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장 철든 계절

[뚜버기/박종천]

가장 철든 계절 

고운기


1
늦은 저물녘
삼개 건너 낡은 밥집에서 식탁을 받는 사내가
노릇한 어묵
멸치볶음을 안주 삼아 먼저
소주 한 병 비운다
가슴 열고 가득 한 잔 부어 복을 마신다

2
몸에 병을 얻자
나에게는 소주 올린 밥상 대신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다

산책도 한가하다

동네 뒷산 길모퉁이 어쩌다 사람과 마주치면
저 또한 나처럼 병들었군, 헤아린다

3
중세의 가을
에라스무스는 경애하는 벗 볼프강 파브리우스 카피토에게 썼다

―황금시대가 열릴 것을 내다보며
 다만
 얼마 동안만이라도 젊어져 보았으면…

4
에라스무스가 기다리던 르네상스는 아니었다
나의 생애는
재미없는 일정으로 설계된 채 버리지 못한 계절

지난 날 몸속에 채운 소주만큼은 다정하다



ㅡ계간 《청색종이》(2023, 봄호)

[북두 4번 별/ 신순말]

뚜버기 님 소개해 주신 詩 좋으네요.
더하여 주시는 사진은 더욱 좋아서 생각이 깊어지기도 하는데,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뚜버기/박종천]

제가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