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李舜臣 : 임진왜란을 극복한 해전 영웅 이순신은 ‘海禁의 시대’에 해양 침략세력인 왜군을 맞아 해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활동 공간의 중심지(軍營)를 이동하였다.
이를 ‘좌수영 시기’라 칭하기로 하자. 다음에 이순신은 1593년 7월에 군영을 한산도로 옮겼고, 여기를 근거로 1597년 2월 6일 파직당할 때까지 해상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한산도 시기’라 칭하기로 하자. 그리고 이후 1597년 8월 3일에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자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과 해남 우수영을 근거로 명량해전의 승리를 이끌어내고, 10월 29일에 군영을 고하도로 잠시 옮겼다가, 1598년 2월 17일에 군영을 다시
고금도로 옮겨 11월 19일에 노량해전에서 전사당할 때까지 근거지로 삼았다. 이를 ‘우수영․고하도․고금도 시기’라 칭하기로 하자. 이제 이 세 시기를 중심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한 이순신의 활약상을 개괄해 보기로 하자.
1576년 32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權官에 부임한 이후 하급 무관직을 전전하면서 파직과 백의종군, 그리고 복직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왔던 이순신은 1591년에 진도군수와 가리포진첨사로 잇따라 보직이 변경되어 임지로 향하던 중,
돌연 전라좌도수군절도사라는 파격적인 승진 발령의 소식을 접하고 발길을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돌려 부임하였다. 그의 나이 47세의 일이었으니, 이는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柳成龍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임란 직전에 이순신은 왜란이 임박했음을 직감했음인지 1592년 3월 하순에 좌수영 앞에 鐵銷 가설을 완료하고, 왜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불과 며칠전인 4월 11일에는 거북선 건조를 완료하였다.
이로써 마치 임란의 발발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 직전에 방어전을 위한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바로 그 직후인 4월 15일에 왜군이 부산포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왜냐하면 왜군이 4월 14일 부산포를 상륙한 이후에 파격지세로 진군을 거듭하여 5월 3일에는 서울마저 함락 당했을 정도로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순신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상좌수사 朴泓이 좌수영을 버리고 도주해버렸고 경상우수영마저도 몰락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경상우수사 元均이 栗浦萬戶 李英男을 시켜 5, 6차례 이순신에게 급박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각기 분담한 경계가 있으니 조정의 명이 없이 어찌 마음대로 경계를 넘으랴” 하면서 짐짓 딴전을 부린 듯한 태도로 일관하였고, 이에 대해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 통곡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이순신의 속마음을 읽기가 더욱 어렵다. 후대의 역사가들도 ‘영남의 해로사정에 어두운 전라도 수군으로써 진군하는 것은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우호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당시 그의 부장 중에는 “우리 구역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타도를 구원할 겨를이 없다”는 입장을 피력한 자가 적지 않았고,
경상도 해역에 대한 파악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부장들의 의기투합을 이끌어내고 경상도 해역을 탐색할 최소한의 여유와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책임있는 장수로서 반드시 점검해야 할 절차였을 것이다.
만약 다급한 마음에 경거망동하여 곧바로 출전하여 만의 하나 참패를 당한다면 제해권은 몽땅 왜군에 넘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 결정한 이순신의 초기 출전 거절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냉철한 그의 판단력을 엿보게 한다. 급보에 접한 이순신은 통분의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 먼저 전라순찰사 이광, 병마사 최원, 우수사 이억기 등에게 공문을 보내어 보고하고, 좌수영의 방비 태세를 점검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쉽게도 4월 23일~30일까지의 일기가 빠져 있지만, 그 대신 4월 29일에 올린 이순신의 狀啓를 보면 당시 이순신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남의 도의 군사이니 그 도의 물길이 험하고 평탄한 것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또 작전을 상의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실패도 없지 않을 것이다.
소속 전함을 모두 합해 봐야 30척 미만으로서 세력이 매우 고약하다. … 그러니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전라우수영의 병력)이 다 도착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출항하여 바로 경상도로 출전해야겠다”고 한 구절이 그것이다.
이로 볼 때, 이순신은 출전하기 전에 경상도 물길에 대한 파악과 전력 보강이라는 두 가지 점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鹿島萬戶 鄭運, 防踏僉使 李純信, 興陽縣監 裵興立, 흥양출신 군관 宋希立 등이 결사항전을 다지며 출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이 賊勢가 서울에까지 박두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즉각 출전을 촉구하자,
이순신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中尉將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발할 것을 약속하고 이미 써놓은 장계를 고쳤다. 그리고 출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달아난 呂島 權官 황옥천을 붙잡아와 목을 베어 군율을 엄정히 하였다.
이로 볼 때, 부장들의 결전 의지를 극대화하고 엄정한 군기를 확립하려는 것도 출전 전에 이순신이 고심한 부분이었다고 하겠다. 이후에 네 차례의 출전에서 경상도 해역을 종횡무진 누비며 화려한 전공을 올렸다. 이 시기에 이순신이 승리를 거둔 해전은 다음과 같다.
왜 수군은 더 이상 바다에 나오지 못하고 경상도 연안지역에 ‘倭城’을 축조하고 여기에 머무르면서 수시로 주변 마을들을 노략질하는 소극적 전술로 전환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멀리 여수에 군영을 둔 상태에서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군영을 한산도로 옮기기로 하고, 1593년 7월에 결행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 이순신이 전라 좌우도, 경상 우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됨으로써, 한산도는 3도수군통제사영의 소재지로 승격되었다.
더욱이 1592년 8월부터 강화회담이 개시되어 다음해 4월부터 왜군이 철수해 남해안의 왜성에 집결하기 시작하면서, 대규모 해전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당항포 2차해전(1594년 3월 4일, 경남 통영군 회화면 당항리), 장문포해전(1594년 9월 24일~10월 4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과 같은 소규모의 해전만이 간헐적으로 있었을 뿐이었다. 그 동안에 조선 조정과 이순신 사이에는 치명적인 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할 것을 하명하였고, 이순신은 왜성이 농성해 있는 왜군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수군과 육군의 합동작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건의하면서 선제 공격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조정의 선제공격론을 지지하는 충청병사 원균의 주장이 있었고, 또한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왜군의 공작까지 겹쳐지면서, 결국 조선 조정은 1597년 2월 6일에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 직에서 끌어내리고 서울로 압송해올 것을 하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이순신의 ‘한산도 시기’도 막을 내렸다. 조정의 추상같은 재촉을 받아 무리하게 왜군을 공격하다가 저 칠천량해전(1597년 7월 16일, 경남 거제군 하청면 칠천도)의 처절한 참패의 주인공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조선은 수륙 양면에서 왜군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노출되는 극도의 위기 상황에 빠져들어갔다. 왜군은 임란 중에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판단하고서, 수륙 양면으로 전라도 공략을 우선적으로 감행했다. 그리하여 전라도의 관문이라 할 남원을 1차 공격 대상지역으로 설정하고서 육군은 함양을 통해서, 수군은 하동으로 상륙하여 남원으로 집결하였다.
그리고 남원을 함락시키고 전라도의 首府인 전주를 공략하여 함락시켜 나갔다. 이미 통제사영인 한산도는 적의 공격을 받아 잿더미로 화한 상황이었던지라, 이순신은 명을 받자마자 전라도의 순천과 보성을 거쳐 옛 부하들을 주축으로 군사들을 끌어모아 진도 벽파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이순신은, 왜군이 남원과 전주 공략에 여념이 없는 사이에, 남은 병선을 모아 수리하고 새로운 병선을 건조하면서 수군의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조정은 수군이 재기불능한 상황에 이른 것으로 판단하여, 수군을 포기하고 군사를 모아 육군과 합동작전에 나설 것을 이순신에게 종용하였으나, 이순신은 수군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끝내 수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1597년 9월 16일에 戰船의 숫자상 ‘10대 1’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서 역사적인 명량해전의 대승리를 이끌어냈다. 만약 이 해전의 승리가 없었다고 한다면, 왜 수군은 서해를 따라 북상하여 전라도를 장악한 육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돌이킬 수 없는 滅國의 화를 초래했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 해전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운명을 되살려낸 救國의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10월 29일에 우수영에서 서북 방향으로 후퇴하여 영산강 하구의 작은 섬 寶花島(지금의 고하도)로 본영을 옮겼던 것이 그것이다.
명량해전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왜 수군은 여전히 건재해 있었으므로 그들이 다시 총공격을 해온다면, 절대적 열세의 수군력으로 이를 재차 물리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음이리라. 戰線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겨울을 나면서 왜 수군과의 일대 격전을 치르기 위한 수군력 증강의 일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수군력 증강이 이루어지자,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에 고이도에서 다시 남동 방향으로 진군하여 울돌목을 지나서 강진만 하구에 위치한 고금도에 이르러 이곳으로 본영을 옮겼다. 비교적 넓은 농장도 있어서 본영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서남해 해양민들의 적극적 협조도 이순신에게 큰 힘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 참패 이전의 전력을 능가하는 수군력을 재건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 같은 해 7월에 명의 해군제독 陳璘이 5천여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고금도에 합류해 들어옴으로써 전력은 더욱 보강되었다.
이순신은 거만한 진린 제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명 연합수군의 전력을 극대화하는데 온 정성을 기울이면서, 왜 수군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한 준비를 순조롭게 진행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새벽녘에 彼我의 1천여척이 뒤얽힌 처절한 노량해전이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은 퇴각하려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왜선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마무리지어질 무렵에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고서, 7년여의 지루한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에 운명을 달리 했다.
그렇지만 그의 부장들과 그가 조직한 전라도 연해민들의 도움이 없었다고 한다면, 크고 작은 그의 승전의 기록들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이순신이 “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하여 호남인이 없었다면 조선의 수호는 불가능했을 것임을 토로한 바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이제 이순신의 연구는 물론 그를 따랐던 이 지방 출신의 부하들에 대한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5관의 장수는 순천대장 유섭, 흥양현감 裵興立, 광양현감 魚泳潭, 낙안군수 申浩, 보성군수 金得光 등을 말하고, 5포의 장수는 방답첨사 李純信, 여두권관 金仁英, 사도첨사 金浣, 발포가장 羅大用, 녹도만호 鄭運 등을 지칭한다.
그리고 본영의 장수는 본영우후 李夢龜, 본영군관 崔大晟․裵應祿․李彦良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순신이 해전을 치를 때, 中尉將 이하 突擊將에 이르는 諸副葬職에 편성되어,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 병졸들을 통솔하여 해전의 연전연승을 이끌어낸 주역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이순신의 손과 발이 되어 기적과도 같은 無敗의 勝戰史를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전쟁은 결코 혼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순신을 해전사의 영웅으로 칭송한다면, 그를 도와 전쟁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이들도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앞으로 이들에 대한 연구가 이순신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병행되어야 할 것을 지적하면서, 여기에서는 이들의 명단만을 군현별로 구별하여 정리해 두기로 한다.
예를 들어 정유년에 이순신이 3도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순천과 보성에 이르렀을 때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들이나, 명량해전 직전에 避亂民들이 100여척의 피란선을 이끌고 참전했던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모여든 사람들은 그 일부가 ꡔ호남절의록ꡕ에 입록되어 있으나, 입록되지 않은 인물들도 다수 있다. 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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