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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자 명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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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본 명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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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 본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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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식 파스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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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안동훈 세베리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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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김정자 아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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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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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김애경 빌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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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김영선 체칠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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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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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박순옥 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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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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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강지양 글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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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정경숙 실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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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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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이명자 카타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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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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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유영제 마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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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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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성인신 모니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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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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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신명희 필로메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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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어숙자 율리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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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김문규 도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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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이영주 펠리지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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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기 데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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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리지 묘 찾아가는 길
리지와 서광계
텅공짜란 선교사 묘지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본래 800여 基가 넘는 서양선교사와 교우의 묘가 있었지만 지금은 63尊의 선교사 묘비만 안치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지이다. 이 묘지는 400여년 전 明나라 떄 都城 서쪽일대, 즉 일찍이 일반인은 텅공짜라 불렀는데 당시 楊씨 성을 가진 한 太監의 별장이었으며, 그가 감옥살이 할 때 재산의 도피처로서 지장왕을 모시는 仁恩寺 라는 사찰로 개축되기도 했었다한다. 오늘날 외국인들은 Chala 라고 부르는데 이곳에는17세기 이후 멀리 서방에서 건너온 적지않은 선교사들의 묘와 묘비가 안치되어 있다. 이 곳에 묻힌 최초의 인물은 바로 중국이름 리마또 (利瑪竇)로 불리는 이탈리의 선교사 마테오리치 (Matteo Ricci:1552-1610) 이다. 그는 명말 천주교 중국선교의 개척자이며 中西文化交流의 선구자이다. 명대 1582년(萬歷10)에 중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601년(萬歷29) 이후 북경에 들어와 유럽의 天文, 曆法, 地理, 數學 등을 전파하고 <坤輿萬國全圖>라 불리는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다. 그는 약 27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과 서양문화교류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다하였다. 생각해보건대 우연하게도 올해가 그가 북경에 들어와 활동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주요한 선교사상은 佛敎를 배척하고 儒學을 섭렵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자신이 저술한 <天主實義>(1595년)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선교는 필히 사람들의 존경을 먼저 얻어야하며 우선 학문으로서 인심을 사로잡고 그로인해 마음이 열리면 신앙은 저절로 따른다 고 믿었다. 그의 선교방법은 우선 언어 즉, 중국어를 습득하고 중국의 풍습과 관습 등을 체험하며 중국의 사상과 특성을 익힌 후 중국 전통문화 중의 한 槪念과 천주교의 觀念을 비교하여 상응하는 내용을 융합시켜 사대부계층을 통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이다. 예컨대 초기에는 심지어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입은 스님의 모습으로 대륙에 들어왔으며 피나는 노력을 통해 영구히 거할 수 있는 작은 토지를 마련하고 교당을 세워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교당의 이름마저 불교식으로 仙花寺 라 하였다. 또한 그의 박학다식한 재능과 서방과학기술은 사대부와의 교류를 폭 넓게 하였으며 천주교를 이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회의 전통교육을 통해 갖추어진 본인의 신앙적 인격과 타민족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진취성이었다. 1610년(萬歷38년) 그가 과로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는 향년 58세였다. 사후 1년, 디팡토야(龐迪我 Die depantoja:1571-1618)는 각고의 노력으로 황제로부터 북경 阜成門外 ?公柵欄 에 묘지를 하사 받아 南堂에 가매장된 것을 옮겨와 안장시켰다. 물론 묘지의 원형은 여러 차례의 수난으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으나 묘혈로 통하는 입구에 세워진 중국 전통의 花紋양식으로 장식한 석문을 보면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좁은 甬道를 따라 걷다 보면 정면에 낮은 담으로 둘려진 커다란 묘비와 마주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마테오리치의 좌측에는 아담샤알(湯若望 Johann Adam Schall von Bell;1592-1666), 우측에는 페어비스트(南?仁 Ferdinand Verbiest;1623-1688)의 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어 우리의 시선을 모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묘장법이 中西融合式으로 분묘는 유럽식이고 묘비는 중국식이었다. 벽돌형식을 빌어 만든 높은 서양식 감실(1900년경 중건) 내부에 전통중국양식의 漢白玉 비석을 두고 碑首에 규룡 문양을 장식하였으며 십자가 문양으로 예수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묘비 중앙에는크게耶?會士利公之墓 우측에는 작게 利先生諱瑪竇?西泰大西洋意大里亞人自幼入會眞修明歷壬午年航海首入中國衍敎萬歷庚子年來都萬歷庚戌年卒在世 五十九年在會四十二年 (대서양 이탈리아 사람인 리선생의 이름은 마두 이며 호는 서태 이다. 어려서 예수회에 들어와 참된 수행을 하였으며, 명력 임오년에 처음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와 널리 선교를 하였고, 만력 경자년에 북경에 들어와, 만력 경술년에 세상을 떠났다. 59년간의 삶 가운데 42년간을 예수회와 함께 보냈다. -- 마테오리치는 1571년 8월5일 예수회에 참여 즉, 예수회 활동기간은 당연 39년임, 비문의 四十二年은 오기. 현재의 비문은 1984년 수리시 재각인/역자주) 좌측에는 라틴어로 중국어와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고있다. 그 비석 주위로 장미문양을 둘러 아름답게꾸며 영혼의 숙면을 향기롭고 달콤하게 이끈다.
당시 장례식은 롱고바르도(龍華民 Niccdo Longobardo:1559-1654)에 의해 거행되었는데, 이 묘지 또한 그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帝京景物略>(1635년)중에는 利瑪竇墓地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의 묘는 중국 전통양식을 모방하여 아래로는 장방형의 단, 위는 반원주체형이며, 묘 뒤로는 천정이 둥근 육각좌의 虛堂(亭子-喪禮敎堂)을 짓고 십자가를 두었으며, 뒤 담벽에는 花紋장식 즉, 위에는 용의꼬리, 가운데는 나비의촉수, 아래는 코끼리의 코와 같은 문양이 각기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 묘술하고 있는데 정자는 온데간데 없고 이미 옛 모습이 아니다. 당시는 仁恩寺 자리가 마테오리치를 위해 지은 묘지였으나 17세기 말에 아담샤알의 묘지가 옆에 따로 지어지고 그 외 페어비스트 등 여러 선교사의 묘가 마테오리치 묘지 내부에 함께 들어오기도 한다. 1900년 의화단의 난으로 완전히 훼손되었으며 그 후 재정비하여 1927년 즈음에는 하나로 합쳐져 가운데 통로를 두고 양옆으로 100여 尊의 선교사를 모셨다. 현재의 묘비와 비석은 문화혁명 이후 새로이 정리되었으며, 1984년 북경시 문물국 협조하에 행정학교가 자금을 출자하여 다시금 보수한 것이지만 묘지의 원형을 잃은 지 오래다. 마테오리치 묘 주위로 몇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멀리 서양에서 와 영원히 안식을 취하는 선교사의 영혼을 위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였다. 과거에는 묘지의 남측에 돌 해시계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아름다운 날은 짧은 그림자와 같으니 당신은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모든 만물은 시간과 함께 흐른다. (美日寸影勿爾空過所見萬品與時幷流) 짧은 구절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회상케 한다. 이 해시계는 마테오리치가 제작한 것이라 전한다. 그가 중국에 있을 동안 해시계를 여럿 제작하여 친구들에게 선물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마테오리치를 기념하기위해 그의 묘 앞에 다시 돌아온 것이리라. 하지만 몇 차례의 수난 속에 사라져버려 아쉬움을 더한다. 더구나 예전에는 묘의 양 옆에 선교사 롱고바르도, 페레이라 (徐日升 Thomas Pereyra1645-1708),폴리캅 (索智能 Polycapus de Sousa;1697-1757)의 묘비도 함께 하였으나 후에 교당의 後園으로 모셨다한다. 그러나 이 세분의 묘비도 이곳 텅공짜란 묘지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추측컨대 70년대 말 묘비를 수습하면서 관리소홀로 인해 다른 묘비와 함께 유실되었으리라 본다. 기타 선교사와 교우의 유골과 묘비는 北京市 海淀區 西北旺鄕에 새로 지은 묘지로 옮겼다. 하지만 明淸시대 선교사의 묘비 가운데 60尊은 아직 학교 내 마테오리치 묘 담장 너머에 남아 있다. 아내는 이곳에 오기전부터 보고자하던 名畵家 카스틸리오네(郞世寧 Ginseppe Castiglione;1688-1766)와 지첼바르트 (艾啓蒙 Ignaz Sichelbarth;1708-1780)의 묘비를 발견하고 기뻐하였다. 그 묘비들 가운데에는 예수회 상징물 즉 HIS문자 문양, 십자가 문양 등이 전통 중국 풍격의 부귀, 길상, 장수를 의미하는 학, 사슴, 쌍용 문양 등과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는 불교의 상징인 卍자 문양이나 연꽃도 등장하고 있어 신선한 맛을 더했다.그 외 묘지 남측으로 신부수사의 숙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특히 文聲學院 건물(口字樓)은 아직도 백 년 전의 고아한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내부의 목조 계단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떄 마다 선현들의 목소리가 살아 들리는 듯 했다. 서쪽편으로는 이미 다른 용도로 전용하고 있는 성모회 수도원(山字樓)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으로 난 산자루 교당이 옛 정취를 자아내고 교당 위의 원형 창 위치에 시멘트로 메우고 별 문양이 자리함이 과거의 한 역사적 단편을 시사하고있어 인상적이었다. 마테오리치와 明淸 선교사 묘지는 이미 중요한 문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어 근래각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 부속건물들은 지금 사무용 혹은 주거용으로 사용되어져 무관심 속에점 훼손되어가고 있는데 이 또한 하루 속히 보호관리 되어져야 하겠다. 돌이켜보건대, 19세기 이후 유럽 정세의 변화와 천주교 교회의 변화 그리고 중국 또한 문화적인 큰 변화를 맞이하였으며 여기 자그마한 선교사의 묘지 텅공짜란 또한 파란만장한 역사의 우여곡절을 함께하였다. 말하자면 여기 이 묘비들은古今文化交融의 유산이며 16세기이래 中西文化交流의 살아 있는 역사적 증언이며 교훈이다. 즉 종교의 전파는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부단한 문화적 교류와 함께 진정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리치의 뒤를 잇는 과학자이자 천문학자 아담 본 샬 신부와 페르디난도 베르비스트 신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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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를 출발한 마태오 리치는 중국의 긴 강과 운하를 따라 약 18년간의 여행 끝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가 중국의 강에서 본 수많은 작은 선박들은 거대한 베네치아를 연상케 했다. 리치는 자오칭(1583년), 사오조우(韶州·1589년),난징(南京·1595년), 난창(南昌·1595년)을 거쳐 1598년에 북경에 도착했지만 외국인 감시가 삼엄해 다시 난창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1600년 다시 베이징으로 들어가다가 리칭(Liqing)에서 환관 마탕에 의해 체포돼 톈진(天津)성(城)으로 이송됐지만, 이듬해 1월 황제 만력제의 교지를 통해 유럽의 대사 자격으로 드디어 베이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리치의 중국 선교 첫 동료였던 루지에리는 중국에 교황청 특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1588년 로마로 돌아간다. 당시 강한 쇄국정책을 쓰고 있던 중국에 외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 특사(또는 교황청 대사)의 자격뿐이었다. 리치를 도와주기 위해 사오조우에 왔던 데 알메이다(1591년)와 데 페트리스(1593년)는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 리치와 동행하던 바라다스(1595년)는 공강의 급류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 중에도 리치는 1594년 불교의 수도승에서 문인 학자로 사회적 위치 변경을 수도회에 정식으로 요청해 발리냐노의 승인을 얻는다. 이후 1596년 난창에서 종신서원을 한다. 리치가 1583년부터 1610년 사망할 때까지 펴낸 많은 역서와 저서들은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펼쳤던 문서선교의 결과였다. 리치는 베이징에서 생활하는 동안 종교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과학자, 천문학자로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국의 과학계에서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연구와 업적은 언제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리치와 서광계의 만남은 이질적인 문화와 사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 이해와 존중을 통해 얼마나 서로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빛나는 선례로 남았다. 서광계 일가는 이후 중국에서 그리스도교 확산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610년 리치가 사망하자 황제 만력제는 애도와 함께 외국인에게 처음으로 무덤으로 쓸 땅을 희사했다. 리치는 400년 전 사망했지만 그의 선교 방법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더욱 부각돼 오늘날 문화 간 이해를 바탕으로한 탁월한 선교 모델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북경 화평문(和平門)에 위치해 있으며, 200년 전인 청대 건륭 연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유리창이라는 이름은 원나라때 유리기와 공장이 있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처음에는 과거를
치르기 위해 북경으로 온 사람들 중에서 과거에서 낙방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전 가져온 서적, 먹, 벼루 등을 가지고 나와서 팔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청조가 멸망한 이후에는 몰락한 귀족 자제들이 문중에서 소장하던 품목들을 가지고
나와 팔아서 생활을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 점점 하나의 시장이 형성되었고, 마침내는 골동품을 거래하는 전통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상점거리로서
깊은 역사를 가진 곳이기에 상점들 자체가 중국 전통건물로 골동품의 역할을 하고 있어 거리를 걷는것 만으로도 중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조선시대 동지사나 역관등들도 중국을 찾았을 때 이곳에 들러 필요한
서책이나 문방용품들을 구매하던 곳이다 서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찾아 서책과 서하과 관련된 것들을 구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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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8월이라면 신청하겠습니다. 김파스칼
환영합니다.! 형제님과 평화는 항상 함께~~~ 꾸벅
아~ 녜. 성지순례와 백두산 걸음여행....
알찬 계획표가 ~~
수고 많으십니다.감사하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8월 말경이 좋아요.
"평화"
여부가 있겠습니까!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꾸벅~~ 왕자매님과 평화는 선과함께 동질성입니다.
언제나 평화의 주인이 되시기를 빌면서.... 꾸벅. 꾸벅
백두산 걸음여행은 참가하기가 힘들것 같네요?
집을 비우기가 이번에는 미안해서요 넘 나만 나 다디는것 같아서 집식구들께 봉사하는 마음으로 참을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늘 평화를 빕니다.
빨리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 . .
오늘도 기다리는 희망이 있어 행복합니다.~~~
같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