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조씨(漢陽趙氏)
氏族의 연원
시조는 조지수(趙之壽). 고려때 벼슬하여 조순대부(朝順大夫)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에 이르렀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선계(先系)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시조 조지수(趙之壽)가 중국에서 건너왔는데 그 동래(東來) 연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씨오천사년(趙氏五千史年)’에는 조지수(趙之壽)의 선대(先代)는 중국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로 송(宋)의 태조인 조광윤(趙光胤)이 선조(先祖)이며 그 후손인 조익(趙翼)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이있다.
그러나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서문에 보면, 조(趙)씨는 본래 한양(漢陽)의 명망있는 종족(宗族)으로 8세조에 조지수(趙之壽)가 있어 현족(顯族)이 되었다는 내용의 글이 있다.
아무튼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시조조지수(趙之壽)의 아들인 조휘(趙暉)가 쌍성총관(雙城摠管)이 되고 손자인 동정군 부원수(東征軍 副元帥) 조양기(趙良琪)가 2대 쌍성총관(2代雙城摠管) 이 되였으며 증손자인 용천부원군(龍川府院君) 조림(趙琳) ㆍ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조돈(趙暾)같은 걸출한 후손들을 낳아 명문귀족(名門貴族)의 반열(班列)에 오르게 되었다.
그뒤 조선조(朝鮮朝) 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 ㆍ 조인옥(趙仁沃) 개국 정사 좌명 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 조온(趙溫)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조연(趙涓) 등이 한양(漢陽)에서 명문귀족(名門貴族) 의 기반을 공고히 닦아 많은 명신현유(名臣賢儒) 들을 배출하였다.
본관지 연혁
한양(漢陽)은 서울의 옛 지명이다. 이태조가 왕도(王都)로 삼은 이래 5백여년간 정치 ㆍ 경제 ㆍ 군사 ㆍ 문화 ㆍ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서울>이란 말은 신라 시대 이래 도읍(都邑)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해방 후 우리나라 수도의 고유명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지역적으로 반드시 지금의 서울과 같지는 않지만, 대략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명칭의 변천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B.C. 18년 (백제 온조왕 1) 위례성(慰禮城) (백제 서울), B.C. 5년 (온조왕14)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371년 (근초고왕 26) 이후 한산(漢山) ㆍ 북한산(北漢山) ㆍ 북한성(北漢城) (백제 서울), 475년 (고구려 장수왕 63, 백제 문주왕 1) 남평양(南平壤) (고구려), 554년 (신라 진흥왕 15) 신주(新州), 557년 (진흥왕 18) 북한산주(北漢山州), 568년 (진흥왕 29) 남천주(南川州), 604년 (진평왕 26) 북한산주(北漢山州), 575년 (경덕왕 16) 한주(漢州), 904년 (효공왕 8) 양주(楊州), 1067년 (고려 문종 21) 남경(南京), 1308년 (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 1395년 (이태조 4) 한성부(漢城府), 1910년 경성부(京城府), 1945년 서울시, 1946년 서울특별시.
주요 성씨로는 조(趙)씨 ㆍ 유(劉)씨 ㆍ 문(文)씨 ㆍ 한(韓)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한풍군파(漢豊君派. 諱 琓) ㆍ 도제공파(都制公派. 諱 河) ㆍ 참판공파(參判公派. 諱 興) ㆍ 고사공파(庫使公派. 諱 育) ㆍ 총제공파(摠制公派. 諱 慕) ㆍ 돈녕공파(敦寧公派. 諱 慈) ㆍ 공안공파(恭安公派. 諱 惠) ㆍ 병참공파(兵參公派. 諱 憐) ㆍ 현령공파(縣令公派. 諱 孟發) ㆍ 현감공파(縣監公派. 諱 仲發) 사정공파(司正公派. 諱 瑾) 파서공파(坡西公派. 諱 順生) ㆍ 봉례공파(奉禮公派. 諱 觀生) ㆍ 사직공파(司直公派. 諱 孝生) ㆍ 정랑공파(正郞公派. 諱 德生) ㆍ 호의공파(戶議公派. 諱 旭生) ㆍ 현감공파(縣監公派. 諱 瑞) ㆍ 참의공파(參議公派. 諱 肅生) ㆍ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諱 冲壻)
주요 세거지
‘고려사(高麗史) 의 조휘(趙暉) 열전(列傳)’에 의하면, 한양조씨(漢陽趙氏) 는 시조 조지수(趙之壽) 전(前) 까지는 한양부(漢陽府)에서 대대로 살아오다가 고려말(高麗末) 시조 조지수(趙之壽)와 그 아들 조휘(趙暉)가 동북면(東北面) 용진현(龍津縣)으로 옮겨 그 후손들이 2~3대 그곳에서 살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다시 한양(漢陽)으로 복귀(復歸)하였다. 5세 조인벽(趙仁璧)의 맏아들인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의 자손들 중에서 7세 한풍군(漢豊君) 조완(趙琓)의 후계(後系)는 조완(趙琓)의 큰 아들 조증(趙璔)의 대 이래로. 홍성(洪城)에 11세 조지황(趙之璜) 조지거(趙之琚) ㆍ 이래로 예산(禮山) 당진(唐津) ㆍ 연안(延安) ㆍ 안성(安城) ㆍ 공주(公州) 등지에 세거했던 것을 비롯하여 13세 조석호(趙碩虎)의 대를 전후해서 청양(靑陽)의 정산(定山) ㆍ 음성(陰城) ㆍ 함평(咸平) ㆍ 장성(長城) ㆍ 부여(扶餘) ㆍ 곡성(谷城)의 옥과(玉果) ㆍ 전주(全州) ㆍ 남원(南原) ㆍ 영광(靈光) ㆍ 진도(珍島) 등지에 자리잡았다.
또한 7세 조하(趙河)의 후계(後系)는 일부가 11세 조세의(趙世義)의 대부터 고원(高原)에, 9세 조옥숭(趙玉崇) 이래로 문천(文川) ㆍ 북청(北靑)에 가 살았으며 일부는 10세 조숙(趙琡) 이래로 당진(唐津)의 면천(沔川)에, 17세 조시중(趙時重) 이래로 평창(平昌) ㆍ 단양(丹陽) 등지에 터를 굳혔던 것 같다.
조하(趙河)의 동생인 조흥(趙興)의 후계(後系)는 9세 조철(趙澈)이 연산조 무오년(戊午年)에 의주(義州)로 유배된 이후 그 자손들이 의주(義州) ㆍ 철산(鐵山) 등지에 자리잡았던 것을 비롯해서 11세 조첨(趙詹) ㆍ 조규(趙圭)의 대부터 4~5대에 걸쳐 보령(保寧) ㆍ 공주(公州) ㆍ 충주(忠州) ㆍ 청주(淸州) ㆍ 아산(牙山) ㆍ 이천(利川)의 음죽(陰竹), 서산(瑞山)의 태안(泰安), 부안(扶安), 담양(潭陽) 등지와 용인(龍仁) ㆍ 평택(平澤) ㆍ 안성(安城) 등 경기도 일대에 산거했다.
그리고 7세 조육(趙育)으 후계(後系)는 조육(趙育)의 현손 조희헌(趙希憲)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공주(公州) 평창(平昌)으로 옮겨가 정착한 뒤에 그곳에 세거하였고, 문정공(文正公) 후손들은 용인(龍仁)에 8세 조의손(趙義孫) 이래로 보령(保寧)에 ㆍ 아산(牙山) ㆍ 평창(平昌) 등지에 나뉘어 살았다.
6세 조온(趙溫)의 동생인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의 자손들은 대체로 10세의 대를 전후하여 양주(楊州) ㆍ 고양(高陽) 등 경기지역에서 전국 각지로 산거해갔는데 7세 조모(趙慕)의 후계(後系)가 연천(漣川) ㆍ 영암(靈岩) ㆍ 무안(務安) ㆍ 광주(光州) ㆍ 함평(咸平) ㆍ 장성(長城) ㆍ 나주(羅州) 등지와 함남 이원(利原)에, 조혜(趙惠)의 후계(後系)는 남원(南原) ㆍ 장흥(長興) ㆍ 무안(務安) ㆍ 영광(靈光) ㆍ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ㆍ 영월(寧越) 등지에 정착 ㆍ 세거하였다고 믿어진다.
또한 조연(趙涓)의 넷째 아들 조련(趙憐)의 후계(後系)는 9세 조종(趙琮)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지금의 영풍(榮豊)으로 옮겨간 뒤에 영풍군(榮風郡) 일원과 안동(安東) ㆍ 봉화(奉化) ㆍ 청송(靑松) 등지, 평창(平昌) ㆍ 홍천(洪川) ㆍ 양양(襄陽) ㆍ 공주(公州) ㆍ 여주(驪州) ㆍ 평산(平山) 등지에 살게 되었던 것 같다.
6세 가천재공(嘉川齋公) 조사(趙師)의 자손들은 9세 조문림(趙文琳)의 대부터 15세 조무(趙懋)의 대에 걸쳐 용인(龍仁) ㆍ 제천(堤川) ㆍ 영천(永川) ㆍ 홍천(洪川) ㆍ 단양(丹陽) ㆍ 충주(忠州) ㆍ 해주(海州) ㆍ 횡성(橫城) ㆍ 이천(利川) 등지에 세거의 터를 굳혔고, 부사공(府使公) 조순(趙純)의 자손들은 단양(丹陽)과 제천(堤川)의 청풍(淸風) 등지에 많이 살았다.
한편 6새 조뢰(趙賚)의 자손들은 8세 조전(趙銓) 이래로 금산(錦山)에, 9세 조승손(趙承孫) ㆍ 조백운(趙伯雲) 이래로 상주(尙州)의 함창(咸昌) ㆍ 문경(聞慶) ㆍ 선산(善山) ㆍ 강진(康津) ㆍ 영암(靈岩) ㆍ 나주(羅州)에 살았으며 그밖에 한양(漢陽) ㆍ 청주(淸州) ㆍ 제천(堤川) 등지에도 일부 자손들이 가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참의공(參議公) 조재(趙䝴)의 자손들이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등지에 세거하였으며, 사평공(司評公) 조갱(趙賡)의 자손들은 9세 조맹생(趙孟生)의 대부터 함평(咸平)에, 16세 조국주(趙國柱) 이래로 곡성(谷城) ㆍ 정읍(井邑) ㆍ 장성(長城) ㆍ 진천(鎭川) 등지에 살게 되었다.
6세 판사공(判事公) 조관(趙貫)의 자손들은 11세 조공려(趙公呂)가 김제(金堤)로 가 나뉘어 살았다.
1930년 당시 한양조씨(漢陽趙氏)는 , 충북 청원군(淸原郡) 강내면(江內面), 음성군(陰城郡) 금왕읍(金旺邑), 단양군(丹陽郡) 영춘면(永春面), 충남 당진군(唐津郡) 면천면(沔川面), 전남 무안군(務安郡) 석곡면(石谷面), 경북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예천군(醴泉郡) 감천면(甘泉面),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 옹진군(甕津郡) 용천면(龍泉面), 함남 북청군(北淸郡) 덕성면(德城面), 이원군(利原郡) 동덕면(東德面) ㆍ 서면(西面), 영흥군(永興郡) ㆍ 고원군(高原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씨족史
한양조씨(漢陽趙氏)는 고려 후기에 조순대부(朝順大夫) ㆍ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는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하는 씨족으로 본관(本貫)은 한양(漢陽)이다.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조지수(趙之壽)의 아들대에 이르러 크게 변화를 맞이한다. 몽고족이 고려를 침략하던 고려 고종말에 동북면(東北面) 지역을 점령한 원(元)이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趙暉)를 초대 총관(摠管)으로 임명한 뒤 총관(摠管)직을 세습하면서 이 지역의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조씨가(趙氏家)는 조지수(趙之壽) 이전에는 한양(漢陽)에 세거 하였다. 13세기 초반에 몽고족은 대거 고려를 침략해온 이래 수십년동안 전국토를 유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많은 주현민(州縣民)들이 살던 곳을 떠나 유리하게 되었는데, 한양(漢陽)의 조씨가(趙氏家)도 그런 유리민 중의 한 부류였던 것 같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조휘(趙暉)대에 동북면(東北面)지방으로 이거하여 용진현(龍津縣)에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알려져 있듯이 원(元)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공민왕 5년 고려의 군사정벌에 의해 고려에 수복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근거지로 삼던 지방세력들은 통치권의 변화에 따라 그 향배가 문제시되게 되었다. 대부분의 세3력이 고려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처럼 영토수복전쟁에서 고려에 협력, 공을 세우고 이후 고려에 벼슬하여 가문의 세력을 키우는 세력도 있었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후손들도 대개는 고려의 통치 아래 들어왔는데, 조돈(趙暾)과 그 아들들이 그러하다. 반면 쌍성총관(雙城摠管)직을 세습해온 조소생(趙小生)측은 고려에 불복, 여진족이 사는 지역으로 도망가 계속 원(元)의 세력으로 남고자 하기도 했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인물들은 공민왕 5년 이후 고려에 벼슬하여 고관에까지 오르기도 하였으니 조돈(趙暾)과 그의 아들인 조인벽(趙仁璧)형제들이 그러하다. 한편 조인벽(趙仁璧)은 역시 동북면(東北面)에 세력기반을 두고 있던 이자춘(李子春)의 딸과 결혼하여 이성계가(李成桂家)와 혼인관계로 맺어지고 있었는데, 고려말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고 이어 조선을 세우는데 적극적으로 참여, 조선개국 이후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조인벽(趙仁璧)의 동생인 조인옥(趙仁沃), 아들인 조온(趙溫)은 개국공신 52명 중에 포함되었고, 이어 조온(趙溫)은 정종 태종정권에도 공을 세워 정사(定社). 좌명(佐命)공신이 되었으며. 조연(趙涓)은 좌명공신으로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조선초에 가장 번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양조씨(漢陽趙氏)는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벌족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중종조의 인물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배출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한양조씨(漢陽趙氏)는 2대 쌍성총관(雙城摠管)이었던 조양기(趙良琪)에 이르러 조림(趙琳), 조돈(趙暾)의 두 아들이 있었다. 총관(摠管)직을 세습한 조림(趙琳)의 후손은 조소생(趙小生)에 이르렀으나 그 이후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돈(趙暾)의 후손들로 어어져오고 있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분파는 조돈(趙暾)의 네 아들 인벽(仁璧), 인경(仁瓊), 인규(仁珪), 인옥(仁沃)의 후손에서 자손이 끊어진 조인경(趙仁瓊)을 제외하고 각각 후손이 양렬공파(襄烈公派), 검한성공파(檢漢城公派), 충정공파(忠靖公派)로 나누어진다.
양렬공파(襄烈公派)는 양렬공(襄烈公)의 큰 아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의 후손이 아들인 조완(趙琓), 조하(趙河), 조흥(趙興), 조육(趙育)을 파조(派祖)로 하여 각각 한풍군파(漢豊君派), 도제공파(都制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고사공파(庫使公派)로 나누어지고, 둘째 아들인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의 아들인 조모(趙慕), 조자(趙慈), 조혜(趙惠), 조련(趙憐)을 파조(派祖)로 하여 각가 총제공파(摠制公派), 돈녕공파(敦寧公派), 공안공파(恭安公派), 병참공파(兵參公派)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조후(趙侯)의 후손은 안정공파(安靖公派)로, 절손이되고 넷째 아들인 가천재공(嘉川齋公) 조사(趙師)의 후손은 아들인 조맹발(趙孟發), 조중발(趙仲發)을 파조(派朝)로 하여 각각 현령공파(縣令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진다.
검한성공파(檢漢城公派)는 자손이 사정공(司正公) 조근(趙瑾) 단파(單派)로 이어진다.
충정공파(忠靖公派)는 충정공(忠靖公)의 네 아들 조뢰(趙賚), 조재(趙賫), 조갱(趙賡), 조관(趙貫)을 파조(派祖)로 하여 각각 절효공파(節孝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사평공파(司評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로 나누어진다. 절효공(節孝公)의 후손은 아들대에 이르러 다시 조순생(趙順生)의 후손인 파서공파(坡西公派), 조관생(趙觀生)의 후손인 봉례공파(奉禮公派), 조효생(趙孝生)의 후손인 사직공파(司直公派), 조덕생(趙德生)의 후손인 정랑공파(正郞公派)로 나누어지고, 참의공파(參議公派)는 호의공(戶議公) 조욱생(趙旭生) 단파(單派)로 이어지고 사평공파(司評公派)는 현감공(縣監公) 조서(趙瑞) 단파(單派)로 이어지고 판사공(判事公)의 후손 역시 그 아들인 조숙생(趙肅生), 조충서(趙沖諝)를 파조(派祖)로 하여 참의공파(參議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나누어진다.
조휘(趙暉)는 한양부(漢陽府)에서 살다가 동북면(東北面)의 용진현(龍津縣)에 옮겨 살았다.
한양의 호족(호족)으로 그 손녀(李椿 度祖妃)가 고려의 왕족(高麗王族)이라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총서(總書)에 씌여진 것으로 보아 조씨가문(趙氏家門)은 지배계층인 귀족(貴族) 신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1231년 이래 몽고병이 고려 전국토를 침략하던 고종조에 중앙정부에서는 군현민(郡縣民)을 몽고병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쉽고, 또 방어에 유리한 산성(山城)이나, 섬에 옮기게 하였다.
동북면(東北面)의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 등 15주인(十五州人)들도 저도(猪島)에 피난하였는데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가 섬은크고 사람은 적어 섬을 지키기 어렵다고 15주인(十五州人)을 모두 죽도(竹島)에 옮기게 하였다. 죽도(竹島)는 섬이 좁을뿐더러 우물도 없고 식량이 모자라서 사람들이 모두 죽도(竹島)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병마사(兵馬使)가 강제로 섬에 몰아넣으려고 하니 도망(逃亡)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 조휘(趙暉)와 탁정(卓靑)이 중심이되어 백성들의 뜻에따라 병마사(兵馬使)를 제거하고 고성(高城)을 정벌하고 화주(和州)이북을 평정하였다. 몽고는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고 조휘(趙暉)를 총관(摠管), 탁청(卓靑)을 천호(千戶)에 임명,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조휘(趙暉)의 총관(摠管)직은 그의 자손인 조양기(趙良琪)-조림(趙琳)-조소생(趙小生)의 4대에 걸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고려에 탈환될 때까지 세습되었다. 원세조(元世祖)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일본(日本)만이 복종하지 않으므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7年(1281年.辛巳) 원의 도원수(都元帥) 흔독(忻篤)와 홍타구(洪茶丘)에 명하여 몽고. 한(漢). 고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총관(雙城摠管) 조양기(趙良琪)는 동정군(東征軍)의 부원수(副元帥)로서 일본정벌(日本征伐)에 출정(出征)하여 원의 원수 흔독(忻篤)와 홍타구(洪茶丘)는 패전하였어도 조총관(趙摠管)과 고려의 원수 김방경(金方慶)은 적을 이기고 군사를 보전하여 돌아왔으므로 원세조(元世祖)가 크게 기특히 여겨 옥대(玉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였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존속한 99년 동안 총관가문(摠管家門)에서는 고려에 벼슬하는 자도 있었는데, 3代총관(摠管)이었던 조림(趙琳)과 그의 동생 조돈(趙暾)의 경우가 그러하다.
조림(趙琳)은 총관(摠管)직을 세습하기 전에 충숙왕에게 벼슬하였다. 원도(元都)에서 충숙왕을 5년간 시종하였고, 그 공으로 삼한대호군(三韓大護軍)이 되었다. 뒤에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에 올랐다. 그뒤 가업(家業)을 이어 쌍성총관(雙城摠管)이 되었다.
조돈(趙暾) 역시 충숙왕조에 벼슬하였다. 이때 고려의 유민들이 조세와 요역을 피해 여진족이 사는 지역인 홍긍(洪肯)(홍원(洪原)), 삼철(三撤)(북청(北靑)), 독노올(禿魯兀)(단천(端川)), 해양(海陽)(길주(吉州))등지로 도망가고 있었는데, 조돈(趙暾)은 충숙왕의 명을 받아 길주(吉州)지역에 가서 고려유민을 추쇄해오고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에 임명되었다. 충숙왕이 죽은 뒤 용진(龍津)에 들어가 살았다.
조돈(趙暾)은 공민왕 5년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수복 때 아들 인벽(仁璧) 등과 함께 고려에 협조, 민심수습을 돕고 그 공으로 예빈경(禮賓卿)이 되었다. 그뒤 판사농사사(判司農寺事), 공부상서(工部尙書), 예의판서(禮儀判書),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를 지냈다. 홍건적 격퇴 1등 공신이 되고 우왕 1년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은 쌍성(雙城)수복에 공을 세워 호군(護軍)이 되고, 1363년 김용(金鏞) 토벌(討伐)에 공을 세워 2등공신(等功臣)이 되었다. 함주(咸州) ㆍ 북청(北靑)에서 왜구(倭寇)를 격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우왕 2년 판밀직(判密直)으로서 화포(火砲)를 사용하여 수군(水軍)을 훈련시키고, 1383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체찰사(東北面體察使)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에 가담, 그 공신이 되고,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누이인 정화공주(貞和公主)를 아내로 맞았는데, 뒤에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인옥(趙仁沃)은 공민왕 22년 음보로 산원(散員)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의 공신이되고 이후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승진, 조준(趙浚)과 함께 고려유신의 경제적 몰락을 가져온 전제(田制)개혁론의 대표자였다. 정몽주 ㆍ 이색과 같은 고려유신의 거두가 모두 제거된 다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오르고, 조선개국 1등공신으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태조 4년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지고, 죽은 뒤 태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은 1392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等)이 되고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수주(隋州)에 쳐들어온 왜구(倭寇)를 격파했고, 제1차 왕자(王子)의 난에 친군위도진무(親軍衛都鎭撫)로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等)이 되었다. 중추원사(中樞院使), 의흥삼군부좌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事),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역임하고 제2차 왕자(王子)의 난 때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방간(芳幹) 등의 군사(軍士)를 평정,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다음 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等)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청렴 ㆍ 검소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은 우왕 13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공양왕 4년 공조총랑(工曹摠郞)을 거쳐, 이해 조선이 개국되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 별운검(別雲劍)이 되어 왕을 호위했다. 제2차 왕자(王子)의 난에 방원(方遠)을 도운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等)이 되고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다.
우군총제(右軍摠制), 도총제(都摠制)를 거쳐 1409년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按撫察里使)로 나가 다음해 모련위(毛憐衛)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적장(敵將) 파아손(巴兒孫)을 유인하여 죽인 후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적의 근거지까지 쳐부수고 돌아왔다. 그후 공조판서(工曹判書),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 세종 4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426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풍군(漢豊君) 조완(趙琓)은 양절공 조온(趙溫)의 아들로 1420년 판홍주목사(判洪州牧使)우군총제(右軍摠制)를 거처 1430년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고 그 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였다가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올랐다
한양조씨(漢陽趙氏) 후손들은 수양대군의 집권과정에서 많은 화를 입었다.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낸 조관(趙貫)은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일당으로 몰려 남해에 귀양갔다가 사면되였다.
세종 때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오른 조순생(趙順生)은 안평대군(安平大君), 황보인(皇甫仁)과 친교가 깊었는데 계유정난 때 고성에 유배, 사사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지주(趙之周)는 세조의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첨지중추(僉知中樞), 형조참의(刑曹參議),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조원기(趙元紀)는 연산군 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으로 재직 중 사초(史草)를 보고자 하는 연산군(燕山君)에 반대, 파직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사성(司成)이 되고, 뒤에 경원부사(慶源府使)로 나가 민심(民心)을 안정시켰다. 그 공으로 대사간(大司諫)에 승진,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재직중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형조판서(刑曹判書),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조문절공유고(趙文節公遺稿)’가 남아 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는 14세 때 어천도찰방(魚川都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희천(熙川)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修學), 이때부터 성리학(性理學)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중종 10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 ㆍ 감찰(監察)을 역임하며 왕의 신임을 얻고, 입시(入侍)할 때마다 유교(儒敎)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을 것을 역설했다. 1517년 교리(校理)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 ㆍ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 향촌(鄕村)의 질서를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道)에 실시케 했다. 다음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奏請),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없애게 했다.
1519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했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사림파(士林派)의 신진인사를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勳舊派)를 외직(外職)으로 몰아내어 훈구파(勳舊派)의 반발을 샀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는 유교적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훈구파(勳舊派)의 남곤(南袞) ㆍ 심정(沈貞) 등이 중심이 되어 조광조(趙光祖)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케한다고 공격하는 한편, 궁중 안에서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로 왕에게 올려 충격을 주었다. 이에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적(道學的) 언행(言行)에 구속감과 염증을 느낀 왕도 사림파(士林派)의 체포에 동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조광조는 능주(陵州)에 귀양갔다가 곧 사약을 받고 죽었고, 많은 사림파(士林派) 인사들이 유배갔다. 이 기묘사화 이후 사림(士林)의 등용문이었던 현량과(賢良科)가 폐지되었다.
뒤에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유고로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간 조경(趙絅)은 인조 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인조 25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고,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이도(吏道)를 쇄신(刷新), 관리등용(官吏登用)의 공정을 기해 명망을 얻었다. 1648년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효종초에 노인직(老人職)으로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조선 후기의 인물로 조위명(趙威明)은 도승지(都承旨) ㆍ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는데, 예론(禮論)에 밝고 글씨, 문장에 뛰어났다. 소론계 정치인이었던 조덕린(趙德隣)은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서원남설(書院濫說)을 반대하다 노론의 탄핵으로 귀양길에 죽었다.
역대 주요 인물
▲고려조
조지수(趙之壽) (僉議中書事)
조휘(趙暉) 쌍성총관(雙城摠管))
조양기(趙良琪) 쌍성총관(雙城摠管) ㆍ 동정 부원수(東征副元帥))
조림(趙琳) (쌍성총관(雙城摠管))
조돈(趙暾) (자(字) : 구원(九元) ㆍ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ㆍ 예의판서(禮儀判書))
조인벽(趙仁璧) (호(號) : 우계(愚溪) ㆍ 시호(諡號) : 양렬(襄烈) ㆍ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ㆍ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선조
조온(趙溫) (시호(諡號) : 양절(良節) ㆍ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ㆍ 좌찬성(左贊成)
조연(趙涓) (자(字) : 여정(汝靜) ㆍ 시호(諡號) : 양경(良敬) ㆍ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ㆍ 우의정(右議政))
조사(趙師) (호(號) : 가천재(嘉川齋) ㆍ 중추부사(中樞府事))
조인옥(趙仁沃) (자(字) : 군계(君啓) ㆍ 시호(諡號) : 충정(忠靖) ㆍ 한산군(漢山君) ㆍ 이조판서(吏曹判書))
조순(趙純) (부사(府使))
조뢰(趙賚) 호(號) : 백탄(栢灘) ㆍ 시호(諡號) : 절효(節孝) ㆍ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조재(趙賫) 참의(參議))
조관(趙貫)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조완(趙琓) 호(號) : 망호정(望湖亭) ㆍ 한풍군(漢豊君) ㆍ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증(趙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윤선(趙允瑄) (부사(府使))
조달손(趙達孫) (자(字) : 통경(通卿) ㆍ 대호군(大護軍))
조흥인(趙興仁) (자(字) : 중원(仲元) ㆍ 대호군(大護軍))
조극선(趙克善) (호(號) : (冶谷文穆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조종우(趙鍾禹) (자(字) : 중규(仲圭) . 高原郡守))
조억수(趙億壽) (집의(執義))
조방언(趙邦彦) (자(字) : 윤지(贇之) ㆍ 예조참판(禮曹參判))
조위한(趙緯韓) (자(字) : 지세(持世) ㆍ 호(號) : 현곡(玄谷) ㆍ 예판(禮判))
조찬한(趙纘韓) (자(字) : 선술(善述) ㆍ 호(號) : 현주(玄洲) ㆍ 좌승지(左承旨))
조찬원(趙燦元) (자(字) : 영도(英都) ㆍ 도정(都正))
조락원(趙洛元) (자(字) : 정화(正化) ㆍ 도정(都正))
조병석(趙炳錫) (자(字) : 대윤(大允) ㆍ 오위장(五衛將))
조응엽(趙膺燁) (자(字) : 경세(景勢) ㆍ 도정(都正))
조천문(趙天文) (자(字) : 문옥(文玉) ㆍ 회녕부사(會寧府使))
조종규(趙鍾圭) (자(字) : 화보(和寶) ㆍ 도정(都正))
조국로(趙國老) (자(字) : 대수(大叟) ㆍ 참의(參議))조경화(趙景和) (자(字) : 문삼(文三) 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흥(趙興) (淸風府使)
조계종(趙繼宗) (자(字) : 조경(朝卿) ㆍ 전라부사(全羅府使))
조진(趙珍) (목사(牧使)) 조수무(趙秀武) (부사(府使))
조택(趙澤) (자(字) : 중청(仲淸) ㆍ 호(號) : 죽하(竹下) ㆍ 사간(司諫)) 조승현(趙升鉉) (자(字) : 백옥(伯玉) ㆍ 부사(府使))
조유춘(趙囿春) (자(字) : 여인(汝仁) ㆍ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응갹(趙應醵) (자(字) : 계옥(季玉) ㆍ 방어사(防禦使))조광현(趙光鉉) (자(字) : 회백(晦伯) ㆍ 부사(府使))
조원범(趙元範) (자(字) : 백식(佰式) ㆍ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종철(趙鍾哲) (자(字) : 치명(稚明) ㆍ 절제사(節制使))
조광조(趙光祖) (자(字) : 효직(孝直) ㆍ 호(號) : 정암(靜庵) ㆍ 시호(諡號) : 문정(文正) ㆍ 대사헌(大司憲))
조숭조(趙崇祖) (자(字) : 경숙(敬叔) ㆍ 원주목사(原州牧使))
조원기(趙元紀) (자(字) : 이지(理之) ㆍ 호(號) : 돈후재(敦厚齋) ㆍ 시호(諡號) : 문절(文節) ㆍ 좌참찬(左參贊))
조형하(趙亨河) (자(字) : 경집(景輯) ㆍ 도정(都正))
조원붕(趙遠朋) (자(字) : 악부(樂夫) ㆍ 부사(府使))
조연수(趙嗹叟) (자(字) : 상보(尙甫) ㆍ 호(號) : 육우당(六友堂) ㆍ 부사(府使))
조형복(趙亨復) (자(字) : 치양(穉陽) ㆍ 호(號) : 류서(柳西) ㆍ 이참(吏參))
조성교(趙性敎) (자(字) : 성유(聖惟) ㆍ 호(號) : 소정(韶亭) ㆍ 시호(諡號) : 문헌(文憲) ㆍ 예판(禮判))
조종순(趙鍾純) (자(字) : 주현(周顯) ㆍ 승지(承旨))
조의징(趙儀徵) (자(字) : 상보(祥甫) ㆍ 승지(承旨))
조윤업(趙胤業) (자(字) : 여환(汝環) ㆍ 부총관(副摠管))
조윤종(趙胤宗) (자(字) : 광숙(光叔) ㆍ 첨사(僉使))
조시균(趙時均) (자(字) : 사옹(嗣翁) ㆍ 부총관(副摠管))
조창병(趙昌秉) (자(字) : 창중(昌仲) ㆍ 도정(都正))
조수권(趙守權) (자(字) : 내성(乃成) ㆍ 호(號) : 난와(蘭窩) ㆍ 부총관(副摠管))조정무(趙廷鵡) (자(字) : 필경(弼卿) ㆍ 한성좌윤(漢城左尹))
조종철(趙鍾喆) (자(字) : 찬문(贊文) ㆍ 도정(都正))조혜(趙惠) (자(字) : 제공(濟公) ㆍ 호(號) : 시재(施齋) ㆍ 시호(諡號) : 공안(恭安) ㆍ 판중추(判中樞))
조언호(趙彦豪) (자(字) : 화언(和彦) ㆍ 병사(兵使))
조숭진(趙崇進) (자(字) : 진수(進叟) ㆍ 이참(吏參))
조몽룡(趙夢龍) (자(字) : 종운(從雲) ㆍ 대호군(大護軍))
조련(趙憐) (병참(兵參))
조공근(趙公瑾) (자(字) : 회보(懷甫) ㆍ 호(號) : 소옹(梳翁) ㆍ 한흥군(漢興君) ㆍ 광주목사(廣州牧使))
조서(趙緖) (자(字) : 망중(望中) ㆍ 호참(戶參))
조경(趙絅) (자(字) : 일장(日章) ㆍ 호(號) : 주봉(柱峰) ㆍ 시호(諡號) : 문간(文簡) ㆍ 이판(吏判))
조석회(趙錫晦) (자(字) : 이함(而함) ㆍ 호(號) : 일봉(一峰) ㆍ 승지(承旨))
조덕(趙德) (자(字) : 택인(宅仁) ㆍ 호(號) : 옥천(玉川) ㆍ 승지(承旨))
조제화(趙濟華) (자(字) : 계보(季寶) ㆍ 호(號) : 청하(靑下) ㆍ 이참(吏參))
조수의(趙守誼) (자(字) : 정숙(正叔) ㆍ 호(號) : 옥한(玉閒) ㆍ 목사(牧使)) 조숙(趙숙) (자(字) : 이온(李溫) ㆍ 대사간(大司諫))
조석린(趙錫麟) (자(字) : 국서(國瑞) ㆍ 도정(都正))
조석귀(趙錫龜) (자(字) : 국보(國寶) ㆍ 호(號) : 전화(銓華) ㆍ 우승지(右承旨))
조위명(趙威明) (자(字) : 회여(晦汝) ㆍ 호(號) : 송천(松泉) ㆍ 예참(禮參))
조종운(趙鍾雲) (자(字) : 숙문(叔聞) ㆍ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종순(趙鍾淳) (자(字) : 영숙(永叔) ㆍ 도정(都正))조국필(趙國弼) (자(字) : 사익(士翼) ㆍ 참판(參判))
조석인(趙錫仁) (자(字) : 여량(汝量) ㆍ 승지(承旨))조규승(趙奎昇) (자(字) : 윤초(允初) ㆍ 우승지(右承旨))
조종환(趙鍾桓) (자(字) : 응오(應五) ㆍ 제주목사(濟州牧使))
조흥교(趙興敎) (자(字) : 익지(翼之) ㆍ 호(號) : 금석(錦石) ㆍ 대사간(大司諫)) 조민(趙岷) (자(字) : 자진(子鎭) ㆍ 집의(執義))
조공(趙珙) (자(字) : 정서(廷瑞) ㆍ 사성(司成))
조세주(趙世舟) (자(字) : 성보(聖輔) ㆍ 영월부사(寧越府使))
조숭(趙崇) (자(字) : 자정(子靜) ㆍ 호(號) : 회곡(晦谷) ㆍ 청송부사(靑松府使))
조문숙(趙文琡) (자(字) : 백옥(伯玉) ㆍ 집의(執義))
조순생(趙順生) (호(號) : 파서(坡西) ㆍ 이의(吏議))
조수(趙璲) (대호군(大護軍))
조택(趙澤) (자(字) : 자장(子長) ㆍ 장연부사(長淵府使))
조윤한(趙胤漢) (자(字) : 현초(顯初) ㆍ 부승지(副承旨))
조욱생(趙旭生) (호의(戶議)) 조여색(趙如穡) (참의(參議))
조호(趙瑚) (자(字) : 여기(汝器) ㆍ 한성판윤(漢城判尹))
조숙생(趙肅生) (참의(參議))
등과인물(登科人物)
조선조
문과(文科)
조충손(趙衷孫) (이정(吏正)) 조민(趙岷) (집의(執義))
조원상(趙元常) (주서(注書)) 조문숙(趙文琡) (집의(執義))
조광림(趙廣臨) (주서(注書)) 조원기(趙元紀) (참찬(參贊))조방언(趙邦彦) (예참(禮參)) 조방정(趙邦楨) (판결(判決))
조윤(趙贇) (군수(郡守)) 조광조(趙光祖) (대사헌(大司憲))
조우(趙佑) (교리(校理)) 조징(趙澄) (통정(通政))
조박(趙璞) (홍정(弘正)) 조덕원(趙德源) (전한(典翰))
조위(趙瑋) (부학(副學)) 조유한(趙維韓) (지중(知中))조응문(趙應文) (장령(掌令)) 조진남(趙震男) (찰방(察訪))
조찬한(趙纘韓) (승지(承旨)) 조위한(趙緯韓) (지중(知中))
조원범(趙元範) (첨정(僉正)) 조유선(趙裕善) (수찬(修撰))
조윤(趙贇) (전한(典翰)) 조경(趙絅) (이판(吏判))
조중려(趙重呂) (수찬(修撰)) 조사기(趙嗣基) (참의(參議))
조우신(趙又新) (학정(學正)) 조비(趙備) (수찬(修撰))
조위봉(趙威鳳) (응교(應敎)) 조위명(趙威明) (참판(參判))
조종저(趙宗著) (부사(府使)) 조수(趙修) (현감(縣監))
조의징(趙儀徵) (승지(承旨)) 조덕순(趙德純) (지평(持平))
조구원(趙九畹) (부사(府使)) 조덕린(趙德隣) (승지(承旨))
조봉휘(趙鳳徽) (현감(縣監)) 조이진(趙以進) (병좌(兵佐))
조진세(趙鎭世) (사간(司諫)) 조처로(趙處魯) (예정(禮正))
조위수(趙渭叟) (참판(參判)) 조수인(趙秀仁) (교리(校理)) 조태명(趙台命) (승지(承旨)) 조숙(趙숙) (승지(承旨))
조무범(趙武範) 조진도(趙進道) 조정상(趙禎相)
조수검(趙守儉) (병정(兵正)) 조보양(趙普陽)
조석회(趙錫晦) 조사충(趙思忠) (목사(牧使))
조상기(趙象基) (교리(校理)) 조규승(趙奎昇)
조성교(趙性敎) (이판(吏判)) 조형복(趙亨復) (참판(參判))
조형면(趙亨勉) (미부직(未赴職)) 조현휴(趙顯休) (승지(承旨))
조명교(趙命敎) (대성(大成)) 조항교(趙恒敎) (승지(承旨))
조종필(趙鐘弼) (판서(判書)) 조종익(趙鐘翼) (교리(校理))
조종순(趙鍾純) (승지(承旨)) 조종운(趙鍾雲) (승지(承旨))
조종우(趙鐘宇) (승지(承旨)) 조석귀(趙錫龜) (승지(承旨))
조제화(趙濟華) (참판(參判)) 조언국(趙彦國) (정자(正字))
조용래(趙龍來) (지평(持平)) 조종린(趙鍾麟) (가주(假注))
조한원(趙漢元) (승지(承旨)) 조윤보(趙胤輔) (직장(直長))
조원승(趙元升) (감찰(監察)) 조숭진(趙崇進) (이참(吏參))
조사적(趙嗣迪) (공조(工曹)) 조중철(趙重哲) (정언(正言))
조이로(趙이珯) (부학(副學)) 조관언(趙光彦) (응교(應敎))
조계윤(趙季胤) (수찬(修撰)) 조 금(趙 嶔) (부사(府使))
조 명(趙 銘) (병조정랑(兵曹正郞)) 조 일(趙 馹) (선혜랑(宣惠郞))
조진항(趙鎭恒) (이정(履正)) 조 림(趙 琳) (부사(府使))
조윤한(趙胤漢) (부승지(副承旨)) 조창교(趙昌敎) (병정(兵正))
조구원(趙九원) (정언(정언))
▲조선조 급제자 정록
충손(衷孫) (세종(世宗) 24년ㆍ 친시(親試) ㆍ 병과(丙科)) 민(珉) (세조(世祖) 11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정과(丁科)) 원상(元常) (세조(世祖) 11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정과(丁科)) 광림(廣臨) (세조(世祖) 23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원기(元紀) (연산(燕山) 1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방언(邦彦) (중종(中宗) 1년 ㆍ 별시(別試) ㆍ 정과(丁科)) 방정(邦楨) (중종(中宗) 1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공(珙) (중종(中宗) 9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광조(光祖) (중종(中宗) 10년 ㆍ 별시(別試) ㆍ 을과(乙科)) 우(佑) (중종(中宗) 14년 ㆍ 현량과(賢良科) ㆍ 을과(乙科)) 윤보(胤輔) (중종(中宗) 23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징(澄) (중종(中宗) 30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박(璞) (명종(明宗) 1년 ㆍ 중시(重試) ㆍ 을과(乙科)) 덕원(德源) (명종(明宗) 8년 ㆍ 별시(別試) ㆍ 을과(乙科)) 위(瑋) (명종(明宗) 13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징(澄) (명종(明宗) 21년 ㆍ 중시(重試) ㆍ 을과(乙科)) 유한(維韓) (선조(宣祖) 22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응문(應文) (선조(宣祖) 27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진남(震男) (선조(宣祖) 34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찬한(纘韓) (선조(宣祖) 39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위한(緯韓) (광해(光海) 1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갑과(甲科)) 원범(元範) (광해(光海) 8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유선(裕善) (광해(光海) 8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윤(贇) (인조(仁祖) 2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갑과(甲科)) 경(絅) (인조(仁祖) 4년 ㆍ 정시(庭試) ㆍ 갑과(甲科)) 중려(重呂) (인조(仁祖) 11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사기(嗣基) (인조(仁祖) 26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을과(乙科)) 우신(又新) (인조(仁祖) 26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비(備) (효종(孝宗) 2년 ㆍ 알성시(謁聖試) ㆍ 병과(丙科)) 위봉(威鳳) (현종(顯宗) 1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위명(威明) (현종(顯宗) 9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종저(宗著) (현종(顯宗) 13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수(修) (숙종(肅宗) 4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의징(儀徵) (숙종(肅宗) 8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갑과(甲科)) 덕순(德純) (숙종(肅宗) 16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구수(九修) (숙종(肅宗) 17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덕린(德璘) (숙종(肅宗) 17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봉징(鳳徵) (숙종(肅宗) 19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이진(以進) (숙종(肅宗) 23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진세(鎭世) (영조(英祖) 1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태명(台命) (영조(英祖) 20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숙(肅) (영조(英祖) 22년 ㆍ 정시(庭試) 을과(乙科)) 무범(武範) (영조(英祖) 30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진도(進道) (영조(英祖) 35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정상(貞相) (영조(英祖) 39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수검(守儉) (영조(英祖)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보양(普陽) (영조(英祖) 49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석회(錫晦) (영조(英祖) 49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사충(思忠) (영조(英祖) 49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상기(象基) (정조(正祖) 19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규승(奎昇) (순조(純祖) 4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수인(守仁) (순조(純祖) 9년 ㆍ 별시(別試) ㆍ 을과(乙科)) 석귀(錫龜)(순조(純祖) 14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현휴(顯休) (순조(純祖) 17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언국(彦國) (순조(純祖) 19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을과(乙科)) 용래(龍來) (순조(純祖) 25년 ㆍ 식년시(式年試) ㆍ 병과(丙科)) 창교(昌敎) (순조(純祖) 27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형복(亨復) (헌종(憲宗) 1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갑과(甲科)) 형면(亨勉) (헌종(憲宗) 14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성교(性敎) (철종(哲宗) 10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항교(恒敎) (고종(高宗) 1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재두(在斗) (고종(高宗) 5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제화(濟華) (고종(高宗) 7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종우(鍾宇) (고종(高宗) ㆍ 식년시(式年試) ㆍ 갑과(甲科)) 종필(鍾弼) (고종(高宗) 11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종운(鍾雲) (고종(高宗) 12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명교(命敎) (고종(高宗) 13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종린(鍾麟) (高宗 16년 ㆍ 정시(庭試) ㆍ 병과(丙科)) 종순(鍾純) (고종(高宗) 22년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한원(漢元) (고종(高宗) ㆍ 증광시(增廣試) ㆍ 병과(丙科)) 종귀(鍾龜) (고종(高宗) 29년 ㆍ 별시(別試) ㆍ 병과(丙科))
[벌열(閥閱)]
상신(相臣) : 조연(趙涓) (세종조 ㆍ 우의정(右議政))
공신(功臣)
조인옥(趙仁沃) (태조조 ㆍ 개국(開國)1등공신(等功臣)) 조온(趙溫) (태조조 ㆍ 개국(開國)2등공신(等功臣), 정종조 ㆍ 1차왕자란(次王子亂)2등공신(等功臣), 태종조 ㆍ 2차왕자란(次王子亂)4등공신(等功臣)) 조연(趙涓) 태종조 ㆍ 2차왕자란(次王子亂) 4등공신(等功臣))
문형(文衡) : 조광조(趙光祖) (중종조) 조윤(趙贇) (선조조) 조경(趙絅) (인조조) 조성교(趙性敎) (고종조)
호당(湖堂) : 조광조(趙光祖) (중종조) 조윤(趙贇) (선조조) 조경(趙絅) (인조조)
청백리(淸白吏)
조원기(趙元紀) (중종조) 조광조(趙光祖) (중종조) 조위한(趙緯韓) (선조조) 조위명(趙威明) (인조조) 조경(趙絅) (인조조)
절의(節義) : 조광조(趙光祖) (중종기묘(中宗己卯)) ㆍ 조원기(趙元紀) ㆍ 갑자사화(甲子士禍))
[문집(文集)]
용주집(龍洲集) (조경(趙絅)) 동사집(東槎集) (조경(趙絅)) 정암집(靜庵集) (조광조(趙光祖)) 야곡집(冶谷集) (조극선(趙克善))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조극선(趙克善)) 옥천집(玉川集) (조덕린(趙德隣)) 민주주의(民主主義)와 나 (조병옥(趙炳玉)) 총계집(叢桂集) (조비(趙備)) 동산유고(東山遺稿) (조성한(趙晟漢)) 추재시집(秋齋詩集) (조수삼(趙秀三)) 백담집(白潭集) (조우신(趙又新)) 조문절공유고(趙文節公遺稿) (조원기(趙元紀)) 현곡집(玄谷集) (조위한(趙緯韓)) 남악집(南岳集) (조종저(趙宗著)) 휴천집(休川集) (조중려(趙重呂)) 현주집(玄洲集) (조찬한(趙纘韓))
[유적(遺蹟)]
시조묘(始祖墓) : 함남 고원군(高原郡) 운곡면(雲谷面) 운흥리(雲興里) 사동(寺洞)
[재우(齋宇)]
충정공부조묘(忠靖公不祧廟) ㆍ 양절공부조묘(良節公不祧廟) ㆍ 양경공부조묘(良敬公不祧廟) ㆍ 문정공부조묘(文正公不祧廟) ㆍ 문간공부조묘(文簡公不祧廟) ㆍ 한흥군부조묘(漢興君不祧廟) ㆍ 충현사(忠顯祠) ㆍ 동명서원(東溟書院) ㆍ 효양사(孝養祠) ㆍ 요당서원(蓼塘書院) ㆍ 경현사(景賢祠) ㆍ 흥현사(興賢祠) ㆍ 현충사(顯忠祠) ㆍ 송천서원(松泉書院) ㆍ 추산사(秋山祠) ㆍ 문암서원(文巖書院) ㆍ 백담사(白潭祠) ㆍ 계음사(溪陰祠) ㆍ 야곡사(冶谷祠) ㆍ 산서사(山西祠) ㆍ 덕림사(德林祠) ㆍ 운곡사(雲谷祠) ㆍ 충의재(忠義齋) ㆍ 운산재(雲山齋) ㆍ 소모전(蕭慕殿) ㆍ 효충사(孝忠祠) ㆍ 용연서원(龍淵書院) ㆍ 곡강서원(曲江書院) ㆍ 연안서원(延安書院) ㆍ 주봉서원(冑峰書院) ㆍ 회암서원(晦庵書院) ㆍ 도산서원(道山書院) ㆍ 양주영당(楊州影堂) ㆍ 효산사(孝山祠) ㆍ 칠곡단(漆谷壇) ㆍ 심곡서원(深谷書院) ㆍ 죽수서원(竹樹書院) ㆍ 죽림서원(竹林書院) ㆍ 소현서원(紹賢書院) ㆍ 봉강망덕서원(鳳崗望德書院) ㆍ 정퇴서원(靜退書院) ㆍ 상현서원(象賢書院) ㆍ 정원서원(正源書院) ㆍ 약봉서원(藥峰書院) ㆍ 운전서원(雲田書院)
유물(遺物) : 사계화(四季花) ㆍ 원세조하사홍옥대(元世祖下賜紅玉帶). 정종사패전답왕지문(定宗賜牌田畓王旨文)(寶物 第1135號. 1992.7. 18指定) 수오재유영지소(守五齋游詠之所)
비(碑) : 시조조지수단비(始祖趙之壽壇碑) ㆍ 쌍성각유적비(雙城閣遺蹟碑) ㆍ 총관공조휘묘비(摠管公趙暉墓碑) ㆍ 양렬공조인벽신도비(襄烈公趙仁璧神道碑) ㆍ 충정공신도비(忠靖公神道碑) ㆍ 부원수공조량기신도비(副元帥公趙良琪神道碑) ㆍ 가천재공신도비(嘉川齋公神道碑) ㆍ 공안공신도비(恭安公神道碑) ㆍ 유석공신도비(惟石公神道碑) ㆍ 양절공묘비(良節公墓碑) ㆍ 참판조방언신도비(參判趙邦彦神道碑) ㆍ 문정공조광조묘비(文正公趙光祖墓碑) ㆍ 사월공신도비(沙月公神道碑) ㆍ 문간공신도비(文簡公神道碑). 문목공 조극선 신도비(文穆公 趙克善 神道碑).
[종문행례(宗門行禮)]
족보간행(族譜刊行) : 갑신보(甲申譜.중종19년.1524) 신묘보(辛卯譜.효종2년.1651) 병오보(丙午譜.영조2년.1726) 무오보(戊午譜.정조22년.1798) 기유보(己酉譜.헌종.16년.1849) 갑신보(甲申譜.고종.21년.1884) 갑자보(甲子譜.1924) 일통세보(一統世譜.1926) 갑술보(甲戌譜.1934) 기해보(己亥譜.1959)
향사(享祀) : 5世祖 동명서원 춘향대제(烈렬公.3月중정) 5世祖 검한성공(檢漢城公.음력10월첫일요일) 5世祖 충정공(忠靖公.음력10月1日) 6世祖 양절공(良節公.음력10월2일) 6世祖 양경공(良敬公.음력10월3일) 6世祖 가천재공(嘉川齋公.10월4일) 6世祖 부사공(府使公.5世검한성공동일) 6世祖 절효공(節孝公.10월1일) 6世祖 참의공(參議公.10월13일) 6世祖 사평공(司評公.3월3일) 6世祖 판사공(判事公.10월1일) 7世祖 한풍군(漢豊君.10월2일) 7世祖 도제공(都制公.10월15일) 7世祖 참판공(參判公.10월5일) 7世祖 고사공(庫使公.10월5일) 7世祖 총제공(摠制公.10월3일) 7世祖 돈령공(敦寧公.10월5일) 7世祖 공안공(恭安公.4월5일) 7世祖 병참공(兵參公10월4일) 8世祖 지추공(知樞公.10월5일) 8世祖 가산공(嘉山公.10월9일) 8世祖 병사공(兵使公.10월5일) 8世祖 사예공(司藝公.10월5일) 8世祖 형의공(刑議公.4월5일(양)) 8世祖 판관곤(判官公.10월5일) 9世祖 승지공(承旨公.10월5일) 9世祖 예안공(禮安公.10월5일다음일요일) 9世祖 어모공(禦侮公.10월5일) 면천공(沔川公.10월5일) 9世祖 사직공(司直公.10월5일다음일요일) 9世祖 통정공(通政公.10월5일) 9世祖 판관공(判官公.8世판관공동일). 9世祖 현감공(縣監公.10월5일).
현재 외교통상부 미주국장으로 근무하는 죠병제도 한양죠문이 배출한 걸출한 인재이다
출처 중앙일보 성씨의 고향
[출처] 한양조씨(漢陽趙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