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0일 토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영영 이별할까 두려워
병원에서 수술을 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이 과연 수술이 잘되어 다시 살아나올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연한 두려움이 가득히 살아납니다. 여러 가지 경우가 일어날 것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죽어서 내가 누워있는 모습과 지금 병실에서 수술실로 실려 가는 모습과 같이 클로즈업되기도 합니다. 정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수술이 잘되어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보다는 그냥 그렇게 마감될 것만 생각납니다. 세상의 모든 은원이나 사랑이나 미움이나 마음 상했던 것들을 모두 뒷전으로 날려버리고 그냥 조용히 누워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수술을 받는 사람이 죽음을 각오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수술실로 실려 가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환한 형광등 불빛,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 가족들의 초조한 얼굴, 그런 모든 것들이 순간순간 아득해집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가족들은 초조하고 불안해서 의사에게 자꾸만 묻습니다. “수술하면 지장이 없겠습니까? 지금 같은 상태로 수술을 하지 않으면 더 위험한가요? 잘못 되는 경우는 없는 것인가요?” 인턴들이나 간호사들은 각서나 주의사항을 확인시켜준 확인서를 보호자 연서로 동의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의사는 아주 의례적인 말로 가족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죽을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다고 은근히 겁을 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수술을 받는 장본인보다도 더 걱정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가족들은 영영 이별할까봐 두려워서 말도 못하고 가슴을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란 노래가 해방 되고,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유행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는 그 마음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사랑하는 가족을 이별하는 아픔은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이 맺히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한 아픔(단장 : 斷腸)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흔희작약’(欣喜雀躍 : 너무 좋아서 뛰며 기뻐함)한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모와 남편과 베네딕따(성녀 현경련)가 모두 순교하였으니, 내 마음이 어찌 안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천국을 생각하면 스스로 위안을 받고 이 은혜를 천주께 감사하게 됩니다. 나는 기쁨이 넘쳐흐르고 마음이 흔희작약(欣喜雀躍)합니다.”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103위 성인전)에서-
오늘 복음에서 그렇게 잘 나가시는 주님께서 ‘오랏줄에 묶여 사람들에게 넘겨 죽는다.’는 말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나가시는 그분의 덕을 보려는 제자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얘기는 꺼내기도 싫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하여 질문하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주님의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아픈 마음도 새겨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둔한 제자들의 그 마음 뒤에 숨겨진 아픔이 갑자기 가슴에 밀려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나를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의 그 영성을 도저히 따라갈 수도 없고, 흉내 내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세상의 인연으로 영영 이별하기가 너무도 겁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의 말씀을 같이 묵상하면서 주님을 깊이 가슴에 새깁니다. 내가 비록 나이 들었으나 주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 같으니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정녕 내가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5-9.14-15ㄷ
5 내가 눈을 들어 보니, 손에 측량줄을 쥔 사람이 하나 있었다.
6 내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그가 나에게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하고 대답하였다.
7 그때에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가 앞으로 나가자, 다른 천사가 그에게 마주 나와 8 말하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9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축일9월 30일 성 예로니모 (Jerome)
신분 : 신부, 교회학자, 성서학자
활동 연도 : 347-419년
같은 이름 : 예로니무스, 제로니모, 제롬, 지롤라모, 히에로니모, 히에로니무스
달마티아(Dalmatia)의 아퀼레이아(Aquileia) 근처 스트리도니아(Stridonia)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성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Hieronymus Sophronius, 또는 예로니모)는 12세 때 로마(Roma)에서 당시의 저명한 문법학자인 도나투스(Aelius Donatus)의 문하생으로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지식은 물론 고대 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 업적으로 명성을 날리다가 19세 때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리어(Trier)에 정착하여 정부 관리로 일하였는데, 이때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370년경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와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하에 같은 뜻을 갖고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후 안티오키아(Antiochia)에 머물면서 라오디케아(Laodicea)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주교로부터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그 후 칼치스 사막에서 375-377년까지 은수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으며, 사막의 은수자인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의 "성 바오로(Paulus) 전기"를 썼다. 그런데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Arius) 이단 문제로 대립하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379년 안티오키아로 갔을 때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바울리누스(Pauli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곳의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Origenes)의 성경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3월 9일) 주교와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382년에 로마로 왔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는 그를 비서로 임명하고 신구약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 교회에서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히에로니무스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경본을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그 당시 그는 헬비디우스(Helvidius)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383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는 헬비디우스가 마리아는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성 히에로니무스는 성녀 마르첼라(Marcella, 1월 31일)와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 등이 주축인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그런데 그의 후원자이던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일부 적대자들이 여자들의 집에 들락거리는 성 히에로니무스를 의심하고 비난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성녀 바울라와 그녀의 둘째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 및 일단의 로마 그룹과 합류하여 이집트로 갔다가,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귀족 부인 성녀 바울라가 따라와서 자신의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 뒷받침을 하였다. 그리고 성녀 바울라는 여자 수도원의 원장을, 성 히에로니무스는 남자 수도원의 원장을 맡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를 맡았다.
그 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경 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당시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을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요비아누스(Jovianus)의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논쟁은 자신의 옛 친구이자 오리게네스의 지지자이며 성경 번역에도 공이 있던 루피누스(Rufinus)와의 사건이었다. 본래 오리게네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성 히에로니무스는 콘스탄티아의 에피파니우스와 예루살렘의 요한 사이에 벌어진 오리게네스 신학 논쟁에 휘말렸다. 이때 에피파니우스를 지지함으로써 요한을 지지했던 루피누스와 등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오리게네스주의와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또한 394년부터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와 서신 연락을 하며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을 몰아내는데도 힘을 보탰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경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했다. 406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경에 '불가타'(Vulgata, 대중적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 당시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경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토(Trento)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406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경 주석서를 남겼고, 그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415년에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anos)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이듬해인 416년 펠라기우스주의자인 폭도들이 베들레헴 수도원을 불태우고 그를 해치려 하였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 후 성 히에로니무스는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아마도 라틴 교부들 가운데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였고,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 또는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예로니모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