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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안동김씨(安東金氏)
氏族의 연원
시조는 김숙승(金叔承).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설(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냈다.
그 뒤 경순왕의 9세손 충렬왕(忠烈王) 김방경(金方慶)을 중조(中祖)로 하여 계대(系代)를 잇고 있다.
참고로, ‘기미보(己未譜)’ 서문에도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신라로부터 나왔으니 상낙군(上洛君) 충렬공(忠烈公)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구보(舊譜)에 15세손으로 기록된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향(貫鄕)이 같으면서도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안동김씨(安東金氏)(구(舊)),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안동김씨(安東金氏)(신(新))로 구분한다.
본관지 연혁
안동(安東)은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古陀耶郡)인데, 경덕왕 때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다.
고려조 태조가 안동(安東)으로 고쳐 부(府)를 삼았으며 성종은 길주목사(吉州牧使)로, 현종은 안무사(按撫使)로 개명(改名)하였는데 뒤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고쳤다.
명종 때 도호부(都護府)로, 신종 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충렬왕 때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으나 공민왕 때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되었다.
조선조 세조 때 진(鎭)을 두고 부사(府使)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겸임하게 하였으나 곧 부사(府使)는 폐지되었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郡)이 되었고 1914년 예안군(禮安郡)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김(金)ㆍ권(權)ㆍ강(姜)ㆍ고(高)ㆍ동(董)ㆍ노(盧)ㆍ가(李)ㆍ임(林)ㆍ문(文)ㆍ박(朴)ㆍ장(張)ㆍ전(全)ㆍ조(曹)ㆍ최(崔)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밀직사사공파(密直司事公派)ㆍ개성윤공파(開城尹公派)ㆍ군사공파(郡事公派)ㆍ전서공파(典書公派)ㆍ부사공파(府使公派)ㆍ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ㆍ안정공파(安靖公派)ㆍ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ㆍ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ㆍ제학공파(提學公派)ㆍ판삼사공파(判三司公派)ㆍ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ㆍ익원공파(翼元公派)ㆍ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ㆍ정의공파(正儀公派)
주요 세거지
경북(慶北)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사촌동(沙村洞)이 바로 안동김씨(安東金氏) 일문이 5백여 년 동안 혈맥을 이어온 마을이다. 이끼오른 기와, 나지막한 토담, 쐐기풀 돋아나는 좁은 골목길 풍경이 고향의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입향조(入鄕祖)는 고려말 도평의공(都評議公) 김구정(金九鼎)의 아들 김자담(金子膽)(감목관(監牧官)). 그는 고려가 망하자 안동(安東)에서 조용히 이 마을로 숨어들어 초야에 묻혀 살았다.
마을입구 대곡천(大谷川) 주변에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등을 심고 가꾸며 욕심없이 살았다.
당시 그가 심은 나무가 지금은 사촌동(沙村洞)을 아늑하에 감씨주는 방풍림이 되어 무성한 숲을 이룬다. 마을 전체 1백 50호, 7백여명이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조선조에서는 그의 후손에서 대과 13명, 소과 28명 등 총 41명의 문과급제자를 내어 명가의 전통을 이어 빛난다.
김광수(金光粹)는 이 마을이 배출한 유명한 시인이요 학자다. 연산군(燕山君) 15년 성균관(成均館)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던 그는 연산(燕山)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입신의 뜻을 버리고 귀향, 청빈한 학자로서 여생을 마쳤다. 남산기슭에 지붕을 드리운 ‘영귀정(詠歸亭)’은 그가 후학을 양성하며 음풍영월(吟風咏月)했던 정자다.
조선선조조(朝鮮宣祖朝)의 명재상 서애(西堐)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외손자가 된다.
일제(日帝)침략의 마수가 이땅을 서서히 침식하던 1896년, 국내 각처에서 의병운동이 불꽃처럼 번지자 사촌동(沙村洞) 김씨(金氏)들은 분연히 항일의 대열에 나섰다.
의성(義城)지역 의병대장은 김상종(金象鍾)이며, 선봉장 김수담(金壽聃), 관향장(管餉將) 김수협(金壽莢)은 옥산(玉山)전투에서 같은 날 전사했다.
주민들의 주소득원은 예나 다름없이 농사이다. 최근에는 사과ㆍ담배ㆍ배추 등을 재배, 가구당 연평균 4백 2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씨족史
안동김씨(安東金氏)(구(舊))는 고려초에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낸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성시다. 후손으로는 고려가 원(元)과 전쟁을 치르던 때의 유명한 장군인 김방경(金方慶)과, 상해임시정부의 주석(主席)이며 항일민족운동가였던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유명하다.
안동김씨(安東金氏)(구(舊))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에서 분적(分籍)된 성씨이다. ‘고려사’ 김방경전(金方慶傳)에는 그가 경순왕의 원손(遠孫)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범김씨대종원(新羅汎金氏大宗院)에서 발행한 ‘대보공김알지선원계보(大輔公金閼智璿源系譜)’에 의하면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김방경(金方慶)의 6대조로 되어 있으며,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설(金殷說)의 아들로 되어 있다.
안동김씨(安東金氏)(구(舊))는 김방경(金方慶) 이후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손자가 계속 재상의 지위에 올라 고려말에 최고 가문의 지위를 누렸다. 그의 현손인 김사형(金士衡)이 조선개국1등공신이 되고 태종조에 좌정승(左政丞)에까지 오름으로써 조선조에서도 가문의 세력을 유지, 발전해올 수 있었다.
이러한 가문의 번성은 인조조 이후 많이 위축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김자점(金自點)이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는 등 세력을 구가하다가 효종즉위 후 탄핵을 받아 정치적 몰락을 보면서부터 전체적으로 문중세가 많이 위축되었다.
안동김씨(安東金氏)(구(舊))의 분파(分派)는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나누어진다. 그에게는 선(愃), 흔(忻), 순(恂), 론(惀), 돈(惇)의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흔(昕)과 돈(惇)은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김칠우(金七祐)의 후손이 밀직사사공파(密直司事公派), 김칠림(金七霖)의 후손이 개성윤공파(開城尹公派), 김칠양(金七陽)의 후손이 군사공파(郡事公派), 김성목(金成牧)의 후손이 전서공파(典書公派), 김천순(金天順)의 후손이 부사공파(副使公派), 김구용(金九容)의 후손이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김익달(金益達)의 후손이 제학공파(提學公派), 김장(金場)의 후손이 판삼사공파(判三司公派), 김구덕(金九德)의 후손이 안정공파(安靖公派), 김구정(金九鼎)의 후손이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 김나(金懦)의 후손이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김사겸(金士謙)의 후손이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이 익원공파(翼元公派), 김수(金綏)의 후손이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김철(金哲)의 후손이 정의공파(正儀公派) 등 15파(派)이다. 그리고 공민왕 때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김선(金愃)의 증손 김제안(金齊顔)의 후손은 사천김씨(泗川金氏)로 분관(分貫)하였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이다. 고종 때 음보(蔭補)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여러관직을 거치고 서북면(西北面)을 두 번 진무(鎭撫)하여 서북면인(西北面人)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원종(元宗) 때는 몽고의 침략에 항복한 고려정부가 개경(開京)으로의 출육환도(出陸還都)문제로 원(元)과의 사이에, 또 왕실(王室)측과 무인(武人)정권과의 사이에 갈등을 나타내고 있었다. 개경(開京)으로의 환도(還都)는 몽고에 대한 완정항복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삼별초(三別抄)를 비롯한 무인(武人)들은 반대한 반면, 몽고세력을 등에 업고 무인(武人) 집정자들로부터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왕실(王室)측은 환도(還都)를 서둘렀다.
몽고의 압력 아래 국왕측이 원종 11년(1270) 환도(還都)를 단행하자 배중손(裵仲孫)이 중심이 된 삼별초(三別抄) 증은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 진도로 옮겨가 환도(還都)에 반대하여 반란하였다. 당시 고려의 대표적 장수였던 김방경(金方慶)은 몽고장수 흔도(忻都),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이어 제주로 옮겨간 삼별초(三別抄)반군까지 쳐서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를 거쳐 시중(侍中)이 되고, 원(元)에 들어가 세조(世祖)로부터 직접 금패(金牌) 등을 하사받았다. 귀국 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원종말~충렬왕 초에 원(元)의 강압에 의해 여원(麗元)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그는 중군장(中軍將), 또는 도원수(都元帥)로 고려군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제 1 차 정일본(征日本) 뒤 충렬왕 4년에 그는 반역을 꾀했다는 무고를 받아 혹독한 고문을 받고 원(元)으로 압송되기도 하였다. 두 번 일본정벌에 참여하고 나서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이 되어 삼중대광첨의중찬판전리사사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서 치사(致仕)했다. 상락군(上洛君) 개국공(開國公)에 봉해지고, 죽은 뒤 충선왕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김흔(金忻)은 김방경(金方慶)의 둘째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책정도감판관(冊定都監判官)을 거쳐 장군(將軍)이 되었다. 원(元)나라의 정동군(征東軍)에 편입, 일본정벌(日本征伐)에 종군 후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내고, 충렬왕 5년 볼모((독로화(禿魯花))로서 원(元)나라에 갔다. 뒤에 아버지의 직을 물려받아 금호부(金虎符)를 찼으며, 이어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을 거쳐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올랐다. 1290년 합단적(哈丹賊)을 격파한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뒤에 찬성사자의도첨의사사(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에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낙공(上洛公)에 봉해졌다.
김순(金恂)은 충렬왕 5년 문과(文科)에 급제, 원(元)나라의 일본정벌(日本征伐) 때 종군하고 돌아와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승지(左副承旨), 다음해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사퇴했다가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1312년(충선왕(忠宣王) 4) 중대광상낙군(重大匡上洛君)에 봉해졌고, 1316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김선(金愃)의 아들인 김승용(金承用)ㆍ김승택(金承澤)은 각각 밀직사사(密直司事),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다.
문숙공(文肅公) 김영돈(金永暾)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충목왕 3년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여 폐정(弊政)을 시정하려고 할 때 왕후(王煦)와 함께 판사(判事)가 되어 권세가들의 불법적인 토지탈점 등의 횡포를 다스리려고 하였다.
서호(徐浩)ㆍ전록생(田祿生) 등의 젊은 신진 개혁세력을 등용하여 과감히 개혁을 수행하려고 하였으나, 고려안의 부원세력의 교두보인 정동행성이무소(征東行省理問所)에서 활동을 방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권문가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숙폐를 과감히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동생 정간공(貞簡公) 김영후(金永煦)는 충숙왕(忠肅王) 때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이르렀다.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고려왕위를 이으려고 획책할 때 원(元)나라에서 충혜왕(忠惠王)을 시종(侍從)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으로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이어 제조정방(提調政房), 좌정승(左政丞), 우정승(右政丞)을 역임하고 공민왕 1년에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졌다가 1356년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다녀온 후 상낙후(上洛侯)에 봉해졌다.
고려말 조선초의 인물로는 상낙후(上洛侯)의 손자인 김사렴(金士廉)과 김사형(金士衡)을 들 수 있다.
김사렴(金士廉)은 문장에 능하여 공민왕초에 문과에 급제하고 시랑(侍郞)을 거쳐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다. 1365년 (공민왕(恭愍王) 14) 왕(王)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집현전태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集賢殿太學士)를 더하고, 공신호(功臣號)를 내리자 신돈(辛旽)이 위험 인물이라고 상소했다. 1392년 고려(高麗)가 망하자 청주(淸州) 도산(陶山)에 은거, 두문불출했으며, 한양쪽을 향해서 앉지도 않았다 한다. 뒤에 숙종(肅宗)은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嘉尙)히 여겨 ‘일편도산(一片陶山) 만고수양(萬古首陽)’이라는 과제(科題)로서 응과생(應科生)들에게 과거(科擧)를 보였고, 송시열(宋時烈)은 “충병일월(忠昞日月) 절고산악(節高山岳) 일편도산(一片陶山) 만고수양(萬古首陽)”이라 하였다.
이와는 달리 동생인 낙포(洛圃) 김사형(金士衡)은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양왕 2년 밀직사(密直使)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다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특진(特進), 뒤에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2년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태조(太祖))를 추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 개국공신(開國功臣)1등(等)이 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낙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에 장자(長子)에게 선위(禪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等)이 되었다. 태종 1년 좌정승(左政丞), 다음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었다. 익원(翼元)의 시호가 내렸고 태조묘정(太祖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晋州城)이 적의 군대에 포위되자 3천8백여명의 의병으로 7일 밤낮을 버틴 끝에 3만명의 왜군을 사살하고 전사한 진주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1554~1592)과 광해군(光海君) 10년 명(明)나라가 후금(後金)을 칠 때 지원병을 요청하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게 좌영장(左營將)으로 출정, 후금(後金)의 군사와 최후까지 접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등은 구국의 투혼과 장부의 기개로 가문의 기백을 지킨 명장들이다.
이들은 사후에 똑같이 〈충무(忠武)〉란 시호를 받았다.그것은 무관(武官)에게는 최고의 영예였다.
김시민(金時敏)은 뒤에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 상낙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가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 추봉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응하(金應河)는 1620년 명(明) 신종(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되고 처자에게 은(銀)이 하사되었다.
이 당시의 인물로 정묘호란 때의 척화파 대신으로 인조 9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8도도원수(道都元帥)ㆍ4도체찰사(道體察使)를 겸임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던 김시양(金時讓)이 있다. 그는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 19년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겸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로 참여했다. 청백리에 뽑혔다.
김질(金礩)은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사육신(死六臣)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세조정권에서 크게 출세한 인물이다. 처음에 충의위(忠義衛)에 보직, 세종 32년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뒤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에 뽑혔고, 성삼문(成三問)ㆍ최항(崔恒)ㆍ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게 문종(文宗)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한 다음해 성삼문(成三問) 등과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위해 거사를 꾀했다가 여러번 기회를 놓치자 발각이 두려워 고변(告變),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공조판서(工曹判書), 병조판서(兵曹判書), 우참찬(右參贊),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1468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이어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이해 세조(世祖)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처리했다. 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等)이 되고, 1474년 우의정(右議政)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김질(金礩)은 지극한 효자로 이름이 있었고, 김수(金晬)는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6년 과거에 급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우참찬(右參贊),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5년 손자 비(秘)가 탄핵당할 때 삭직당했다.
만보당(晩保堂) 김수동(金壽童)은 성종 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 정자(正字), 사인(舍人) 등을 역임했다. 연산군(燕山君)초에 전라(全羅)ㆍ경상(慶尙)ㆍ경기도(京畿道)의 관찰사(觀察使),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1503년 지춘추관사겸(知春秋館事兼)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되고, 1505년 우찬성(右贊成)ㆍ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다음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재치가 넘쳐 연산군(燕山君) 폭정(暴政) 대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많은 문신(文臣)들의 화(禍)를 면하게 했으며, 청렴을 지켰다.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等)으로 좌의정(左議政)에 승진,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4년 뒤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낙서(洛西) 김자점(金自點)은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광해군(光海君) 말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이르렀으나 당시 집권당(執權黨)인 대북파(大北派)에 의해 밀려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等)에 올랐다. 반정(反正)에 성공한 서인(西人)이 집권당(執權黨)이 되면서 공서(功西), 청서(淸西)로 분파(分派)하게 되었는데, 그는 공서파(功西派)에 속하여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세력(儒林勢力)을 배경(背景)으로 한 청서파(淸西派)와 대립하였다. 인조(仁祖) 말에 그는 우의정(右議政)ㆍ좌의정(左議政)을 거쳐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그의 손자(孫子)가 인조(仁祖)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하자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으로서 실권(實權)을 잡고 세력을 떨쳤다. 1649년 인조(仁祖)가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김경록(金慶錄), 송준길(宋浚吉) 등으로부터 국정(國政)을 농(弄)하고 조정(朝廷)을 어지럽힌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의 파직으로 가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근대이후의 인물로는 항일민족운동가였으며 위대한 민족주의자였던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백범(白凡)은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3년 동학(同學)에 들어가, 이듬해 해주(海州) 팔봉도소(八峰道所) 접주(接主)가 되어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입단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高宗)의 특사(特赦)로 감형(減刑)되었다. 1898년 복역 중 탈옥, 1908년 기독교(基督敎)에 입교(入敎)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終身刑)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減刑)으로 1914년 출옥했다. 3ㆍ1운동 후 상해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警務局長), 내무총장(內務總長),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ㆍ이동녕(李東寧)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수가 되어 이봉창(李奉昌)ㆍ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 등의 의거(義擧)를 지휘하였다. 60만 원의 현상이 붙은 채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상해를 탈출, 가흥(嘉興)으로 갔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인(韓國人) 무관학교(武官學校) 설치와 대일(對日) 전투 방책(方策)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 후에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를 조직하여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했다. 1944년 임시정부주석(臨時政府主席)에 선임,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훈련을 실시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당시 미군정청은 임시정부요원의 귀국를 정부차원으로 인정치 않고 개인자격으로 제한하였다.
귀국후 백범(白凡)은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적인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고군분투, 신탁통치안에 반대하고, 군정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측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1948년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提唱), 북한에 가서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남한만의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로 남아있다가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백범(白凡)의 암살은 몽양 여운형의 암살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그 뒤 이승만정권측의 안두희비호를 보면 이승만정권에 의한 암살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소원은 〈민족을 위한, 민족의 힘에 의한, 민족 스스로의 평화통일〉이었다. 때문에 1948년 유엔 소총회가 〈가능한 지역(남한)에만 국한된 총선거〉를 결의했을 때, 그는 울면서 3천만 동포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건설을 위해 공동투쟁하는 것 뿐이다. 조국이 만일 내 육신을 요구한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내 몸을 제단에 바치겠다.”
1948년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남북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해 평양(平壤)으로 가면서 “가다가 38선을 베고 죽을지라도 조국의 평화통일은 나의 소원”이라고 했던 그의 외침은 분단된 조국이 40년이 넘도록 통일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가슴을 울린다.
현재 백범사상연구소가 있다.
역대 주요 인물
▲ 고려조
김일긍(金日兢)(태사(太師)) 김이청(金利請)(태수(太守))
김의화(金義和)(예부시랑(禮部侍郞))
김민성(金敏成)(서령(署令))
김효인(金孝印)(병부상서(兵部尙書))
김방경(金方慶)(자(字) : 본연(本然)·시호(諡號) : 충렬(忠烈)·도원수(都元帥))
김선(전리판서(典理判書))
김흔(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김순(金恂)(자(字) : 귀후(歸厚)·시호(諡號) : 문영(文英)·판삼사사(判三司事))
김유(金愉)(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김승용(金承用)(시호(諡號) : 충숙(忠肅)·대제학(大提學))
김승택(金承澤)(시호(諡號) : 양간(良簡)·평장사(平章事))
김승우(金承佑)(상서(尙書))
김영돈(金永暾)(자(字) : 나해(那海)·호(號) : 균헌(筠軒)·시호(諡號) : 문숙(文肅)·좌정승(左政丞))
김영후(金永煦)(호(號) : 온재(穩齋)·시호(諡號) : 정간(貞簡)·좌정승(左政丞))
김후(金厚)(첨의평리(僉議評理))
김앙(金昻)(평장사(平章事))
김지서(金之瑞)(도첨의부사(都僉議府事))
김진(金鎭)(판자혜원사(判慈惠院事))
김행(金杏)(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
김칠우(金七祐)(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김칠림(金七霖)(개성윤(開城尹))
김칠양(金七陽)(호(號) : 강은(康隱)·수안군사(遂安郡事))
김성목(金成牧)(공조전서(工曹典書))
김천순(金天順)(밀직부사(密直副使))
김구용(金九容)(자(字) : 경지(敬之)·호(號) : 척약재·대사성(大司成))
김제안(金齊顔)(자(字) : 중현(仲賢)·추밀원사(樞密院事))
김구정(金九鼎)(도평의(都評議)) 김나(金懦)(대호군(大護軍))
김익달(金益達)(직제학(直提學))
김사렴(金士廉)(자(字) : 공직(公直)·호(號) : 오은(梧隱)·안렴사(按廉使))
김사형(金士衡)(자(字) : 평보(平甫)·호(號) : 낙포(洛圃)·시호(諡號) : 익원(翼元)·좌정승(左政丞))
김수(金綏)(서운관정(書雲觀正))
김철(金哲)(호(號) : 양파(陽坡)·예조판서(禮曹判書))
김천검(金天儉)(유수(留守)) 김휴(金休)(자(字) : 연부(鍊夫)·호(號) : 학당(學堂)·학자(學者))
▲ 조선조
김익정(金益精)(자(字) : 자비(子斐)·이조참판(吏曹參判))
김뉴(金紐)(자(字) : 자고(子固)·호(號) : 금헌(琴軒)·이조참판(吏曹參判))
김충갑(金忠甲)(호(號) : 귀암(龜巖)·군수(郡守))
김제갑(金悌甲)(자(字) : 순초(順初)·호(號) : 의재(毅齋)·시호(諡號) : 문숙(文肅)·관찰사(觀察使))
김시민(金時敏)(자(字) : 면오(勉吾)·시호(諡號) : 충무(忠武)·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시약(金時若)(첨절제사(僉節制使))
김시백(金時伯)(자(字) : 자장(子長)·호조참의(戶曹參議))
김시양(金時讓)(자(字) : 자중(子中)·호(號) : 하담(荷潭)·시호(諡號) : 충익(忠翼)·병조판서(兵曹判書))
김치(金緻)(자(字) : 사정(士精)·호(號) : 남봉(南峰)·관찰사(觀察使))
김휘(金徽)(자(字) : 돈미(敦美)·호(號) : 사휴재(四休齋)·이조판서(吏曹判書))
김득신(金得臣)(자(字) : 자공(子公)·호(號) : 백곡(栢谷)·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응하(金應河)(자(字) : 경의(景義)·시호(諡號) : 충무(忠武)·군수(郡守))
김응해(金應海)(자(字) : 군서(君瑞)·어영대장(御營大將))
김선필(金善弼)(자(字) : 중필(仲弼)·대호군(大護軍))
김종덕(金宗德)(자(字) : 도언(道彦)·호(號) : 천사(川沙)·학자(學者))
김공량(金公亮)(자(字) : 필지(弼之)·호(號) : 양곡(楊谷)·대제학(大提學))
김공석(金公奭)(자(字) : 주경(周卿)·병조참판(兵曹參判))
김공예(金公藝)(자(字) : 중아(仲雅)·승지(承旨))
김주(金澍)(자(字) : 응림(應霖)·호(號) : 우암(寓菴)·시(諡) : 문서(文瑞)·예조참판(禮曹參判)·화산군(花山君))
김희(金憙)(자(字) : 여구(汝懼)·부사(府使))
김수남(金壽男)(자(字) : 인보(仁甫)·병조판서(兵曹判書))
김담(金曇)(현감(縣監))
김시회(金時晦)(자(字) : 양오(養吾)·호(號) : 양진재(養眞齋)·부사(府使))
김시헌(金時獻)(자(字) : 자징(子徵)·호(號) : 애헌(艾軒)·도승지(都承旨))
김소(金素)(자(字) : 지백(知白)·호(號) : 양졸와(養拙窩)·관찰사(觀察使))
김귀만(金龜萬)(자(字) : 원서(元瑞)·좌승지(左承旨))
김승(金陞)(밀직사사(密直司使))
김종숙(金宗淑)(좌찬성(左贊成))
김질(자(字) : 가안(可安)·호(號) : 쌍곡(雙谷)·시(諡) : 문정(文靖)·좌의정(左議政))
김천주(金天柱)(자(字) : 경여(擎汝)·호(號) : 화면(畵眠)·충신(忠臣))
김작(자(字) : 위경(衛卿)·호(號) : 상곡(相谷)·시(諡) : 효소(孝昭)·형조판서(刑曹判書))
김적(자(字) : 자고(子高)·목사(牧使))
김무(자(字) : 미보(美甫)·풍양군(豊陽君)·공조판서(工曹判書))
김의동(金義童)(목사(牧使))
김성동(金誠童)(자(字) : 명보(明甫)·부사(府使))
김수동(金壽童)(자(字) : 미수·호(號) : 만보당(晩保堂)·시호(諡號) : 문경(文敬)·영의정(領議政))
김수경(金壽卿)(자(字) : 이문재·부사(府使))
김귀서(金龜瑞)(자(字) : 상백(祥伯)·대호군(大護軍))
김언(자(字) : 호원목사(浩源牧使))
김억령(金億齡)(자(字) : 중로(仲老)·관찰사(觀察使))
김덕룡(金德龍)(자(字) : 운보(雲甫)·호(號) : 낙곡(駱谷)·부제학(副提學))
김질(金瓆)(자(字) : 선숙(宣叔)·호(號) : 눌암(訥菴)·시호(諡號) : 효헌(孝獻)·우참찬(右參贊))
김자정(金自精)(자(字) : 순서(純瑞)·호(號) : 일금백(一金白)·부호군(副護軍))
김자점(金自點)(자(字) : 성지(成之)·호(號) : 낙서(洛西)·영의정(領議政))
김질(집의(執義))
김자행(金自行)(자(字) : 안이(安而)·관찰사(觀察使))
김숙연(金淑演)(자(字) : 유량(幼亮)·목사(牧使))
김희수(金希壽)(자(字) : 몽정(夢禎)·호(號) : 유연재(悠然齋)·관찰사(觀察使))
김로(金魯)(자(字) : 경참(景參)·호(號) : 동고(東皐)·직제학(直提學))
김홍도(金弘度)(자(字) : 중원(重遠)·호(號) : 남봉(南峰)·전한(典翰))
김첨(金瞻)(자(字) : 자첨(子瞻)·호(號) : 하당(荷塘)·도승지(都承旨))
김수(자(字) : 자앙(子昻)·호(號) : 몽촌(夢村)·시호(諡號) : 소의(昭懿)·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정립(金正立)(자(字) : 여지(汝止)·호(號) : 노은(老隱)·군수(郡守))
김성경(金成景)(호(號) : 삼림(三林)·병사(兵使))
김백내(자(字) : 중보(重寶)·호(號) : 완경재(玩景齋)·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억민(金億敏)(부사(府使))
김복원(金復元)(자(字) : 정지(貞之)·호(號) : 인와(忍窩)·정언(正言))
김구(金九)(호(號) : 백범(白凡)·임시정부주석(臨時政府主席))
[등과인명(登科人名)]
▲ 고려조
문과(文科)
김효인(金孝印)(희종조)
김순(金恂)(충렬왕조)
김영돈(金永暾)(충렬왕조)
김승용(金承用)(충렬왕조)
김앙(金昻)(충숙왕조)
김제안(金齊顔)(공민왕조)
김명선(金明善)(우왕조)
▲ 조선조
문과(文科)
김익정(金益精)(이참(吏參)) 김익렴(金益濂)(지평(持平))
김고(金顧)(한림(翰林)) 김전(金塡)(직학(直學))
김돈(金墩)(승지(承旨)) 김맹헌(金孟獻)(직학(直學))
김계우(金季友)(한림(翰林)) 김환(金丸)(판교(判校))
김질(좌상(左相)) 김수녕(金壽寧)(호참(戶參))
김한(金漢)(직학(直學)) 김뉴(金紐)(이참(吏參))
김서형(金瑞亨)(현감(縣監)) 김작(형판(刑判))
김수동(金壽童)(영상(領相)) 김연수(金延壽)(대사헌(大司憲))
김석정(金石精)(병랑(兵郞)) 김엄(金淹)(통례(通禮))
김공망(金公望)(부사(府使)) 김식(金湜)(군수(郡守))
김인명(金麟明)(목사(牧使)) 김공예(金公藝)(참의(參議))
김인상(金麟祥)(정랑(正郞)) 김철(金鐵)(정언(正言))
김면(金沔)(판결사(判決事)) 김주(金澍)(대헌(大憲))
김영세(金英世)(도사(都事)) 김수준(金守濬)(통례(通禮))
김덕룡(金德龍)(대헌(大憲)) 김충갑(金忠甲)(사예(司藝))
김언침(감사(監司)) 김인(직강(直講))
김억령(金億齡)(지사(知事)) 김효갑(金孝甲)(한림(翰林))
김덕곤(시정(寺正)) 김제갑(金悌甲)(감사(監司))
김방(金昉)(부사(府使)) 김찬(金瓚)(이판(吏判))
김시회(金時晦)(부사(府使)) 김수(부사(府使))
김제현(金齊賢)(병정(兵正)) 김흠(金欽)(목사(牧使))
김직재(金直哉)(승전(承傳)) 김시헌(金時獻)(이참(吏參))
김계도(金繼燾)(지사(知事)) 김치(金緻)(영백(嶺伯))
김정일(金鼎一)(지평(持平)) 김극령(金克寧)(병좌(兵佐))
김시양(金時讓)(병판(兵判)) 김희(金憙)(부사(府使))
김상윤(金相潤)(시정(寺正)) 김욱(金頊)(정언(正言))
김적(金適)(정랑(正郞)) 김호(옥당(玉堂))
김설(金渫)(형좌(刑佐))
김경(金絅)(한림(翰林)) 김구(군수(郡守))
김확(부사(府使)) 김련(金璉)(좌랑(佐郞))
김진(金瑨)(첨지(僉知)) 김효건(金孝建)(판결(判決))
김태기(金泰基)(장령(掌令)) 김소(金素)(충백(忠伯))
김이경(金以鏡)(동지(同知)) 김경(金坰)(장령(掌令))
김휘(金徽)(이판(吏判)) 김식(이좌(吏佐))
김득신(金得臣)(참판(參判)) 김석지(金錫之)(예정(禮正))
김계광(金啓光)(군수(郡守)) 김환(金奐)(교리(校理))
김성좌(金聖佐)(부사(府使)) 김일성(金日省)(현감(縣監))
김정하(金正夏)(정언(正言)) 김귀만(金龜萬)(승지(承旨))
김항(金沆)(사예(司藝)) 김시경(金始慶)(승지(承旨))
김세익(金世翊)(영백(嶺伯)) 김두남(金斗南)(헌납(獻納))
김전(사예(司藝)) 김환(지돈(知敦))
김중희(金重熙)(집의(執義)) 김유(우윤(右尹))
김도응(金道應)(현감(縣監)) 김서귀(金瑞龜)(첨지(僉知))
김호(金浩)(승지(承旨)) 김성(金聲)(통례(通禮))
김오응(金五應)(현령(縣令)) 김도(장령(掌令))
김홍택(金弘澤)(현감(縣監)) 김광국(金光國)(참판(參判))
김가경(金可慶)(경도(慶都)) 김영섭(金永燮)(양사(兩司))
김광위(金光緯)(장령(掌令)) 김덕원(金德元)(판교(判校))
김회원(金會元)(사간(司諫)) 김중초(金重楚)(전적(典籍))
김재경(金在敬)(장령(掌令)) 김재성(金在誠)(도사(都事))
김중옥(金重玉)(현감(縣監)) 김종구(金宗九)(전적(典籍))
김복원(金復元)(장령(掌令)) 김경행(金景行)(주서(注書))
김항광(金恒光) 김종경(金宗敬)(지평(持平))
김회빈(金晦彬)(정언(正言)) 김종발(金宗發)(장령(掌令))
김명저(金明著)(도사(都事)) 김우국(金愚國)(지평(持平))
김복인(金複仁)(지평(持平)) 김경(金憬)(정언(正言))
김정호(金正浩)(교리(校理))
무과(武科)
김응하(金應河)(요동백(遼東伯)) 김응해(金應海)(어장(禦將))
김익련(金益鍊)(수사(水使)) 김세귀(金世龜)(수사(水使))
김세장(金世章)(병사(兵使)) 김세익(金世翊)(좌윤(左尹))
김중삼(金重三)(병사(兵使)) 김중휘(金重徽)(훈장(訓將))
김중일(金重一)(승지(承旨)) 김중태(金重泰)(훈장(訓將))
김완(金浣)(부사(府使)) 김숙(金淑)(부사(府使))
김명우(金明遇)(병사(兵使)) 김노익(金魯益)(현감(縣監))
김노직(金魯直)(병사(兵使)) 김선교(金善敎)(좌윤(左尹))
김선필(金善弼)(진무사(鎭撫使)) 김선행(金善行)(부사(府使))
김명구(金命求)(방어사(防禦使)) 김봉구(金鳳求)(목사(牧使))
김학구(金鶴求)(선전(宣傳)) 김범구(金範求)(영장(營將))
김한구(金翰求)(선전(宣傳)) 김동운(金東韻)(병사(兵使))
[조선조 급제자 정록]
익정(益精)(태조(太祖) 5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익렴(益廉)(태종(太宗) 8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고(顧)(태종(太宗) 8년·식년시(式年試)·진사(進士)) 전(塡)(태종(太宗) 14년·식년시(式年試)·을과삼(乙科三)) 곽(태종(太宗) 1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맹헌(孟獻)(세종(世宗) 8년·식년시(式年試)·진사(進士)) 효온(孝溫)(세종(世宗) 16년·알성시(謁聖試)·을과이(乙科二)) 계우(季友)(世宗 18년·친시(親試)·진사(進士)) 환(丸)(세종(世宗) 24년·친시(親試)·진사(進士)) 질(문종즉위(문종즉위)·식년시(式年試)·정과(丁科)) 수녕(壽寧)(단종(端宗) 1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한(漢)(단종(端宗) 1년·식년시(式年試)·정과(丁科)) 뉴(紐)(세조(世祖) 12년·춘시(春試)·병과(丙科)) 중연(仲演)(세조(世祖) 12년·고성춘시(高城春試)·병과(丙科)) 뉴(紐)(세조(世祖) 12년·중시(重試)·을과(乙科)) 뉴(紐)(세조(世祖) 12년·등준시(登俊試)·병과(丙科)) 극해(克諧)(성종(成宗) 2년·별시(別試)·병과(丙科)) 작(성종(成宗) 8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수동(壽童)(성종(成宗) 8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석정(石精)(성종(成宗) 14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한로(漢老)(연산(燕山) 1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엄(淹)(연산(燕山) 10년·별시(別試)·정과(丁科)) 형(泂)(연산(燕山) 10년·별시(別試)·정과(丁科)) 공망(公望)(중종(中宗) 1년·별시(別試)·정과(丁科)) 식(湜)(중종(中宗) 1년·별시(別試)·병과(丙科)) 인명(麟明)(중종(中宗) 2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희수(希壽)(중종(中宗) 2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공예(公藝)(중종(中宗) 8년·별시(別試)·병과(丙科)) 인상(麟祥)(중종(中宗) 8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수준(守濬)(중종(中宗) 12년·별시(別試)·병과(丙科)) 식(중종(中宗) 14년·현량과시(賢良科試)·병과(丙科)) 언(중종(中宗) 16년·별시(別試)·병과(丙科)) 노(魯)(중종(中宗) 2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주(澍)(중종(中宗) 34년·별시(別試)·갑과(甲科)) 영세(英世)(중종(中宗) 35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덕룡(德龍)(명종(明宗) 1년·증광시(增廣試)·갑과(甲科)) 충갑(忠甲)(명종(明宗)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홍도(弘度)(명종(明宗) 3년·별시(別試)·갑과(甲科)) 언침(명종(明宗)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인(명종(明宗) 7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억령(億齡)(명종(明宗) 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효갑(孝甲)(명종(明宗) 8년·별시(別試)·병과(丙科)) 덕곤(명종(明宗) 8년·별시(別試)·병과(丙科)) 제갑(悌甲)(명종(明宗) 8년·별시(別試)·병과(丙科)) 방(昉)(선조(宣祖) 즉위(卽位)·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찬(瓚)(즉위(卽位)·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시회(時晦)(선조(宣祖) 즉위(卽位)·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제현(齊賢)(선조(宣祖) 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수(선조(宣祖) 6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첨(瞻)(선조(宣祖) 9년·별시(別試)·병과(丙科)) 흠(欽)(선조(宣祖) 16년·별시(別試)·병과(丙科)) 직재(直哉)(선조(宣祖) 18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시헌(時獻)(선조(宣祖) 21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성립(誠立)(선조(宣祖) 3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대래(大來)(선조(宣祖) 2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계도(繼燾)(선조(宣祖) 28년·별시(別試)·병과(丙科)) 치(緻)(선조(宣祖) 30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정일(鼎一)(선조(宣祖) 32년·별시(別試)·병과(丙科)) 극령(克寧)(선조(宣祖) 3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시양(時讓)(선조(宣祖) 38년·정시(庭試)·병과(丙科)) 희(憙)(광해(光海) 2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상윤(相潤)(광해(光海) 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욱(頊)(광해(光海) 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적(適)(광해(光海) 2년·별시(別試)·을과(乙科)) 방(昉)(광해(光海) 2년·별시(別試)·병과(丙科)) 설(渫)(광해(光海) 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경(絅)(광해(光海) 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구(광해(光海) 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확(광해(光海) 10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련(璉)(광해(光海) 13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진(瑨)(인조(仁祖) 1년·개시(改試)·병과(丙科)) 효건(孝建)(인조(仁祖) 2년·정시(庭試)·병과(丙科)) 태기(泰基)(인조(仁祖)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소(素)(인조(仁祖) 13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진(振)(인조(仁祖) 13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이경(以鏡)(인조(仁祖) 14년·별시(別試)·병과(丙科)) 경(坰)(인조(仁祖) 15년·별시(別試)·병과(丙科)) 휘(徽)(인조(仁祖) 2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식(인조(仁祖) 12년·별시(別試)·병과(丙科)) 득신(得臣)(현종(顯宗) 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환(奐)(현종(顯宗) 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성좌(聖佐)(현종(顯宗) 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일성(日省)(숙종(肅宗) 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정하(正夏)(숙종(肅宗)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귀만(龜萬)(숙종(肅宗) 4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시경(始慶)(숙종(肅宗) 8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세익(世翊)(숙종(肅宗) 12년·정시(庭試)·병과(丙科)) 두남(斗南)(숙종(肅宗) 13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전(숙종(肅宗) 15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환(숙종(肅宗) 17년·증광시(增廣試)·갑과(甲科)) 중희(重熙)(숙종(肅宗) 36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유(숙종(肅宗) 36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도응(道應)(숙종(肅宗) 3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서귀(瑞龜)(경종(景宗) 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호(浩)(경종(景宗) 3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오응(五應)(경종(景宗) 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성(聲)(경종(景宗) 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도(영조(英祖)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려채(礪采)(영조(英祖)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홍택(弘澤)(영조(英祖) 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광국(光國)(영조(英祖) 1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가경(可慶)(영조(英祖) 1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영섭(永燮)(영조(英祖) 2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광위(光緯)(영조(英祖) 2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덕원(德元)(영조(英祖) 2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회원(會元)(영조(英祖) 27년·정시(庭試)·병과(丙科)) 중초(重楚)(영조(英祖) 2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재경(在敬)(영조(英祖) 2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중옥(重玉)(영조(英祖) 31년·정시(庭試)·병과(丙科)) 재성(在誠)(영조(英祖) 3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종구(宗九)(영조(英祖) 3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복원(復元)(영조(英祖) 4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경행(景行)(영조(英祖) 4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항광(恒光)(영조(英祖) 49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종경(宗敬)(영조(英祖) 50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회빈(晦彬)(영조(英祖) 51년·정시(庭試)·병과(丙科)) 종발(宗發)(정조(正祖)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우국(遇國)(정조(正祖) 6년·정시(庭試)·병과(丙科)) 복인(複仁)(정조(正祖)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명저(明著)(정조(正祖) 1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경(憬)(정조(正祖) 14년·알성시(謁聖試)·갑과(甲科)) 수신(秀臣)(정조(正祖) 20년·별시(別試)·갑과(甲科)) 유헌(裕憲)(순조(純祖) 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영묵(순조(純祖) 1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희유(羲裕)(헌종(憲宗) 1년·정시(庭試)·병과(丙科)) 회명(會明)(헌종(憲宗) 10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상룡(相龍)(고종(高宗) 3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정호(正浩)(고종(高宗) 4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벌열(閥閱)]
●상신(相臣)
: 김사형(金士衡)(태조조·좌의정(左議政)) 김질(세조조·좌의정(左議政)) 김수동(金壽童)(연산조·영의정(領議政)) 김자점(金自點)(인조조·영의정(領議政))
●공신(功臣)
: 김사형(金士衡)(태조조·개국(開國)1등공신(等功臣), 정종조·1차왕자난(次王子亂)1등공신(等功臣)) 김질(세조조·세조즉위(世祖卽位)3등공신(等功臣), 성종조·성종즉위(成宗卽位)2등공신(等功臣)) 김수녕(金壽寧)(성종조·성종즉위(成宗卽位)4등공신(等功臣)) 김수동(金壽童)(중종조·중종즉위(中宗卽位)2등공신(等功臣)) 김수경(金壽卿)(중종조·중종반정(中宗反正)3등공신(等功臣)) 김주(金澍)(선조조·종계변무(宗系辨誣)3등공신(等功臣)) 김시민(金時敏)(선조조·임진왜란(壬辰倭亂)2등공신(等功臣)) 김자점(金自點)(인조조·인조반정(仁祖反正)1등공신(等功臣)) 김련(金鍊)(인조조·인조반정(仁祖反正)3등공신(等功臣))
●문형(文衡)
: 김첨(金瞻)(선조조)
●호당(湖堂)
: 김수녕(金壽寧)(성종조) 김주(金澍)(중종조) 김홍도(金弘度)(명종조) 김첨(金瞻)(선조조) 김치(金緻)(선조조) 김구용(金九容) 김덕룡(金德龍)
●청백리(淸白吏)
: 김무(중종조) 김제갑(金悌甲)(선조조) 김홍도(金弘度)(선조조) 김시호(金時護)(선조조) 김수(선조조) 김시양(金時讓)(인조조) 김응하(金應河)(인조조) 김두남(金斗南)(경종조)
●장신(將臣)
: 김응해(金應海)(인조조·어영대장(御營大將)) 김중기(金重器)(숙종조·훈련대장(訓鍊大將)) 김선필(金善弼)(고종조·진무사(鎭撫使))
●명륜(明倫)
: (효행(孝行)) 김성추(金成秋)(증종사랑교관(贈從仕郞敎官), 정려(旌閭))
●문집(文集)
: 척약재집(김구용(金九容)) 선수집(選粹集)(김구용(金九容)) 주관육익(周官六翼)(김구용(金九容)) 백곡집(栢谷集)(김득신(金得臣)) 종유총지(終有叢志)(김구용(金九容)) 몽촌집(夢村集)(김수)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김시양(金時讓)) 하담집(荷潭集)(김시양(金時讓)) 읍계기문(김시양(金時讓)) 영모록(永慕錄)(김질(金質)) 육사자책설(六事自責說)(김질(金質)) 우암유집(寓菴遺集)(김주(金澍)) 송은집(松隱集)(김광수(金光粹)) 천사집(川沙集)(김종덕(金宗德))
출처 중앙일보 성씨의 고향
[출처] 舊안동김씨(安東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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