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아침기도
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끝기도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
1815년 토리노 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사제가 되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고 젊은이들에게 기술 교육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가르치는 살레시오회를 창립했다. 신앙을 옹호하는 몇 개의 소품들을 남겼다. 1888년 세상을 떠났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의 편지에서
(Epistolario, Torino, 1959, 4,201-203)
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생도들의 참된 행복을 찾고 그들이 생활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인도해 주고 싶다면, 우리는 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부모를 대리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비단 나만이 아니고 살레시오회의 회원 전체가 그렇게 했습니다.
자녀들이여, 나는 나의 긴 생활을 통해서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얼마나 자주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은 더 쉽고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겠습니다. 즉, 참아 내지 못하고 오만한 성격을 지닌 우리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생도들을 참아 주면서 엄중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는 것보다 벌을 주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성 바울로가 초심자들에 대해 지녔던 그 사랑을 나는 여러분에게 천거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그들이 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랑은 바울로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에게 권고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체 못하는 분노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를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벌을 줄때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거나 또는 분노를 폭발시키려고 행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필요하게 되는 그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우리 권하에 있는 이들을 우리 자녀로써 바라보도록 합시다. 명령하러 오시지 않고 순종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지배한다는 그런 인상마저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대하신 방법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은 무지하고 예의를 모르고 불충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도 자비와 애정 어린 지극한 친밀성으로 대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어떤 이들에겐 놀라움이 되었고 또 어떤 이들에겐 걸림돌이 되었지만 한편 다른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생도들이 진정 우리의 자녀라면 그들의 잘못을 고쳐 줄때, 우리는 온갖 분노를 재거해 버리거나 분노를 완전히 제어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로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여 주거나 또는 마음 상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잘못을 고쳐 주고 다 잘되게 해주는 참된 부모들처럼 지금은 자비를 베풀고 미래에는 희망을 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문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리는 것보다는 겸손과 항구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릴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돈 보스코의 인연
250여년뒤 신학생 돈 보스코가 주보성인으로 공경,
교회에 대한 충성심, 인내와 온유 등에 큰 매력 느껴
돈 보스코와 살레시오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250여년이나 후대를 살았던 돈 보스코가 살레시오를 알게 된 것은 신학교 시절. 돈 보스코가 신학교를 다녔던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 지방은 살레시오 성인이 살던 당시 사보야 왕국에 속해 있었고, 살레시오 성인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돈 보스코는 신학생 때부터 살레시오를 주보로 수호성인으로 공경하며 그를 본받으려 노력했다.
살레시오에 대한 돈 보스코의 공경은 그의 사도직 활동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는 1844년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는 오라토리오('기도하는 곳'이라는 뜻)를 설립하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라고 이름지었고, 1852년 이탈리아 발도코에 첫 성당을 지으면서 살레시오 성인께 봉헌했다. 또 자기 제자들과 협력자들을 '살레시안'이라 불렀으며, 1884년 수도회 인장을 만들면서 살레시오 성인 모습을 새겨넣기도 했다.
돈 보스코는 특별히 살레시오 성인의 두가지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하나는 살레시오의 사목적 활력, 형제들 구원을 위한 열정, 진리를 변호하고 가톨릭교회를 수호하려는 충성심이고 다른 하나는 이같은 열정을 실행하면서 드러나는 인내와 친절, 온유이다.
사제로서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자신을 바친 돈 보스코가 내적으로는 온유와 인내를 간직하면서도 밖으로는 담대함과 용기를 갖고 복음을 전한 살레시오 성인의 삶에 감동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또 하느님의 섭리이자 안배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급한 성격을 가졌던 돈 보스코는 살레시오 성인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며 그 어떠한 사람도 지극히 존중하며 환대하고, 늘 미소를 머금은 채 한없는 인내와 온유함으로 청소년들을 돌보는 삶을 살았다.
두 성인의 영적 만남과 교류는 이렇게 보이지 않게 이뤄졌지만 이제는 전 세계 128개국에 산재한 살레시오회원들을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다.
[평화신문, 제777호(2004-06-13),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1) 영적 스승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유적지
가난한 사람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살레시오
(사진설명)
1. 프란치스코 살세이오 성인과 요안나 샹탈 성녀가 설립한 마리아 방문회 대성당 전경.
2. 성 프란치스코 성인 유해가 안장된 황금색 부조.
3. 성녀 요안나 샹탈 유해가 안장된 황금색 부조.
4. 마리아 방문회 대성당에서 강종명(살레시오회) 신부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순례단.
5. 안시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 내부 전경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의 '벗'이자 '아버지'로 살았던 돈 보스코(1815~1888) 성인. 그의 영성과 삶을 따라 사는 살레시오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50돌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살레시오회는 순례단을 모집, 지난 5월21일부터 31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산재한 돈 보스코 성인 관련 성지를 돌아봤다. 이에 동행,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보는 기획 연재를 5주에 걸쳐 마련한다.
돈 보스코(본래 이름은 요한 보스코, 이탈리아어로 '돈(Don)'은 신부를 뜻한다) 성인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돌보며 창설한 수도회가 살레시오회다. 베네딕도회나 프란치스코회처럼 창설자의 이름을 따 수도회 명칭을 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살레시오회는 그렇지 않다. 왜 돈 보스코회가 아니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 성인의 이름을 딴 살레시오회일까. 250년 전에 살았던 살레시오 성인과 돈 보스코는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의문을 풀기 위해 순례단은 프랑스 안시(Annecy)로 향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50㎞ 떨어져 있는 안시는 살레시오 성인 유해가 안장된 마리아 방문회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성지. 살레시오는 여기서 20㎞ 떨어진 살레시오 성(城)에서 1567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가난한 이들을 보면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지 않으면 안달이 날 정도로 착한 심성을 가졌던 그는 안시에서 공부를 하면서 사제성소를 느껴 파리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교회법, 민법, 신학을 공부하고 1593년 12월18일 사제품을 받는다.
당시 프랑스와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지는 지금처럼 다른 나라로 갈라져 있던 것이 아니라 사보야 왕국에 속해 있었고, 종교개혁으로 활성화된 개신교 특히 칼빈파가 융성하던 곳. 이런 시대에 사제가 된 살레시오는 1602년 제네바 주교로 임명되자 개신교에 맞서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 교회 재건에 앞장선 것은 물론 당시 과부였던 요안나 샹탈 여작(女爵)을 만나 영적 친분을 맺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환자와 소녀, 과부들을 돌보는 관상수도회 '마리아 방문회'를 1610년에 설립한다.
그는 지금도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룗신심생활입문서룘, 룗하느님 사랑의 개요(신애론)룘 등을 저술하고, 1622년 12월 28일 하느님 품에 안겼으며 1665년 교황 알렉산더 7세에 의해 시성됐다.
돈 보스코는 신학생 때 이미 살레시오 성인에 심취했다. 살레시오의 저작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사목방법과 열성적 선교활동에 감동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돈 보스코는 '나에게 영혼을 주고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는 살레시오 성인의 말을 평생 생활좌표로 간직하며 되뇌었기 때문이다.
안시 시내로 접어들자 언덕 한가운데 우뚝 솟은 마리아 방문회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1610년 마리아 방문회를 설립하면서 세워진 성당이다. 순례단은 중앙 제대 옆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작은 제단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중앙 제대 왼쪽에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유해가, 오른쪽에는 살레시오와 함께 마리아 방문회를 설립해 그늘진 이웃을 위해 한 생을 바친 성녀 요안나 샹탈의 유해가 황금색 부조 안에 안장돼 있었다. 평생 자신의 안락함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하려고 뛰어다닌 노고를 뒤로한 채 하느님 품에 안긴 듯 편안히 누워있는 모습이다.
대성당 언덕에서 잠시 중세풍 붉은 벽돌건물로 꾸며진 고풍스런 안시 시내를 내려다본 후 순례단은 시내 중심지에 우뚝 서 있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동상을 지나 예전에 살레시오와 요안나 샹탈의 유해를 모셨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으로 향했다.
살레시오 성인을 기념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이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이곳 중앙 제대 왼쪽에는 돈 보스코가 자신의 수단 자락에 매달리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손을 잡고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성상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살레시오 성인의 성화가 걸려 있었다.
결코 얼굴 한번 본적 없지만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고,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을 보전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널리 선포하려고 혼신을 다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닮은 두 성인을 번갈아보던 순례단은 감격스러운 듯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쳤다.
어느 덧 맑던 하늘에 어둑어둑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순례단은 발길을 옮겼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접어 들었다. 돈 보스코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피에몬테 지방 베키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내일은 또 어떤 감동이 순례단을 기다리고 있을까.
[평화신문, 제777호(2004-06-13),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돈 보스코 대성당
(사진설명)
돈 보스코 대성당 내부. 제대 전면 목각 부활 예수상이 인상적이다.
꼴레 돈 보스코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돈 보스코 대성당'.
돈 보스코 아버지 프란치스코가 머슴으로 살며 아들 요한을 낳았던 농가 집터 위에 세워진 대성당은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동시에 윗 성당과 아래 성당이 함께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당 외부 길이는 110m, 원형 돔 높이만 80m에 달한다.
성당 입구 정면에는 돈 보스코 동상이 웅장한 자태로 서있고, 내부로 들어서면 제대 뒷 벽면에 나무로 조각된 거대한 부활 예수상(높이 8m, 폭 6m, 무게 3000㎏)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한 돈 보스코 영성을 상징해 부활 예수상을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또 성당 내부는 거대한 배 안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구원을 표상하는 '노아의 방주'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옮겨 지하성당으로 내려가면 중심에는 청소년 가운데 서 있는 돈 보스코를 그린 벽화가 눈길을 끈다. 아이들과 함께 가을 소풍을 간 그가 활짝 웃고 있는 내용이다.
제대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돈 보스코의 유해를 담은 성광이 안치된 작은 단상이 순례객을 맞았다. 현재 돈 보스코 유해는 그가 사제생활을 하던 중심지인 발도코 지역에 세워진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에 안치돼 있지만 이 곳은 그의 탄생지임을 기념해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는 것이다. 세계 전역에서 모인 순례객들과 함께 유해 앞에 무릎을 꿇은 순례단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던 돈 보스코의 삶을 본받아 제2의 작은 보스코로 살아가겠다"며 두 손을 모았다.
[평화신문, 제778호(2004-06-20),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2) 돈보스코 유년기 유적지
꼴레 돈 보스코, 매주 7만여명 순례객 찾아와 기도
(사진설명)
1. 꼴레 돈 보스코 전경. 왼쪽이 돈 보스코 대성당이고, 오른쪽이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기술학교다.
2.돈 보스코가 2살부터 16살때까지 살던 옛 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순례단.
3. 돈 보스코의 이복형 안토니오가 살던 집 터에 세워진 도움이신 마리아 소성당. 오른쪽 건물이 형 요셉이 살던 집이다.
돈 보스코의 영적 스승,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성지를 돌아보고 순례단이 향한 곳은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 중심 도시인 토리노에서 차로 1시간여 떨어져 있는 베키. 돈 보스코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오늘날 이 곳에는 돈 보스코의 생가, 기념성당, 박물관 등으로 꾸며진 '꼴레 돈 보스코'(이탈리아어로 '돈 보스코 언덕'이라는 뜻)가 세워져 있다.
순례단이 189년 전 돈 보스코가 태어나 살았던 과거로 여행하듯 언덕을 천천히 올랐다. 1815년 8월16일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마르가리타 오키에나 사이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가 16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요한은 여기 한 농가의 돌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머슴으로 살던 집으로 보스코가 태어난 자리에 현재 '돈 보스코 대성당'이 우뚝 서있다.
순례단은 대성당에 앞서 요한이 유년기를 보낸 집부터 순례했다. 요한이 두 살이 채 되기 전 갑작스레 남편을 잃은 엄마 오키에나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농가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남편 프란치스코가 마굿간으로 사용하려고 사둔 허름한 돌집이었다. 현재 이곳은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쓰러질 듯 서 있는 돌집 앞에 서자 어린 요한 보스코가 생활하던 모습이 마치 흑백 영화처럼 펼쳐지는 듯 했다. 요한은 여느 시골 농가 아이들처럼 들판을 뛰놀기도 하고, 가난했지만 엄마 오키에나의 농사일을 도우며 엄마의 포근한 품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눈에 아른 거리는 영상을 뒤로 한채 돌집에 들어섰다. 추운 겨울 요한이 언 몸을 녹이던 작은 마굿간, 온 가족이 모여 숙식을 해결하던 방 겸 부엌을 지나 조심스레 위층으로 올라가자 차가운 돌벽에 자그맣게 난 창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오는 골방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요한이 사용하던 방이다.
그는 아홉살 되던 해 여기서 자신의 일생을 예견하는 잊을 수 없는 꿈을 꾼다. 하루종일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한 탓인지 저녁기도를 하곤 이내 잠자리에 든 요한은 파아란 잔디에 예쁜 꽃이 피어있는 집 앞 정원에서 조잘대며 즐겁게 노는 아이들과 다른 한쪽에서 두 패거리 아이들이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평소 불의를 보면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던 요한은 패거리에게 다가가 준엄하게 꾸짖었고 패거리와 싸움이 붙고 만다.
이 때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요한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주먹으로는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없다. 온유와 친절로 해야 한다." 흠칫 놀라는 요한에게 이번에는 어떤 여인이 나타나 팔로 감싸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는 것을 보렴." 요한이 보니 아이들이 사나운 짐승 때로 변해 으르렁거리다가 그 여인이 손을 내밀자 순하디순한 양으로 변하고 말았다.
겁에 질린 요한이 울음을 터뜨지자 여인은 "이곳이 너의 일터다. 겸손하고 꿋꿋하고 강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요한은 꿈에서 깨어났다.
요한은 이때부터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성모님의 도움에 의지하며 한 평생을 살게 된다. 요한이 꿈 속에서 보았던 집 앞의 정원 그 자리에는 지금 요한의 꿈을 그린 기념탑이 서 있다.
순례단은 돌집에서 내려와 요한의 형 요셉이 결혼한 후 살던 집터에 세워진 로사리오 경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곳은 후에 사제가 된 요한(돈 보스코)이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 쉬던 장소이자 애제자였던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을 처음으로 만난 자리이기도 하다. 잠시 경당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순례단에게 돈 보스코의 수단 자락에 매달려 조잘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또 발길을 옮긴 순례단은 경당 바로 옆에 있는 도움이신 마리아 소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미사를 봉헌했다. 요한의 이복형 안토니오가 살던 집터에 세워진 성당으로 돈 보스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전세계 살레시오회원들이 힘을 모아 지은 것이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온 순례단은 깜짝 놀랐다. 꼴레 돈 보스코를 찾은 수많은 순례객 때문이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끊이질 않는 행렬을 보며 안내 센터를 찾아 "얼마나 이곳을 찾느냐"고 묻자, "매주 7만여명이 찾아 기도하고 간다"고 했다.
돈 보스코가 청년기와 신학생 시절을 보낸 '키에리'로 이동하기 전에 휴식을 취하다 꼴레 돈 보스코를 찾은 이탈리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다는 프란체스카(26)씨는 "200여년 전 인물이지만 이 곳을 찾을 때마다 늘 새롭고 신선한 느낌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돈 보스코를 만나게 된다"면서 "온유와 겸손, 친절로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됐던 돈 보스코의 정신을 이어가는 다리가 되는 삶을 살고 싶어 가끔 순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화신문, 제778호(2004-06-20),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3) 청소년기 및 신학생 시절 유적지
키에리, 가난에 굴하지 않고 사제 꿈 키우던 곳
(사진설명)
1. 돈 보스코가 청소년 시절과 신학생 시절을 보낸 키에리 거리. 지금 이 거리는 '돈 보스코 길'로 불린다. 왼쪽에 우뚝 솟은 성당이 성 필립보 네리 성당이다.
2. 돈 보스코가 고학하며 숙식하던 피안타 커피점으로 전경. 현재는 인쇄작업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3. 피안타 커피점 안에 있는 돈 보스코 숙소 전경. 오른쪽이 화덕이 있던 자리다.
4. 어린 요한 보스코가 고학하며 매일 기도하러 다니던 은총의 성모 성당 전경.
9살 되던 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꿈을 꾼 요한 보스코. 꿈에 나타난 여인이 난폭한 패거리 아이들을 순한 양으로 변화시키며 '온유와 친절로 이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그는 이 말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며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두살 때 이미 아버지를 여읜 요한은 학교 가는 것조차 꿈꿀 수 없었다. 어머니의 힘든 노동으로 하루 벌어 먹고 살기조차 빠듯한 형편이었기 때문. 다행히 이웃집 한 농부의 도움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운 요한은 어머니를 도와 바쁜 농사일을 하는 가운데 짬을 내 공부에 열중했다.
하지만 이복형 안토니오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늘 요한을 괴롭혔다. 요한의 꿈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남편이 남긴 얼마되지 않는 돈으로 요한을 카스텔 누오보에 있는 초등학교로 보냈다. 카스텔 누오보는 보스코가 살던 베키에서 20㎞ 떨어진 곳으로 요한은 한 재봉사의 집에 머물며 공부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요한은 학비를 벌기 위해 바느질 기술도 익히고, 오르간도 배우고, 온갖 연장 다루는 법을 체득한다.
요한의 청소년 시절은 학교가 끝나면 생계를 위해 노동의 연속이었다. 16살 되던 해 중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요한은 대도시 토리노 인근에 있는 중소도시 키에리로 향한다. 이곳은 요한이 사제수품을 받기 전까지 10년간 살며 공부하던 유적지. 순례단은 가난에 굴하지 않고 사제의 꿈을 키웠던 요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키에리로 발길을 옮겼다.
중세풍 고색찬연한 건물을 그대로 간직한 키에리에 도착, 시내를 걷던 순례단은 요한이 고학 중에 숙식을 해결하던 피안타 커피점으로 이동하다 거리 한켠에 우뚝 솟은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성 필립보 네리 성인을 기념해 세워진 '성 필립보 네리 성당'. 신학생 시절 수없이 성당 앞 거리를 걸어다녔던 요한은 이곳에 자주 들러 영성체를 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체험을 했다. 요한이 신학생이던 1830~40년대 당시 교회는 신자들에게 주일과 대축일에만 성체를 영하도록 허용했지만 요한은 하느님께로 향한 강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평일에도 성체를 모신 것이다. 그는 당시 사건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아침식사를 하러 가는 동안 몰래 필립보 성당에 들어가 영성체를 하고 학교에 갔다. 이런 행동은 규칙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장상들의 묵인으로 평일에도 영성체할 수 있었고, 이는 내 성소의 가장 큰 자양분이었다."
오늘날 '돈 보스코 길'이라고 불리는 거리에 서있는 필립보 성당 앞에 잠시 머물며 기도를 바친 순례단은 피안타 커피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피안타 커피점은 현재 개인이 운영하는 인쇄공장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요한이 쓰던 숙소는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키 160㎝ 정도로 왜소했던 요한이 누우면 발이 문 밖으로 삐져 나올 정도였다"고 설명하는 성지관리인 페레로 쥬세페(75)씨의 말을 듣고 들여다 본 요한의 숙소는 방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웠다. 너무 좁고 낮아 고개를 숙여야만 서 있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요한은 사제의 꿈을 키워갔던 것이다.
커피점원으로 일하는 대신 과자나 빵을 굽던 화덕이 놓여진 이 골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요한은 방과 후 가게 청소는 물론 설겆이, 커피점 내 당구장 청소 등을 도맡아 하는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소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꿈속 여인의 말을 가슴 속에 간직했던 요한은 키에리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명랑회'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이는 '신자로서 적합지 못한 행동이나 말을 삼가고 학교와 신앙생활에 충실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그는 회원들과 함께 매주일 예수회 신부들이 하는 교리수업에 참여하며 방황하는 아이들을 하느님께 인도했다.
순례단은 한 10여분을 걸어 '은총의 성모 성당'으로 향했다. '계단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요한이 신학교 입학 전 힘들게 공부하던 시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던 성당. 매일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의 은총과 자비를 간구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요한은 이 곳에서 자신의 성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20살 되던 해인 1835년 드디어 신학교로 들어간다.
가난하고 그늘진 청소년들의 아버지로 살기 전 이미 스스로 그들과 같은 삶을 뼈저리게 체험하며 눈높이를 맞춘 삶을 살았던 요한의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미래에 돈 보스코 성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순례단은 또 발걸음을 내디뎠다.
[평화신문, 제779호(2004-06-27),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4)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성당 안에 성인의 삶을 영화처럼 꾸며 놓아
(사진설명)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내부 제대 앞 전경. 토리노 대교구장 뽈레또 세베리노(가운데)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위해 돈 보스코가 도안한 성화가 보인다.
돈 보스코 사제생활의 중심지이자 살레시오회가 탄생한 본산지인 발도코를 순례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삶의 매순간마다 길을 보여주고 도움을 주신 성모님을 기념해 1868년 세워진 이 성당 내부는 돈 보스코의 삶 전체를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꾸며놓은 듯하다.
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스코가 매일 미사를 집전하던 제단이 그대로 보존돼 있고, 제단 위에는 유리관에 안치된 성인의 유해가 밀납으로 만들어져 안치돼 있다. 이 제단을 끼고 뒤로 돌면 성인의 유해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이곳은 언제나 무릎꿇고 기도하는 순례객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또 이 제단 바로 옆에는 돈 보스코와 함께 여자 살레시오회를 창설한 성녀 마리아 마자렐로의 유해를 모신 제단이 자리잡고 있고, 맞은편에는 돈 보스코의 애제자였던 성 도미니코 사비오를 유해가 안치된 제단이, 또 그 옆에는 돈 보스코의 영적 지도를 맡았던 성 요한 카파소 신부의 유해를 모신 제단이 있다. 평생 돈 보스코와 함께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동료들이 한자리에 누워 있는 셈이다.
눈길을 돌려 성당 중앙 제대를 바라보자 제대 뒷벽을 장식하고 있는 대형 성화가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화가 토마소 로렌조니가 돈 보스코의 지시대로 그린 것으로, 천사에 둘러싸인 동정 마리아가 한손에는 아기 예수를, 다른 손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잡고 서있고 사도들이 성모를 우러러 보는 형상이다. 돈 보스코는 이 그림 뒷배경으로 자신의 사목무대가 된 발도코와 토리노 시 전경을 그려 넣도록 했다.
발걸음을 옮겨 내려간 성당 지하에는 돈 보스코를 본받아 전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돈 보스코'로 평생을 살다가 하느님 품에 안긴 수많은 성인, 복자,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돈 보스코의 뒤를 이어 살레시오회를 이끌어던 첫 후계자 복자 미켈레 루아의 유해. 대리석으로 조각된 채 안치된 루아의 얼굴에 말듯 비치는 미소는 돈 보스코의 미소를 빼닮은 듯했다.
대성당을 순례를 마치기 전 순례단은 다시 돈 보스코 유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깊은 묵상에 잠긴 순례단의 얼굴에는 성인의 삶을 본받아 주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이 이어지는 듯 평화와 온유 가득한 미소와 평화가 번지는 듯 했다.
[평화신문, 제782호(2004-07-18),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4) 돈 보스코 사제생활 유적지
'오라토리오' 시작한 곳에 '피나르디 경당' 세워져
(사진설명)
1. 돈 보스코 사제생활의 중심지 발도코에 세워진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전경. 성당 앞 광장에 세워진 돈 보스코 성상이 인상적이다.
2. 피나르디 경당 입구. 돈 보스코가 처음으로 오라토리오를 시작한 곳이다.
3. 돈 보스코 성인 유해가 안치된 제대. 성인은 여기서 매일 미사를 집전했다.
4. 밀납으로 제작, 안치된 돈 보스코 성인 유해.
가난하고 힘겹던 키에리의 고학 생활을 마치고 신학교에 입학, 성소를 키운 요한 보스코는 1841년 6월5일 26살 나이에 드디어 사제가 된다.
키에리 신학교에서 가까운 토리노 시내에 있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날 '주어진 시간을 철저히 사용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이라면 인내와 겸손으로 앞장서며, 영적 스승으로 모셨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온유와 영성을 따라 살겠다'는 세가지를 하느님께 서약했다. 이는 그가 9살 되던 해 꿈에 나타나 가난하고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삶을 살 것을 예시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사제가 된 돈 보스코는 청소년을 위한 사목에 앞서 3년간 토리노 시내에 있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다른 새 사제와 함께 사목교육을 받는다. 그는 여기서 첫미사를 봉헌하며 '젊은이들의 수호천사'가 되기로 다시 한번 결심했다.
순례단이 찾은 프란치스코 성당에는 그 옛날 돈 보스코가 첫 미사를 집전했던 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제대 중앙에는 돈 보스코 성인의 환한 미소를 닮은 꽃다발과 함께 성인의 성화가 놓여 있었다.
성당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순례단의 눈길은 중앙 제대 옆 쪽에 있는 제의방에 머물렀다. 이곳은 그간 돈 보스코가 꿈꿔왔던 청소년 사목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 장소이기 때문.
성인이 사제가 된 지 6개월이 지난 1841년 12월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던 그날은 유달리 추운 겨울이었다. 미사를 봉헌하려고 제의방에 들어간 돈 보스코는 따뜻한 곳을 찾아 몰래 숨어든 누더기 차림의 소년 바르톨로메오 가렐리가 제의방지기에게 혼줄이 나며 쫓겨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를 측은히 여긴 돈 보스코는 큰소리를 지르는 제의방지기에게 '이 아이는 제 친구입니다'라고 감싸주며 아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은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인 뒤 '다음 주일엔 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데려 오라'며 되돌려 보냈다. 다음 주 네명이 모였고, 그 다음 주에는 그 수가 배로 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산업화로 인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도시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시내 뒷골목에는 오갈데없이 방황하는 아이들이 즐비했다. 가렐리와 함께 매주 돈 보스코를 찾아온 아이들은 모두 거리에 내려버진 이런 아이들이었다. 그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모아 글과 교리도 가르치고 먹을거리도 장만해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오라토리오'(ortorio, '기도하는 곳'이라는 뜻)다.
순식간에 300여명으로 불어난 아이들과 함께 지낼 공간을 찾을 수 없어 막막하기만 하던 돈 보스코.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려울 때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길로 도움을 베풀어주시던 성모님과 하느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은인의 도움으로 토리노 인근 발도코에 작은 집을 마련한 돈 보스코는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고아, 가난한 청소년,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의 친구이자 아버지로 살아간다.
순례단은 돈 보스코가 혼신을 다해 청소년 사목에 매진했고, 살레시오회의 본산이 됐던 발도코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날 발도코에는 돈 보스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이 웅장한 자태로 세워져 있고, 성당 앞 대광장에는 수단 자락에 매달린 아이들을 따뜻한 미소로 감싸안은 대형 돈 보스코 성상이 자리잡고 있다.
발길을 옮겨 대성당 경내로 들어서자, 앞 마당 한켠에 있는 '피나르디 경당'이 눈길을 끌었다. 돈 보스코가 300명의 아이들을 이끌고 발도코의 한 작은 집에서 오라토리오를 시작한 곳에 세워진 경당이다. 돈 보스코는 6년간 여기서 아이들과 살다 공간이 협소하자 인근 부지를 매입, 자신의 영적 스승의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을 짓는다. 이 성당은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경내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돈 보스코는 이를 전초기지로 삼아 아이들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각종 교육과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학교를 세워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시절 고학하며 구두수선, 재봉, 목공 등 안해본 일이 없었던 그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스승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돈 보스코 직업학교의 모태다. 그는 또 이곳에서 청소년 사목에 헌신할 남녀 젊은이들을 모아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 전세계에 '제2의 돈 보스코'가 버려진 아이들의 어머니 아버지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평화신문, 제782호(2004-07-18), 박주병 기자]
성 요한 보스코 (1815~1888)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위대한 교육자
1815년 8월 15일, 베키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일찌기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위고 가난한 홀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두 형제들과 함께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요한 보스코가 아홉살 때 한 꿈을 꾸게되는데 그 꿈은 그의 일생을 계시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꿈을 계기로 요한 보스코는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남의 집 머슴살이나 상점의 점원 또는 직공 등을 하면서 신부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을 길을 찾는다.
자연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천부적인 명석함을 지닌 그는 신학교를 다 마치고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사제가 된 요한 보스코 신부(일반적으로 ‘돈보스코’라 부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로 인한 많은 혼란들이 있었다.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시골 출신의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의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보스코 신부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들을 돌보아주고 곁에 있어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면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간파한다. 그리하여 보살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소년들을 위하여 ‘오라또리오’라 부르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마련해주고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주는 일을 시작한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소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일을 돕게 한다. 특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년들 가운데서 보다 성숙한 젊은이들이 보스코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보스코 신부는 마음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사랑했다.
초창기 오라또리오의 600명이 넘는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보스코 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스코 신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느껴지는 각별한 사랑의 친밀감으로 인하여 소년들은 보스코 신부를 ‘돈보스코’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삶을 의지하였다.
그래서, 처음 수도회 설립의 뜻을 젊은이들에게 밝혔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수도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파악하지도 않고 단지 돈보스코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칠 수 있다고 하면서 참여하였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1854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탄생되어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는다.
보스코 신부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이어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남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야간학교 등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동시에 2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이고,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효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안에 심은 대영성가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는 확신처럼 돈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보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에 선종한다. 그리고 1934년 부활절,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살레시오회 홈페이지에서]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년)는 이탈리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봉헌한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살레시오 수도회와 수녀회를 설립하여 가난하고 불우한 청소년들의 사회적 재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국민 교육과 기술 교육의 문제가 시급해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구의 도시 집중과 빈민굴의 형성, 비참한 노동 조건 등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면서 가장 보호받지 못하고 내버려진 이들이 바로 청소년들이었습니다.
보스코 성인은 뒷골목에서 방황하는 소년들과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에서 기계 부품으로 전락한 소년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오갈 데 없는 100여 명의 소년들과 함께 근 1년 동안 돈도 거처도 없이 옮겨 다니는 가운데 위기에 처한 소년들과 출감 소년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하층 계층의 자녀들로서 그대로 방치하였다가는 생명의 위험에 처하거나 범죄에 곧바로 노출될 아이들이었습니다.
보스코는 이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하면서 사회적으로 재활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보스코 성인의 교육 사목이 성공하게 된 이유는, 철저한 가족 정신 아래 청소년들을 믿어 주고 희망으로 기다려 주며,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신망애 향주 삼덕을 바탕으로 한 ‘예방 교육법’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의 아버지’ 요한 보스코 성인의 교육 철학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몸소 체험한 그의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비록 가난하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어머니의 남다른 헌신과 사랑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앙은 그를 청소년의 아버지로 자라게 해 주었습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매일미사, 2007년 1월호에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살레시오회(상)
사진말 = 지난해 사제수품식 때 새 사제들이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사진 위). 서울 대림동에 있는 직업학교 목공소에서의 작업 장면.
창설과 역사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위대한 교육자인 요한 보스코.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 안에 뿌리내린 그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를 창설해 세계의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사랑을 심어줬다.
1815년 8월 15일 이탈리아 토리노 베키지역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아홉 살 때 꾼 꿈을 계기로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도시로 나와 상점의 점원이나 공장의 직공 등의 일을 했지만 사제가 되고자하는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남들보다 몇해 늦게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는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가 됐다.
당시 공업화가 한창이던 이탈리아는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이 많았고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를 저질렀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이 때 요한 보스코 신부는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라는 고아를 만나면서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아 신앙의 안내자를 필요로 하던 젊은이들을 주일마다 성당으로 초대해 함께 놀면서 교리를 가르쳤다. 날이 갈수록 이같은 청소년들은 늘어났고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오라토리오'라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일자리를 얻는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줬다. 이때 오라토리오에서 함께 생활하던 600여명의 청소년들 모두 그의 각별한 사랑을 느낄 만큼 보스코 신부는 학생 하나 하나에게 애정을 쏟으며 사랑을 베풀었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고 했던 보스코 신부는 오라토리오의 청소년들이 점차 늘자 이들을 더 잘 보살피기 위해 1864년 수도회를 창설했다. 당시 보살핌을 받고 있던 청소년들 가운데 성숙한 젊은이들이 함께 했던 살레시오회는 수도자가 되기보다 항구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보스코 신부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한평생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등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했던 보스코 신부는 자신의 이상대로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신학교시절부터 존경해왔던 살레시오 성인의 영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라고 정했다.
살레시오 성인은 17세기 제네바의 주교로서 칼빈주의에 맞서 가톨릭의 진리를 선포하며 샤블레라는 지역에서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세상 안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완덕의 길을 제시하며 성화의 길로 이끈 살레시오 성인은 온유와 사랑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은 살레시오회는 창설자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따라 끊임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끌어안으며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실천했다. 1868년 '살레시오 오라토리오 출신자회'를 탄생시킨 보스코 신부는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하고 이어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해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들에게 다 내어준 보스코 신부는 1934년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성인으로 반포됐으며,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실천적인 사랑과 교육으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2천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보스코 신부는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로서 교회 안에서 큰 영성가로 남아있다.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살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학교, 기숙사, 성당, 기술학교 등을 갖춘 살레시오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청소년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또한 살레시오회는 1954년 6·25의 아픔을 안고 살던 한국에 진출해 현재까지 살레시오 중·고등학교를 비롯해 많은 오라토리오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이 땅에서 요한 보스코 신부의 청소년 교육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5일, 이진아 기자]
살레시오회(중)
사진말 = 돈보스꼬 정보센터 전경(사진 위)과 중국 연길 직업학교 졸업식 장면.
청소년 사목을 위해 적극 투신했던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영성은 젊은이들을 교육하면서 채택되고 체험된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을 통해 종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요한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에게 세상 삶을 위한 실제적인 도움을 주면서 그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예방교육'이라는 영성을 통해 교육사에 크나큰 공헌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영성사 안에서 교육 영성이라는 새로운 장을 마련한 요한 보스코 성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참된 인간적, 영적 양성을 교육을 목표로 했다.
이성과 종교, 친절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예방교육은 훌륭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처럼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가족적인 교육환경을 만들고, 형제적 친밀감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이 사랑한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이성으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종교로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며, 친절한 사랑으로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하느님과의 사랑을 매일의 삶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길 당부했다.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통교하는 힘은 이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그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에 앞서 교육자 자신이 스스로의 성격을 다스리도록 권고했다. 보스코 성인 자신도 그의 급한 성격과 과민함을 온유와 사랑으로 다스리며 젊은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한발짝 다가설 수 있었다.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엄청난 인내심을 가졌던 보스코 성인은 자신의 감정을 먼저 다스림으로써 젊은이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꾸짖을 때 화난 목소리나 몸짓을 지녀서도 안되고 마음을 흥분시킨다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지 말라고 당부하며 이것이 바로 참다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예방교육에 있어 이성과 아울러 신앙생활, 즉 종교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악습 예방은 물론이며 올바른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어릴 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화해성사와 성체성사는 젊은이들의 영적생활에 힘을 준다고 확신했다. 이 때문에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매일미사, 성체강복, 성체조배 등 조기 신자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모신심이 특별했던 그가 예방교육의 세 번째 요소로 언급한 것은 친절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냅니다"(1고린 13, 4. 7)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모든 살레시안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들에게 사랑받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예방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며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까지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매일 미사와 성체조배 때 젊은이들 한명 한명을 기억하며 기도했고 또 신심이 약하고 반항적인 젊은이들을 위해 언제나 기도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예방교육과 함께 가족정신을 중요시했다. 그의 교육은 언제나 복음적인 사랑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졌으며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며 이뤄졌다. 이러한 정신은 오라토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요한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과 협조자들 가운데서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오라토리오를 대 가정처럼 운영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그 안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대장장이, 제화공, 목공일 등을 닥치는 대로했던 그는 훗날 가난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깊이 이해하며 도울 수 있게 됐고 직업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기술을 습득시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고 고무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 그는 살레시오회원들 뿐 아니라, 그의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했으며 언제나 몸소 그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였다. 그가 생애를 마친 후에도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동료들이며 분신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에서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점점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2일, 이진아 기자]
살레시오회(하)
사진말 = 돈보스꼬 직업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청소년들(사진 위)과 살레시오 교육회관에서 펼친 여름캠프 장면
사도적 실천
살레시오회는 1954년 한국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수도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당시 광주대교구장 헨리 대주교에 의해 초청된 이후 오늘날까지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예방교육을 전개해 내가고 있다.
초창기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파견돼 살레시안 교육을 펼쳐나갔으며 89년 광주 일곡동으로 이전한 살레시오 중고등학교는 현재까지 2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57년 노기남 대주교의 초청으로 서울 도림동성당의 사목과 운영을 맡았던 살레시오회는 63년 도림동성당 관할지역인 대림동에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기숙사와 신학원을 설립했고 구로공업단지를 관장하는 구로3동에 본당을 신설, 운영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살레시오회는 더 가난하고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1970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6동에 돈보스코 직업학교를 설립, 젊은이들에게 기계기술을 가르치고 공단지역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화, 교육을 실시했다. 아울러 살레시오회는 가톨릭노동청년회나 소년원 사목활동도 함께 펼쳐나갔다. 이같은 교육을 통해 살레시안들은 청소년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책임감 및 자립정신을 갖게하고, 개인적으로는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청소년들의 인성교육을 위한 수련회 활동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살레시오회는 80년 전남 영광군 해변 청소년 캠프장 마련을 비롯,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살레시오 교육회관을 설립했다. 입시위주의 교육현실 속에서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돕고자 시작된 살레시오교육회관의 프로그램들은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교육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 전국적으로 확산, 실시됐다.
서울, 대전, 충남, 강원도 등지에서 교육회관,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각각 지역마다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운용, 청소년들의 필요에 따라 교육회관과 수련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서울 교육회관에서는 인성교육, 리더쉽, 자원봉사학생교육, 가족피정 등을 실시하고 있고, 대전에서는 음악, 역할극, 명상 등 상호학습과 체험학습 위주의 교육을 전개하고 있다.
오라토리오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가족애와 사랑을 실천해온 살레시오회는 결손가정 청소년들을 위한 소규모 복지시설인 '나눔의 집'을 85년부터 시작, 현재 서울과 광주, 대전, 춘천에서 20여개의 소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청소년들의 매스컴 교육에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있는 살레시오회는 94년 돈보스코정보문화센터를 설립해 출판, 영상 및 컴퓨터 등 첨단분야의 청소년교육을 펼치고 있으며 일선 사목자들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청소년 이해를 넓혀주는 '청소년사목전문학교'도 실시하고 있다. 미디어교육부, 문화교육부, 인터넷기획부 등으로 구성된 정보문화센터는 매년 청소년창작영화제를 개최해 청소년들의 방송제작교육을 체험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방학을 이용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상캠프를 전개하고 있다. 67년부터 근로 청소년들의 야학 및 문화강좌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된 교육부는 지역 청소년들과 주민들의 문화활동 및 취미생활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해오고 있다. 현재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문화센터는 컴퓨터 교실을 포함해 영어, 논술, 만화, 연극, 과학교실, 바이올린 등 17개 과목이 개설돼 있으며 성인들을 위해 영어, 일어회화, 핸드니트, 퀼트, 손바닥정원 들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독자적인 서버 구축으로 포털사이트(www.ibosco.net)를 운영하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다양한 청소년교육사업을 온라인으로 연결해 시너지 효과를 얻어내고 있으며 청소년인터넷방송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80년부터 아프리카 등지에 선교사를 파견해온 살레시오회는 96년 중국 연길지역을 한국관구의 선교지로 선정, 2년 뒤 현지에 공업기술고등학교를 세워 중국 청소년들에게 기술교육을 통한 복음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 99년 한국진출 45년만에 정식관구로 승격된 살레시오회는 한국에서는 108명(수련자 포함)의 성직·수도자들이 요한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실현,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으며 전세계에서는 1만7000여명의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9일, 이진아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4. 돈 보스코 (1) 생애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
- 돈 보스코는 거리를 배회하는 많은 청소년들을 위해 기술학교·주일학교·기숙사 등을 세웠고, 아이들을 체벌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했다.
많은 이들이 돈 보스코(Don Bosco·1815~1888) 성인을 두고 ‘사제의 이상형’‘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가톨릭 교육자’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에 청소년 교육 영성을 도입한 대영성가이자, 가톨릭 신앙을 수호한 호교론자였다. 근대 선교 운동의 개척자였으며, 2000여 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책상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그들의 ‘놀이터’에서 일생을 보냈고, 그 한가운데서 일생을 바쳤다.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시의 베끼에서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니’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이 채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들일을 거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이웃집 머슴살이까지 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우울한 성장 과정은 불균형적인 인격 형성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학의 전통적 견해는 돈 보스코에게선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는 늘 쾌활했으며 재치가 넘쳤다. 상상력이 풍부했다. 게임과 오락을 즐긴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수, 배우, 마술사 등으로 불렸으며 장터에서 본 광대나 곡예사를 즐겨 흉내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골목대장이었다. 동시에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에 남달리 충실했으며 기도생활에도 열심이었다.
결국 밝고 맑은 성격의 보스코는 1835년 신학교에 입학, 6년 뒤인 1841년에 사제 서품을 받는다. 서품 전날 밤, 보스코는 9가지 결심을 세우게 된다.
▲ 환자 방문과 같은 중대한 이유 외에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겠다.
▲ 시간을 엄격히 사용하겠다.
▲ 영혼을 구하는 문제라면 언제나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행하며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겠다.
▲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자애와 온유를 본받겠다.
▲ 건강에 해롭지 않는 한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든 항상 만족하겠다.
▲ 포도주를 마실 땐 물을 타서 마실 것이며 건강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만 마시겠다.
▲ 일은 영혼을 해치는 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하루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이상은 자지 않겠다.
▲ 묵상과 영적 독서를 위해 매일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하겠다. 미사 전에는 최소한 15분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이며, 미사가 끝난 뒤에도 15분 이상 감사경을 올리겠다.
▲ 고해성사를 주거나 혹은 영적 지도에 필요한 때 외에는 여성들과 절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사제 보스코는 모든 노력을 다해 자신의 결심을 실천해 갔다. 이후 그는 우연히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젊은이들을 방문하는 경험을 한다. 또 얼마 뒤에는 성당의 제의방에서 한 고아 소년을 만난다. 이로써 그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길로 들어선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소년들이 집도 일거리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돈 보스코는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 소년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구두 제작, 양재, 목공, 인쇄 제본 등의 기술을 소년들에게 가르쳤다.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다. 저술과 출판활동으로 자신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도 땀을 흘렸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돈 보스코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돈 보스코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강요와 체벌을 가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그 사이에는 종교적 유대감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 대응했다.
그는 이어 그의 청소년들 중에서 미래의 협력자들을 찾아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 선교사업을 전개했으며 이 수도회는 1869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고, 1871년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했다.
땀과 기도로 일관한 일생이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2세의 돈 보스꼬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느님 품에 안긴다. 그는 최후의 순간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되었다. 1950년 스페인 정부는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돈 보스코가 남긴 말
▲ 신부는 혼자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않는다. 잘 살면 그의 좋은 표양으로 구원된 영혼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잘 살지 못하거나 악표양을 주게 되면 그 악표양으로 저주받은 영혼들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돈 보스코의 건강을 염려하며 휴양을 권하는 한 부인에게) 저는 제 건강을 돌보기 위해 신부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15일,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