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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문학에 대하여 생각한다(1)
- 이인화의 문학 자서전을 읽고 소개하며 -
글 / 보헤미안 정 혁
내 스스로 문학의 문자도 잘 모르는 처지에 결코 문학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평소부터 느껴오던 것은 사실이나 나름대로 문학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나마 겨울나무 가지에 붙어 있는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대고 있어서인지 돼 먹지도 않은 글쟁이의 흉내를 내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요즈막에 들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글쟁이들의 치열한 작가적 열정이 배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그러던 차에 <시인의 별>이란 단편으로 2000년도에 제24회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인 <이인화>의 수상작품집 말미에 이인화(본명 - 유철균)가 쓴 나의 문학적 자서전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그의 문학에 대한 구도 작업에 느낀 점이 많아 나뿐만 아니라 글쟁이들에게도 도전과 자극이 되지 않을 가 하는 생각에서 그 글 내용을 순서에 따라 여기에 소개하여 본다. 생각 같아서는 글 전부를 그대로 옮기고 싶으나 즐거운 성탄절에 궁상을 떠는 것 같기도 하고 분량도 만만치 않고 그럴 시간도 없어서 내 나름대로 많은 부분들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간추리고 또 내 입장에서 정리하여 소개하는 식으로 옮겨 보았으니 읽는 분들은 양해하기를 바란다. 다만 이로 인해 작가 이인화 씨에게 혹시 누가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또한 문맥상의 오류나 오자가 있더라도 그것 역시 나의 책임임을 밝힌다.
나의 문학적 자서전
- 문학이 있었기에 행복했던 그 순간순간들 -
< 이 인화 >
[햇빛 찬란한 날들]
이인화는 1966년 1월 5일, 2남 1녀의 장남으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7남 3녀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월급에 비해 지출이 많아서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술은 일체 입에도 대지 않는 등 본인부터 최대한 절약해서 가정을 꾸려 갔으며 어머니 역시 검소하고 부지런한 분이었다고 한다.
문학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 빽빽히 꽂힌 책으로 3면의 벽을 덮은 좁은 방. 자진의 조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에 앉으면 아버지는 제일 먼저 네 자루의 연필을 깎았다. 손을 베기 쉬운 낡은 면도칼로 아주 천천히 나무를 깍고 연필심을 다듬었다. 그런 뒤에는 책상 위에 책을 펴고 책의 여백이나 누우런 표지의 노트에 깨알처럼 촘촘한 연필 글씨로 주석을 적어 넣었다.
아버지가 쓰는 노트는 적을 때는 이십 권, 많을 때는 사십 권이 넘었다. 주제별로 각각 다른 노트에 주석을 작성하던 아버지의 표정은 마치 요즘 포켓 몬스터의 색칠 공책을 그려 모으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다. 더할 수 없는 몰입과 충만, 남들이 알 수 없는, 어떤 확고하고 풍요로운 세계와 하나가 된 조화감, 아버지의 하찮은 동작 하나 하나가 지극히 평화로운 한 세계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필요에 따라 생겨나는 움직임 같았다. 나는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 같은 행복을 느껴 보리라 기대했다.
- 그러나 인인화 자신은 공부를 못해 사십대 중반의 아버지가 스물여덟 살의 선생님께 불려가 거듭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인화의 아버지 역시 선생님으로 교육대학 부속국민학교에 다니던 그는 아버지의 제자인 교생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4학년 때 담임 이명수 선생으로부터 글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들었으며 그때부터 열심히 글을 쓰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 보헤미안 주.
[물의 골짜기]
이인화의 조상들이 살던 수곡리와 가문의 내력에 대한 부분으로 생략한다. 다만 남인과 서인의 정권 암투가 치열했던 와중에 작가의 직계조상들은 서인의 영수였던 집안어른의 등용을 거절하고 남인의 편에 서 있었던 까닭으로 당쟁에 휘말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런 조상들의 당쟁에 얽힌 역사를 통해서 그는 이를 정조대왕을 새롭게 조명했던 소설 <영원한 제국>의 모티브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 보헤미안 주.
[계단 위의 성소]
중학생이 되면서 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한편 학생회 간부로 일하고 발군의 글짓기 실력을 발휘하여 거의 매달 상장을 받았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하여서는 사춘기에 <계단문학동인회>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계단문학동인회>는 학교 3층에서 옥상으로 향한 계단 사이의 좁디좁은 공간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20년도 넘는 전통 있는 문학동아리였다.
이 계단의 문학동인회 방에는 졸업한 선배들이 여전히 드나들었는데, 그 중에 성종하 라고하는 선배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매일 같이 등교를 했던, 그리고 - 문학이 곧 존재의 목적이라는 과격한 예술지상주의자였던 <성종하>라는 선배가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성종하는 늘 가정이나 사랑, 사회적 성공 따위는 문학 한 글자를 위해 일척(一擲)해 버리고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에 대하여 얘기를 들려주면서 매우 난폭한 방식으로 문학에 대한 열성을 일깨웠다고 한다. 예를 들면 중요한 백일장이나 현상공모에 후배들이 한 명이라도 입상하지 못하면 어김 없이 줄빳다가 돌아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학생들이 많이 찾아 온 시화전 전시회장에서 선배 성종하는 후배들에게 <머리박아>를 시킨 적도 있으려니와 이로 인해 자존심이 상한 후배들이 기합을 받다 말고 일어서서 도망쳤고 성종하 선배는 몽둥이를 휘두르며 4킬로미터나 넘는 길을 쫓아 왔을 만큼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인화를 비롯한 후배들은 성종하 선배의 열성에 서서히 세뇌되면서 - 추모 받아 마땅한 시인과 소설가들의 기일(忌日)을 챙겨서 그것을 핑계로 그 난방도 전등도 없는 계단에서 담배로 향불을 피우고 소주를 홀짝거렸다.
금복주에 취해 널브러져 있노라면 머리 위의 창문이 노을에 물들면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주홍빛으로 빛났다. 그것은 영원하고 성스러운 빛이 가슴 깊숙한 곳에 내리는 정밀(情密)한 순간이었다. 눈앞의 계단은 정신적인 감흥 속에 승화되어 불멸의 별들이 빛나는 문학사의 밤 하늘로 올라가는 성소(聖所)가 되었다.
우리의 성소는 두 개의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한 기둥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고독과 무한한 비참함을 깨닫게 만드는 ‘성스러움’ 이었다. 이상(李箱)과 김유정(金裕貞)과 같은 작가들이 자멸과 요절을 통해 만들어 낸 신화들의 성스러움은 태양의 높이만큼이나 무섭고 황홀했다. 원근법의 불가사의한 조명을 만드는 창문의 햇살, 그 배후의 일점(一點)은 우리의 인생에는 연결되지 않고 다음 세기에서나 맺어질 빛덩어리처럼 보였다.
또 하나의 기둥은 ‘새로움’ 이었다. 우리에게 문학은 ‘생활’의 저편에 펄럭이는 보헤미안의 깃발이었고 더 모던(modern)한 것, 더 새로운 것, 우리의 내부에 결핍된 것이었다. 더 조야하게 말하면 이 변소 냄새나는 학교에는 없는 것이었다. 지방 학생다운 촌스러운 상상력으로 우리는 그것이 서울에 있으리라 믿었다.
우리는 서울에 가서 글쟁이로 출세하고 싶었다. 풍문만 무성한 지방도시의 수선스러움을 떠나 진짜 작가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깊이 통찰하며 언어로 삶의 전체상을 부활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작가가 되고 싶었다. 서울에 가면 장차 글을 팔아서 먹고 살리라 생각했다. 절대로 건실한 회사원도, 경영자도, 교사도 되지 않을 것이며 월급봉투도 받지 않으리라. 그런 굴욕적인 제도나 인습의 노예가 되지 않고 가난한 출판사들에게서 인세와 원고료를 등쳐먹고 살아가는, 아주 야비한 날품팔이 글쟁이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안은 주사약 보다도 빠르게 희망의 핏속으로 번졌다. 나의 펜촉 끝은 뚝방의 구멍 같아서 무한한 저수지의 물이 끝도 없이 넘쳐흐르리라는 확신에 들뜨다가도 금방 두려운 난파에의 예감이,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의 자기 증명에 실패하고 요 모양 요 꼴로 살게 되리라는 예감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지금은 거대한 쇼핑센터가 들어선 연매시장의 막걸리집에서 술에 만취하면 그런 불안의 쓰라림을 <클레멘타인>의 노래에 실어 불렀다.
- 엄마 엄마 나 죽거든 낙동강에 뿌려 주. 푸른 강물 바람 따라 넋새되어 날으리. 꽃이지고 우리 사랑 지고 나면 잠 못 드는 긴 세월을 풀잎 되어 울으리. 겨울 오고 기나긴 밤 창문 밖엔 바람소리. 허문 육신 버려두고 길 떠나는 내 청춘, 목숨 지던 그 생각에 잠 못 드는 서러운 밤. 험한 세상 눈물 많던 우리 엄마 설운 밤. -
불안한 마음은 환성적인 조숙(早熟)에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빨리 최인호나 황석영처럼 고등학교 재학중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스스로의 재능을 검증하고 싶었다. 혹은 김현처럼 스무 살에 완벽한 평론을 발표하고 싶었다. 그런 천재들의 예는 우리를 자극해서 친구들의 눈에, 특히 시화전 때마다 만나는 여학생들의 눈에 얼마간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열적인 노력을 경주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동인지 《계단문학》을 발간했고 문예지들을 샅샅이 읽었으며 새 시집이 나오면 반쯤 미쳐 날뛰며 그것을 비평했다. 겨울이 오면 공부를 뒷전으로 미루고 신춘문예에 당선될 불멸의 작품(?)을 쓰면서 밤을 새웠다.
나는 이제 쓴웃음을 지으며 내 청춘이 거느렸던 야심들을 회상한다. 조숙은 천재의 증거가 아니었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증거도 아니었다. 조숙한 천재를 흉내 내기 위해 우리는 우리 나이의 정상적인 삶을 희생해 버렸다. 그 대신 충동적인 토론과 아는 체하기, 부모와의 갈등과 고백하기 힘든 퇴폐 속에서 시간을 낭비했던 것이다.
삶은 환상을 사랑하지 않으며, 인생을 탕진한 죄에는 오랜 징벌이 따른다. 나는 대학입시에 실패했고 그 실패는 나의 시민적 본능을 자극했다, 정말로 비참했던 것은 내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세상의 거절을 웃어넘길 수 없는, 절대로 소속감과 장래성이라는 시민계급의 기본 욕구를 외면할 수 없는 지극히 범용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1984년 12월 14일 오전 10시 25분.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 주었던 성종하 형이 포항 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술에 만취해서 친구 집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다가 뒤로 넘어져 뇌출혈을 일으킨 것이었다.
《위대한 캐츠비》의 마지막 대목처럼 형의 장례식은 아주 초라했다. 생전에 그토록 많은 후배들에게 그토록 많은 정을 주었던 형은 너무나 초라한 문상을 받았다. 입시 일정에 바쁜 후배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아침 9시 30분에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독경하는 스님의 축수가 있었고 형이 생전에 쓴 시 <산사(山寺)에서>가 낭송되었고, 곧바로 형을 실은 버스는 포항을 출발해서 화장터에 도착했다. 화장터에서 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줌의 재로 바뀌었다. 불과 한 시간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그리고 형은 화원 유원지로 옮겨져 노래처럼 정말 낙동강에 뿌려졌다. 형의 나이 23세였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스무 살의 나이를 완장처럼 차고 세상을 걸어 보았다. -
위에 그대로 옮긴 그의 글을 통해 어려서부터 많은 상을 탈 정도로 글재주가 있었던 이인화는 고등학교 때 《계단문학동인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글 쓰기와 습작기를 가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인화는 조숙한 천재 흉내내기로 정상적인 삶을 희생하거나 고백하기 힘든 퇴폐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객기어린 문학에의 열정과 노력이 이인화로 하여금 문학평론이나 소설가로 있게 한, 한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인화의 단편 <초원을 걷는 남자>에서 보면 주인공 역시 고등학교시절에 문학서클에 활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상의 여인을 문학서클 선배가 살고 있는 그의 추레한 단칸방에서 만나게 된다. 추측컨대 이 문학서클은 자서전 적으로 쓴 본 글에 나오는 《계단문학동인회》로 짐작이 되고 이 단칸방의 주인공 역시 문학선배인 - 술에 취해 23세로 요절한 <성종하> 로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이인화는 <초원을 걷는 남자>에서 주인공이 문학공모에 대상으로 받은 현상금으로 동인회의 열두 명의 학생들과 어울려 막걸리 집에서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 포르노 비디오를 틀어주는 심야다방으로 가서 널 부러졌다고 쓰고 있다. 중간에 다섯 명은 집으로 갔다. 이 부문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 새벽 한 시에 우리 일곱 명은 심야다방을 나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역전으로 걸어갔다. 청춘이었고 객기의 시대였다, 우리는 랭보처럼 스무 살까지 일생일대의 걸작을 쓴 뒤에 “잘 있거라 쪼다들아!” 하며 유유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시인은 이렇게 온몸을 불이 붙은 것처럼 살아야 했다. 수많은 금기를 넘어 인생의 모든 것을 맛보아야 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탕진해서 죽음에게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리라. 늙고 병들고 다 떨어진 가죽 푸대 외에는. 역전 골목에서 우리는 빨려 들어가듯 어느 집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 역 광장에 다시 모였을 때 우리는 묘한 공범의식으로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밤하늘을 쳐다보며 희랍인 조르바처럼 춤을 추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아름다운 밤이었다. 운명은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는다. 별밤의 환희는 얼마 못 가서 처참하게 짓밟혔다.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했던 1학년 하나가 아침에 소변을 보다가 밑이 따끔따끔한 것을 발견했다. 내가 미리 누이들에게 신신당부했던 만큼 신을 것을 다 신었고 절대 병에 걸렸을 리가 없건만 이 바보는 공포에 사로잡혀 죽는 것이 아닐까 괴로워 하다가 어머니에게 자수하고 말았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일곱 명은 무기정학을, 다섯 명은 유기정학을 당했다. 학교는 나의 동인회를 아예 없애버렸다. -
인용한 위의 글에서 작가는 은연중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문학동인회>를 통하여 치열했던 문학에의 열망과 그만큼 객기 또한 많았으며 퇴폐적인 음모에 가담했던 것을 자수하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을 보게 된다. 그의 이러한 문학적 열정은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되었음을 그의 이어지는 자서전에서 알게 된다.
- 다음 편에 계속 -
2004년 12월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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