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
내용 |
고구려시대 (장수왕6년,475년) |
율목군에 속함(박달동,석수동은 잉벌노현에 속함) |
고려시대 (태조 23년, 940년) |
잉벌노현 → 곡양현 |
신라시대(경덕왕16년,757년) |
과주(곡양현 → 금주현) |
조선시대(태종13년,1413년) |
과천현(금주현 → 금천현) |
조선시대 (태종14년,1414년) |
과천현으로 개칭 |
조선시대(1456년) |
금천현에 일시병합(금천은 1416년 금양현 개칭후 1795년 시흥현으로 개칭) |
조선시대(고종 32년,1895년) |
과천군(시흥군) |
1914년 4월 1일 |
과천,시흥,안산군이 시흥군으로 통합되며 시흥군 서이면에 속함 |
1941년 10월 1일 |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 |
1949년 8월 14일 |
대통령령 제162호(1949.8.13 공포)로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 |
1973년 7월 1일 |
법률 제2597호(73.3.12 공포)로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 |
Ⅲ 과천의 역사
과천(果川)은 고려 때는 광주에 속한 적도 있고, 태종 13년(1413)에는 금천과 병합하여 금과로 칭하다가 곧 세조 때 복구된 적 말고는 조선시대 내내 현(縣) 단위로 있다가 고종 32년(1895)에 군(郡)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때인 1914년에 시흥군에 병합되어 1986년에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일개 면 단위로 머물게 되었다.
연대 |
내용 |
고구려시대(장수왕63년,475년) |
동사힐, 율목군 |
신라시대(경덕왕16년,757년) |
율진군 |
고려시대(940년) |
과주(별호-부안,부림) |
조선시대(태종13년,1414년) |
과천현 |
조선시대(고종32년,1895년) |
경기도 과천군 |
일제시대(1914년) |
시흥군 과천면 |
1986년 1월 1일 |
경기도 과천시 |
Ⅳ 답사지역
1. 시흥행궁터(始興行宮址)
조선조 금천현의 치소인 동헌으로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행궁(行宮)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시흥5동 831번지 6호 부근이며, 노량진→장승백이→신대방삼거리→신대방1동→독산동을 거쳐 이곳 금천에 이르러 머문 다음 안양을 거쳐서 수원으로 가는 길로 당시 행궁의 규모는 114칸이나 되었다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이곳에 행궁은 없어지고 그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수령 830년 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2. 중초사지
당간지주 (보물 4호)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중초사지(中初寺址) 삼층석탑(三層石塔)과 함께 남아 있으며 양 지주가 원상대로 85cm의 간격을 두고 동서(東西)로 대립하여있다.
아무런 조각이 없어 장식적(裝飾的)인 의장(意匠)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상부(上部)에는 약간의 가공(加工)이 있어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다.
양 지주의 상부(上部)는 내측면(內側面)의 면위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활 모양(線)을 그리며 위로부터 굴곡없이 깍여졌다.
당간(幢竿)을 고정시키는 간공(杆孔)은 양지주 모두상.중.하의 3곳에 간구(杆構)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는데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공(長方孔)을 마련하여 간을 장치하였고 중하부는 관통된 원공(圓孔)에 간을 시설하게 되어있다.
기저(基底)에는 장대석(長臺石)의 기반석(基盤石)을 지주사이와 양지주의 외측에 각기 1매씩 깔아서 기대를 삼고 있으며 간대는 지주사이의 장대석 중심부에 원공을 시공하고 그 주변에 원대(圓帶)로 돌려서 마련한 간단한 간대이다.
이곳을 중초사지(中初寺址)라고 하는 것은 서쪽 지주의 바깥에 각자(刻字)한 명문(銘文)에 의한 것이며 이 지주는 신라(新羅) 흥덕왕 (興德王) 원년(元年)인 826년 8월 6일에 채석하여 그 이듬해인 흥덕왕2년(827) 2월 30일에 세운 조성년대(造成年代)가 명문이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이다.
명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寶曆二年 歲次 丙午 八月 朔六 辛丑日 中初寺 東方僧岳一
보력 2년 세차 병오 팔 월 삭 6 신축일 중초사 동방승악일
보력=신라 흥덕왕(826-836) 년호이다 보력2년827년(병오년은 보력 일년 이라야 맞다)
삭 6= 초 6일 (초엿세)
石分二得 同月二十八日 二徒作初 庵九月一日 此處至 丁未年
석분 2득 동월 2 십 8 일 2 도작초 암 9월 1 일 차처지 정미년
二月三十日 了成之 節州統 皇龍寺恒昌和上 上和上
2 월 30 일 료성지 절주통 황룡사항창화상 상화상
절주통(節州統)= 신라에는 승려의 계급이 있었다 국가에서 제일높은 승려를 국통(國統)
주통(州統)은 전국 9주에 즉 각주에 1명 모두 9 명이다 항창화상은 그 중 한사람
眞行法師 貞座 義說法師 上座 年嵩法師 史師二
진행법사 정좌 의설법사 상좌 년숭법사 사사2
妙凡法師 則永法師 典都唯乃二 昌樂法師
묘범법사 측영법사 전도유내 2 창낙법사
法智法師 徒上二 智生法師 眞方法師 作上 秀南法師
법지법사 도상 2 지생법사 진방법사 작상 수남법사
여러 법사들의 각기 맡은 일을 설명 해 놓았다
중초사지 3층석탑 (경기유형문화재 164호)
당간지주와 함께 1934년에 보물7호로, 해방후 보물5호로 지정되었다. 1972년 경기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조정되었고 현재 보물5호는 없다.
고려시대(高麗時代)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지면에 두꺼운 지대석(地臺石)이 놓이고 그 위에 2단 괴임으로 된 별석(別石)이 놓여 상층기단을 받게 된 단층기단(單層其壇)으로 되어 있다.
기단 중석은 4매석으로 짰는데, 우주 (隅柱) 모양이 있을 뿐 탱주(撑柱)는 없고 갑석(甲石)은 2매판석(二枚板石)으로 덮였는데, 위의 괴임은 1단이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돌이고 탑신은 지나치게 작은 초층탑신석만 남았고 옥개석은 두꺼우며 밑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줄었으며 상륜부(相輪部)는 전부 없어졌다
3. 석수동 마애종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
이 마애종은 달아놓은 종을 스님이 치고 있는 장면을 거대한 바위에 묘사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마애종이다.
사각형의 결구(結構)형식에 쇠사슬로 연결된 종은 음통(音筒)을 갖춘 비교적 정교한 종뉴 아래에 약간 벌어진 형태의 자료이다. 종신이 연결되어 있다. 종신의 표면에는 상대(上帶)와 붙어 있는 유곽(乳廓), 종복(鐘腹)에 있는 연화문(蓮華紋)당좌(撞座), 뚜렷하지 못한 문양을 새긴 하대(下帶)가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공간의 균형감이 있어 보이며,전체적으로도 안정감이 있는 종을 표현하였다.
이 마애종은 조각수법이나 종뉴.종신의 표현 등에서 신라말(新羅末) 내지
고려초기(高麗初期)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마애종의 유일한 예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4. 안양사 (전통사찰 제10호) 소재지: 석수동 산27, 28
오늘날 안양시 지명유래의 근원지인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3년(90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자 이를 이상히 여겨 가보던 중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이 안양사로 전해진다. 안양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상주하는 청정(淸淨)한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安養世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고려때 최영장군이 7층 전탑(塼塔)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佛事)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원당(八角圓堂)의 부도(浮屠)와 귀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3호)가 있다. 귀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이 글을 짓고 명필 이원부(李元符)가 쓴 비문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왕께서 충남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 중 안양사에 들렸다는 기록이 있고, 안양사와 관련한 여러 수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안양사 귀부 (경기도 유형문화재 93호)
이것은 비신(碑身)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龜趺)만이 남아 있다.
몇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地臺)를 구축했고, 굄대와 귀부가 한 개의 돌로 만들어졌다.귀부 정상중심에 비좌(碑座)를 설정(設定)하고, 비좌의 각면을 외겹 연꽃무늬로 돌리고 있다.
귀갑문(龜甲文)은 6각형이며,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처럼 새겨 사실적이고, 귀부(龜趺) 뒷편에 꼬리를 옆으로 새겼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이 귀부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이는데, 높이 1m, 길이 3m, 너비 2.18m달한다
안양사 부도(비지정유형문화재) 소재지: 만안구 석수동 산27
안양사 부도는 탑신(塔身)과 기단(基壇) 중석(中石)은 없으며 하대석(下臺石)은 높은 2단의 8각 지대석(地臺石)으로 복연(複蓮)을 장식하였고 상대석(上臺石)은 앙연(仰蓮)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팔각3단의 옥개 받침위에 올려있고 처마의 상, 하선이 전각(轉角)부분에서 반전(反轉)하며 높이는 1.36m, 너비1.35m로 양식의 특징을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 되어진다
부도란 고대 인도의 범어(buddha)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부처, 불신을 뜻하며 불가에서 열반후 사리나 유골을 모시는 곳이다 .
5. 삼막사 (전통사찰 제9호) 소재지: 만안구 석수동 241-54
삼막사 망해루에서 멀리 서해안이 보인다
삼막사(三幕寺)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전 신라 문무왕(文武王) 17년(677)에 원효, 의상, 윤필등 세 성인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불상을 모셔 관음사(觀音寺)로 부르다 사찰이 융성해지며 도량의 짜임이 중국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삼막사로 부르다 언제 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다.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1348년) 나옹(懶翁)대사와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이곳으로 오니 선풍(禪風)이 크게 일었고 조선조 무학(無學)대사에 의하여 동쪽에 불암사, 서쪽에 진관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한양 남쪽의 비보사찰로 그 역활을 하였다. 이후 태종(太宗)때 대중창이 있었으며 임진왜란시 왜구가 침범하여 불을 질렀으나 법당건물이 타지 않아 왜구가 참회하고 떠낳다고 전해진다. 근대에는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池錫英)의 형 지운영(池雲英)이 이곳에 백련암(白蓮庵)을 지어 은거하였다. 현재 조선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望海樓)와 명왕전(冥王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자료 제60호)이 있으며 고려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인 일명 살례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과 사적비(事蹟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남녀근석(男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 삼막사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과 삼귀자(三龜字), 감로정(甘露井)등 다수의 비지정 문화재가 있어 삼막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삼막사 명부전 (문화재 자료 제60호)
이 건물은 조선(朝鮮) 고종(高宗) 17년(1880) 건립되었고 1975년 중수(重修)되었다. 기둥위에 결구(結構)된 공포(拱砲)는 장식적(裝飾的)인 요소(要素)가 가미(加味) 되는 조선조 말기의 일반적인 주심포계형식(柱心包系形式)이며 5량가구(三樑架構)에 맞배 지붕으로 되었는데 내부에는 우물천정을 설치하였다.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위시하여 명부(冥府)의 10대왕(大王)을 모신 곳으로 이들 명부의 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왕전(冥王殿)이라고도 한다.
삼막사 3층석탑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12호)
이 탑은 삼막사 승도(僧徒)인 김윤후(金允候)가 몽고군(蒙古軍)의 원수(元帥)인 살리타이를 살해, 싸움을 이긴승적(勝績)을 기념한 탑이라 전한다. 기단부(基壇部)는 장대석(長臺石) 4매(四枚)로 하층기단(下層基壇) 하대 (下臺)를 만들고, 하층기단 면석(面石)도 역시 장대석 4매로 되었으며, 갑석(甲石)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상층기단(上層基壇) 면석(面石)은 4매석(四枚石)으로 짜여 있고,갑석은 한 귀퉁이가 파실(破失) 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는데 각층의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으로 둔중하여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높이는 2.55m 이다.
삼막사 사적비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25호)
이 비의 비갓은 팔작지붕형이고 지대석(地臺石)은 땅에 묻혀 있다. 비문(碑文)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조선국경기(朝鮮國京圻) 관악(冠岳) 산맥갑묘행룡삼성산하 (山脈甲卯行龍三聖山下) 사명삼막좌유향로봉(寺名三幕左有香爐峰)"과 건립연대(建立年代)를 밝히는 "강희(腔熙) 46년(四六年) 정해(丁亥)"란 명문(名文)이 있어 이 비석(碑石)의 위치는 경기 관악 산맥 삼성산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朝鮮) 숙종(肅宗)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삼막사 마애삼존불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94호)
이 마애불은 자연암벽에 감실(龕室)을 만들고, 거기에 부조(浮彫)한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로 조선후기(朝鮮後期)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며, 석굴사원(石窟寺院) 유구(遺構)로 전해 오는 중요한 자료이다. 주존(主尊)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머리는 소발(素髮)에 반달형 계주가 보이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눈과 입, 볼 등을 율동감 있게 묘사하여 미소짓게 함으로써 중후하고 자비스러운 인상을 풍기게 한다. 목은 짧아서 더욱 어깨가 움츠려 보이고, 신체는 두터운 불의(佛衣)에 파묻히고 선각(線刻)으로 묘사하여 양감을 느낄 수 없다. 좌우(左右) 협시(脇侍)인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은 각각 연화대 위에 합장한 모습인데, 머리에는 소박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있 으며 얼굴은 본존과 비슷하지만 환한 미소 때문에 활력이 넘쳐 보인다. 이 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의 활달한 부조(浮彫)로 생동감이 넘쳐 조선 (朝鮮) 불상(佛像)에서는 파격적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의 표현을 생략한 평판적이고 경직된 상체와 하부로 내려갈수록 얕은 기법등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불상아래 건륭(乾隆) 28년(영조(英祖)39년, 1763)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朝鮮) 후기(後期) 불교조각사 연구(佛敎彫刻史硏究)에 귀중한 자료가되며, 칠성신앙(七星信仰)과 다산신앙(多産信仰)이 결합한 불교(佛敎)와 민간신앙(民間信仰)의 결합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삼막사 남녀근석 (민속 자료 제3호)
이 돌은 삼막사(三幕寺) 칠성각(七星閣) 옆에 있는 자연 형태의 남근석(男根石)과 여근석(女根石)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돌에다 정성을 들인다. 속전(俗傳)에는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17년(677)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전부터 이 선바위는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였다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서 자식두기를 원하고 출산과 일가(一家)의 번영(繁榮)과 수명장수(壽命長壽)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하며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등 이름있는 날에는 경향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과 삼색과실(三色果實)등을 차려놓고 빈다. 천연 그대로의 돌인 남근의 높이는 150cm, 여근의 높이는 110cm이다. 이러한 성기숭배(性器崇拜) 사상(思想)은 수렵(狩獵), 채집(採集)의 풍속과 풍농(豊農), 풍어(豊漁),다산(多産)과 무병장수 신앙이 하나를 이루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행해져 왔으며 고려(高麗), 조선시대(朝鮮時代)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巫俗),풍수신앙(風水信仰),동제(洞祭), 미륵신앙(彌勒信仰)속에 어우러져 이어지고 있다.
삼막사 삼귀자 (비지정 유형 문화재)
조선후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池錫英)의 형 지운영(池雲英 1852 ~ 1935)이 이 곳 백련암지(白蓮庵址)에 은거할 당시에 쓴 글로 바위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귀자를 새겨 놓았다.
삼귀자 좌측엔 「불기 2947년 경신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란 명문이 있어 1920년에 쓴 것이며 서체는 전서(篆書)로 우측에는 「관음몽수장수영자」라 하여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에 글씨를 썼음을 알 수가 있다.
6. 만안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38호)
경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260번지 성혜병원 앞에 위치한 이 다리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朝鮮) 정조(正祖)(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하러 갈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朝鮮)후기(後期)의 대표적인 홍예석교 (虹霓石橋)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駑梁津), 과천(果川), 수원(水原)을 거치는 것이 빠른 길이었으나, 과천 남태령고개를 넘는 등 험난한 고개를 넘어가는(그 로변에 대왕과 원한이 있는 김약로(金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 하여)등 노정이 바뀌어 시흥(始興), 수원(水原)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 다리를 축조 한 것이다. 정조가 만안교를 지난 것은 7번째 능행부터이며 축조공사에는 당시 경기관찰사 (京畿觀察使)를 서유방을 중심으로 온백성의 힘을 모아 축조한 것으로 길이 31.2m, 너비 8m에 7개의 홍예수문과 그위에 화강암판석(花崗岩板石)과 장대석 (長臺石)을 깔아 축조한 것이다. 원래는 현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으나 국도(國道)확장으로 1980년 8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 만안교 다리밟기가 펼쳐지는 곳이다.
이 다리는 처음에는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경기관찰사 (京畿觀察使) 서용보에 의해 돌로 이를 대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795년(정조19)에 당시 경기관찰사 (京畿觀察使)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이를 완성하였다.
축조양식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다.
원래는 현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으나 국도(國道)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다리 앞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쓴 만안교비가 있어 이 다리의 연혁을 설명해 주고 있다.
7. 구 서이면사무소(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서이면사무소는 1914년 4월1일 과천군 상서면(동안구일원)과 하서면(만안구일원)이 통합되면서 축조되어 현재까지 유일하게 보존되어 온 행정관청이다.
서이면사무소는 1914년 축조당시에는 호계도서관 부근에 있었으나 안양의 중심지가 안양리로 이동하면서 본 건물은 1917년 7월6일 현 위치로 옮겨왔으며 1941년 10월1일까지는 서이면사무소로, 1949년8월13일 까지는 안양면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그 뒤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어 읍청사를 서이면사무소 좌측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본 건물의 소유권이 개인에게 이전되었다. 이후 부속 건물이 있던 부지가 줄고 한옥 본관만 남았으며, 건물의 후면에 현관을 만들어 사용해 온 것을 복원하여 당시의 현관(건물뒤편)에 면사무소 현판을 설치하였다.
8. 마사박물관
전국마필분포도
120여평의 전시실에는 말안장과 발걸이, 방울 등 ‘말갖춤’과 말조각 등 다양한 말 관련자료 1335점이 26개 진열장에 전시돼 있다. 선사시대 유물 5점, 삼국시대 유물 66점, 통일신라시대 유물 4점, 고려시대 유물 12점 등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진귀한 말 문화와 관련된 자료가 소장돼 있다. 또한 부패한 관리를 벌주던 암행어사들의 마패와 말 우표, 동전, 조선 때 장수들이 말을 타며 입었던 갑옷과 투구 등도 눈길을 끈다. 이밖에 조선시대 말 관련 의학서적인 <마경초집언해>는 물론 1900년대를 전후해 우리나라 전체에 흩어져 사육되던 말의 종류와 형태를 표시한 <각도마필분포도>도 볼 수 있다.
말이 오늘날에는 경마나 승마 등 일부 스포츠에서만 활약하고 있지만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물자의 운반과 교통, 통신 등 인간의 활동영역을 넓혀주는 수단으로 그 역할이 매우 컸다. 또한 전시에는 중요한 병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말은 국력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졌다. 이처럼 말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말의 이런 폭넓고 다양한 역할로 인해, 말을 소재로 한 미술.문학 등 예술장르에서도 사람들은 실로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적 성과물을 창출해 내었다. 기마민족의 웅건한 기상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우리의 역사는 어느 나라 못지않은 풍부한 마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말은 19세기에 들어 기계문명의 발달로 각종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그 역할이 현저히 감소하여 우리의 생활주변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따라서 사라져가는 마문화를 발굴, 보존하기 위해 한국마사회에서는 마사박물관을 서울올림픽 개막에 때맞춰 1988년 9월 13일에 개관하여 각종 마문화 관련 자료를 소장, 연중무휴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마사박물관은 국내 마문화의 메카로서 잊혀 지고 망실된 찬란한 우리겨레의 5천년 마문화의 전통을 올바로 세움과 동시에 오늘 우리시대의 문명적 성과를 바르게 해석하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학습장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9. 국사편찬위원회 (조선방역지도 국보248호)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시기 이후부터 왕이 사망하면 왕 단위로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라는 뜻을 가진 실록(實錄)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고종, 순종 실록까지 합쳐서 1950卷, 944冊, 약 7만장, 49,147,540字로 구성된 519년간 209,350일간의 정부일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록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외교, 교육 등에 관한 자료 및 신앙과 사상, 윤리와 도덕 생활을 포함하여 천문, 기상, 지리, 의학, 박물 등 자연 현상들과 과학 기술 일반에 관한 자료들, 민간생활에서의 민속, 세태, 설화관계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사회생활의 전반에 걸친 역사적 자료들을 폭넓게 반영하고 있다. 또한 명, 청, 몽고, 여진 등 대륙의 역사와 일본, 대마도, 유구 등 아시아 및 세계 여러 나라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실록을 나라에서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는데 여러 개의 사고터 중 하나가 바로 '오대산 사고터'이다. 처음에는 실록을 2부 간행하여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보관하였었는데 세종대부터 4부를 간행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았으며 그리하여 순조 36년(1603) 실록 출판 사업을 벌여 4부를 새로 작성하여 모두 5부가 되었다. 이 중 춘추관 실록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소실되었다. 이렇게 인조대 이후부터는 실록을 4부씩 작성하여 마니산(뒤에 정족산→총독부, 경성제대로 옮겨짐), 태백산(뒤에 총독부, 경성제대로 옮겨짐), 묘향산(뒤에 적상산→창덕궁 장서각으로 옮겨짐), 오대산(뒤에 동경제대로 옮겨짐)에 보관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민족문화를 계승 발전하고 일제침략에 의하여 단절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하여 1946년에 설립된 국가의 공적인 사료연구 편찬기관이다.
삼국시대로부터 시작된 국사편찬의 전통은 고려시대에 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져 「조선왕조실록」 등 당대의 역사 기록을 남겼다. 또한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현재의 국가통치와 개인생활에 유용한 지침서(거울)로 삼기 위하여 전 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왔다.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동국통감」같은 사서(史書)의 편찬이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이를 수행한 사관(史官)들은 역사의 사실을 바르게 기록하는 것을 신성한 임무로 여겼다. 고려시대의 예문춘추관이나 조선시대의 춘추관은 국가에서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설치한 전담기관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역사편찬 전통을 이어받아 창설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3월 국사관설치규정이 제정·공포되어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 처음 설치되었던 국사관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신이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국사관은 1949년에 문교부 직속 국사편찬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등 한국사 기초사료 편찬에 주력하였다. 1965년에는 전임 위원장 직제가 마련되었고, 초서로 된 원본「승정원일기」를 탈초하여 편찬하는 대규모 사업을 비롯하여 「고종시대사」「한국독립운동사」「일제침략하 한국삼십육년사」「자료대한민국사」등을 편찬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영역을 넓혀 갔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사」와「한국사론」등을 편찬 간행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한국사 미개척분야에 대한 연구를 넓혀갔다. 대지 20,595m2 연면적 12,906.7m2 으로 외형적으로는 조선시대 사고의 형태를 현대화함으로써, 한국의 전통적인 고건축미를 살리고, 내부에는 현대적 특수 시설을 갖춘 1부 1과 4실로 구성하였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는 약 80명의 직원과 9명의 사료연구위원이 한국사의 심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시대 사고의 형태로 지어졌는데, 조선 후기 사고들의 경우 그 건축양식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쪽에 2층 누각식(樓閣式)의 기와집 건물이 두 동인데, 하나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또 하나는 선원보(璿源譜) 등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이었다.
조선방역지도는 1287년 8월 1일 과천에서는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자 국보급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다.
이 지도는 명종 12년(1557) 8월부터 명종 13년 2월 사이에 제용감에서 전국의 공물 진상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단위에 채색 안료로 그려진 조선방역지도는 우리나라8도의 주와 현을 표시한 '8도주현도'로서 상단에 '조선방역지도' 라고 씌어있고 중앙부에 우리나라 전도(G3×98.5cm)가 그려져 있다 주와 현의 명칭은 8도별로 색상을 구분하여 경기도는 연한황색, 강원도는 연한녹색, 황해도는 백색, 함경도는 청색, 평안도는 녹색, 경상도는 적색, 충청,전라도는 황색으로 원안에 표시했고 하단에는 지도 제작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좌목이 있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 때 다른 문화재와 함께 왜군에 의해 약탈되어 대마번(대마도에 설치했던 일본의 봉건통치기구)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조선사편수회에서 식민통치사료로 이용하기 위해 다른 종가문서와 함께 구입(1929 . 1938년)했던 것인데,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회가 인수하여 종가문서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조선방역지도는 조선전기에 제작된 지도 중 비교적 정확한 원본 지도다. 특이한 것은 울릉도와 독도가 빠져 있는 반면 대마도와 만주지방을 우리나라로 표시한 점이다.
10. 온온사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
온온사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관아에 부속된 객사의 정당 건물이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객사)로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 역할과 함께 궐패와 전패를 모셔 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 망배를 행하는 곳이었다. 과천의 객사는 인조27년(1649) 현감 여이홍이 객사 동헌을 건립하여 창건되고, 현종7년(1666년)남창조에 의해 객사서 헌이 건립되어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규모가 큰 의미를 갔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이 남행할 때에는 과천을 경유해야 했고, 경우에 따라 왕이 묵어가야 했으므로 규모가 컸던 것이다.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원묘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현륭원으로 고치고 이곳에 참배하기 위해 능행(1790.2.11)할 때 과천의 객사에 머물며 주위경관이 좋고 쉬어가기 편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 을 갖게 되었고 이때 관아동헌에는 옛 별호인 부림을 따서 부림헌(富林軒)이란 현판도 하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온온사는 일인들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과천면의 청사로 사용하다 1932년 기존 건물을 헐고 원형을 변형하여 새 로 짓고 사용되다가 1986.12.12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객사의 형태를 참고로 하여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 객사의 일반 적인 형태는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을 두었으며, 앞면에 중문, 외문 그리고 옆면에 무랑 등이 설치되는 것이고 전패와 궐패를 모시는 정당에는 기와나 돌을 깔았고 , 익실에는 온돌을 놓아 숙박이 가능토록 하였다.
현재의 온온사 건물은 석축위에 정당3칸, 좌우익실3칸을 둔 정면9칸, 측면2칸의 구조로 팔작지붕집에 정당 부분에 맞배지붕을 얹어 놓은 형태이다.
한편, 온온사의 위치에 관하여 원래 현 과천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것(옛날 주초와 장대석 이 있음)을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현 위치로 옮겨 과천면사무소로 지었다는 증언도 있고, 현 온온사 주변인 아파트 과천초등학교 일대에 객사동헌, 아사 내동헌, 관청, 사창, 객사서헌, 향청, 연정, 공수, 작청, 군기청, 사령청, 옥등의 관아지가 있었던 곳이었으며 온온사 주변 지표조사에서 적심석 적토기와편, 계단석, 기단석, 백자편, 석열, 분청사기편, 담당지 등이 발견되었다.
고창객사의 전패와 궐패
정조의 친필 현판
첫댓글 이순자 선생님의 방대한 자료 감사합니다.선생님의 안양사랑과 과천에 대한 애정을 느길수 있습니다.
어느 해설사 보다도 자세하고 넘치는 지식을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전해 주시려는 선생님의 모든정렬과 힘을 느끼네요,,,,,,,
이순자샘~~ 사진이 안뜨네요..저만그런가요..? 답사기를 읽다보니 다시 그곳에 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드네요. ~~^^*
딴 분들도 안뜨나요?
예 저도 사진이 안뜸니다. 내용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