기부를 질타하는 등 극히 부정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文益煥씨의 密入北 사건이 터지자 이번에는 「국민의 세금을 받고 있으면서 對共의 구멍이 뚫리도록 안기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책임져라」고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안기부를 이렇게 약화시켜서 되겠느냐」며 안기부의 강화와 사기 진작을 위한 보도를 했습니다. 이때 저는 안기부에 대해 갖고 있는 국민의 감정이 愛憎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수사관들을 모아놓고 「절대로 위축되지 말고 용기를 갖고 근무해 달라. 국민과 언론이 우리 뒤에 서 있다」는 요지의 훈시를 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일본의 친북조직의 역할이 규명되었습니다. 중요한 중개 역할을 한 인물이 정경모이고, 反韓的인 일본 지식인인 야쓰에 료스케 이외에 親北단체인 韓民統 관련 사람들과의 연계 관계도 드러났지요. 그 중에서 文씨와 함께 밀입북했던 유원호라는 사람은 金모 의원의 비서를 했었죠. 그는 韓民統의 배동호, 박병채, 곽동의와 접촉을 해 박병채로부터 1000만 엔을 받아 金모 의원에게 주었고, 곽동의에게서는 개인적으로 700만 엔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정부는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들로부터 한국의 정치인이 돈을 받아서 정치자금으로 이용하는 과정이 밝혀진 특이한 사건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안기부에서도 과거에 유원호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는 겁니다. 유원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조사를 해 보니 외국을 수십 회 드나들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동남아시아, 일본을 드나들면서 활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원호는 속을 잘 털어놓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 때문에 수사에 애를 먹었습니다. 당시 유원호는 완전히 위장된 공작망인데도 불구하고 북한이 유원호를 표면에 드러나게 하여 그 공작망을 사용 불능으로 만들었습니다. 안기부는 북한이 유원호를 노출시킨 배경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북한은 당시 유원호가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거기다가 文益煥의 방북이 워낙 큰 공작이어서 여기에 바람잡이 역할로 유원호를 사용한 것으로 분석되었습니다. 그 무렵은 학생들과 근로자들의 시위가 극에 달했던 때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文益煥, 徐敬元, 황석영 등으로 이어지는 대담한 밀입북 공작을 통해 남한 사회 전체를 계속 흔들면 남한 체제가 붕괴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결국 북한은 對南공작조직을 풀 가동, 밀입북 공작을 추진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사회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文益煥씨가 金日成을 만나면서 그의 품에 안기는 제스처가 전국에 방영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어떻게 저럴 수가」라는 충격을 주었는데, 그것은 북한의 공작이었습니까. 『저는 북한의 공작이라기보다는 金日成을 만난 文益煥씨의 감격이 그렇게 표현됐다고 봅니다. 金日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통령에게는 대놓고 욕을 해도 金日成 앞에서는 감격하게 됩니다. 임수경도 수십만 관중이 모인 스타디움에서 완전히 90도로 허리를 굽혀 김일성에게 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 그렇게 절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놓칠 뻔한 徐敬元 국회 프락치 간첩사건> ―1989년 6월 徐敬元 사건은 무려 한 달 동안 모든 신문의 지면을 차지했고, 그런 면에서는 文益煥씨 밀입북 사건보다 더 큰 정치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徐敬元 밀입북 사건이 알려진 것은 金元基 평민당 총무가 徐敬元씨를 데리고 朴世直 안기부장의 공관으로 찾아와 자수시키는 식으로 해서 밝혀졌습니다만, 당시 수사국장을 하시면서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저는 李善實 간첩 사건 때도 秋夕 휴가준비 도중 새벽에 전화를 받고 그때부터 무려 한 달간을 수사에 매달리게 됐습니다. 이 사건 때도 당시 2박3일 휴가를 얻어 늦은 밤에 짐을 꾸리는 도중 부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차를 몰고 공관으로 갔더니, 「徐敬元이라는 평민당 국회의원이 통일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밀입북을 했는데, 이 사실을 자진해서 우리 기관에 고지를 해 왔으니 조사를 하고, 현직 의원이니 예우를 갖춰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朴부장은 그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그 지시에 따라 다음날 오전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徐敬元씨를 넘겨받기로 야당과 약속을 했습니다. 저도 그 사건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민완 수사관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상대의 신분도 신분이라 安家에서 조사를 시켰습니다. 현직 국회의원이란 신분이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궁금했지요. 한 시간 간격으로 계속 전화를 해 조사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조사는 예상 밖으로 길어졌고 그 날 저녁 담당 수사관으로부터 올라온 보고는 아주 뜻밖이었습니다. 「북한의 특별 전세기를 타고 방북했다면 단순 밀입북 차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벨기에의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어 교육받은 간첩인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정예 수사관을 추가로 투입한 후 수사 전말을 당시 안응모(安應模) 차장에게 보고드렸지요. 그랬더니 安 차장은 철저히 조사하란 지시를 했습니다. 安 차장은 순발력이 아주 뛰어난 분입니다. 조사를 계속한 결과, 이것은 전형적인 국회 프락치 간첩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정가(政街)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이때부터 야당에서는 이른바 「공안정국」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공안정국」, 「공안통치」란 말은 徐敬元 사건으로 인해 태어난 정치 유행어입니다』 ―당시 徐敬元씨의 밀입북에 대해서 金大中씨가 사전에 알고 있었느냐로 인해 불고지죄냐 아니냐로 논란이 많았습니다만 결국 불고지 혐의는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徐敬元이 5만 달러를 金日成으로부터 받아와 金大中씨에게 1만 달러를 주었다는 혐의는 안기부에서는 밝혀내지 못하고 검찰에서 밝혀냈지요. 『안기부에서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은 감지했습니다. 이 사건은 방대한 규모의 사건이었습니다. 85년 4월 북한 공작원 성낙영에게 포섭된 이후 이 사건이 밝혀진 89년까지 4년 동안이나 암약해 온 대형 간첩사건이고 관련자만도 수십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안기부의 간첩사건 조사기간은 20일로 제한돼 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4년 동안의 첩보활동을 조사한다고 해 보십시오. 게다가 단식투쟁이나 묵비권도 행사하지요. 그나마 조사기간 20일 중에서도 진짜 수사 시간은 10일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후부터는 송치 서류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 정도 간첩사건을 수사하려면 2∼3개월은 족히 걸려야 하는 겁니다』 ―徐敬元 사건은 당시에 저도 취재를 했기 때문에 생생합니다만, 언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수사가 진행됐지요. 『언론은 체제와 체제의 싸움이 시작되면 안기부의 편에 섭니다. 그러나 체제 내의 갈등에 대해서는 안기부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언론의 이러한 자세는 옳다고 봅니다』 ―그때 안기부의 페이스대로 수사가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정치권의 反 DJ 연대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金鍾泌씨의 신민주공화당과 金泳三씨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민정당이 다 같이 金大中씨에 대해 비판적인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이것도 수사에 힘을 싣는 데 큰 뒷받침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는 적법절차에 의한 수사를 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드러나는 사안이 엄청났기 때문에 언론이 전폭적인 지지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언론들은 치열한 취재경쟁을 했습니다. 저희들은 그 사건에 대해 일주일마다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 이외에는 일체 외부로 사건을 알리지 않았는데 언론이 워낙 집요하게 사건을 취재하는 바람에 일부 수사 내용들이 단편적으로 흘러나가게 된 겁니다. 그런 단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언론들은 큰 충격을 받고는 전폭적인 지지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언론들의 그러한 지지가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徐敬元 수사는 가톨릭 농민회와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또 밀입북했던 徐敬元은 金壽煥 추기경과 만나 북한에 갔다 온 것을 말하면서 金 추기경의 訪北을 권유했지요. 그래서 종교권에 대한 수사가 상당히 미묘했던 적이 있었는데 어떤 식으로 대처했습니까. 『제가 그때 수사국장으로서 예의를 갖추고 金壽煥 추기경을 직접 방문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추기경이란 분이 대단히 훌룡한 성직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격적으로 감복했습니다. 저희 수사진을 맞는 자세나 답변 등에서 훌룡한 면모를 보여주신 겁니다. 그 분은 관련된 모든 사안에 대해 진솔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처벌받는데, 당신께서도 불고지죄에 해당된다면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의 불고지가 의도적인 것이 아니어서 입건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사의 과감성을 뒷받침하는 또다른 예는 한겨레신문의 압수 수색이었습니다. 尹모 記者가 徐敬元의 밀입북과 金日成을 만난 사실을 알고 사진까지 갖고 있었는데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점을 두고 수색을 했고, 관련 종교계 인사도 모두 수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런 사건이 난다면 성역 없는 수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지금은 침체된 역량과 축소된 수사권, 그리고 안기부 법의 개정 등으로 인해 과연 이런 수사를 할 역량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도 의문입니다』 ―1989년만 해도 좌익세력들이 지금보다 훨씬 기세등등하고 안기부는 상당히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좌익세력들이 훨씬 더 약화되었는데도 이러한 수사를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안기부는 對共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연행하여 48시간 동안 조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전 영장이 없으면 연행할 수 없어요. 더구나 변호인이나 가족, 의사(醫師)의 피의자 접견 요구를 거절하면 7년 이하의 징역입니다. 경찰과 검찰은 그렇지 않은데 유독 안기부에만 이런 조항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위헌(違憲)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인은 절대 접견권이 있기 때문에 예외입니다만, 면회를 시켜주지 않는다고 징역형에 처한다는 것은 형평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세상에 이런 악법(惡法)이 어디 있습니까. 가족들을 면회하면 피의자는 그때부터는 정직하게 진술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면회인들과 내통합니다. 안기부의 수사력을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래 놓고 무슨 수사를 합니까』 <30代의 좌편향 문제> ―徐敬元 사건에 의해 정치, 종교 등 각계 각층에 親北세력이 침투해 있다는 것이 실증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朴弘 서강대 총장이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친북세력들이 침투해 있다」고 한 말이 다시 뉴스가 되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벌써 徐敬元 사건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주사파가 가장 극성을 이루었던 시기가 81, 82학번 때입니다. 그 시대의 학생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론을 비롯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중핵을 이루고 있습니다. 30代가 일선업무를 장악한 언론과 출판, 예술, 문화, 학계 심지어 정치권에서는 徐敬元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나면 일시에 다들 조용해집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일단락되고 잠잠해지면 일거에 다시 일어나서 사건을 왜곡하고 폄하시키고 거꾸로 뒤집어서 국민들에게 돌리는 겁니다. 하지만 또 사건이 터지고 그로 인해 체제가 위험 수위에 다다르면 중산층들이 이에 대응해 반체제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현재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중입니다』 ―저도 언론사에 있으면서 느낀 겁니다만, 文益煥씨 사건이나 徐敬元씨 사건이 일어나면 언론들은 집중적으로 이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다가 문익환씨가 사망했을 때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보게 됐습니다. 그때 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를 지냈던 丁一權씨도 같은 날 사망해서 언론에서는 두 인물을 동시에 다루게 된 겁니다. 기사를 보면 丁一權씨는 마치 친일파로서 굴절된 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비하시키고, 文益煥씨는 민주투사로서 아주 꿋꿋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칭송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왜곡된 일부 언론의 영향입니다. 좌익 분위기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나라를 위해서 전선을 누비며 평생을 바쳐 싸웠고, 또 한 사람은 북한의 공작 조직에 포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코미디 같은 비극」입니다』 ―지금까지 수사국장으로서 구속시킨 사람들이 수백 명은 족히 될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의 연령층은 어떻습니까. 『역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가장 많습니다. 李善實 사건 수사 중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건설과 관련된 조직들을 조사한 적이 있었지요. 놀라운 것은 그 조직원들 거의가 30代였고, 세칭 일류대 학생들이었는데, 어느 누구도 간첩을 알고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朴世直씨가 도중하차한 배경>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면 큰 사건이 흐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徐敬元 간첩사건이 당시 정치의 흐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한때는 盧대통령과 金大中씨가 중간평가 취소 합의로 밀월을 가진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文益煥 밀입북 사건으로 인해서 金大中씨가 조사를 받은 데 이어 徐敬元 사건이 잇달아 터지자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로 정계가 개편되어야 되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체제가 무너지지 않느냐는 우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려가 암묵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3당 합당의 계기를 만들게 되었죠』 ―徐敬元 수사 직후에 朴世直 안기부장이 徐東權 안기부장으로 바뀌지 않습니까. 수사는 잘했는데 왜 이런 경질이 있었습니까. 『朴 부장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거목으로 비쳐졌습니다. 그 잠재력을 두려워한 6共 실력자의 견제에 의해서 도중하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裵命仁 전임 부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朴世直 안기부장은 취임한 지 7개월 만에 사임했는데, 그 기간은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분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큰 조직을 지휘해 본 사람이었기 때문에 통이 큰 분이었습니다. 정치적 야망도 있었고, 여야 관계를 부드럽게 했던 분이었습니다. 오래 있었으면 훌륭한 안기부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조기 퇴진을 모두 아쉬워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조금 신중하게 접근하는 면이 있었습니다만, 부하들의 건의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자기 의사와 다르더라도 부하의 의지를 수렴해주는 큰 그릇이었다고 생각합니다』 <『對共 수사관의 사기 저하… 戰線이 무너지고 있다』> ―당시 1차장이던 安應模씨는 오히려 對共수사를 강하게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지금도 동교동쪽에서는 서경원 사건 때 安應模 차장이 강하게 몰아붙였다고 생각하고, 감정의 골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당의 핵심간부가 그 후에도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도 있지요』 ―그동안 모시던 안기부장이 盧信永, 張世東, 安武赫, 裵命仁, 朴世直, 徐東權, 李相淵, 李賢雨, 金悳, 權寧海 이렇게 열 분인데, 평균 수명은 1년 남짓합니다. 북한 對南공작 부서의 책임자들도 이렇게 자주 바뀝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북한의 對南담당 비서를 얘기할 수 있는데, 안기부장과는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북한의 경우 국가보위부장이 안기부장에 해당합니다. 오히려 북한의 對南 담당 비서는 우리의 수사국장과 대응관계인 셈입니다. 對南공작을 책임지는 사람이 노동당의 몇 안되는 실력자인 비서를 하고 있다는 것이 북한이 對南공작을 얼마나 중요시하느냐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겁니다. 그러한 중요한 직책을 십 수년간 허담(許錟)이 했고, 그 다음에 계응태, 윤기복(尹基福), 김용순(金容淳)이 번갈아 가면서 십 수년씩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의 對南공작은 일관되고 그 조직도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안기부 內에서 북한과 관련이 되는 부서의 상대적인 위치는 어떻습니까. 『대표적인 부서가 역시 對共수사국인데, 현재는 對共이 시대에 낙후된 업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對共의 위상이 점차 추락하고 있습니다. 對共수사국 직원들은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떠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고, 자신의 직업을 동료나 친지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과 밥 한번 먹자는 사람이 없습니다. 에피소드 한 가지를 말씀드리지요. 全斗煥 대통령 때 22만 달러 밀반출 사건을 안기부에서 수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검사장을 비롯해서 다수의 검찰, 법원간부가 옷을 벗었지요. 그때 全대통령이 직접 그 사건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서 돈을 받은 공직자중에서 서울 시경(市警) 소속의 對共 경찰관이 있었습니다. 全 대통령은 수사결과 보고를 받고 다른 사람은 모두 사직시키되 「춥고 배고픈 對共경찰관만은 살려주라」고 해서 혼자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사기가 떨어진 것은 여론, 언론이 그 동안 「간첩조작」 「용공음해」로 공격해서 그렇습니까. 『필요할 때는 「너희들이 제일이다, 너희가 국가 체제를 지키지 않느냐」며 활용하고, 필요 없을 때는 팽개치는 일을 반복해 왔습니다. 對共 수사관들은, 경찰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정보부서와 비교해서 승진이라든지 중요한 보직에 갈 때 항상 소외되고 불리한 여건을 당해 왔습니다. 가정도 팽개치고 고생하니까 5년 이상 근무한 사람치고 병을 안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만두면 갈 자리도 없습니다. 사회에서도 냉대를 받고, 돈도 없어 전세집을 전전하고…. 검찰도 과거엔 공안검사가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對共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낙인으로 찍혀서…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對南공작은 더 대담해지고 집요해진 반면에 우리의 對共전선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누가 對共수사요원을 政治에 써먹었나> ―저도 對共수사관들을 많이 만나 보았는데, 상당히 삭막한 생활을 하고 세상물정을 모르는 듯했습니다. 호적 조사, 미행 등 재미도 없고 성과도 별로 나오지 않는 일을 하고, 루머같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의 이름 하나를 찾기 위해 몇십만 명의 자료를 뒤지는 등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같이 일하면서 한 길만 바라보고 삽니다. 그러다가 다른 부서나 해외부서로 나가게 되면 다시는 對共 수사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對共 수사요원은 바깥 세계를 알면 절대 안된다고. 경찰도 그 문제로 고민 끝에 對共 부문은 주특기를 따로 해서 별도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집권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對共 수사요원들을 순수하게 간첩수사에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용도로 썼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유명인사의 사생활을 추적한다든지 하는 「더티 워크(Dirty Work)」에 투입된 적은 없습니까. 『과거에 對共요원들이 본래 고유의 임무가 아닌 정권 유지 임무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서 對共이 이용되고 활용되고 한 그런 역사가 대공을 불신하게 하는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6共부터는 제자리를 잡아가서 지금은 고유 임무에만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徐敬元 간첩사건에 연이어서 文奎鉉·林秀卿 밀입북 사건이 터져 89년 여름은 굉장히 바쁜 계절이었습니다. 『제 경우는 한 달에 5일 정도 집에 들어갔을까. 한번은 중병에 걸려 직업을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많은 직원들이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러나 우리 손으로 대한민국을 지켜야겠다는 각오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이 체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그때는 심지어 村老들이 속옷을 부쳐오는 등 위문품이 답지하곤 했습니다. 그 덕분에 피곤함을 잊어버리고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안기부의 수사 결과는 절대 거짓이 없습니다』> ―이 두 사건의 해외 배후 인물로 지난 5월호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었던 尹한봉이란 사람이 줄곧 등장합니다. 광주사태 직후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안기부 수사기록엔 거기서 호주 민족자료실의 김승희를 국내로 잠입시켜 全大協 등 한국학생들과 접촉, 임수경을 밀입북시킨 역할을 했다고 돼 있습니다. 문규현과 관련된 부분으로는 89년 7월19일 미국內 한청련 사무실에서 文 신부가 윤한봉으로부터 「조선 반핵 평화 위원회」 명의의 초청장을 입수한 걸로 돼 있습니다. 안기부 수사에 의하면 林秀卿, 文奎鉉의 밀입북은 尹한봉의 핵심적 역할로 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지금도 믿고 계십니까. 그가 수사 당시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라 간접수사를 통해 얻은 결론이니 일종의 「추정」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한 인물에게 무거운 굴레를 씌울 수 있는 對共에 관련된 사실을 대외에 발표할 때는 확실한 진술과 증거 없이는 하지 않는 것이 對共수사의 원칙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지난 93년 尹한봉씨가 귀국했을 때 수사가 필요했겠지요. 그런데 정치적인 압력에 의해 안기부는 북한 공작 협조 혐의자를 심문 한번 못해보고 구경만 했다는 말씀인데 그를 수사하지 말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라고 안기부에 지시한 사람은 누굽니까. 『지금 시점에서는 말씀드리기 곤란한 부분입니다. 때가 되면 밝힐 수 있으리라 봅니다만…』 ―그 당시 청와대의 간부입니까? 『그 점도 곤란합니다. 양해 바랍니다』(계속) |
[ 2023-02-02, 14:5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