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그립고 사람 그리운 집, 화가 이청초의 ′청초산방′(글/사진/피재현_시인, 노암공방 운영) |
봉화 가는 길 봉화로 차를 몰았다. 낯설지 않은 길, 낯설지 않아서 여기저기 새로 생긴 길이며 못 보던 건물이 눈에 쉽게 들어오는 길. 봉화는 내 신혼집이 있던 곳이다. 1991년, 결혼을 하고 우리는 봉화 읍내의 곁방 한 칸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궁핍했으나 아름다웠던 봉화의 햇살과 눈길과 신록을 나는 기억한다. 봉화를 떠나오면서 언젠가 인연이 되면 여기 어디쯤 다시 와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곳. 청초산방이 봉화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청초라는 사람이 여러 해 전에 봉화에 흙집을 짓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여러 군데서 들었던 터인데, 지난해에야 한 행사장에서 인사를 나눴다. 그날도 행사장 천막 아래서 국수 한 그릇 나누고 종이컵에 막걸리를 부어 그이와 건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는데 그는 “언제 술 한 잔 해요”라고 인사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알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 시 쓰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술적이지 않은 사람들까지.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청초와 술 한 잔씩 나눈 사이였다. 친구다. 묘한 소외감 같은 것? 슬그머니 그런 감정이 생길 즈음, 나는 그와 술 한 잔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청초산방 집은 비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청초산방은 원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한옥 한 칸과 새로 지은 둥근 흙집 한 동, 이렇게 두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앉은 지껄에 작은 연못을 파 연꽃이며 수초들이 자라고 뒷 산에는 제법 등걸을 굵히고 있는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손수 새긴 청초산방 목판은 벽에 걸려있지 않고 아무렇게나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들어가는 현관 실내에는 ‘술 그립고 사람 그리운 집’이라는 서각 작품이 하나 덜렁 걸려 있다. ‘청초산방’에 대한 뜻풀이인 셈인데, 술이라는 단어에 역시 그답다 생각하다가 두 번 반복되는 ‘그립다’라는 말에 마음이 짠해진다. |
신상 털기 1999년 봉화로 전근을 와서 2004년 퇴직을 했다. 퇴직을 하면서 고향인 예천에 가서 살 생각도 했지만 동무도 몇 안남은 고향 가서 뭐하겠냐 싶어서 그냥 정든 술친구들이 있는 이곳에서 살기로 했다고 한다. “남들은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무슨 짓이냐고 그러지만 사실 저는 20년을 기다린 거지요. 20년 지나야 명예퇴직 요건이 되거든요. 그래서 딱 20년 4개월하고 사표를 썼습니다.” 말 해놓고 그도 나도 웃는다. 나도 공방을 한답시고 앉아 있으면 찾아오는 사람들 마다 ‘부럽다’를 연발한다.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은 누구나 있는데 그렇게 살지를 못하는데 당신은 어찌 그리 사시오 부럽소 하는 말인데, 그 말을 들으면 참 마음이 무거워진다. |
전국순회전시를 다니는 까닭 “우선은 제가 몇 년간 공부한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청초라는 사람이 저런 그림을 그리는 구나. 저런 글을 쓰는구나 하는 걸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전시회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힘이 있어요. 시작할 때와는 달리 마칠 때가 되면 내가 뭐가 부족한지 보이기도 하고 새롭게 그리고 싶은 것들이 생기기도 하지요.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술 한 잔 하는 재미도 있구요.” 비용 걱정 돼서 나는 전시회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그는 몇 가지 노하우를 가르쳐준다. 서울 인사동이나 전문화랑은 하루에 대관료가 백만 원씩 한다. 그러나 요즘은 문화시설이 많이 생겨서 공공기관이나 종교시설 등에서 운영하는 갤러리는 일주일에 이삼십 만원이면 대관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도록을 따로 찍지 않고 엽서형태로 찍으면 인쇄비도 얼마 들지 않으니 근근이 전시회를 이어갈 수는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그는 카카오스토리 같은 공간을 통해 전시회 홍보를 한다. |
꽃, 여자, 개구리, 그리고 술병 “술 그림을 그리다보면 옛날 추억들이 생각나요. 술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와 동네 이웃들을 떠올리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되지요.” 술은 그에게서 창문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캄캄한 청초산방의 커튼을 열듯 막걸리 한 잔 하고 나서면 눈에 들어오는 새와 꽃, 나무와 봄비... 창 밖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나서는 쪽문이기도 하고 그리운 아버지를 재회하는 회상의 창이기도 한. 그래서 깨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또 마셔야만 하는. “전통기법이나 소재에만 연연하면 안될 것 같아요. 그림을 배우고 그리는 것도 그래요. 정해진 패턴만 너무 존중되고 있어요. 개성이나 창조성이 더 존중되어야 하고 자기 방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그림 그리는 작가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해요.” 어쩌다 그림 한두 점 팔면 술값하기도 바쁜 그도, 둘이 앉아 세어보니 어느덧 산방생활 10여년이다. 지칠 만도 하다. 그런데 그는 아주 긍정적이다. 아내에게도 큰소리를 친다고 한다. “보험 넣지 말고 나한테 투자해라. 그게 훨씬 투자가치가 높다” 앞으로 그림을 그려도 지금보다 더 잘 그릴 거고 그림이 팔리기로 쳐도 더 높은 가격에 더 많이 팔릴테니 보험 넣는 것보다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카운슬링인데, 나는 왜 그 말을 듣고 덩달아 힘이 나는 걸까? “남들은 술 먹고 싶을 때 술 먹고 그림 그리고 싶을 때 그림 그리면서 사니까 좋겠다고 그러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술 먹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허허 참……. 술친구 되기 |
첫댓글 늘 사람 그립다 하시더니, 참으로 좋은 벗을 사귀셨습니다.
피재현 시인의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글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