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번째 미국 주가 된 하와이 이야기
성조기의 50번째 별은 '하와이', 미국 본토와 약 3,200km나 떨어진 그 곳, 하와이왕국이라는 독립국이던 하와이는 왜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것일까?
하와이의 역사는 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1,500년 전에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와이 섬에 처음 도착했다. 별자리에만 의지하여 길을 따라온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카누를 타고 기적적으로 2,000마일(3,218km)을 항해한 끝에 하와이 제도로 이주했다. 북태평양의 낙원인 하와이는 1778년 영국탐험가 제임스 쿡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하와이 섬들의 전쟁을 통해 하와이왕국을 통일국가로 이루고, 서양인과의 접촉으로 사회는 신속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당시 하와이의 부족을 이끌던 추장 중 한 명인 카메하메하는 제임스 쿡과 그의 선원들이 전해준 영국식 문화에 흠뻑 빠졌다. 수백 년간 외부 교류 없이 원시 세계에 살던 이들이게 집채보다 큰 서양의 배, 망원경, 불을 뿜는 총 등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후 카메하메하는 영국과의 교류를 지속하며 매우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이 중에서 특히 무기를 들여오는데 집중했다. 그들은 현대식 무기를 이용해 하와이의 다른 부족들을 잇달아 무너뜨리며 하와이왕국을 세웠다.
1810년 하와이제도가 하와이왕국으로 통일을 이룬 이후 하와이왕국은 서구화에 박차를 가했다. 1840년에는 서양식으로 헌법을 만들고 영국을 모방한 입헌군주제를 채택할 정도였다. 이렇게 하와이가 서구문물 수입에 적극적이자 하와이를 찾는 서양인들의 발길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특히 많은 무역선과 고래잡이배들은 하와이에 머물며 이곳을 고래잡이 항구이자 태평양을 지나가는 배의 정박지로 활용했다. 이후에는 하와이에 아예 거주하러 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 서구화는 하와이왕국에 예상치 못한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하와이가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자 미국이 대단히 큰 관심을 보였다. 하와이는 당시 매우 가치가 높은 작물인 사탕수수 대농장을 건설하기에 딱 맞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1875년에는 하와이에 '미국으로 수출하는 사탕수수에 관세를 매기지 않을 테니 우리하고만 외교를 맺자'는 제안까지 했다. 하와이의 국왕은 이 제안을 수락했는데 이것이 결국 왕국을 몰락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하와이 원주민보다 돈도 많고 셈도 빨랐던 미국인들은 이후 하와이 곳곳에 사탕수수농장을 건설하며 하와이 경제를 조금씩 장악했다. 정작 하와이 원주민들은 이들에 밀려 생계유지에 급급해졌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1890년에 터졌다. 싼 값으로 들어오는 하와이 산 사탕수수 때문에 미국 사탕수수 농가들의 피해가 커지자 미국은 약속을 깨고 하와이산 사탕수수에 다시 관세를 매긴 것이다. 그러자 자연히 하와이산 사탕수수의 미국 수출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3년 하와이의 마지막 왕이 된 릴리우오칼라니는 더 이상 하와이경제가 미국에 휘둘리는 걸 막기 위해 '외국인 농장의 국유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미 왕보다 더 힘이 세진 미국인 농장주들은 미국 해병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하와이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900년 쿠테타를 이끈 농장주 대표이자 하와이 임시대통령이 된 샌포드 돌은 미국에 하와이 편입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하와이는 임시 주로 미국 영토로 있다가 1959년 8월 정식으로 미국의 50번째 주가 된 것이다.
하와이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승리를 돕다. 하와이는 매년 13조원의 관광수입을 올린다. 하지만 1900년 하와이가 미국에 편입된 후 미국의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분야는 바로 '군사'라고 할 수 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은 곧바로 참전을 발표했는데 이 전쟁에서 하와이는 태평양 전쟁이 벌어진 아시아와 가까워 항공모함과 전투기가 뜨는 미국의 전진 기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후 하와이는 태평양 전체를 아우르는 미국의 군사적 요충지로 인정받아 정식 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1778년 제임스 쿡에 의해 발견된 하와이는 근대화를 이루게 된다. 19 세기전반 종교적기반의 확립과 경제개발을 요구하는 유럽, 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들과 그 후손은 경제적 안정을 위해 정치권력을 탐하게 되고 그 영향은 시대를 거쳐 강력하게 되었다. 사탕수수 농장과 무역하여 막대한 부를 얻은 사람들은 추가의 산업 발전을 추구하는 값싼 노동력을 일본 및 다양한 지역에서 대량으로 불러 모아 하와이는 여러 인종이 혼합된 복잡한 문화가 되어 버렸다. 한편, 하와이에 노동자로 불려온 대량의 일본인 이민자들은 심각한 차별을 받게 된다.
20세기에 들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이 하와이 경제에 박차를 가하면서 일본, 중국, 필리핀, 포르투갈의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라나이는 세계적인 파인애플 수출지가 된 후부터 “파인애플 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민자들의 여러 인종이 섞인 덕분에 오늘날 하와이의 인구 구성은 매우 다양하다.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오아후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그로부터 4년 후 1945년 9월 2일에 일본이 USS 전함 미주리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끝났지만, 이 전함은 지금까지 진주만에 그대로 남아 있다. 1959년에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오늘날 하와이는 방문객과 알로하 정신을 나누는 세계적인 관광지인 것이다. 햇살과 서핑뿐만 아니라 하와이의 풍부한 문화 역사도 배우며 여행의 깊이를 더해 보면 어떨까.
첫댓글 잘 알았습니다.
문화여행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입니다.
오오, 레알?
농땡이가 멋땡이일 줄이야~~~~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