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레아요리콤♡
'출처' - 레아요리콤♡'s FanCafe (cafe.daum.net/ReaYoriCom)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1
"자, 오늘은 음.. 17일이지? 다들 17바퀴 돌도 온다.
뒤쳐지는 10명은 7바퀴를 더 돌것이니 그리 알도록. 실시!"
우렁찬 체육선생의 말에 아이들은 얼굴을 구기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노총각 히스테리! 개달구!!!!!
성격이 저러니 장가를 못가지~ 에잉 쯧쯧~'
"어허, 어디서 꾸물쩡 거리는게야! 얼른 뛰어가지 못해!!!"
한서고에는 3대 명물 선생님이 있었다.
빙그레 썅년이라고 불리우는 지리선생님은 웃으며 아이들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독신주의 여선생이였고,
개지랄이라고 불리우는 학주 김지봉 수학선생님.
마지막으로 김지봉선생과의 차별화를 두기 위해 개달구라고 불리우는 김달구 체육선생.
아이들 사이에서 김지봉 선생과 김달구 선생의 지랄은 쌍벽을 이룬다며 소문이 나있었다.
이과이기 때문에 빙그레 썅년을 피해갈수 있었던 아이들은 애석하게도 개지랄과 개달구의 손아귀에 떨어져야할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났던 것이다.
개달구는 수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정신 수양이라는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가며 매일 월일 숫자에 따라 운동장 뺑뺑이를 돌리곤 했다.
예를 들어 5일이면 5바퀴. 15일이면 15바퀴 30일이면 30바퀴,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개달구는 뜨거운 땡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앉았다.
모두들 그런 개달구를 저주하며 낑낑거리며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5바퀴.
몇몇의 아이들은 하나둘씩 뒤쳐져만 갔다.
8바퀴.
절반수의 해당하는 학생들이 걷거나 뒤쳐져갔다.
아이들의 체력이 거의다 바닥날 쯔음..
어디선가 혜성처럼 쏜살같이 달려오는 이가 있었으니..
"얏호~ 하람이다~~~~"
먼지를 일으키는 것같은 착각을 주며 손살같이 달려온 호수가 뒤에서 하람을 껴않는다.
그 바람에 하람은 크게 휘청이며 앞으로 고꾸라질 뻔 한 몸을 추스렸다.
"헤- 뛰고 있는거야?"
라며 방긋 웃는다.
"네..보다싶이.."
호수는 하람의 대답을 듣는 둥 하며 하람의 어깨를 껴안고 부비부비- 공격을 한다.
"땀냄새 납니다."
"아기 비누냄새 난다."
라며 하람의 볼을 만지작- 거리며 또 푸딩 타령을 한다.
하람은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호수의 행동에 포기했는지 호수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유호수- 네 이놈! 또 땡땡이냐!!"
"앗~ 노총각 쌤~"
"뭐야?!!"
호수는 자신의 말에 방방 뛰면서도 그늘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개달구에게 호탕하게 웃어보이며 말한다.
"선생님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구하셨잖아요~
설마 저번의 우리의 내기를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라며 승리의 V자를 펼쳐보인다.
몇달전 달리기 시합에서 호수에게 진 치욕을 떠올리며 달구는 팽- 하고 콧소리를 내며 뒤돌아섰다.
"자자~ 선생님. 우리 이쯤에서 노는게 어떻겠습니까아~"
라며 눈웃음을 친다.
뜨거운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호수의 블론드 머리카락이 반짝거린다.
"흠흠-
좋아 오늘은 8바퀴에서 그만둔다. 다음엔 국물도 없어!"
개달구의 말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운동장 한켠에 있는 수돗가로 달려간다.
달구는 유난히 호수에게 약했다.
호수에겐 운동에 꽤나 재능이 있어 체육선생인 개달구가 아끼는 학생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교적으로 성격도 좋았기에 자주 땡땡이를 친다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싫어하긴 커녕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였다.
"우리도 가자~"
호수가 하람의 손을 끌며 말했다.
수돗가에 간 하람은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그리고 시원한 물에 세수를 했다.
물은 분명 차가운데 한번 달아오른 얼굴의 후끈거림은 가시지 않았다.
점점 몸이 달아오르는 것같은 느낌이 하람의 온몸을 휘감았다.
몇번이나 찬물에 열을 식힌 사람은 대충 물기 묻은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떨치려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이리와.."
호수가 하람의 팔을 붙잡고 이끌었다.
그리곤 자신의 체육복 상의를 손으로 드러내 하람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하람의 키가 170대였고, 호수의 키가 180을 훨씬 웃도는 키였기에 그닥 어려운 일은 아니였다.
체육복을 드러내자 옷속에 감춰져 있던 탄탄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아- 됐다."
또 싱긋- 웃는다.
"고마워요."
라고 인사한 하람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눈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듯하더니 하람이 앞으로 쓰러질 뻔하는 걸 호수가 순간적으로 하람의 허리를 낚아챘다.
"강하람??"
호수는 하람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하람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수..숨을 안쉬어...!"
호수는 조심스레 바닥에 하람을 눞혔다.
그리고 가슴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하람은 숨을 쉬지 않앗다.
그대로 호수는 하람의 입을 벌렸다.
이마를 누르고 코를 막은 호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하람의 입으로 가져갔다.
웅성웅성-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 동그랗게 모여 사태를 지켜보았다.
"하악-"
붉은 입술에서 거칠은 숨소리가 튀어나왔다.
하람이 숨을 쉬자 호수는 한도하며 하람을 안아올렸다.
그리곤 양호실이 있는 건물로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래 갑자기."
"남자 새끼가 비실해서야..."
누군가가 혀를 차며 비웃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나 잘하세요."
옆에서 연후가 쏘아붙이듯이 말하자 찍소리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근데.... 왜 난 기절한 얼굴이 여자같다고 느껴졌을까..?
왠지 모르게 색기도 흐르는 것 같고.."
누군가가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자 해산하던 아이들이 움찔- 한다..
모두의 머리위로 떠오르는 생각들...
'나..나만 그런게 아니였던가..!'
"변태......"
이번엔 연후옆에 있던 도진이 나즈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이들은 아무말없이 그저 아까 자신이 생각했던 흉측한(?) 것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그리고 말을 꺼낸 한 불쌍한 중생이 변태로 거듭나는 순간이였다.
.
.
.
"피로 누적에 영양결핍에 약간의 감기 기운하고.. 빈혈기도 있더군..
그리고 관자놀이 쪽에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더군."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상처와 욕조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있던 것.
그리고 오래된 지병인 영양결핍과 피로누적이 합쳐져 하람의 몸을 한계점으로 끌어당겼던 것이다.
"조퇴시키는 것이 좋겠구나."
30대 중반에 머리를 깔끔히 모아 하나로 말아묶은 양호선생이 말했다.
"그런가요? 그럼 제가 데리고 갈게요."
"태워줄까?"
"아뇨. 택시좀 불러주세요."
양호선생이 콜택시를 부르는 동안 호수는 하람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서로를 알아볼수가 있대..
그래서.. 자꾸 네가 내 눈에 띄이나봐.."
조용히 양호실에 울리는 청령한 목소리.
슬픈빛을 머금은 검은 눈동자는 슬프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2
수채화가 물에 번지듯..
천천히 넓어지는 시야안으로 불분명한 색들이 들어왔다.
눈을 깜빡이자 점점 선명하게 변하며 그것이 벽지의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전혀 본적이 없는 파란색에 아름다운 하늘이 그려져 있는 벽지였다.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누워있던 하람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바위에 올려져 있는 손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블론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검은 눈동자가 있던 자리에는 긴 속눈썹만 눈에 띄었다.
새근거리는 호흡에 맞춰 몸이 오르락 내린다.
깊은 잠에서 빠져선 꿈을 꾸고있는지 잔뜩 풀어진 얼굴로 "푸딩..."이라고 중얼거리곤 뒤척인다.
하람은 멍하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파란색 계통으로 꾸며진 방은 호수와 어울리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키 180cm가 넘는 남학생의 방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우습지만 말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하람은 침대 머리맡 서랍위에 올려져 있는 액자를 집어 들여다 보았다.
액자속에는 휠체어에 앉아 맑게 웃고 있는 여성과 무릎에 반창고를 붙이고 뚱한 표정으로 서있는 어린 호수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어머니 쪽은 한국계인가보네.."
하람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하려던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응.. 다른 쪽이 영국계지."
호수는 '아버지'란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는지 말똥히 하람을 처다보던 호수가 하람의 손목을 이끌었다.
갑작스러운 이끌림에 호수에게 껴안기듯한 포즈가 되어버린 두사람.
미약하게나 하람이 반항의 몸짓을 구사했지만 호수는 꽉 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놔주세요."
"온기가 느껴져."
"......"
하람에 말에 동문서답하는 호수.
하람은 얘가 왜이러나 하고 생각하며 호수를 올려다보았다.
"이제서야 꽉찬느낌이다."
".....?"
호수는 하람의 머리칼을 뒤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가 여자였으면 좋겠어."
쿵-
하람의 심장이 크게 곤두박질친다.
설마 들킨 것일까? 라는 불안감이 하람을 덮쳐온다.
"네가 아니면 날 채워줄 사람은 없을 것같아...아니 없을거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넌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어.
무기력한 눈빛, 흥미조차.. 빛조차 잃어버린 체 죽어버린 눈동자..
네 눈동자는 나를 닮았어..
힘없고 무기력하게 숨죽여있는 나랑 너무 닮아서..... 그래서 네가 자꾸 내 가슴에 밟힌다.."
마주친 눈동자는 흔들림없이 굳건하다.
하람은 딱딱하게 굳어 있엇다.
무기력하다.
죽었다.
숨죽인다.
항상 자신이 생각하던 또 다른 자신의 모습.
지워내고 지워내봐도.. 감추고 감추려고해도..그는 꿰뚤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약한 자신의 치부를..
하람은 거칠게호수를 밀었다.
하지만 도리어 하람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벽에 등을 부딛쳤다.
"너 하루종일 자기만 했어.
먹을 것좀 만들어올테니까 가만히 누워있어."
라며 다정한 말투로 말하곤 방을 나가버렸다.
방에는 오직 하람만이 남았다.
벽에 등을 기대어 그대로 긴장을 풀자 온몸에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다.
파고든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파고 들어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이미 곪아버린 상처를 헤집고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을 것이다.
연약한 살을 파해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안에 둥지를 틀 것이다.
위험하다.
하람은 본능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에게 위험하다.
천천히 빨아들이는 늪처럼.. 자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잠.식 당할 것이다...!
.
.
.
구수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음식을 그릇에 담고 쟁반에 수저와 나란히 올려놓고는 방으로 향했다.
호수가 문을 열자 하람이 그 까만 눈동자로 호수를 응시한다.
쟁반을 들고 침대맡에 앉은 호수는 쟁반을 서랍위에 올려놓고 수저로 죽을 떴다.
그리곤 아직 열기가 남아 뜨거운 죽을 후- 후- 불더니 하람에게 수저를 내밀었다.
"너 영양걸핍에 과로래.
갑자기 먹으면 속이 놀랄까봐 죽으로 만들어봤어. 입맛 없더라도 먹어."
"..........잘해주지마.."
하람의 가시돋힌 말보다 하람이 반말을 했다는 사실에 놀란 눈으로 하람을 처다보는 호수.
그런 호수의 눈길에도 하람은 그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였다.
"다가가는게.. 두려운거야..?"
"....."
"다가가는데 두러워서 숨어버린다해도 난 널 찾을수 있어.
상처입은 영혼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그리고 서로에게 끌리거든.
무언가 서로의 영혼에 사슬이 묶여있는 것처럼 말야.
아무리 네가 날 밀어내도.. 우린 서로에게 끌리게 되있어..
식겠다. 먹어."
호수가 하람의 입술 근처로 수저를 밀어넣어줬지만 하람은 요지부동이였다.
"다 안먹으면 키스해버릴거야."
"....."
호수의 협박에 굳게 닫혀있던 하람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호수가 부드럽게 수저를 입안으로 넣었다가 마치 아기를 먹이듯 죽을 입안으로 털어놓는다.
하람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고, 호수는 방국 웃어보였다.
결국 하람의 완패였다.
.
.
.
호수의 고집으로 하루를 호수의 집에서 지내게 된 하람은 다음 날 호수와 함께 등교를 해야만 했다.
호수가 자는 틈을 타 새벽에 문을 꼭 걸어잠그고 샤워를 한 하람이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호수는 요리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꿈지락거리며 챙기던 호수는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고, 하람은 호수에 의해 원치않는 아침을 먹게 되었다.
등교하는 내내 하람과 호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서양적 외모나 금발은 확실히 거리에서 튀는 특징이였기 때문이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슬하게 1교시 시작전이였다.
1교시엔 조회가 있었다.
[알려드립니다.
이제 곧 운동장 조회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교실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집합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 . .... ...]
운동장 조회가 있다는 말에 아이들은 짜증내며 투덜거리곤 교실을 빠져나갔다.
하람과 호수 또한 운동장으로 나갔고 곧 운동장 조회는 시작되었다.
의례적인 순서들이 지나가고 교장의 지루한 연실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쯤..
"이번에는 저번에 다른 학교로 전근가신 선생님들을 대신하여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 두분의 소개가 있겠습니다."
교감의 말에 건장한 남자들이 앞으로 나왔다.
내심 젊은 여선생이길 기대하던 아이들은 야우를 보냈지만 곧 진정되었다.
"체육을 맡게 되신 신영광 선생님이십니다. 다들 환영의 인사를.."
이라고 하자 190정도 되어보이는 떡대의 남자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외국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신 강도준 선생님이십니다.
이제부터 생물Ⅰ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다같이 환영의 박수."
잘생기고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앞으로 한발 나와 인사를 했다.
짝짝-
그러자 여기저기서 힙없는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한편, 호수의 장난에 바보처럼 놀아나던 하람은 강도준이라는 이름에 놀라 고개를 들어 새로운 선생들을 처다보았다.
'저 인간이 왜..? 아....'
하람은 저번에 청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새 아침조회는 끝이 나고 전교생이 질서없이 우르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람과 호수는 그곳에 껴서 밀려가듯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3
딩동댕-
종이 치자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다들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나선다.
전국 학생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는 시간.
바로 점심시간이였기 때문이다.
하람은 부쩍 안좋아진 몸을 생각해 오늘은 뭐라도 먹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딱히 입맛에 맞는 것도 없었고, 먹고 싶은 것도 없었으며, 갑작스러운 음식물 투입에 위가 놀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하람이 결국엔 빵과 우유나 마시자는 결론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려고 일어섰는데...
하람의 앞에 누군가가 서있어 그녀의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람이 고개를 들어 위를 처다보자 호수가 보온병을 들고는 흔들어보인다.
"밥먹자!"
한서고등학교 식당에 처음 와보는 하람은 엄청난 인파와 살벌한 기운에 조금 놀란듯 했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빨리 먹기 위해 고분전투하고 있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저기 자리 맡고 있어."
라며 호수는 빈 테이블을 가르켰다.
그리곤 수많은 인파속으로 걸어들어가 이내 그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하람은 호수가 말한대로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않았다.
그러자 곧 연후와 도진이 도착했다.
"어? 여기 앉아도 되는거야?"
연후의 말에 하람은 고개만 끄덕였다.
도진과 연후가 하람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수는?"
"글쎄요. 곧 오겠죠."
하람에 말에 연후는 하람을 뚤어져라 처다보았다.
그리고는 머뭇머뭇- 한 기색을 보이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저기...하람아.."
"네 말씀하세요."
"사실 나 네 존댓말이 불편하거든..
그냥 편하게 말하면 안될까?
그게 더 친근하잖아.
같은 반이고..나이도 같고.. 또..음.. 친구니까... 말 편하게 했으면 좋겠다."
"아...."
하람은 당황했다.
사실 하람은 누군가에게 말을 편안하게 놓아본적이 없었다.
여태껏 그저 자신의 앞가림하기 벅차게 살아왔기 때문에 친구를 만날 틈도, 만들 틈도 없었다.
연후의 말에 하람은 그렇게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후와 좀 더 친해질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말이다.
자신의 임무는 김연후를 지키는 것이였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김연후가 아닌 호수가 착 달아붙어 다니게 된 하람이였다.
"뭐야. 내가 말 놓으랄땐 안놓고.. 이거 차별맞지??"
라며 어느새 다가온 호수가 투덜거렸다.
그의 손에는 보온병과 돈까스가 담긴 큰 접시가 들려져 있었다.
"뭐야 니 혼자 받아온거냐?"
"내가 팔이 4갠줄 알아?
옛다. 식권이다 가서 받아오기만 하면 될꺼다."
라며 식권 두장을 건낸다.
연후는 재빠르게 우동이라고 써져있는 식권을 낚아챘다.
"도진아 네것도 같이 가져올게."
라며 헤헤- 웃으며 쫄랑쫄랑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4인용 테이블에는 도진과 하람 그리고 호수만이 남았다.
하람이 몇일동안 겪어본 도진은 상당히 말이없고 과묵한 사람이였다.
그러나 존재감이 없는 그런 사람은 아니였다.
마치 굳건한 산과 같은 사람이였다.
하람의 옆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호수는 어디선가 가져온 빈 그릇에 보온병에 들어있던 것을 부어냈다.
그러자 여러가지 야채가 담긴 죽이 그릇을 가득채웠다.
보온병에 담아서 그런지 식지 않고 모락모락 열기가 올라온다.
"자, 먹어."
호수는 친절하게도 그릇에 수저를 푹- 담더니 하람의 앞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돈까스를 나이프로 자르기 시작했다.
"너무 안먹는것도 안좋아.
가뜩이나 마른 자식이 다이어트하는 것도 아닐테고 말야..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지, 요즘 세상에 누가 영양결핍으로 쓰러져~"
라며 우걱우걱- 돈까스를 씹어댄다.
우동과 라면을 들고 온 연후는 중간에 쏟을 뻔 했다며 투덜거렸다.
하람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호수의 성의에 속으로만 감사하며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닥 입맛이 없었기 때문인지 하람은 몇수저 먹지도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아야만했다.
그러자 열심히 밥을 먹던 호수가 하람을 처다본다.
"안돼 푸딩!
그렇게 생기를 잃어가면 안된다고.
포동포동- 해야 잡아먹는 맛도 있지 않겠어?"
란다.
그말에 하람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작은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에 호수는 눈을 크게 뜨고 하람을 처다본다.
"..왜 처다봐..?"
"너..방금 웃은거야?"
"......."
"맞지 웃은거지? 그런거지??
와~
진짜 예쁘다..
앞으로 자주 웃어봐. 진짜 예뻐~!!"
라며 감탄사를 줄줄이 내놓는다.
그 바람에 뻘쭘해진 하람은 호수를 무시하며 멋쩍은 표정을 하다가 수저를 휙휙- 돌리며 끄적거렸다.
"이리줘봐.
그렇게 먹으면 복달아나."
라며 하람이 쥐고 있는 수저를 빼앗아간다.
그리고는 죽을 한아름 푸더니 하람의 입술로 가져간다.
하람은 죽을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호수를 빤히 처다본다.
"뭐해 먹으라니까."
그러자 하람이 천천히 입을 열고 아기같이 죽을 바라본다.
그런 하람을 바라보는 호수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너희...."
"응?"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후가 우동을 먹다말고 입을 연다.
밥먹을 때만큼은 입다물고 한마디도 안하는 연후가 말을 하자 호수는 놀랍다는 눈으로 연후를 처다본다.
"정말 사이가 좋구나?"
"으응??"
이번에는 하람이 신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표시를 띄운다.
"아냐 밥먹자."
친구끼리라도 먹여주는 애들은 별로없어, 라고 말하려던 연후는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을 염려.
그냥 그말은 속으로 삼켜버리고 젓가락으로 우동면발을 집어들었다.
물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후만이 아니였다.
호수는 꽤나 학교에서 유명했다.
멋진 외모와 스타일도 그렇지만, 혼혈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튀었다.
서양에서 동양계 사람이 시선이 가듯 혼혈아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화려한 블론드 머리카락이 시선을 모으는데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옆에서 힐끔- 거리며 호수 일행을 훔쳐보던 아이들은 그대로 얼고 말았다.
아기도 아니고 동갑에 사지 멀쩡한 남자에게 밥을 떠먹이는 호수나..
자기가 마치 아기가 된 것 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받아먹는 하람이나..
모두 정상이라고 비춰지기엔 약간의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호수는 꿋꿋하게 하람에게 밥을 떠먹였다.
시선에 무딘 하람과 호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였지.. 만약 다른 일반인이였다면 얼굴에 구멍이 뚤렸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떠먹이거나, 받아먹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4
식당의 거의 모든 이들의 정신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하람과 호수는 밥을 다먹고 유유히 식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연후와 도진은 원래 밥먹는 속도가 매.우 느린터라 그냥 그 둘을 버리고 나와 막 입구를 통과하려는 순간.
"강하람!!!"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가 하람을 불러세웠다.
하람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떠올리고는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천천히 뒤돌아보자 그 곳에는 도준이 서있었다.
그는 잽싸게 하람의 앞에 와서는 하람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갑작스러운 도준의 태도에 하람은 물론 호수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너 왜 연락안했어!!"
하람이 무사하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도준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 바람에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일행에게 다시 또 시선이 몰린다.
"....죄송하군요."
"강하람!
형한테 아직도 존댓말이냐??
왜 집에 안들어왔던거야?
아.버.지가 몇번이나 확인전화하신거 알아?
네 신.분을 지금 망각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도준은 눈을 부릅뜨고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실어 호통쳤다.
하람은 재빨리 상황파악을 했다.
필히 학교에서의 하람과 도준의 관계는 친형제가 틀림없었다.
아버지라 함은 경찰청장을 가르키는 말일 것이고, 신분이라함은 임무를 잊었느냐고 화를 내는 것이다.
하람은 소리없이 사라져 경찰청에 연락을 넣지 않은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분명 사라진 자신 때문에 경찰청에서는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가뜩이나 연쇄살인범으로 인해 사회가 흉흉한 이 시점에 잠복근무를 나간 담당형사의 실종(?)이라..
게다가 평소에 하람이 이런식으로 연락을 끊은 적이 없어 아마 불안감은 더했을 것이다.
하람은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노라고, 잠시 몸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럼 그렇지.
네가 아무 이유없이 외박을 할리가 없지..
그래 지금은 안아프지?"
"응.."
다정한 모습.
하람과 도준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친 형제사이로 보였다.
외박을 한 동생과 그 동생을 나무라는 형제의 모습 말이다.
아이들은 갓 부임해온 선생과 하람의 사이를 멋대로 상상하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시선을 거두웠다.
"쌤~ 하람이네 형?"
"아.....그래...음...이름이..?"
"유호수입니다."
"아..그래...나이는 내가 더 많으니 말 놔도 되겠지?"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선생님이시잖아요."
호수가 붙임성 좋은 성격을 발휘한다.
도준은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띄운다.
"너 이과반 14반이지?
조금 있다가 생물시간에 보자. 그럼 오늘은 일찍 들어와라."
도준은 하람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료정리가 덜 되었다며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하람은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을 동생취급하며 스킨쉽을 유발하는 도준의 태도에 조금 빈정상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어차피 친형제로 완전 못박힌 듯하니 당분간은 그런식으로 연기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네 형이라는 거 왜 말안해줬어?"
"나도 몰랐으니까.."
"흠.
근데 형제끼리 되게 안닮았네."
호수의 날카로운 지적에 하람은 속이 뜨끔- 하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나 외모상으로 하람과 도준은 형제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들이였기 때문이다.
"형은 아버지닮고, 난 어머니를 닮았으니까.."
하람은 대충 둘러대고는 호수가 또 다른 것을 물어오기 전에 그의 팔을 끌어 교실로 가자 하였다.
호수는 아무런 의심없이 하람에게 이것저것 재잘거리며 교실로 향했다.
.
.
.
하람의 신경은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 마냥 날카로웠다.
그것은 우중충한 날씨 때문도 아니였고,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옆의 호수 탓도 아니였으며,
요즘 따라 마치 구렁이가 담넘어가듯 능글맞게 구는 도준 탓도 아니였다.
하람의 신경을 건들이는 것은 바로 오늘의 요일.
그렇다.
오늘은 그 지독한 살인마가 살기를 뿌리며 희생자를 찾아헤메이는 목요일이였던 것이다.
연쇄살인자는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닌 무차별하고, 무자비한 살인을 행하고 있었다.
그는 살인을 즐겼으며, 살인을 통해 또다른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희생자를 찾아 거리를 헤멜 것이다.
아직 연후의 주변엔 그닥 의심가는 인물은 없었다.
물론 연후의 주변에 꼭 범인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연후에게 접근하는 수상한 사람도 없었다.
몇일 전 하람은 연후가 항상 신고다니는 신발에 위치 추적기다는 것에 성공하였다.
호수를 통해 연후와 많이 친해진 탓이였다.
그리고 또 최근에는 연후의 전화기에 도청기를 다는 것을 성공했다.
혹시라도 범인이 주변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몇달째 잡히지 않고 있는 범인.
계속해서 일어나는 살인사건.
검찰과 경찰을 비난하는 여론은 거세졌고, 경찰과 검찰은 사방팔방으로 범인을 잡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런 검찰과 경찰의 노력을 비웃듯이 범인은 유유히 사건현장을 빠져나가곤 했다.
첫번째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남자는 건강한 남성.
대략 20~30정도 될 듯한 나이에 스포츠형 머리.
남들보다 키가 굉장히 크고 체격이 건장하다는 특징외에 알아낸 것이 없었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여서인지, 아니면 범인이 일부로 그런 곳만을 택하는 것인지..
가로등하나 없는 골목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다른 특징이나 몽타주 작성은 힘들었다.
두번째 목격자인 김연후의 경우도 그랬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것 같은 범인의 태도에 경찰과 검찰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범행 장소 또한 특정 지역이 아닌 서울과 경기도 일처였기 때문에 사방에서 출몰하는 범인을 잡아내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게다가 목요일 밤길을 조심해달라는 검찰의 호소에도 시민들은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길리가 없어',란 안일한 생각으로 대체하였기에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
오늘 만약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면..희생자는 11번째가 된다.
벌써 10명이나 살인범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하람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딩동댕-
때마침 울리는 종소리의 하람의 한숨을 묻혀버렸고..
호수는 가방을 들고 하람의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가자~"
벌써 가방을 챙기고 뒷문에서 하람과 호수를 기다리는 연후와 도진.
오늘은 담임선생이 연수에 참여하는 날이기 때문에 종례는 생략되었다.
하람은 책상 옆에 걸린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섰다.
이런날 현장을 뛰지 못하고 어린 고등학생들 틈에 껴있어야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말이다.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5
하교길.
나란히 하교하던 하람과 호수.
호수는 퓨마 마크가 큼지막하게 박힌 옆가방을 메고 하람의 옆에서 연신 쫑알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람의 머릿속에는 온통 '목요일'이라는 단어만이 둥둥 떠다닐 뿐이다.
그런 하람의 눈앞에 저멀리의 두 인영이 눈에 띄었다.
"어?"
두 사람은 사이좋게 6,7교시를 땡까고 사라진 도진과 연후였다.
덥썩-
"응?"
재잘거리던 호수가 갑자기 손을 잡아오는 하람의 태도에 당황하며 눈을 크게 뜨고 하람을 처다보았다.
그러나 하람은 허수의 주변에 떠다니는 '?'표시를 무시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영문도 모른체 끌려가는 호수였다.
"어? 호수야~"
먼저 인사를 건낸건 연후였다.
도진은 하람과 눈을 맞대고 고개를 약간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하람이도 있었네~"
"응. 근데 어디가는 길이야?"
"응? 그냥 집에..너희는?"
"우리야 뭐.. 갈곳두 없구.. 그냥 정차없이 떠돌고 있었징~"
하람과 맞잡은 손을 흔들어보이며 끼어드는 호수.
하람은 그제서야 아차! 하는 마음에 손을 빼려고 했지만 하람의 손을 꽈악- 쥐고 잡고 있는 호수의 손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사이 좋아보이는(?)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연후가 말했다.
"그래? 특별히 가는 곳이 없다면 우리집 갈래?"
"응! 먹을꺼 많은 연후네~
하람이 너도 갈꺼지?"
"응..? 아..가..가야지..당연히.."
방긋- 웃으며 물어보는 호수의 물음에 하람은 얼떨떨하게 대답하게 되었다.
"좋아 그럼 가자구~"
뜻밖의 수입이였다.
그의 집에 가게 된 것은 말이다.
좋은 일을 몰아준 호수를 잠시 처다보던 하람은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호수의 옆을 걸었다.
연후는 평범한 집의 둘째 아들이였다.
월급쟁이 아버지와 깐깐한 주부이신 어머니, 평범한 형. 평범한 누나.
24평 남짓한 주택에 들어서자 향긋한 아로마 냄새가 풍겨온다.
연후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모두들 외출을 한 모양이였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도진과 호수는 자주 와봤는지 익숙한 행동으로 연후의 방에 들어간다.
하람 또한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연후의 방은 다른 남학생들의 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이리저리 팽겨쳐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옷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연후는 발로 옷을 대충 모아 한 곳으로 처박아 놓았다.
"기다려봐. 이 두놈들은 몰라도 하람이는 손님이니 먹을 것이라도 내놔야지.
가방으로 대충 내 방에 놓고 비교적 그래도 넓은 거실로 가자."
"그럼 우리는 손님 아니라는거야?"
호수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도진의 눈빛 또한 그렇게 묻고 있는 듯 보였다.
"이 식충이들아! 니네가 손님이냐~ 왠수지!!"
라며 말하자 곧 바로 호수의 항의 어린 말들이 날아든다.
"식충이라니! 너무해 연후!
어떻게 친구에게 그런 심한 말을...!!"
물먹거리는 폼새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기세다.
오바하는 행동또한 진심어려 보였지만 역시 고단수인 연후에게 통하지 않았다.
연후는 무심히 호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쑈를 해라. 쑈를 해.
자꾸 말꼬리 잡고 늘어지면 저녁을 없을 줄 알아!"
"헙!!!!"
호수는 다급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부정의 뜻을 내비췄다.
"그럼 할 말 끝난거지? 간다."
결국 호수의 패배로 돌아가버린 말싸움이였다.
연후는 음료수와 과자 그리고 빵을 꺼내왔다.
아무래도 남자가 넷이다 보니 먹는 양이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한 연후가 꽤 많은 양의 먹을 것을 가져온 것이다.
한가득 먹을 것으로 들고 거실에 모인 일행들..
"근데.. 심심하다."
호수가 과자를 바삐 집어먹으며 말했다.
입은 심심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손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과자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러게 할게 없네.."
솔직히 재미없는 남자 넷이 모여 집에 처박혀 무엇을 할 것인가?
여자들은 수다라도 떨고 보통 남학생이라면 게임이라도 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내기라도 하겠지만..
지금 모인 이멤버들이 어디 흔한 멤버이겠는가?
한놈은 언어가 아는 눈짓과 눈빛으로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고...
한놈은 친구라고는 한놈도 사겨본적 없고 대인관계에서만큼은 빵점인 초짜녀석이고..
또 한놈은 멀쩡하게..아니 오히려 준수하게 생겨서는 가끔..아니 아주 자주 알수 없는 말을 하는 정체불명의 외계인 같은 놈이고..
한놈은 그나마 정상적인 놈이지만 공부에 가끔 미쳐 세상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어쩌면 이 곳에서 제일 순진한 놈이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도진이랑 보려고 빌려놓은 DVD가 있는데..
호수야 그것좀 틀어봐. 나 잠깐 화장실좀."
이라며 연후가 일어나며 말했다.
호수는 연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유리문을 열고 DVD 전원을 켰다.
전원의 빨간불이 들어오고 재생이 시작되었다.
[..앗...으응...아아앙.....하앗...]
"헉!"
TV 브라운 관에서는 외설적인 내용이 흘러 나왔다.
호수는 잠시 굳었고 도전은 조금 당황한듯한 표정으로 흐트러진다.
살색의 외설적인 장면에 놀리지 않은 것은 오직 하람 뿐이였다.
가는 소프라노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한 여자의 목소리에 그 누구도 DVD를 끌 생각하지 못했다.
무심히 TV를 보던 하람이 입을 열었다.
"강간모드군."
..모두들 돌로 굳어버리는 순간이였다.
정말 생긴건 가장 순진하고 귀엽게(?) 생긴 주제에 저런 단어를 입에 담을 줄이야..
호수와 도진은 속으로 동시에 외쳤다.
'생긴대로 놀란 말이야....!'
둘의 처절한 절규는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어둠속으로 묻혀갔고..
화장실에 다녀온 연후가 벌개진 얼굴로 DVD를 종료시킴으로 마치 석상처럼 굳어있던 두 남자의 몸이 마법처럼 풀렸다.
"연후야....너.. 저런것도 보니.."
호수가 의외라는 듯이 연후를 처다보았다.
연후의 얼굴은 민망함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냐!
이놈의 형을 그냥...!"
연후는 잔뜩 꾸미고 헌팅을 하러 나갔을 자신의 형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괜찮아.. 이해해줄수 있어..
대한민국의 건장한 고등어라면... 그것도 건장한 수컷이라면 다 그런거지...흐흐흐.."
호수는 아까의 복수라도 되갚겠다는 것인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아니라고 했지!!!!!!!"
"다 이해한다니까~~~~~"
라며 연후의 어깨를 두들기며 속삭인다.
"근데..좋았냐?"
"유호수....죽을래!!!!!!!"
"클클클~!!!!!!"
연후의 찌렁찌렁한 목소리를 뒤로 사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에 대해 우리는 연후에게 행운을 빌어줘야할 것이다.
분명 호수는 이 일을 빌미로 두고두고 연후를 괴롭힐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6
[예고장의 말대로군요. 이것으로 첫번째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베르체 형사님.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 . .... ....]
연후가 보고자 했던 것은 다름아닌 추리 영화였다.
산속의 한 대저택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
실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기에 꽤나 현실감 있고 작품 완성도가 높아 추리 매니아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 호평받는 영화였다.
"누가 범인일까?"
"그러게 아무래도 저 여자가 범인같지 않아?
후계자가 죽으면 이익보는 여자는 저 여자 아냐!
생긴것도 깐깐하게 생겨서는.."
연후와 호수는 연신 범인이 누구일 것이다라고 온갖 추측을 내놓았다.
"범인은 첫째아들이야."
"뭐? 왜?"
가만히 영화를 보던 하람이 말하자 모든이의 시선이 하람에게 몰렸다.
"양궁은 여자가 당기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물건이지.
소의 힘줄을 만들어 보통여자가 활시위를 당겨 목표물을 맞추기엔 무리가 있어.
특별히 양궁을 배운사람이 아니라면 해내기 힘들어.
아마도 양궁 시위는 눈가리게 일뿐이야.
작은 창문을 맞추기엔 무리가 있어... 확실히 일반인이라면 말이지.
형사는 희생자가 서있던 자리의 벽에서 몇가지의 흔적을 발견했어.
그것은 마치 못같은 것으로 파고 든 것같은 것이였지.
그 흔적은 바로 범인이 몇일 전부터 희생자를 맞추기 위해 몇번의 실험을 걸쳐 준비한 것일꺼야.
실제로 범인을 맞춘것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석궁이겠지.
또 피해자는 활에 죽은게 아니야.
분명 맞기는 했으나 그렇게 빨리 급사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부위는 아니였어.
그것은 단순한 미끼일뿐 피해자가 사망하게 된 원인은 목 뒤에 있을꺼야.
사람의 몸에는 365개의 혈이 있어.
그곳에 정확하게 힘을 가하면 심하면 사망에 이르지.
그렇다면 혈을 잘아는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커.
큰아들은 중국에서 의학을 배웠고, 피해자가 사망하기 직전 그를 포옹하며 인사했어.
아마 그 타이밍을 절묘하게 노려 석궁을 쏘게 만들었을 거야.
피해자를 죽인 것은 숨어있는 다른 자라는 인식을 주고 오히려 피해자와 같이 있었다는 것으로 알리바이를 성립시켰던거야."
"오!
니 말을 듣고 나니 그런 가능성이 있다!"
이런곳에서 자신이 배운 전공을 어김없이 발휘해버린 하람이였다.
"대단하다! 니 말을 들으니까 정말 저 남자가 범인같이 느껴지는걸?
우와 너 이런 거 되게 좋아하나보네? 나도 추리같은 것에 흥미 많은데..
아직 봐도봐도 범인이 누군지 모르겠던데.."
"아..조금 좋아하는 편이야..."
연후가 연신 감탄하며 초롱한 눈으로 처다보자 하람은 멋쩍인 듯 대충 얼어부렸다.
영화는 하람의 예상한 남자가 범인이였고, 무언가의 여운을 주는 듯한 스토리로 장장 3시간에 걸친 스토리의 막을 내렸다.
영화를 다 본후 대충 늦은 저녁을 먹자 시계는 어느덧 11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늦었다. 얼른가."
모두 하나둘 자신들의 짐을 챙겨들었다.
"데려다줄까?"
"으..ㅇ...."
"아니!! 그냥 집에 있어. 너무 늦은 시각이다.
게다가 오늘은 목요일이잖아."
응! 이라고 답하려는 호수의 대답은 하람의 말에 일찍이 묻혀버렸다.
"그러고보니 오늘 그 여자만 노린다는 연쇄살인범이 날뛰는 날이구나.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에 오한이 든다니까..
하필이면 그런 살해장면을 발견하다니 말야.
정말 요즘 세상에 미친놈도 많다니까.."
연쇄살인범은 이미 대중언론매체에 의해 멀리 퍼져있는 상태여서 코흘리게 어린아이들이 아닌이상 모든이들이 알고 있는 큰 사건이였다.
"근데 여자만 노린다니.. 남자인 내가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순간 하람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연쇄살인마는 모든 여자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 마냥 항상 여자만을 그것도 특징적으로 같은 여자를 죽이곤 했다.
여태껏 많은 희생자중에 남자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후는 예외였다.
그는 유일한 목격자였고..(물론 다른 목격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범인이 선포한 목표물이였다.
어떻게 설명을 하지도 못하고 특별하게 둘러댈거리도 없이 우물쭈물해하는 하람을 도와준 것은 다름아닌 도진이였다.
"...넌 여자로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라며 연후를 아래위로 훓는다.
처음엔 도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연후는 도진이 계단을 내려갈때가 되서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그거 지금 내가 여자같다는 말이냐??
이 자식아!! 거기 안서?!!"
그러나 연후에게 돌아오는 것은 도진의 대답이 아닌 밤늦게 누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냐는 어느 성질드러운 아저씨의 욕설 뿐이였다.
.
.
.
"그럼 내일봐."
"도진아 잘가."
휙휙-
두어번 손을 흔들던 도진은 그대로 돌아 호수와 하람이 가는 길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도진은 그렇다 치고 호수는 바로 근방에 버스 정류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람의 집 근처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겠다고 우겼다.
그 똥고집에 못이긴 하람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호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선선한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주택가라 그런지 굉장히 어두웠고, 길또한 좁고 이리저리 엉켜있었다.
시간은 11시 20분.
연후의 집에서 나온지 10분정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분전 길가에서 어디서 버스를 타는가. 에 대해서 말싸움비스무리한 것을 벌이다가 10분이나 길바닥에서 그대로 시간을 보내버린 하람과 호수였다.
파바밧-
금방이라도 꺼질 것같은 가로등은 깜빡깜빡- 거리며 위태로운 생명을 이어나갔다.
호수는 고개를 들고 가로등 불빛을 처다보았다.
"왠지 기분나빠.."
사람이라곤 하람과 호수밖에 없는 인적없는 골목길.
가로등이 커져있어도 기분나쁜 골목인데, 엎친데 겹친격이라고 가로등까지 깜빡거리니 음산한 분위기는 한층 더했다.
"왠지 으스스하다. 그치 하람아?"
"그렇네..
마치 살인이라도 일어나기 딱 좋은 곳이군."
"엇..그런소리하지마..
부정탄다. 부정타."
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순간..!
야옹-
"헉!!!"
어디선가 검은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야행성 동물이라 그런건지, 눈동자는 빛을 반사해 마치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악...깜빡이야.."
호수는 화들짝- 놀란 심장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의외로 겁이 많은 호수였다.
고양이는 두어번 울음소리를 내뱉고 호수를 째려보듯 처다보다가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기분나빠.."
호수는 한껏 얼굴을 찡그리곤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타다당-
무언가 바닥에 부딛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7
"응? 이게 무슨 소리지?"
"....."
호수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하람은 아무말없이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어? 그쪽은 우리가 가야할 곳이 아니야. 하람아?"
하람은 호수의 말을 무시한 채로 계속 그쪽으로 걸어갔고, 어쩔수 없이 호수 또한 하람의 뒤를 따랐다.
좁고 미로처럼 엉켜있는 골목길을 따라 걸어들어간다.
무언가를 발견한 하람은 그자리에 우뚝 섰다.
"응? 무슨 일이야?"
갑자기 멈춰버린 하람의 행동에 하람의 옆에선 호수는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행동에 얼어버렸다.
그것은 참혹한 것이였다.
좁은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여자.
그녀의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입근처에는 잔뜩 침이 묻어 있었다.
소매쪽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으며, 눈까지 부릅뜬 채로 죽어 있었다.
타다닥-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미세한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 하람은 그대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던 곳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하람아?"
"경찰에 신고해!! 어서!!"
하람은 달리며 뒤에 덩그러니 서있는 호수에게 말했다.
어김없이 목요일의 밤은 또하나의 희생자를 만들어 내었다.
하람은 이를 악물었다.
경찰로써의 자신의 무능력함.
조금만 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면 아마도 저 여자를 살렸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람은 있는 힘껏 뜀박질을 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좁고 미로같은 골목길을 돌고 또 돌고 갔던 길을 되돌아 숨바꼭질같은 추격이 시작된지 약 10분 정도가 흐른 것 같았다.
점점 앞의 발자국소리가 더욱더 커져옴을 느낄수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이미 폐는 한계라는 신호를 뇌까지 전달시키고 있었지만 애써 하람은 그것을 거부한다.
잡아야한다.
거칠게 튀어오르는 심장은 요란스레 고동친다.
하람의 눈 앞에 덩치큰 남자 하나가 멀리 시야에 잡힌다.
더욱더 속도에 박차를 가한 하람이 그 남자의 뒤를 거의 따라잡았을 때..
퍽-
무언가가 하람의 머리쪽으로 날라왔다.
남자가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던 것이다.
그 바람에 하람은 뒤로 휘청거리게 되었고, 남자와도 거리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주르륵-
하람의 이마 위로 피가 흘렀다.
피는 그녀의 시야를 촉촉히 가리며 밑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람은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범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풀릴대로 풀려버린 몸뚱아리는 어서 달리라는 의지를 철저히 무시해버린다.
저 멀리서 달려가는 범인이 살짝 하람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야구모자를 써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짐승같이 빛나는 그의 눈빛이 하람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젠장.."
하람은 욕지꺼리는 내뱉으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버린다.
출혈이 심한 것인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싸이렌 소리와 함께 하람은 눈을 감아버렸다.
목요일 밤이 삼켜버린 희생자를 애도하며..
.
.
.
찰칵- 찰칵-
옛날에서나 나올법한 타자기를 두둘기는 형사와 그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하람과 호수.
"그러니까 11시 30분 경쯤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그 곳에 가보았다는 겁니까?"
"네."
"...."
이미 치료를 마친 하람은 이마쪽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형사의 질문에 호수만이 답하고 있었다.
하람은 의자 등에 기대어 멍하니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사에 응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목격자에 대한 신분은 철저히 보장해드립니다."
"그럼 가봐도 되는건가요?"
"예.
가보십시오."
장장 6시간에 걸친 조사가 끝났다.
물론 별로 발견한 점도 알고 있는 점도 없었지만, 하람의 치료와 현장조사로 인하여 시간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하람과 호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담당 형사에게 목례하고는 경찰청을 빠져나왔다.
형사인 하람이 목격자가 되어 다른 형사에게 조사를 받는 일이 생기다니..
하람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피식- 웃었다.
갑작스레 웃는 하람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호수는 그 미소가 너무나도 슬펐기에 그녀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였다.
시간은 벌써 5시 반을 훌쩍 넘겨 있었다.
잠들어 있던 도시는 하나 둘씩 일어나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거리에도 하나둘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도로에는 쌩쌩- 달리는 자동차가 있었고, 해또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다.
또다른 한 명의 희생자를 삼켜버린 밤은 서서히 그 이빨을 감추고 물러가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지독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 침묵이 어색했는지 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죽어 있는거..
보는거....두번째야.."
"........."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그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까..무섭다..
넌 처음보나봐...
그래서 지금 충격받은거지..?"
호수는 하람이 충격을 받아서 저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하람에게 시체란 직업상 그리 멀리있는 것이 아니였다.
대한민국은 옛날의 대한민국이 아니다.
이미 잃어버린 도덕과 양심은 범죄를 낳는다.
나만 잘살면된다는 이기심에 뒤덮혀 남의 목숨따위는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인간들이 많았다.
용돈을 안준다고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아내를 사고로 위장시킨 남편.
부모님의 유산을 위해 청부살인을 부탁한 자식.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을 살해한 남자.
남편에 외도에 남편의 아내를 찔러버린 여자.
하람은 시체를 수도없이 봐와봤다.
점점 무감각해지는 감정은 그런 끔찍한 사건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고작 이런 것으로 그녀가 흔들릴리가 없었다.
충격같은 것은 애시당초 받지 않게 되었다.
다만 범인의 눈빛이..
어둠속에서도 잔인하리만큼 빛나던 눈동자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헤집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8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구멍에서 열쇠를 빼낸 하람은 손잡이를 돌려 밀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을 잠그지 않았었던가..?'
하람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시 열쇠를 구멍사이로 밀어넣었다.
집안은 공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수 있었다.
하람은 기척을 죽이고 현관문 근처에 걸려있는 긴 장대우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벽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척은 안방에서 들려왔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인듯 했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반쯤 열려있는 안방문 안을 살펴보는 하람.
팟-
그 순간 어두운 거실의 불이 커졌다.
한순간 얼어붙은 하람.
수의치가 있는 쪽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얼라라?
뭐하냐?"
"........선배....?"
.
.
.
"크크.. 내가 도둑이라도 되는줄 알았나보지?
흐응...아마 TV소리는 사람의 기척으로 착각했을테고~"
"왜 여기 계시는겁니까?"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히죽대는 도준.
하람은 꽤나 기분이 상해 이마 위로 솟구쳐 오르려는 힘줄을 애써 진정시킨체 따지듯이 물었다.
"아~ 오늘부터 너와 난 호흡을 맞춰야하니까
정부 예산 축낼생각말고 같이 살라던데?"
히죽거리며 말하는 도준의 태도에 하람은 '그 빌어먹을 너구리같은 청장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도준을 붙여준 청장을 떠올렸다.
그 사이에 도준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부탁한 김연후에 대한 자료고.. 이건 오늘 사건 조사내용이다."
라며 그 서류를 하람의 앞으로 밀어넣어주었다.
자료를 받아든 하람은 한 장 한 장 서류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라고 생각안해.
정신이 이상한 놈이 아니고서야 그런짓을 할리가 없지.
범죄심리야 내 전공이 아니지만.. 그 놈은 여자에게 몇차례에 걸쳐 심한 상처를 받은게 틀림없어."
"어렸을 때 아동학대를 당했을 경향이 크죠.
실제로 켈로리다 주에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원인은 범인의 어렸을적 어머니를 통한 학대에서 비롯되었죠.
아마도 굉장히 소심하고 섬세한 성격일꺼예요.
희생자들중 그렇다할 관계자는 없지만 특징적인 것들이 있어요.
옷차림이나 체구같은 것말이예요.
그리고 희생자들의 목을 칼같이 끊어놓았어요.
대게 그런 상황이면 피해자들은 완강히 발버둥치며 소리를 지르고 저항했을텐데도 별 소란과 마찰없이 피해자를 제압한 걸보면 운동을 꽤나한 사람일꺼예요.
피해자들중 국가대표 유도 선수가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해본다면 운동에 종사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고요.
평소에는 일반인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테죠..
그러니 더욱더 위험한 것이구요.
아마도 잠재되어 있던 분노가 '여자'라는 키워드를 가진 특정한 사건으로 인하여 폭발했을 가능성이 커요."
"역시 전문가의 답변이군.
하버드 범죄 심리학과 수석다운걸?
나같은건 못따라잡겠어..후후.."
"...아이큐 145이신 선배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욕으로 들리는군요."
"하하하..그럴리가 있나~
너도 만만치 않을 걸로 아는걸?"
이라며 도준은 찡긋- 한 쪽 눈을 깜빡여보였다.
"FBI에서 잘도 선배를 한국으로 파견시켜주다니 의외였어요."
"하하..나도 빠져나오기 힘들었다구..
근 한달전부터 근 모든 중요한 사건은 내가 맡아서 처리하는 바람에 하루도 제대로 자본적 없어.
한달만에 돌아간다는 약조를 하고나서야 나온거라니까? 후후.."
"윗쪽에 나랑 같은 파트너로 붙여놓으라는 명령도 물론 미리 손써놓으신거겠구요."
"....하핫;; 알고 있었나보네..으음..
그렇지만..자꾸 하람이가 날 싫어하고 피하니까 자꾸 자꾸 달라붙고 싶은걸~"
"....그러니까 제가 더 싫어하는건 아시지요?"
"후후....그런건 신경쓰지 말고 이제부터 사랑해달라고. 알았습니까? 얼음공주님.
아, 그리고 이제부터 학교에선 형제 행세를 해야할테니까 잘 협조해달라고..
요즘 김연후 근처에 수상한건 없고?"
"아직까지 낌새는 없습니다만.......근데 왜 하필 형제입니까?"
"그럼 동생이라고 그럴까?
그나마 너 다음에 내가 형사들중에 제일 젊어서 선생으로 온거야.
뭐 온것도 별로 도움은 안되겠지만.. 요즘 애들은 선생을 멀리해서 말야..
앞으로 파트너로써 잘해보자구~"
생글생글- 웃어보이는 도준의 앞에서 하람은 도준 모르게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평탄치 못할 자신의 우중충한 미래를 생각하며....
.
.
.
토요일 3교시.
HR·CA·조회로 이루어진 토요일은 거의 노는날이나 다름없었다.
담임은 회의에 들어가 들어오지도 않고 교실은 난장판이였다.
남자들이 무엇이 그리 할 말이 많은 것인지 이리저리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시끄러운 주변환경에 하람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에 집중하려고 신경썼다.
조용한 발라드 곡이 흐르고 하람은 턱을 괴고 앉았다.
귀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자꾸 머릿속에는 잡생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방해하는 이가 있었으니.. 호수가 하람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쳤다.
하람은 호수 쪽으로 돌아보았다.
호수는 하람의 한 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었다.
".....?"
"오늘 시간 있어?"
"무슨 일인데?"
"어디 같이 가자구.."
"어딜..?"
"..........혼자 가기 싫은 곳.."
하람은 거절하고 싶었다.
토요일.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니 오랜만에 느긋하게 자료 정리·분석도 하고 청담동 살인사건 시신검사의 결과 또한 알아보러 K에게 갈 생각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의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혼자가기 싫은 곳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호수처럼 맑은 검은색 눈동자가 눈물로 얼룩져 있었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람은 조용히 가방을 챙겨들었다.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30분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게이치 않았다.
"그럼 가볼까?"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19
덜커덩- 덜커덩-
한산한 전차안.
몇없는 사람들. 전차안으로 들어오는 햇빛.
전차의 움직임에 따라 앞뒤로 흔들리는 손잡이.
창 밖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막힘 없이 앞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전차.
하람은 말없이 문쪽의 작은 창밖 세상을 바라보았다.
질서없이 서있는 집들이 눈에 박혀 들어온다.
덜커덩 덜커덩-
낡은 전차는 비명을 지르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간다.
불투명한 미래를 나아가듯 정해진 운명을 따라 그렇게 앞을 헤치며 나아간다.
아까부터 꽉- 잡은 손을 통해 온기가 전해져온다.
마치 엄마를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체 그렇게 무언가에 불안한 듯, 긴장한 듯...
아까부터 굳은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매일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라고 생각되지 않을정도로 굳어버린 얼굴에서는 미소 한 점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 역은 수내.. 수내 역입니다. 내리시는 분은 오른. .. .... ...]
스피커를 통해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리자."
그는 오른 쪽문에 섰다.
전차가 역안으로 진입하고 곧 문이 열리고 하람과 호수는 역에 내렸다.
한가한 역안.
호수는 하람의 손을 놓지 않은 체 어디론가 향한다.
역에서 내린 후 택시를 타고 20여분 정도를 더 가서 도착한 곳은 한 요양원이였다.
약간 연한 분홍색으로 칠해져있는 건물.
양쪽으로 세워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환자의 빠른 쾌유를 위해서 마련한 듯보이는 잔디와 간간히 보이는 벤치.
여기저기 환자복을 입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진 사람들이 여기저기 간간히 눈에 띄었다.
호수는 잔뜩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앞을 향해 걸어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병원.
'접수실'이라고 써져 있는 곳으로 간 호수.
간호사는 이것저것 차트를 정리하는 듯 하다가 자신의 앞에 서있는 호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어머, 반가워. 호수군.
오랜만에 왔네. 어머니는 잠시 B구역 정원에 산책나가셨거든...
근데..옆에는..?"
"아..친구예요. B구역 정원이라구요? 혼자서 계신가요?"
"요즘엔 몸이 좋아지셔서 혼자 다니실수 있게 되셨거든.
얼른 가봐. 바람이 차지기 전에 들어오시는거 잊지말구~"
"감사해요. 누나."
대화를 마친 간호사는 바쁘다,바뻐.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차트 정리에 집중했다.
하람은 멀뚱히 눈을 뜨고는 호수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 그의 뒤를 따랐다.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 한참 걷다보니 주위에는 아무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곳.
조금 먼 잔디공터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보였다.
호수의 걸음이 더욱더 빨라진다.
그러다 여자가 점점더 가까워지자 점점 걸음이 느려진다.
그의 걸음에 맞춰 하람도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호수는 바로 여자의 뒤에서 우뚝- 멈춰섰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여자는 약 3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였다.
약간 덥고 바람에 선선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숄을 걸치고 무릎 위에는 담요를 올려놓고 있었으며,
갈색 머리는 한 갈래로 따서는 길게 늘어트리고 있었다.
약간 눈 꼬리가 쳐저서는 선한 인상을 주는 여인이였다.
"....엄마...저 왔어요."
호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왔다.
아주 미세한 떨림이였지만 하람은 알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음을..
호수의 말에 중년여인을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민현이 왔구나.."
"..네. 어머니 잘 지내셨죠?"
"그럼..내 아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우리 민현이..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거지?"
"그럼요.. 잘다니고 있어요."
그녀는 휠체어 바퀴를 살짝 틀어 호수를 바라보았다.
하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현이라는 이름은 호수의 이름이 아니였지만 호수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인은 호수를 '민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람은 여자와 호수를 번갈아 처다보았다.
호수는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평소의 그의 환한 미소가 아니였다.
인위적인, 억지 웃음이였다.
하람이 가끔 쓴 웃음을 짓곤 하는.. 혼자 남몰래 울고 싶을 때 짓곤하는.. 그런 미소였다.
하람은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지면서 따끔- 거리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유가 무엇때문인지는 모르나 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이 싫었다.
죽어버린 것 같은..
전혀 생동감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그의 표정이 싫었다.
기분 나쁜 감각이 몸을 엄습해온다.
여인은 계속하여 '민현'이라는 이름을 거론했다.
호수도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것에 대해서 익숙한 것 같았다.
둘 사이는 다른 모자지간과 똑같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생활을 말하고...
특별했던 일들과.....
서로의 건강을 챙기고...
함께 웃으며...
사이 좋은 모자지간.
다른 모자지간보다 더 사이가 좋아보였다.
비록 어머니의 병으로 인하여 자주 만나지 못하는 듯 했지만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아보였다.
보고 있노라 하면 웃음이 나오는 그런 순수한 관계.
이것저것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호수의 태도에서 평소의 그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었다.
엉뚱하고 재밌고 말썽피우기 좋아하는 장난꾸러기같은 모습은 상상할수 없을 정도였다.
'유호수'라는 사람이 저런 사람이였나..하고 생각될 정도로 그는 어른스러웠고, 무언가 씁쓸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하람에게는 어린아이가 갑작스레 성장해버려 어른이 된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하람은 유심하게 그 모자를 관찰했다.
처음 서있던 그 곳에 서서는 그들이 하는 대화, 행동, 표현들을 모조리 자신의 눈에 담았다.
하람은 아까부터 거슬리던 호수의 얼굴을 처다보았다.
그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말아올라져 있었다.
하람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호수의 인위적인 표정..
하람은 애써 나빠지려는 기분을 떨쳐내고 호수가 몸이 안좋았나? 하고 치부해버렸다.
저렇게 평온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람은 호수의 또다른 이름이 '민현'이라고 생각하고 단정지어버렸다.
호적상의 이름과 평소 가족들이 부르는 이름이 다른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하람은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훗날..
그녀는 그의 눈물과 함께 민현의 이름의 출처를 듣게 될 것이고, 이 날 자신이 그렇게 단정지은 것에 대해서 뼈져리게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미 상처받고 금가버린 거울속의 그를 발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뒤늦은 후회를....
그렇게..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잠식되었다.
잠 식 - 20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머니.
다음에 다시 뵐께요....그때까지 건강하시구요..
저 가볼게요."
"그래.. 민현이.. 공부 열심히하고.....다음에 보자꾸나..
가는 길 조심하구...일찍 들어가야한다..알지..?"
"...네...."
호수는 고개를 꾸벅- 거리고는 휠체어를 간호사에게 맡겼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들고는 하람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를 하람이 쫓는다.
여인은 휠체어에 앉아 호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점점 까맣게 점처럼 변해 멀어져가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처다본다.
하람은 걷다가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여인은 휠체어에 앉아 한없이 호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애절해보인다.
하람은 그녀를 처다보며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시선을 옆의 호수에게 옮겼다.
호수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차라리 아까 인위적으로 억지 웃음을 짓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말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하람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그저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물어볼 상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고 역까지 가는 사이에 그 둘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고, 입조차 열지 않았다.
지하철 표를 끊고 전차에 올라타 내려야할 역을 몇정거장 앞두고 번화가를 지나가는데..
그제서야 호수가 입을 열었다.
"....술 할줄 아냐..?"
.
.
.
하람과 호수는 포장마차에 마주보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나는 오징어 볶음과 소주잔 두개와 빈 소주 세병이 나란히 놓여져 있다.
소주 잔에 가득 채워진 소주를 원샷- 해버린 호수는 조용히 테이블 위로 소주 잔을 내려놓았다.
"크.."
입이 쓴지 호수는 크- 소리를 내며 나무 젓가락을 들고 오징어 볶음 하나를 집어 입안으로 들이밀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소주 병에 들어있던 내용물은 이미 호수의 입으로 다 들어간 후였다.
하람은 소주한잔 입에 대지 않았다.
호수 혼자 앉자마자 들이마신 것도 있었지만 하람은 술에 취해 자신의 감정이나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혼자서 소주 세병을 다비운 호수가 마지막 소주잔을 원샷해버린 후 손을 들고는 소주 한병 추가요.를 외쳤다.
이윽고 포장마차 아줌마가 소주 한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버린다.
하람은 이렇게 마시는 호수를 말려야하나 그냥 내버려둬야하나.. 갈팡질팡 한다.
혼자 청승맞게 소주 한병을 깐 호수는 비어있는 소주잔을 또 채우기 시작한다.
이미 눈을 풀릴대로 풀려 있었으며, 소주병을 잡고 있는 손을 자꾸 잔에서 어긋나 테이블 위로 소량의 술이 흘러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하람이 소주잔을 들으려는 호수를 말렸다.
"그만마셔. 충분히 많이 마셨다고 생각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술로 해결하려고 하지말고.. 이제 집에 가자."
"...음..? 조금만 더.."
이미 풀려버린 동공은 하람을 똑바로 처다보지 못했다.
하람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은 술을 먹으면 고집이 쎄진다고..
호수는 잔에 있는 술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말없이 세병이나 마시게 놔두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체 한시간동안 호수의 앞에 앉아 있었던 하람은 답답해져왔다.
자신이 여기 앉아있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둘째치고..
이유도 모른체, 이렇게 있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술만 마셔대는 호수때문에 답답했다.
이유라도 안다면 이렇게 답답할 이유도 없었고.. 그리 좋은 말, 위로를 해줄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위로의 한마디라도 꺼내줄수 있을텐데..
호수의 굳게 닫힌 입에서는 말한마디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잔에 술을 따르려는 호수의 팔을 하람이 잡아서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하람은 호수의 팔을 당겼다.
일어나라는 뜻이였다.
"일어나자.
너 취했어. 이제 집에 가야해.
얼른. 그만마셔.. 그렇게 막마시는거 속에 안좋아. 가자.."
".......조금만....하람아....
조금만.....나 아직 안취했어.."
".....가자....."
"......나.......나 너무 비참하고..슬프니까..
너무 우울하고 미칠 것 같이 아프니까......
이대로 미쳐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으니까.....
그러니까...
나좀 내버려둬줘....
...이런 말하는 내가 우습겠지만.....
나......이렇게라도 기대고 싶어...
술에 취해서...술에 기대서.....그렇게...잠들고 싶거든.....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게..안되면...그냥 버리고 가.....
나 아무대서나 안죽으니까....그니까.....버리고가....."
".....내가 그렇게 못하겠거든.
얼른 일어나.
술..?
일단 우리집가자...우리집가서 마셔..이렇게 밖에서 마시지 말고..가자.."
하람은 호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의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팔을 두르고 그를 부축했다.
180이 넘는 큰키를 하람이 부축하기에는 조금 무리감이 있어보였지만..
하람은 술에 휘청거리는 호수를 잘 부축해주었다.
호수의 집까지 가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가까운 곳은 하람의 집이였다.
집에는 도준이 있겠지만..뭐 그런거야 나중에 생각하자, 하고 일단은 택시부터 잡는 하람이였다.
택시를 타고 집근처까지 와서 내렸다.
갑자기 속이 울렁댄다는 호수의 말에 혹시라도 택시에 실례를 할까봐 미리 예방차원에서였다.
잠시 큰길가 벤치에 호수를 앉혀놓은 하람은 근처 약국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술깨는 약과 휴지를 사고는 다시 호수에게 다가섰다.
그를 아까와 똑같은 방법으로 부축한 하람은 조금 비틀비틀 거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
"..자..잠깐만..하람아.....나..우웁...!!!!"
호수가 입을 틀어막더니 마침 옆에 있던 전봇대를 잡는다.
그리고 등을 구부리더니 웩- 웩- 거리며 위장에 들어 있던 모든 것들을 비워낸다.
하람은 옆에서 그의 등을 두둘겨주었다.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미련스럽게 마시래.."
하람은 혀를 차며 계속해서 부드럽게 호수의 등을 쳐주었다.
위장속에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을 비워내고 하람은 호수에게 휴지를 주었다.
휴지로 대충 입주위를 닦은 호수는 비틀거리며 벽에 등을 맞대고는 기대섰다.
"...힘들다..하람아...."
"얼른 집으로 가자... 조금만 가면 집이니까.."
"으응....."
호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조금 술이 깼는지 조금 비틀대기는 하지만 혼자 걸어간다.
별하나 없는 도시속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호수가 말했다.
"하람아..
온통 세상이 까매....."
"밤이니까.."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밤이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건물도...... 빛도...구름도..........별도...태양도..
하늘도.....어머니 얼굴도...보이지 않는다..
오직 보이는 건 어둠과 너 뿐이야..
어둠속에 너만 우두커니 서있어.."
".....밤이니까.."
"....밤이니까 안보이는 것 뿐이겠지..?"
"그래..."
"그래..하람이 말이 맞을꺼야...
밤이니까 아무것도 안보이는 거겠지..
내일 눈을 뜨면...
이 지독한 악몽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내일 눈을 뜨면..
내눈에는.. 빛이 보일꺼야..
건물도... 구름도.. 별도, 태양도, 하늘도...
그리고 어머니 얼굴도.............다 볼수 있을꺼야.."
"........."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볼수 있겠지..
그래...볼수 있겠지..
이 지독한 현실이 꿈이라고 느껴지겠지..
그치....?
이 지독한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가장 먼저 널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여태껏 너는 꿈을 꿨어.'..라고..........그랬으면 좋겠어.........
....꿈...이였으면......좋겠다................."
"....그래....말해줄게............
여태껏...너는 꿈을 꾼것이라고............"
하람은 호수의 눈 꼬리에서 흐르는 눈물을 외면하며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흔들리는 그의 걸음같이.. 그의 눈물도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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