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 속으로] 44. 경산 발해마을
'해동성국' 자부심 품은 대조영 후예들 살아가는 곳
발해마을 전경
발해(渤海)는 대조영이 698년 대조영이 건국해 926년까지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 존속하며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다. 문왕 때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육로를 뚫어 ‘신라도’가 생겼고 선왕 때
발해의 영토가 가장 넓었다. 발해는 바다 동쪽에서 번성한 나라라 해서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말을 탄 대조영 실루엣‘발해마을“
경산시 남천면 송백2리 산 아래를 지나가다 보면 말을 탄 ‘대조영’ 실루엣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입구에
‘발해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이곳이 대조영의 후손 34가구 80여 명이 모여 사는 영순 태씨 집성촌이다.
대조영 실루엣을 따라 골목 어귀로 들어가면 태극기와 발해를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며 대조영의 흉상과
사당이 있고 마을 곳곳에는 해동성국의 전통 갑옷을 입은 늠름한 장군들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를 만난다.
집집마다 봉황이 그려진 같은 모양의 문패에는 ‘발해 △△세손 태OO’이라는 문패가 달려있다. 발해에 대한
자부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깃발은 대조영의 ‘대(大)’를 더 큰 ‘태(太)’라는 의미로 음양의 기운을 받은 우주 만물을 상징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큰 대(大)와 클 태(太)는 통용하는 자로, 발해 고왕 대조영에 관한 기록을 할 때 태조영이라고 해
태조가 대씨에서 태씨로 사성(賜姓)했다고 한다.
발해마을 드론 촬영.
이 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의 31세손 태순금 일족이 이주해오면서 터를
잡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마을의 역사는 상현사에도 남아있다. 마을의 긴 담벼락을 따라가다 보면 상현사가 나온다. 상현사에는
2012년 10월 국가 표준영정 제86호로도 지정된 대조영의 영정이 봉인돼 있다.
영정은 후손들의 대상으로 ‘발해 고황제 대조영 영정제작을 위한 두상복원’ 작업을 통해 제작된 것이다.
이 영정은 발해마을과 서울대 박물관 등 단 두 곳에만 보관돼 있다.
대조영 흉상
두상복원을 위해 전북 남원과 경북, 서울에 사는 후손 총 78명의 얼굴을 사진 촬영한 결과 대조영은
이마가 좌우로 발달했고 눈썹이 진하고 짧으면서 눈썹 산이 높고, 코는 끝이 크지 않고 길었다.
입술도 두텁고 뺨은 두터워 살이 많은 편이었다.
머리 둘레가 유독 큰 것은 태씨만의 특징이라는 설명이다.
상현사에선 영정을 향해 해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에 대조영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낸다. 전국에서 모여든 태씨 종친들이 금관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데 실제로 후손 중에 제사모가
안 맞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지금의 사당(祠堂)은 추모제(追慕齋)로, 조선조 중종 8년(1513) 무렵에 벼슬을 두루 거친 서암공(西菴公)
태두남(太斗南)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1929년에 세웠으나, 허물어져 1960년에 다시 세웠다. 2000년대에
들어 본래 상현사를 고황전으로 개칭한 후 고왕 대조영 황제를 비롯한 18황제를 배향해 오고 있다.
영순 태씨가 집거(集居)하고 있는 송백2리는, 정착 당시 100여 세대에 가까운 일족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극심한 도시화와 이농현상으로, 34세대(전국 7000세대 추정) 불과한 씨족이 옛 발해국의 옛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후손들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호적제도가 만들어지면서 ‘호적법’이 제정되면서 ‘태’씨로 정했다. 현재
태씨는 전국에 7000여 가구에 이르며 이 중 경산 발해마을 출신이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발해마을 벽화
송백2리 발해마을 벽화
발해마을은 2016년 농촌건강장수마을 육성사업에 선정, 건강관리와 사회활동, 환경정비, 소득 활동 등
4가지 테마로 주민 복지를 돕고 체험형 휴양마을로 청사진을 세워 마을 입구에 대조영 실루엣 조형물을
설치하고 마을 곳곳에 벽화를 그리는 등 스토리를 입혔다.
발해석등
발해역사 안내
이어 경산시는 송백2리 창조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2018년·2019년(2년간) 발해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경관형성을 통해 역사를 계승하고 후손들에게 발해마을 정체성을 전승하기 위해 대조영 장수공원조성,
주차장, 발해역사 배움길 등을 조성했다.
2020년 발해마을에서 대조영 추계대제를 모신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후손들은 발해국 시조 대조영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발해마을에 잠재한 유무형의 역사문화
관광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발전시켜 국내외 관광객에게 발해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체험기회를 제공하는 현창사업을 기획하고 있다.
태영철 송백2리 이장
태영철(66) 송백2리 이장은 “발해마을 입구에 궁성의 남문인 오봉문 설치, 궁성 제2궁전지 동쪽 구역의
정원을 재현해 광장 옆에 연못과 정자 조성, 박물관과 전시실, 활쏘기 체험장, 경구 체험장, 고왕전 조성
등의 구상”을 밝혔다.
김종국 향토사학자(초대 경산시립박물관장, 문학박사·구비문학전공)
◇김종국 초대 경산시립박물관장(향토사학자·문학박사)은 발해국(渤海國)은 서기 698년~926년간 고구려를
계승해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이다. 발해의 건국으로 정식적인 남북국 시대가 열렸는데, 남국은 신라, 북국은
발해를 지칭한다. 이후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서 존속했다. 수도는 발해 성왕
이후로 상경 용천부로 전하고, 초기는 스스로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으로 정했으나 이후 해동성국이나 고려
라고 불리기도 했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탈출했고,
698년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을 기반으로, 대조영이 동모산 부근에서 건국한
자주국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고려라는 국호도 사용했는데, 당시 발해국이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는 국호를
고려라고 했고, 일본도 발해를 고려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926년 발해는 갑작스레 멸망했는데, 그 이유에는 백두산 폭발, 요 태조(거란)의 침입, 지도층의 내분 등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고 있으나 모두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발해국이 멸망한 이후 고왕 대조영의 후손들이 대거 옛 고구려 땅인 고려의 유민으로 정착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지금의 영순 태씨는 대씨(大氏)와 태씨(太氏)로 나뉘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이거 했는데, 이중
영순 태씨는 상주, 문경지역에서 임진왜란 직전에 지금의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전거했다는 유래만 전승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종국 박사는 “1984년 편찬된 ‘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에는 1680년경 김해 김씨가 경산에서 이거 해 오면서
개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발해(渤海) 마을 유래비는 이보다 앞서 1592년에 이미 입향조 태순금 선생이 전거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미루어 두 마을 개척자의 정착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법정 리(里)를
기준으로 보면 김해 김씨는 송백1리, 영순 태씨는 송백2리이다”고 덧붙였다.
김윤섭 기자l 승인 2021.07.26k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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