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이동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B.M.)
Heidelberg Universitat (Magister)
Tubingen Universitat (Dr.Theol.)
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선교학
hs2joo@acts.ac.kr
Postmodern 신학을 한국 기독교에 최초로 소개한 사람은 '부활'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던 홍정수 박사였으며, 그가 감리교단에서 출교 당할 때에, 이 불행한 사건에 관해서 그는 자신의 Postmodern 신학 때문이라고 공표 하였다. 그러나 Postmodern 이라는 개념의 뜻은 정확히 파악되고 있지 않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Postmodernism을 Modernism 과 비교하여 그 낱말의 뜻을 명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Postmodernism 은 이미 한국에 익숙해진 외래어이기 때문에 제목을 외래어로 잡았으나, 내용은 '탈현대주의'로 기록해 나가고 있다.
1. 현대의 시기와 특성
현대(Modern) 이라는 개념은 1880년에 자주 사용되었으나 Adorno의 주장으로는 1850년으로 앞당기고 있다. 그때에 Habermas 는 현대와 탈현대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같은 때에 예술 분야에서도 그것이 문제가 되었고, 또 그 때에 가톨릭 내부에서도 현대주의(Modernismus)가 충돌을 빚었다.
일본의 K. Kondo 박사는 Troeltsch의 다원주의를 예로 들어 '현대'적인 특성이 절대 이성주의나 전체 지향적인 것만이 아님을 주장하며, 현대 문화적인 다원성과 복수성을 지목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 개인주의 외에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인 자유는 '현대'의 가장 큰 업적으로 고 있다.(미주 1 참조)
반-탈현대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Habermas도 다원성이나 임의적 성격이 탈현대적 독특성이 아니라, 이미 현대적인 특성 내지 전 현대적인(prämodern) 하부 복합성(Unterkomplexität)일뿐 (미주 2 참조) 탈현대의 시작이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하며(미주 3 참조) 현대주의를 변호하고 있다.
중요한 현대주의적 특성은 바로 불란서의 파리 대학 철학 교수인 J.-F. Lyotard의 Meta-이야기(Meta-Erzählungen)에서 드러난다. 그는 1979년 미학과 사회학으로부터 처음으로 탈현대주의를 철학에 수용한 사람인데, 그가 'La condition postmodern' 이라는 책을 쓰게 됨으로서 탈현대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Lyotard의 'Meta-이야기'란 현대를 지배하던 두 개의 '큰 이야기'(große Erzählungen)로서, 역사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의 사변적인' 역사철학'을 말한다.(미주 4 참조) 즉 세계를 통일하고 획일화하는 허무한 신화 같은 헤겔주의와, 다 붕괴되어 버린 마르크스주의를 일컫는 말이다. 이 두 이야기가 끝나면서 통일성과 획일화는 섬뜩하고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고, 그로 인해 현대주의는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미주 5 참조) P. Koslowski 는 헤겔의 철학을 영지주의(Gnostizismus) 내지 현대 이단이라고 규명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신이 되는 과정의 일부(der Mensch als Teil des Selbstwerdungsprozesses Gottes) 라고 하는 것 때문이다. 그는 또 마르크스를 헤겔의 영지주의에서 생성된 유물주의적 이단으로서'기독교 이단의 이단'이라고 하며(미주 6 참조) Koslowski는 이러한 현대주의를 하나님을 철저히 세속화하고 인간을 철저히 신격화했다고 비판했다.(미주 7 참조) 인간이 절대자가 되는 이론 때문에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 영지주의적 요소를 발견한 Koslowski 는 Meta 이야기를 신화라고 호칭한 Lyotard를 치하한다.(Ibid., p.75.) Koslowski 역시 '재신화화'(Remythologi-sierung) 내지 무신론적이고 파괴적인 신비(dekonstruktivistische Mystik)가 탈현대주의 속에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현대의 '거대한 이야기'는 끝났고, 일원론적 영지주의도 극복했다고 보았다.(미주 8 참조) 그러나 Koslowski를 비판하면서 현대와 이성의 절대 주권을 동일시 하는 것은 '현대' 개념을 너무 축소시키는 것이라고 본 것은 옳은 것이다. 실재로 현대는 탈현대적 요소인 다원성을 이미 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Lyotard 역시 탈현대를 현대화의 단절도 아니고, 새 시대도 아니라고 하며, 탈현대는 다만 현대의 유일성이나 전체성을 철거하고 교정하여 이성의 자율성과 다원성을 인정하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W. Welsch 는 Lyotard 의 탈현대주의를 '철저한 다원성'(radikale Pluralität)내지 '철저한 현대'(radikale Moderne)라 규정하고 그를 또 반-전체주의자(anti-Totalitär)라고 부른다.(미주 9 참조) 현대의 전체주의적 동향은 1960년대에 성행했던 개신교의 세속화 신학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20세기 세계 선교학계에 'Missio Dei' 신학을 발전시키고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J. Hoekendijk 은 아래와 같은 탈 기독적인 사상을 토대로 새로운 선교신학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회철학자 A. Weber의 산업사회 시대의 '단일인간 형태'(미주 10 참조) 에 관한 이론을 따르게 된 것이다. Hoekendijk은 '제4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간 형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미주 11 참조) 제4인간이란 아직 이름이 없는 숫자로서 기독교 이후, 교회 이후, 시민 이후(부르주아 이후), 개인 이후(Bockmühl,. K . pp.18f.)의 인간 형태이다. '기독교 이후'(post-Christian)라 함은 기독교 세계는 더 이상 생활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세계로서 부흥회 같은 것은 포기해야 되고, 오히려 'Missio Dei'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Hoekendijk,. J. C. pp. 51f. 209.) '교회 이후'라 함은 교회의 안과 밖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특징을 말한다. 그러므로 전도의 기관은 가능한 한 교회와 같이 보이는 모든 것에서 멀리 자신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이후' 라 함은 제4인간에게 무의미한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자들이며, 이들은 부르주아 형식으로 믿음이 표현된 자들이며, 이런 교회 양태는 바뀌어야 한다고 한다. '개인 이후'란 과거에는 개인적인 결단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집단 사업으로서 전체 이웃을 위한 전도이어야 하며, 따라서 강력한 상황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업은 예를 들면 프랑스의 무산계급에서 시도한 '선교'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종교 이후'의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간 형태에게는 무종교적인 형식으로 복음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첨부한다.(Ibid, p .48-61.) Hoekendijk이 비기독교 지역에 교회 세우는 일을 비판하면서, 기독교 지역과 비기독교 지역, 신자의 지역과 불신자의 지역을 따로 구별하는 재래적 선교관을 비판한다.(미주 12 참조) 이러한 그의 일원론적 역사관은 현대주의적 유토피아 사상과 병행된다.
Hoekendijk와 동시대인으로서 해방신학의 상징적인 인물 G. Gutierrez역시 문화혁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하고, 총체적이며 유토피아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온 인류 내지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주장한다.(미주 13 참조) 이러한 세계관 역시 현대주의는 1968년부터 WCC의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M. M. Tomas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1948년 총회 때로부터 이미 교회가 민족들의 자유 투쟁(Freiheitskampf)에 참여할 사명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1961년 제3차 Neu-Delhi 총회에서는 우리 시대에 교회를 혁명들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 아니라고 하며, 교회는 세속 이념들로부터 억제될 것이 아니라 세속 이념들을 증거의 도구로서 사용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Ideologie들을 신적 언약의 도구로 보았던 것이다. Tomas는 제5차 WCC (1975 나이로비 )에서 인류 연합을 위한 '투쟁의 영성' (Spritualität des Kampfes)에 대해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적이건 도덕적이건 문화적이건 간에 사람을 종속시키는 모든 연합을 파괴하고 더 성숙한 연합을 위하여 남녀를 해방하며, 이 연합이 다시금 종속적으로 되어지면 또 다시 파괴해야 한다고(미주 14 참조)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는 Nairobi 대회의 복음적 주제를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투쟁으로 해석한 것이다. 지면상 다 예를 들지 못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수용한 위와 같은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1966년에 발족된 WCC의 혁명신학에 의해 전체 지향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동향은 제3세계 교회로 침투되었고, 1971년에 창립된 WCC내의 '대화 프로그램'역시 세계 공동체를 형성할 목표를 두고 이룩한 종교 다원주의 운동이다. 이상과 같이 '현대주의'는 획일적이던지 다원적이던지 모두 핵무기 발달과 자연재해로 인한 인류 말살의 위기감을 가지고 함께 살아남기 위한 세계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줄기차게 노력하였다.Koslowski가 현대주의를 하나의 Ideologie로 본 것은 타당하다.(Kosloswski. P., p.70.)
다른 한편으로 현대주의는 카톨릭 내부에서 교회적 권위와 충돌하게 되었다. 현대주의란 19세기말에 이탈리아에서 현대주의 비판자들에 의해서 호칭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을 변혁하고, 카톨릭 신학자들이 절대적인 학문의 자유를 요청했던 급진적 자유주의로서, 가톨릭 교리와 종규에 위기를 몰고 왔었다. 그러므로 교황 피우스 10세는 본래적인 교리와 종교가 파괴되는 것과 악의 유포를 막기 위해서 1907년에 현대주의 65개 조항을 엄격히 정죄하였다. 이러한 정죄에도 불구하고 유포되는 사상 때문에 1909년에는 모든 성직자들에게 반현대주의 서약을 요구하였다.(기독교 대백과사전16, 기독교문사 1989, pp.462-465.)
그러나 제2차 바티칸 회의는 과거의 입장과는 다른 새로운 선언을 하고 있다. 그것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타종교들을 구원의 길 내지 참된 종교로 인정한 것이다.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잘못에 대한 대답으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이나 악이란 무엇인가?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참 행복의 길은 무엇인가? 사망, 형벌, 보응은 무엇인가? 우리 실존의 궁극적 비밀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해 주고, 인간 속에 있는 불안에 대해 교리와 규범과 성례를 통해 길을 제시한다고 하였다.(미주 15 참조) 기독교 진리는 유일하지 않다는 것이며, 힌두교는 우리를 제한에서 해방하며, 불교는 가장 높은 경지, 즉 완전 해방에 달하게 된다고 진술한다. 특히 무슬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하며,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는 못하나 선지자로 공경하고, 성모 마리아를 존경하고, 하나님의 심판날을 기다리며, 기도와 적선과 금식을 도덕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함께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위해 힘 쓸 동반자로 제시했다.(Ibid ., pp 356f) 바티칸은 타종교가 기독교와 같은 구원의 길이라고 명시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배타주의를 포기하고, 타종교를 진리와 해방의 길로 인정함으로서 종교 다원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람과 화목하셨으므로 , 선교의 목적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일하기 위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Ibid ., p.351.) 그러므로 현대주의적 다원적 세계공동체 지향적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적인 제시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2. 탈현대의 시기와 특성
1985년 탈현대주의는 연극, 무용, 음악, 예술, 건축, 문학, 철학, 심리학, 자연과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났고, 그 특징은 불확실성, 파편성, 표준의 해체, 자아 상실, 기반 상실, 명시할 수 없고, 풍자적이고, 불순하고, 카니발이며, 참여, 짜 맞추기, 내재성, 다양성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Welsch, W., Wege aus der Moderne, p.21.)
1991년 7월9일자 조선일보는 탈현대주의의 특징을 괴이하거나 새로운 것, 대중적인 것, 예술의 자율, 합리성을 포기한 문화 현상, 초현실주의, 무정부적 경향, 기괴한 행위, 수평적 해체주의, 불손, 천박성, 생활 세계의 자율성, 시민사회의 다원성, 평등, 참여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1983년 Adorno 회의에서 하나의 요괴(미주 16 참조)로도 묘사한 탈현대주의는 실상 1870년 영국 Salon 화가인 Chapman이 그 친구들이 그린 가장 진보적인 그림을 탈현대미술로 비판한 일이 있다.(Ibid , p.7.)
그후 100년 후인 1969년에 문학잡지Playboy에 실린 Leslie Fiedler의 탈현대적 논문에 관한 논쟁이 수록되었다. 그 기본 형태는 언어의 다원주의로(미주 17 참조) 묘사되고 허구와 사실, 신화와 현실, 꿈의 세계와 기계의 세계가 병행되고 있다.
그 후 건축 분야에서 탈현대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영국으로 귀화한 미국인 Charles Jencks이다. (1975) 그는 Fiedler 의 개념을 건축에 적용시켜, 여러 형식의 건축양식을 혼합한 것이다.( Ibid , p .38f.) 탈현대적 음악 형태는 장조와 단조가 파괴되고 불협화음, 또는 전적 침묵 등으로 연주된다.(Ibid, p .48.)
이러한 다양성을 H. J. Türk가 생각 없는 (임의의) 다수 (gedenkenlose Viel- falt)(Ibid, p 41f) 라고 칭했듯이, 일치 내지 전체 지향적인 현대적 요소를 완전히 떠나서 이미 현대주의의 내부 구조였던 다양성만이 더 확실해지고 철저해진 것을 탈현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탈현대주의 공통성이란 오직 공통분모가 없는 다원성이다.
다원주의의 한 현상으로서 Kondo 박사가 현대주의의 장점을 민주주의로 본 바와는 달리, W. Welsch 는 탈현대주의의 장점을 민주주의로 보았다.(미주 18 참조) 현대주의가 전체 지향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탈현대주의는 개체성(Individuum )을 인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탈현대주의로 보는 Welsch의 견해가 좀더 객관성이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민주주의가 탈현대주의의 범주에도 들어맞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Koslowski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헤겔과 마르크스적인 역사철학적 유토피아는 파멸되었다. 사실상 구소련의 붕괴 이후에 비합리주의(Irrational- ismus)가 탈현대주의 속에 등장한 것이다.(Koslowski P., pp., S.39-41.)
처음으로 탈현대주의 신학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전 감신대 홍정수 교수의 번역 작품을 통해서이다. '근대 후기'라고 번역된 '포스트모던'의 특징은 번함(F. B. Burnham) , 벨라(R. N .Berllah). 슈나이더(S. M. Schneider), 윌리암스(R. D. Williams)와 현대의 '상실된 통일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온의 언어를 다시 배우고 성서 문화를 복구하자는 린드백(G. A. Lindbeck)에 의해서까지 공통적으로 제시된 것은 바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이다.(Birnham, F. B., 『포스트모던 신학』, 홍정수역, 세계신학연구원, 조명문화사,1990.) 밀러(J. Miller)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을 철저한 상대주의와 불확정성과 주관성 및 참여라고 한다. 모든 지식을 문화적 가공물로 보고 지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으로 본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은 역사적이며, 불완전하다. 새로운 체계가 과거와 비논리적인 관계에 있더라도 상관이 없다. 이들에게는 진리의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Miller, J. B. '근대 후기 세계의 출현', pp.35-41.) 세계관이 다르고 구원관이 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다원주의가 탈현대주의적 성격이다.
J. Miller가 무로부터 창조를 부인하면서 하나의 기독교인으로서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세계'와 '지금도 계속 창조되고 있는 과정'(Ibid, p.42.)을 동시에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진화든 창조든 그에게는 아무 것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탈현대주의는 부정확성, 철저한 상대주의, 다원주의, 탈 경전성, 탈 규범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빈 무덤을 부정하면서, 부활의 의미를 '후천 개벽'이나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의 시작'이라고 풀이하고(크리스천신문, 1990, 11, 17.) 부활의 뜻을 광주 사태가 민주 항쟁이 된 것, 망월동 원혼이 되살아나고, 그들에 의해 세상이 새로워지는 것 등으로 풀이하게(한몸, 세계신학 연구원 1990, 여름 p.19f.) 된 원인이 바로 탈 현대주의 탈 규범적이고 탈 경전적인 성격으로 인한 것이다. 탈 현대주의의 해체주의적 성격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핵심이 파괴되어도 무감각한 철저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탈현대주의와 나란히 유행한 코페루니쿠스적인 신 중심주의적 종교 다원주의 신학도 동일하게 해체적이고 탈 규범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적 신 중심주의 모델로서 한신대 김경재 교수는 하나님을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세상 종교들을 그 산정에 오르는 등정들로 보며, 다른 종교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음을 인정하라고 권한다.(동아일보 1991, 11. 22 제12면.) 그는 니터(P. Knitter)의 입장과 같이 하나님의 나사렛 예수 외에 다른 곳에 계시 할 수 없다는 독단을 극복하라고 말하고, 다른 종교는 일반 계시에 의존하고 기독교는 특수 계시에 입각했다는 학설을 '기독교 우월감'이나 '계시 이분법'이라고 거절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자체는 절대적이지만 그 계시를 받아 응답하는 종교 응답, 제의 , 상징, 교의 , 신학은 문화 역사적 삶의 자리에 따라 다양하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온누리신문 (특집) 1991. 12. 7 제4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의미하는 신 중심주의 모델을 주장하는 이정배 교수 역시 '신학은 이제 교회 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넘어 신 중심주의 또 우주, 생명 중심주의에로 자신의 사유 모형을 급격히 전환시켜 나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니터의 말을 인용하여 '지평적인 융합'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가 이슬람교의 유일신적 하나님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미주 19 참조)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다신 숭배자요 우상 숭배자라고 비방하는 '이슬람교의 유일신관'을('Der Koran', 9. Sure 5.)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정배 교수는 또 궁극자와 유한자를 구별하는 기독교는 브라만과 아트만 사이의 비이원론적으로 보는 직관력을 필요로 한다고 함으로써,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과 비인격적인 궁극자 브라만을 억지로 통일시켜 혼합주의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비인격적 힌두교의 직관력을 기독교에 수용하여 창조주와 창조물을 일원론적으로 통일하는 범신론적 신인 융합의 사상에 기독교를 통일시킴으로서 인간 신격화를 꾀하는 종교 혼합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직선적인 기독교 세계관과, 창조주도 없고 종말론도 없는 원형적인 힌두교적 세계관을 어떻게 통일하겠다는 것인가? 이정배 교수는 가톨릭교도 시인 김지하의 글을 인용하여 '하늘은 연합하고 있는데 왜 이 땅의 종교인들이 하나가 되고 있지 못할까?'라고 탄식 하기도하고, 예수의 삶과 죽음을 하나의 비유로서 이해해야 할 것을 주장하여(이정배, pp.95-97. 9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실제성을 부인함으로서 기독론 뿐 아니라 구원론도 일체 상대화하거나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사고는 전체 지향적인 현대주의적 혼합주의와 탈 규범적이고 해체적인 탈현대주의적인 사고를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현대적 사고와 탈현대주의적 사고의 공통분모는 현대주의의 뿌리가 되는 이성 만능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대의 전체주의적 성격과 탈현대의 해체주의적 성격은 J. Hick의 사상에서도 발견된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 모델에서 벗어나 소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에 의한 신 중심 모델을 제시한 J. K. Hick은 모든 종교의 배후에 하나의 신적 실재가 있고 모든 종교적인 표현을 상대적으로 본다.(Knitter, P.,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변선환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pp.239-241.). 그러므로 그는 모든 종교의 공동 내용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을 유신론적 해석이라 하여 거부하고, 불교 같은 종교에 적합한 '실재하는 것은'(the real)또는 '참된 것'(the tru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Ibid. p.397 주 9.) 이에 따라 기독론도 재해석되고 예수가 자신을 신의 아들로 자칭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의 아들'이란 다만 유대교의 '신의 아들' 이미지에서 발전한 신화와 은유라는 것이다.(Ibid. pp.244f. 박성용, '존 힉의 종교신학 연구', 『종교 다원주의와 신학의 미래』 종로서적 1989, p354.) 이러한 '신의 이미지'는 그에게 있어서 '야훼, 알라, 크리슈나, 파람, 성육신, 브라만, 니르바나'이며, 세계 종교들이 다 하나의 신적 실재에 대한 응답들이라는 것이다.(박성용 , 345-348.) 그는 또한 선재하는 로고스와 수육과 동등한 방법으로 '선재하는 불타의 수육'론이 발전했다는 '불교적 성육신'론을 펴고 있다.(Ibid, 353f.)
이와 같이 Hick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을 다 부정하고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기독론을 배척한다. 그는 우리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공존을 믿는 다면 그것은 이단이고 또 그의 수육을 문자적으로 믿어도 이단이라고 선고한다.(나학진, '다종교 상화에서의 기독교', 목회와 신학 1991, p.154.)
이것으로서 우리는 존 힉의 코페르니쿠스 적인 신 중심주의와 종교 다원주의가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한 것과,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길을 차단해 버린 마귀적인 구상임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설명하고 싶은 것은 종교 다원주의와 문화의 다원주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할 점이다. 기독교는 계시를 바탕으로 한 종교이지 인간 문화의 소산물이 아니다. 참 기독교인이라면 갈1:6-9 말씀과 같이 복음의 절대성을 시인하며, 고전 9:19이하의 말씀처럼 문화의 다원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현대주의나 탈현대주의의 유행 신학에 따라 기독교 복음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잘 보존해야 할 책임이 신학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복음의 탈현대적 해체적 성격은 1991년 2월 7일부터 호주 캔버러에서 열린 제7차 WCC총회에서도 공개된 탈현대적 해체적 성격을 띈 새로운 성령론이다. 특히 이번 총회에서 이화여대 정현경 박사가 발표한, 버림받은 애굽인 하갈의 영으로부터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잔다크의 영, 원폭 실험 지대에서 녹아 버린 어린이들의 영, 인간의 탐욕으로 약탈당하고 파괴되고 착취된 땅과 공기와 물의 혼 등 십자가에서 착취당하고 죽임을 당한 우리의 형제인 예수의 영과 더불어 20여 가지의 한 맺힌 영을 초청하고 초혼문을 적은 창호지를 불태워 하늘에 날려보내면서 시작한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제목의 강연은 성령과 사령을 구별하지 못한 무속 신앙적 혼합주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1991년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린 신학정책 협의회 강연장에서 '죽은 사람의 영과 성령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라고 묻는 필자의 질문에 둘 사이의 관계는 '붉은 장미와 그 향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 속에서 울부짖는 하나님의 영과 역사 속에서 울부짖는 목소리의 표현이다. 그러나 억울한 영이 성령은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개념적인 이해를 전제로 분석하면 정박사의 성령론은 첫째로 강신론(Spiritism)이다. 그가 무당적 춤과 초혼제로 만신(한 맺힌 사령들, 동식물의 영들, 땅, 공기, 물과 같은 자연 영들)과 함께 성령을 불러들인 후 강연을 시작하고, 또 무당적 천 가르기 한풀이로 강연을 마쳤는데, 신학정책 협의 회장에서 그는 그의 춤을 Medium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그는 '우리 모든 조상들이 여기 우리들에게 출연하여 여러분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며 귀신들이 실제로 강연장에 초청된 것으로 전제했다.
둘째로 범신론(pantheism)이다. 그는 성령을 기(氣)와 동일시하면서 이 사상을 안병무 박사에게서 전수한 것이라고 한다. 기는 생명의 호흡이고, 생활의 에너지이며, ruach, 창조의 영, 하늘과 땅과 인간을 조화시키는 영으로써 분리의 벽이 파괴된다고 한다. 그는 기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설명한다. 이 기가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성 차별주의(Sexism)다. 그는 성령을 여성신으로 생각한다. 그는 관세음보살은 전쟁의 신인 남성신에 반하여 자비와 지혜를 지닌 동양의 여성신임을 강조한다. 성령의 사상이 관음으로부터 왔다고 하며 '그녀를 맞으라'고 한다. 그는 후기 불교에서 발전된 타력구원 사상의 신화적 인물인 관음보살을 역사적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혼동하는 엄청난 과오 속에 빠져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니케아 신조(381년)는 하나님의 영이며, 동시에 아들의 영인 성령을 단수이며 중성으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정 박사는 근거 없이 그의 sex motive에 의해서 성령을 여성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여신의 상징인 땅을 숭배한다. 이 땅을 '거룩한 땅', '성령의 땅','우리 어머니의 땅'이라 하며, 군중들로 하여금 모두 신발을 벗게 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여신은 땅이고 , 성령이고, 관음보살이다. 이렇게 그는 성령을 모든 피조물, 사령, 동물영, 자연영, 기, 여신, 보살과 동일시함으로써 복음적인 신앙을 버리고 혼동의 영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성경적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행 1:8),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영(고전12:3),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영(요16:3),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다. 그러나 정현경 박사의 탈현대주의적 성령론은 자기 동질성 상실과, 기준 없고 임의로운 해석으로 말미암아 여신, 보살, 기(氣)등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이와 같이 신학자들이 스스로를 탈현대주의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현대는 탈현대주의 사상으로 만연해 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Gianni Vattim은 탈현대적 성격을 근본부터 이질적인 요소를 수용하되 통합하지 않는 점으로 지적했다.(Welsch, W., Unsere Postmoderne Moderne, p.138.)
Dieter Kemper는 탈현대주의를 현대주의의 계승이며 동시에 그것의 배반으로 , 미의 추구이며 동시에 미에 대한 마비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파멸의 암시이다(Welsch, W., Wege aus der Moderne, p.28f. Wahrnehmungen katastrophischer Tendenzen.). 탈현대를 더 파괴적으로 보는 사람은 Jaeques Derrida이다. 그는 탈현대적 다원성을 현대적 바벨탑의 파괴에 비교하며, 그것을 죽음의 의미로 풀이한다(Welsch, W., Unsere Postmoderne Moderne, pp.150-152 Anm. 43.). 탈현대를 이보다 더 비참하게 보는 사람은 Jean Baudrillard이다. 그는 어떤 개혁이나 희망이 없는 꿈을 상실한 이미 닥쳐온 미래의 불행에 대해 진술한다. 그는 Postmoderne을 Posthistoire라는 개념으로 대치하고 종말적인 유토피아는 이미 도래했기 때문에, 이젠 종말도 없고 어떤 희망도 없다는 흑색 진단을 내렸다.(Ibid ., p.150-152. 주 43.)
결어
현대와 탈현대의 특성을 간단히 정리하면 '현대'는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완성하고자 하되 그 범위는 전 우주를 다 포괄한다. 그 전체 속에 탈현대적 요소인 차이점과 다원성을 함께 품고 있었다. 그러나 탈현대주의에 와서는 그 포괄성을 벗겨 버리고 철저한 다원주의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탈현대주의는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 임의성과 자율성을 허용한다. 어떤 규범이나 비판도 가하지 않는 무한대의 학문의 자유와, 윤리적 자유, 정치적 자유,
교리적 자유... 그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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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Welsch, W., Wege aus der Moderne, Weinheim 1988, p.18.
6. Eine Häresie einer Häresie des Christentums.
7. Koslowski, P., pp.126f, 133-136. radikale Verweltlichung Gottes, radikale Vergöttlichug des Menschen.
8. Ibid., pp.75f. 80.137. Koslowski 는 기독교를 신화나 우화가 아닌 역사적 전승으로 보고 있다.
9. Lyotard, J.-F., Die Moderne redigieren, in: Wege aus der Moderne, hg. v. W. Welsch, Weinheim 1988, pp.205-213. Türk H. J., pp.66f.
10. Bockmühl, K., Was heißt heute Mission?, Giessen 1974, p.15.
11. 제3인간은 '시민 시대'(bürgerliches Zeitalter) 인간이며 유럽 정신 속에 구현된 고대 희랍-로마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산물이며 '교회 주변'을 형성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J. Hoekendijk,『흩어지는 교회』. 이계준역, 대한 기독교서회. 1988, pp.47.1).
12. Hoekendijk, J. C. Bemerkungen zur Bedeutung von Mission, in: Mission als Struktur-prinzip, Genf 1965, p.32.
13. Gutierrez, G., Theologie der Befreihung, München 1982,p.107.
14. Krüger, H./ Müller Römheld, M., Bericht aus Nairobi, Frankfurt 1976, p.251.
15. Rahner, K. (Hg.), Kleines Konzilskompendium, Freiburg 1984, p.355.
16. Ibid., p.4 Anm.6. 'Ein Geist geht um in Europa - das Gespenst des Postmoderne'.
17. Turk, H. J., p.38. Pluralismus von Sprachen 또는 Mehrsprachigkeit
18. Welsch, W., Wege aus der Moderne, p.39. 'Postmoderne ist so radikal, daß sie nur demokratisch gelingen kann.'
19. 이정배, '다원주의 기독교와 토착화 신학'. 신앙과 신학 8., 대한 기독교서회 1991, pp.95. 99.
자료출처 : 이동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선교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