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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제7화)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리라.... .....
┗▶ 이글은 2000년도 구미시 자원봉사대회 최우수작 대상으로 선정된 글입니다.
끝까지 읽어보시구요 제가 더욱더 밝고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는데 최선을 다할수 있도록 따듯한 격려 부탁드립니다. .........
글. 머리에 !
진정 오늘날 내가 이렇게 살아 숨 쉴 수 있게 하여준 부모님 !
그리고 선후배 제위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펜을 들어봅니다.
그러나 막상 펜을 들고 보니 행여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역겨움이나 분노를 자아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저려 옵니다.
생각 하면은 이제 영원히 추억 속으로 묻어 두고 싶기도 하고 또한 나의 모든 치부를 들어내어 보이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망설이 다가 용기를 내어 봅니다.
말없이 흘러 버린 지난날들을 추억으로 묻어 두기엔 너무나 숱한 사연들이 많아 못내 아쉬움 을 남게 합니다.
참으로 이사회와 수많은 분들께 물심양면 많은 도움으로 조그만 결실을 맺었다 하여 보잘 것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이 어쩐지 건방진 생각 같고 정말 나보다도 진정 어려운 처지에서 지금도 열심히 강의에 열중하고 있을 우리 상록학교 많은 자원봉사 선생님 및 학생들을 생각하면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의 고난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쁨이 있고, 오늘의 기쁨이 곧 내일의 영광으로 이어 지리라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본인은 행여 이 글이 비록 보 잘것 없는 졸.작이 될 지 언정 아름다운 사회 보다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는데 미료한 글 이나마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고자 저의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하여 지금도 전국 어디에서 홀로이 투쟁 하시는 모든 독학생 여러분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용기를 심어 주고자 이 글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우리들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들의 참 사랑이 스며 있습니다.
그늘진 곳에서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모여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고 읽으면서 우리의 지난날을 잠깐 뒤돌아보고 다시 한 번 반성과 분발의 계기를 삼아 밝아 오는 내일을 준비하고 설계하고 싶은 충동에서 감히 펜을 들었으니 넓은 이해와 관용을 바라겠습니다.
읽으시는 분들께 !
행여 문장이 서툴고 난필 일 지라도 넓으신 아량으로 관용을 베풀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당신은 나의사랑....
지금도 잊지 못할 그해 가을 이었습니다.
"여보! 빨리 갑시다" 오늘도 아내는 술이 취해 방황하는 나를 마치 어린아이 마냥 두 손을 잡고서 야간학교에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라는 조그만 촌락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체 신문배달 구두닦이 등을 전전 하다가 낯선 이곳 구미에 내려와 술집 종업원 생선장사 등 닥치는 대로 힘든 삶을 고행해 오다가 스물 세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혼인식도 올리지 못하고 동거를 하면서 우리 부부는 오로지 내일에 있을 희망의 그 날을 향해 힘차게 달렸습니다.
내 나이 서른이 넘어 춥고 배고픔과 배우지 못한 설움에 몸부림치는 나에게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라도 해서 뒷바라지 하겠노라며 『구미 향토 학교』라는 야간 학교에 입학을 시켜 내 인생의 전환점을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 날부터 나는 남들이 볼세라 마치 죄인인 냥 숨죽여 가며 야간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구미 향토 학교는 모 신문사 사무실 한 켠에서 자원봉사 교사인 금오공대생 5명과 저와 다른 어린 학생 2명 등 모두 8명이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자원봉사 선생님들은 곱하기 나누기도 잘못하는 나에게 부분 집합이 어떻고 원소나열이 이렇다면서 아무리 앞에서는 열강을 해도 30년 이상 녹슨 나의 머리는 좀처럼 수학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한달 두 달 차츰 나의 머리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으며 공부 하는 게 신이 났습니다.
이제는 야간에만 공부 하는 게 부족하여 낮에는 국, 영, 수 세과목을 과외공부하고 나머지 암기 과목은 야간 학교에 나가서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공부하는 그 신문사 사장님이 도저히 공간이 부족하여 안 되겠다면서 장소를 비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배우는 학생 입장이라 운영은 누가 하며 어디에서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출강을 나오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들 모두가 저에게 찾아와 "정 사장님 끝까지 가르쳐 드리고 싶었는데 능력 부족이라 저희들이 교실을 구하지 못해 도저히 더 이상 가르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 하고는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그만 향토 학교는 문을 닫고는 말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할말을 잃었습니다. 내가 어떡해 해서 이곳까지 왔는데 그동안 얼마나 춥고 배고픔과 배우지 못한 서러움에 남모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중략)
☛저 하늘에 밝은 햇살이
나는 집에 돌아와 할말을 잃고 시름에 잠겨 있는데 사실은 알고 난 아내가 살며시 두 손을 잡으며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여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니이러지 말고 어서 용기를 내서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하면서 우리 부부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자만 누구하나 저에게 선뜻 장소를 빌려주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문뜩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여보! 여보!" 좋은 생각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옥상에다 조립식 가건물을 지어서 우리가 직접 야간학교를 운영하면 어떻겠습니까?“
" 그러면 당신이 공부할 수가 있지 않겠어요?"하면서 제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몇 일간 을 고민에 빠져 있다가 아내와 상의 끝에 옥상에다 조립식 가건물을 짓자고 합의를 하고는 건축 사무실에 찾아가 문의를 하니까 아무리 불법 건축물이라고 하여도 건물을 짓고 들어가 공부를 하면은 괜찮다고 하여 2층 옥상에다 조그만 사무실 3칸을 1.300 만원에 계약을 하고는 일주일 후 드디어 새로운 야간 학교가 우리 집 옥상에 우뚝 솟았습니다.
나는 그동안 흩어진 선생님이며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다시 만난 우리들은 모두들 기뻐 어쩔 줄을 몰랐으며 모두들 새로운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마음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대형 칠판도 두 개사고 책상과 의자는 손수 앵글 철판으로 맞추었으며 페인트칠도 우리 손으로 손수 칠하고 모든 게 신이 날 뿐이었습니다.
공사가 모두 끝나고 분주하게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있는데 이게 또 웬 날벼락입니까?
내용을 모르는 이웃 주민들이 무허가 건축물을 지었다고 관할 동사무소에 신고를 하여 철거 명령이 떨어 졌습니다.
참으로 못 배운 것도 서러운데 이런 모욕적인 수난을 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 옛날 원평3동 에서 포장마차 할 때에 동사무소 직원들이 날이 새면은 찾아와 얼마나 강제철거를 하였는지 모든게 희미한 주마등같이 스쳐 갔으며 다시금 그 옛날을 생각하니 이름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봇물 마냥 하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도저히 이대로는 주저앉을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동사무소와 구미시청 을 찾아다니면서 애원을 하였습니다.
"우리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정부 차원에서 야학교를 세워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강제 철거를 할 수 있습니까?"
하면서 마구 악을 써보기도 하고 큰소리를 쳐보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이며 모두가 한결같이 "사연은 딱하고 이해는 하나 법을 어기는 것을 보고 그냥 방치 할 수는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 여론도 있고 해서" 하면서 요즈음은 민원 신고가 제일 겁이 나는 세상 아닙니까? 하면서 얼버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 그 당시 새로 오신 신동혁 원남동장님이 잠깐 들어와 조용히 이야기하자며 집무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는 자초지종 말씀 드리니까 무허가 건물은 짓지 말고 그 대신 동사무소 2층 회의실을 빌려 줄 테니 야간에만 사용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고 뛸 듯이 기뻐 나는 연신 고개를 숙여 ”동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과 같이 부끄럽지 않는 사회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조립식 건물을 짓는 것을 포기하고 학생들과 같이 기자재며 살림들을 챙기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제일먼저 전화부터 한대 설치했습니다. 054-454-9737 이름으로 처음 등록하였으며 여러 물품이며 기자재를 구입하느라 또다시 금액이 많이 소요 되었지만 아내는 전혀 반대하지 않고 동참을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원남동사무소 2층에서 새롭게 공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남몰래 숨어서 할 게 아니라 내외적으로 모집광고를 하자싶어 아내와 나는 포스터 5천매를 손수 제작하여 몇날 몇칠을 풀 통을 들고서 벽보를 붙이러 다녔습니다.
공개적인 홍보는 처음이라서 인지 일주일 만에 50명이 접수가 되어 1991년 6월 20일 제4기 입학식을 원남동사무소 2층 회의실에서 그런 대로 조촐하게 개최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학생은 52세의 김정연 아주머니 외 59명 교사 김경식외 20명 등이 등록을 하였습니다 . 그러던 얼마 후 드디어 검정고시 시험일이 되었습니다.
그 날은 나와 학생 7명이 응시를 하고 교사3명이 따라 왔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어느덧 한 달이지나 시험발표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아 합격발표 장에 가질 못하고 교사 중 한사람인 조진만 선생님과 아내한테 대신 차비 줄 테니 갔다 오라고 하였습니다.
조진만 선생이 웃으면서 만약 가보고 12시까지 합격하였으면 전화를 하고 연락 없으면 불합격 한줄 알고 있으라며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10시가지나 11시가 다가와도 연락이 없어 불안하고 초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정오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열두 번을 다 치도록 연락이 오질 않았습니다.
이제는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으며 모든 것이 수표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싶어 미안한 생각에 아내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
그토록 오늘을 위하여 뒷바라지해 왔는데 너무나 마음이 답답하고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아 그 지긋 지긋한 시험책과 공책 모두들 쓰레기통에 쑤셔놓고 얼른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마구 중얼거렸습니다.
"도저히 나란 놈은 안돼 어쩔 수 없어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지긋지긋한 공부는 없다" 하면서 중얼거리며 대낮부터 마구 술을 퍼 마시고 있는데 오후 3시쯤 되어서 아내와 조선생, 황선생 셋이서 술집마다 나를 찾아 나선 모양이었습니다.
구미 2번가 어느 포장마차에서 술이 취해 없드려 흐느끼고 있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본 아내와 선생님들 일행이 저를 흔들면서
"사장님 ! 집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는데 왜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까?"
하면서 다짜고짜 조진만 선생이 마구 나무라며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조선생, 황선생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여러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자 모두를 갑자기 "하! 하! 하!"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에게 장난끼 있는 조진만 선생이 짠! 하면서 "사장님 합격입니다. 합격! 그것도 전 과목을 합격하였습니다." "뭐 라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질 못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왜 진작 알려주질 않고 그래" 하니까 사모님께서 사장님 실망하는 모습 보려고 일부러 장난하려고 그랬다고 하였습니다.
어찌되었든 합격했으니 좋다 무조건 좋다 오늘저녁 멋지게 내가 한잔 산다 가자!
그날 저녁 우리는 1차 2차 3차 아니 나중에는 어디까지 갔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아마 필름이 끊어져 구미시내 술집이라는 술집은 다 헤매 이었나 봅니다.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나는 아내의 두 손을 꼬옥 붙잡고 "여보! 고맙소 무조건 고맙소 오늘의 이 영광을 하느님에게 그리고 이 합격증을 당신에게 드리리라" 하면서 마구 어린아이 마냥 떼를 쓰며 머리를 파묻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어느새 아내도 말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창가에 비치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아래 아른거리는 아내의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으며 마치 내게는 하늘이 내려주신 마음씨 착한 천사로만 보였습니다.
어느새 나와 아내의 두 눈에는 이슬이 맺혔으며 이름모를 한없는 서러움에 합격증을 번갈아 만져보며 밤새 서로 부둥켜안고서 울부짖어야 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새벽녘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에 살며시 일어나 조용히 무릎을 꿇어앉아 아내의 두 손을 살며시 잡아 가볍게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와 나란히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나는 어느새 백마를 탄 기사가 되어 아내를 안고서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아내가 나의 품안에서 살며시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나는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하였습니다 .
아내야, 아내야 사랑하는 내 아내야 너를 만나 내 어이 오늘을 잊을꼬 천년만년 살고지고 두리둥실 두둥실 얼싸안고 춤을 추며 한평생 살자꾸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기러기떼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우리들이 부러운 마냥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더욱더 신이 나서 마치 개선장군마냥 이럇! 하면서 더욱더 힘차게 달렸습니다, 아~ 아 하느님 제발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게 하소서 하고 마구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꿈이 깨기도 전에 동녘에는 어느새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그래도 나는 좀처럼 흥분한 마음이 가라않질 않았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서울대에 합격한 누구마냥 전국방방곡곡 구석구석에 현수막이라도 내걸어 실컷 자랑도 하고 싶었으며 지방 신문이라도 대문짝만하게 얼굴이라도 실려 전국 어디에선가 독학으로 몸부림치는 수많은 만학인 들에게 큰소리라도 치고 싶었습니다. 헤 냈노라고.......
♣상록 학교는 나의 인생 !
우리는 또다시 형곡동 삼우건설 이완영 사장님이 제공하여 주기로 한 교실로 이전 준비에 분주 했습니다.
이영만 선생과 나는 이제 향토학교에서 벗어났으니 학교 이름을 무어라고 개명할까 하고 몇 날 몇 칠을 고심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영원히 어느 종교 단체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에 새로이 설립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신라의 옛 정기를 이어 서라벌 야학교로 할까 한림으로 할 까 아니면 광명으로 할까 여러가지 교명을 두고 고심하다가 문득 일제치하의 야학교에 대한 농촌 계몽운동을 주제로 한 심훈의 명작『상록수』라는 소설이 생각이 나서 우리도 언제나 늘 푸른 상록학교라는 교명으로 설립하기로 하였습니다.
♣설 립 취 지 및 목 적 ♣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많은 교육기관이 있지만 여러 가지 개인적·경제적 상황으로 인하여 교육 기회를 잃은 사람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교육을 통하여 배움을 향한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를 충분히 수용하여 근본적으로 문제를 수용할 수 있고 제도적으로 교육을 맡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으며 지역사회 단체들의 교육 참여 또한 미진한 실정이다.
민족 분단 40여년을 보내고 우리 민족 기상이 세계만방에 뻗어 가는 이때에 기존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 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지금까지 축적해 온 지식과 역량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배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줌으로서 지적인 가능성과 삶의 새로운 가치관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 모두는 공동 운명체라는 자각에서 지성인들이 향토 사회 발전을 위하여 봉사함으로서 민족의 교육적 에네르기를 활성화시켜 지적 계층적 차원의 대립과 갈등을 화해와 단 결로 전환시키고 민족 통일과 번영을 지향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아울러 본인은 다시는 이 땅에 야학교가 설립되는 일이 없도록 기원하면서 상록학교를 설립한다. 설립자 정 태 하
드디어 1993년10월13일 상록학교는 이렇게 해서 출발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우리들만의 교가를 작사 정태하 작곡 송은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상록의 꿈 이라는 노래가 탄생 되었습니다.
♣상 록 의 꿈 ♣
보통 빠르게
정태하 작사 송은호 작곡
상 록 의 꿈 안 고 배 움 의 길 향 하 는 우 리 모 두 하 나 되 어
못 다 한 꿈 찾 아 나 서 세 아 - 아 - 상 록 상 록 희 망 이 가 득 찬
미 래 가 있 는 곳 우 리 들 의 보 금 자 리 언 제 나 높 은 하 늘 처 럼
푸 른 곳 애천 애인 애국 의 교훈 (중략)........
이튼날 아내와 나는 서점에가서 상록수 책을한권 사서 둘이서 번갈아읽고 또읽으면서 너무나 그날에 주인공 들의 가슴 뭉클한 장면에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이 계절에 아직까지 탐독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하여 다시한번 심훈의 명작세계『상록수』 속으로 초대할까 합니다.
한잔의 커피와 함께 저와같이 파일속으로한번 들어가 보시죠 ! . . . . .
우리나라에서 심훈의 『상록수』 만큼 널리 알려진 소설은 없을 것이다.소설을 읽은사람이고 안읽은 사람이고 『상록수』라는 작품이 우리 문학에 있어서 농촌 계몽운동을 그린 대표적인 소설이라는 것을 누구나가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상록수』라는 소설의 제목은 농촌 계몽운동의 대명사가 될만큼 하나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었다.
우리 소설의 명작『상록수』가 발표된것은 1935년도이다.
이작품은 동아일보가 1935년에 창간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상금 오백원 이라는 당시 거금을 걸고 장편소설을 현상공모한데 응모하여 당선된 것이다.
심훈은 상금 오백원을 받자 그가운데 일백원을 들여 고향인 충남 당진 부곡리에 상록학원을 건립하여 농촌 계몽운동에 더욱 활기를 뛰게 하였다.
작품『상록수』가 쓰여질 무렵의 우리나라 형편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아래서궐기한 3,1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정책이 유화적인 문화 정책으로바뀌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이리하여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지가 창간되 이 신문들은 1930년대에 이르러 당시한글 학자들이 체게적인 한글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되자 대대적인 한글운동을 통해 민족계몽과 문화 창달 운동을 제창하게되는것이다.
또 이와함께 지식인들 사이에는 대혁명이 일어난 제정 러시아 말기에 그곳에서 벌어졌던 민중 계몽운동인 "브나드로" 운동이 커다란 시대조류로 다가왔던 것이다.
민중속으로 계몽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나라의 한글운동과 맥을 같이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시대적 물결로 농촌 계몽운동의커다란 흐름을 형성 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시대의 흐름은 당시의 우리나라 문학작품에도 크게 반영되어 그것이 심훈의 『상록수』나 이광수의 『흙』 이라는 농촌 계몽운동을 소재로하는 명작 소설의 탄생하게 되었다고 할수있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1910년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 났다 .
본명은 심대섭 으로 서울의 교동 국민학교를 거쳐 현제의 경기고등 학교의 전신인 경성 제일 고등 보통학교에 제학당시 일어난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어린몸으로 영어의 생할을 하기도 했었다.
사춘기에 격었던 이와같은 체험은 작가 심훈에게 끓어 오르는 민족혼을 체득하게 했을것은 물론이다.
그는 출옥후 1920년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망명과 유학의 3년간의 생활을 하면서 북경과 남경을 거쳐 상해에 머무르기도 하다가 항주에 정착하여 그곳의 원강대학에 적을두어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었다.
1923년 중국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자 바로 창간된지 얼마 안되는 동아일보의 기자로 입사하게 된다.
그는 신문기자 생화을 통해서 그의 타고난 글재주를 발휘 하여 그것이 작가로 대성하는 하나의 기반이 되어 준것이다.
심훈은 동아일보에 들어간지 2년만인 1925년에 그지면에 처음으로 탐정영화『탈춤』을 연재 하기도 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되고 1926년에는 『먼동이 틀때』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고 각색도하고 감독을 하기도한다.
그후 그는 동아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기자 조선 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으로 있으면서 계속해서 시와 소설을 써서 발표 하기도 했었다.
그무렵쓴 주요 작품은1930년에 발표된 중편 『동방의 애인』장편 『불사조』 등이 있다.
그러나 이작품들은 일제의 식민 정책의 일한인 신문검열에 번번이 걸리고 급기야는 연재 중단이 되고 말았다.
심훈은 드디어 중대한 결론끝에 낙향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밀물처럼 퍼져가는 "브나드로"운동에 민중속으로 라는 구호아래 대대적으로 전게된 농촌 계몽운동이 심훈의 낙향에는 무엇보다도 큰힘이었고 기둥이 되어 주었다고 말할수있다.
1932년 심훈이 낙향한 고장은 충남 당진 부곡리 였다.
1935년 그는 부곡리에 필경사라는 이름 지은 새집을 마련하여 이곳에서 화재의 명작 『상록수』를 완성하였다.
마침 이소설의 집필을 끝낼무렵 동아 일보 창간 15주념 기념 현상공모에 응모하여 당선되어 이작품은 더욱큰 화재와 소문을 불러 일으켰었다.
소설 『상록수』는 널리 알려진대로 당시의 농촌 계몽운동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실제 모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당시 심훈이 머무르고 있던 부곡리에서는 그의 조카인 심재영이 경성 고등을 나와 고향에서 활발한 농촌 계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심훈은 조카의 계몽활동을 자세히 지켜 보면서 그들 여럿이 공동 경작답을 조직하여 세로운 농촌 계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또 문명 퇴치 운동에도 앞장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고 가난하여 학교에 못다니는 아이들에게 공부할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었다.
이것을 지켜본 심훈에게는 이사실이 새로운 작품을 쓰는데 무엇보다도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거기에다 때마침 처녀의 몸으로 농촌 계몽운동에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난 최용신 양의 이야기가 신문과 잡지에 보도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화제의 인물 최용신 양은 원산에 있는 누씨여고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고스란히 샘골이라는 부락으로 보내어 그곳부녀자들이 그것을 기금으로 하여 계를 조직하여 만든 돈으로 샘골 강습소를 차려 문명 퇴치의 배움터를 마련하여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과로도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만것이다.
심훈은 이 두이야기를 줄거리로 하여 명작 『상록수』를 꾸며냈다.
작품 『상록수』가 쓰여질무렵 세상형편은 1919년의 3.1운동과 1929년의 광주 학생사건을 거쳐 민족의식이 크게 각성 고조되고 민족계몽 운동이 그 절정을 이루는 시기였다.
심훈은 이러한 시대배경을 작품으로 그대로 반영하고 실제의 인물이었던 심재영과 최영신의 두젊은 남녀를 배경으로 해서 박동혁과 채영신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에 등장시키고 있다.
작품 『상록수』는 서두에서 여름방학 동안 농촌 계몽운 운동에 참가했던 남녀 학생들이 주최측인 신문사가 가을 신학기를 맞아 그들을 모아놓고 위로를 겸한 활동보고회를 개최하는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보고회 석상에서 박동혁과 채영신은 가장 뛰어난 활동을한 학생으로 뽑혀 농촌계몽 활동의 구체적인 보고회를 하게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사람은 서로의인상을 깊게 새기게 되고 그것이 그들의 뇌를 떠나지 않는다.
청조하고 정열적인 채영신의 모습은 박동혁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고 씩씩하고 남성적인 박동혁의 인상은 채영신의 가슴에 큰파문을 던진다.
두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진 다음 얼마후 어느농촌 문제의 좌담회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되자 둘사이는 더욱더 가까워진다.
그리고 서로가 품고있는 생각이 너무나같고 절실 하다는데 새삼스럽게 놀라워한다.
그들은 어느날밤 호젓이 만나 손을 맞잡고 농촌운동에 일생을 바칠것을 맹세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장한 각오를한다.
우리 시골로 내려갑시다 공부고뭐고 다집어 치우고서 우리의 고향을 지키려 내려갑시다.한가정을 붙든다느니 보다도 다쓰러져 가는 우리의 고향을 붙들기위한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 용기를 냅시다.
그네들을 위해서 일을하다가 죽는한이 있드래도 선구자로서의 자랑과 기쁨은 남았지요. 이러한 굳은 결의아래 박동혁은 고향인 한곡리로 내려가고 채영신은 기독교 청년 연합회 농촌 사업부의 파견으로 경기도 청석골로 내려가 서로의 지상 목표인 농촌부흥을 위한 계몽운동에 몸을바치게된다.
두사람은 이렇게떨어져 농촌계몽 운동을 하면서도 서로 동지로만 사길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느낀다.
그러나 각자의 일터인 청속골과 한곡리를 버리고 둘이 맺어질수 없다는것을 한편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3개년 계획만더세워 노력하여 서로의 일터가 자리를 잡게되고 후진들에게 일을 맡겨도 안심이될 만큼 기초가 든든하게 선다음에야 결혼을 하자고 약속을한다.
이렇게 해서벌인 계몽운동이란 깊이그기에 몸바칠수록 더욱 어려운 문제만이 생긴다.
더욱이 여자의 몸으로 채영신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청석골에 내려가 그 고장의 허름한 예배당을 빌어 학교애 못가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채영신은 그들을 가르치게된다.
그러나 주제소에서는 아이들이 너무많이 모인다고 하여 80명이상을 못오게한다.
고심한 끝에 모금으로 청석학원을 지으며 손수 건조작업에 까지 연약한 몸을 아끼지않다가 학원 낙성식에 과로와 맹장염에 쓰러지고 만다.
한편 영신을 간호하고 한곡리로 돌아간 박동혁은 고리대금 업자와 농우회원과 동생 동화의 잘못으로 대신하여 경찰에 잡혀간다.
그동안 채영신은 정양과 유학을 겸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그생활이 순조롭지못하여 다시 되돌아 온후 다시 청속골로 내려가 학원일을 계속하려 한다.
그러나병약한 몸을 회복못하고 다시쓰러져 사경을 헤메다가 끝내 숨을거두고 만다.
영신이 세상을 떠난후에야 자유의 몸이되어 청속골로 찾은 동혁은 영신의 관앞에서 일생을 오로지 농촌 사업에만 몸바치고 영신이 못다한 일을 다하겠다고 맹세한다.
이렇게 새로운 결심을 다짐하며 동혁은 한곡리로 돌아간다.
작가 심훈의 작품 (상록수)를 쓴 다음해인 1936년에 그는 세상을떠났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작품『상록수』를 책으로 내기위하여 서울로 올라와 출판사인 한성도서 2층 골방에서일을 보는가운데 장티푸스에 걸려 대학병원에 입원한체 결국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작품 『상록수』는 그의 절 필이 되고 그것은 우리 문화사의 큰봉우리로 길이 자취를 남기게 된것이다.
" 자. 어떠 하셨습니까 ! 상록수를 읽어본 소감이?" 이렇게 해서 여러분 께서는 명작 심훈의 『상록수』를 한권 탐독하게 된것입니다 !
나 는 지금도 아내와 내가 작품속의 주인공 인냥 사뭇느껴지기도 하며 현제의 상항이 너무나 그때의 모습과 절실하기 때문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있는 심훈의 명작소설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이 되고 아내는 최영신이 되어 드디어 1993년10월13일 상록학교는 이렇게 해서 출발을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리라 . . . . .
글을 맺으며 !
그토록 40도를 오르내리던 폭염도 전국의 숱한 농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였던 참으로 지긋지긋한 무더위와 가뭄속 그늘도 어느덧 모두가 떠나가 버렸다.
언제인가는 몃십년 만에 최대의 홍수가 어떻고 매스컴을 시끄럽게 하더니 올해는 최고의 무더위와 가뭄이 50년만에 처음 이란다.
자고 나면 또다시 조간신문 가득히 실린 끔찍하기만 하는 대형 사건사고 들.오늘하루는 무사히 지내려나 하는 조바심도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오랜만에 맑게 개인가을 하늘 싱그럽게 펼쳐진 가로수를 누비며 하얗게 피어나는 뭉게 구름을 쳐다보니 모두가 언제인냥 싶다.
누우런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려 춤추고 먼 산의 단풍잎이 한잎두잎 곱게 물들어 갈 때 마지막 잎새와 함께 농부들의 이마에는 잔주름이 하나둘 늘어가고 속절없이 흘러간 무심한 우리네 인생 살이가 또다시 우리를 슬프게한다 .
결실의 계절에 부쳐 이렇게 글을 맺고나니 자꾸만 나자신이 쑥스러워 지는것 같다
행여 누군가 비웃지는 않을까 ?
손가락 질이나 하지 않을까 ?
하지만 이제는 주사위는 던져 졌다.
아쉬움이 있다면 조금더 진솔 되고 솔직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언제인가 다시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모든것 아낌없이 들려 주리라 .
그래도 마음 한켠에는모든것 훌훌 털 고나니 한결 마음이 새롭고 가볍게 느껴지는것같다.
가슴한구석 10년묵은 체중이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제 나에게는 더 바랄게 없다.
그토록 고향을 떠시지 않으시려는 어머님도 큰 형님 댁에서 안정을 찾아 생활하시고 어머님 역시 도회지 생활에 잘 적응하시어 매일노인정에서 소일을 하고게시고 큰형님 역시 얼마 전에 내집 마련을 하시어 연립 주택에 입주하시었고.출가한 막내 여동생이 어제 드디어 득남을 하였다고 연락이왔다.
살며시 눈을 감고 회상을 해본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나의 검정고시 여러 추억들 하지만 목표를 향해 쉼없이 자신을 독려하던 그 시절을 되돌아 볼 때마다 언제나 신선한 감동을 내게 준다.
내인 생에 다시 한번 그와 같은 결단과 노력이 주어진다면 그때와 같이 온몸으로 부딪히며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용기가 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번 나자신에게 반문해 본다.
생각하면은 어떻게 그어렵고 험난한 길을 걸어 왔는지 뒤 돌아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
하지만 고생 뒤에는 영광이 있다고 하질 않았던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그러나 나는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이후 모진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오늘이 있기 위해 참으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나 또한 보람된 길을 걸었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속담에 저또한 그어려운 역경과 고난을 견디어 왔으며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는 격언 또한 저를 충분히 새로운 인생을 걷게 하여 주었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게 죄인이 아니고 그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잘못 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춥고 배고픈 자의 설움과 고통은격어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 흉내 낼 수 없으며 배우지 못한 자의 설움 또한 아무나 흉내 낼 없는 너무나 뼈저린 아픔이었습니다.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법칙에 의하여 발전하며 창조적 소수에 의하여 건설된다고 갈파하였듯이 모든 값진 인생은 결국 창조적으로 자기의 환경을 극복하고 개척해 나가는데 있음을 저는확신합니다.
흔히들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현재의 상황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데 그것은 결국은 나약한 자기 자신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아울러 우리인생의 삶이란 끝없는 도전과 투쟁이기도 합니다.
열번 찍고 백뻔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작은 힘이나마 <하면 된다!>라는 이 구절만큼은 지금도 우리 상록학교 혹은 적국 어디에서든 열심히 만학에 불타고 있는 모든 독학생 여러 분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 홀로이 떠있는 돛단배처럼 지금도 어디에선가 만학으로 홀로이 투쟁하시는 이 땅의 모든 독학생 여러분!지난날 경험 하셨던 답답함과 막막함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꿈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할 것인지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배울 때의 어려움은 잠시이지만 못 배운서러움은 한평생 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진 세파와 짓밟힘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 떨기 들국화처럼 저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기 위한 준비를 하며 어제도 오늘도 그렇게 살아 왔듯이 내일 또한 그렇게 살아가렵니다 .
그리하여 나는 대입 검정고시도 무난히 합격을 하였으며 93년 방송대법학과를 합격하여 다니다가 그래도 정규학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정정당당 하게 도전하고싶어 아들또래 친구들과 같이 수능시험 두 번치루고 세 번만에 정규 김천대학 전파 통신과에 합격하여 그동안 꿈에도 그리든 대학교 켐퍼스의 낭만과 동아리 회장을 맡아 농촌봉사활동 등 대학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마구 누려 보았습니다.
1996년2월 김천대학을 무사히 졸업하여 또다시 방송대 국어국문과 3학년에 편입하여 못다한 공부를하고 있으며 그동안 소흘이한 고향마을 어르신들을 찻아뵈어 경로잔치등을 베풀어 드리면서 춥고 배고푼 설움과 배우지못한 설움을 모두다 저 뭉게 구름에 실어 보내고 이제는 어두운 그늘속에서 몸부림치는 우리 상록학교 소년 소녀 가장 및 불우 청소년들과 늘 함께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는 길이라면 언제라도 달려갈 것이며 나의 분신인 구미 상록학교와 구미 청소년 사랑회를 내 가슴속 영원히 묻어 둘것을 약속드리며 이제나는 자원봉사 교사가 되어 오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싱그러운 햇살을 가르며 김천소년교도소 수험생들에게 출강을 하기 위하여 힘차게 폐달을 밝으며 달려 가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어 늘푸른 인간 상록수로 길이남을 것을 약속 드리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필자약력
▶경북김천시 개령면 서부리 출생
▶국가 검정고시 합격
▶김천 대학교 전자통신과 졸업
▶국립금오공과대학교 산업대학원 수료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및국어국문과 전공
▶서울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경영학 졸업
▶자랑스러운 신,한국인 선정 대통령상 수상
▶법무부장관 자원봉사 유공교정위원 표창
▶교육부장관 자원봉사 유공교원 표창
▶경상북도지사 자원봉사 유공교원 표창
▶전)법무부 김천소년교도소 교육분과 위원장 교정위원 15년
▶법무부 김천소년교도소장 감사패
▶현)대구 제2군작전사령부 “무열학교”개교출강
▶저서)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저서) 잃어버린 나를 찻아서.....
▶저서)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리라.
▶저서)문학촌 들풀문학 공동저자
▶구미시 자원봉사자대회 수기부문 최우수(대상)
▶제32회 스승의 날 기념교육 현장 체험 수기 공모수상
▶2006년 한국문인협회 신인작가 수필가등단
▶2018년 중앙뉴스 10주년기념 신인문학상 등단
▶2019년 문학촌 들풀문학 수필가 신인작가 등단
▶대구대학교 평생교육사 2급 취득
▶현)평생교육사 교생실습지도자
▶현)성인문해교원 교생실습지도자
▶현)구미 상록학교장 자원봉사 35년
▶연락처 054-457-3422 휴)010-9572-7547
▶구미시 백산로82 지하 (송정동35-1)
▶격려해주신분들 ▶푸른창공/ 상록이님 화이팅 입니다 항상 좋은 게시물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오늘도 좋은날 되십시오 [2004/05/02] ▶상록이/상록이도 언제인가 푸른 창공을 날수가 있겠죠~~~~~~~ [2004/05/02] ▶Vada /부지런하신 우리 상록이님 ~~ VadaCafe에 안계심 안 되실 상록이님 ~~~ 항상 고맙답니다 비가오는 밤거리를 나혼자 걸어요 ㅎㅎㅎ 비오네요 Vada는 비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오늘 너무 너무 좋아요 ㅎㅎㅎ 편안한 휴일 보내시기 바랄께요 *^^* [2004/05/02] ▶상록이/ㅎㅎㅎ사실은 뮤직배경은 이곳에서 슬쩍 한거예요 평소에 폴모리 경음악을 넘조아해서요 용서하실꺼져~~~~~ [2004/05/02] ▶하루/ 상록님. 아름다운 그의아내. 분들에게 신의은총이 ...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하여 많은일 하여주세요 .좋은나날되시길 ㅎ [2004/05/02] ▶상록이/상록이도 하루 하루 살다보면은 언제인가 볕이 들날이 있을까여~~~`격려 진정으로 감솨요` [2004/05/02] ▶해병수색대/ @@^^@@ [2004/05/02] ▶상록이/해병수색대 님 반갑습니다. 닉이 참 씩씩하게 보입니다. [2004/05/03] ▶화려한외출/ 상록이님 만세!! 휴우~~~다읽느라고 아무것도 못했어요..우리나라 부패하고 어지러워도 희망이 있죠? 상록이님 같은 분들 때문에..그리고 아내되시는 분에게도 감사를 ............오래도록 행복하세요.....화 이팅!! [2004/05/03] ▶상록이/ 그래요 이제 사랑하는 아내애게도 날개를 달아주어 푸른창공을 원없이 날게 해드려야 겠죠..... 글구 언제인가는 님의 닉처럼 화려한 외출을 할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따뜻한 격려 부탁드릴께요. ㅠㅠㅠㅠㅠ [2004/05/03] ▶길손/ 상록이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004/05/03] ▶돛을 올려라/ 오우! 끝내주는 울상록이 이뽀,깨물어 주고퍼. 상록이는 울 카페대장!!!만세!!! [04:42:28] ▶돛을 올려라/ 나,간다네,술병꿰차고 이달 지기전에 간다네,, ,울 상록이랑,그의 아름다운이 보고파 간다네. [04:58:50] ▶상록이/ㅎㅎㅎ그래요 순항에 돛을 달구서 낙동강구비구비 물결따라 구미로 흘러 오세여 제가 맛난것 사드릴게여 이왕이면 가족과 함께오심 좋구요 금오산이 손짖을 하고 있답니다. 어서오라구요~~~~~ [09:12:53] ▶상록이/길손님 이제 길손이 아닌 우리들의 주인으로서 자리매김 하셔서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 09:14:35] ~~~~^*^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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