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의 국민성]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도 분명하게 밝히기를 좋아한다. 즉,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양시론'을 매우 싫어한다.
가혹할 정도로 상대의 약점을 풍자하는 재치(에스프리, esprit)도 프랑스인들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프랑스인의 성격은 그들의 조상인 골루와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날 골지방 Gaule(오늘날의 프랑스땅)에는 셀트족이 살았는데 이들을 로마인들은 '골지방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골루와 Gaulois (라틴어로는 'gallus')라고 불렀다. 이 라틴어는 골지방 사람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수탉'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인의 조상(셀트족)이 로마인들의 눈에 수탉의 성질, 즉 솔직하고 쾌활하며 외설스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로 비쳤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프랑스인의 기질 및 사고방식] (1) 이중적 기질
프랑스 민족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고방식 또한 다양하다. 프랑스 인은 쌜뜨(Celtes)족으로부터 개인
주의를, 로마인으로부터 법과 질서를 사랑하는 마음을, 게르만족으로부터 건축제조 재능을, 노르망족으로부터 진취적 기질
을 이어받았다고 말한다.
① 농민 기질 : - 고향 땅에 집착하고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며 폐쇄적이다.
- 현실적이다.
- 인색할 정도로 절약한다.
- 남을 경계할 정도로 조심성이 많다.
- 전통주의적이며 보수적이다.
② 기사도 기질 : - 이상주의자이며 쉽게 열광하고 모험정신을 가지고 있다.
- 과잉될 정도로 너그럽게 베풀며 옳다고 생각되는 대의(大義)를 위하여 항상 투쟁할 준비가 되어있다.
- 규율이 없을 정도로 개인주의적이다.
- 불의나 압박에 대항하여 싸울 때에는 기꺼이 혁명적이다.
③ 보통의 프랑스인 : - 명랑하고 낙관적이며 좋은 포도주와 좋은 음식을 즐긴다.
-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재치 있고 융통성이 있다.
- 양식(良識)있는 사고와 행동을 한다.
- 매우 사고적(思考的)이고 외향적이다.
④ 빠리 사람 : - 태평하고 충동적이며 변덕스럽다.
- 호기심 많고 놀이를 좋아하며 예술을 즐긴다.
- 불평 많고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재치 있는 말과 행동을 잘한다.
(2) 프랑스적 재치
① 적절한 재치 : 하나의 말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적절히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재치 있게 응수한다.
② 심술궂은 언행 : 타인의 어떤 성격이나 행동에서 못마땅한 점을 보면 채찍을 때리듯이 때로는 부당하다 할 정도로 빈정
거린다.
③ 뜻밖의 논리 : 겉으로는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예기치 못한 국면을 보여주는 논리성이 있다.
(3) 프랑스인의 성격
① 정원 가꾸기 정원을 가꿈으로써 프랑스인은 스스로를 온전하게 실현한다는 감정을 갖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원처럼
주의 깊게 그리고 애착을 가지고 가꾸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② 명석함 프랑스 인들은 광기의 세계 속에서도 논리적이며, 그들의 정신은 그들의 언어만큼 잘 배열되어있고 명석하다고
흔히 말하여 진다. 스스로 명석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프랑스인은 지성의 이름으로 어디든지 논리와 명석함을 도입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③ 변형의 재능 프랑스는 대조적인 특징을 많이 가진 나라로 상반된 면이 동시에 존재하거나 차례차례 번갈아 존재하기도
한다. 프랑스는 밖으로부터나 안으로부터 위협을 받았을 때 변화에 적응하고 역사의 도전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자산을
그 자신 안에서 찾는다.
(4) 새로운 사고방식
① 시골인구가 감소되어감으로써 농촌은 외부세계로 넓게 개방되었다.
② 전통적인 부르쥬아 계급도 광범위하게 다양화된 중산층으로 대체되었다.
③ 빠리의 생활은 이미 한가히 소요하는 시간을 거의 허용치 않고 있다.
④ TV와 교통의 가속화와 통신수단의 발달의 결과로 프랑스인의 시야는 넓어졌고 이제는 지구촌의 리듬으로 살고 있다.
⑤ 1980년대에 다시 나타났던 개인주의가 오늘날에는 집단의 연대성(클럽, 연합회, 팀정신)으로 바뀌었다.
⑥ 창조성의 이름으로 발명의 정신이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언어의 특징] ①프랑스어의 음성체계의 특징은 '선명함'과 '정확성' 그리고 모음음색의 '다양성'에 있다.
② 프랑스어는 간단하고 짧은 단어와 요점이 축소된 표현을 선호한다. 그래서 길고 복잡한 단어나 표현을 간단하고 짧게
만들어 가는 경향이 있다.
③ 프랑스인은 굳어진 표현 즉, 기성적 표현방식이나 격언 같은 것을 흔히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④ 프랑스어 어휘의 또 다른 특징은 추상성이다. 따라서 개념을 표현하는 데 특별한 능력을 갖는다.
⑤ 프랑스어는 명사를 특히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언어가 외부세계를 행상의 시각에서 이해하려는데 비해 프랑스어는
그것을 존재의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하다.이러한 현상은 문어체에서 특히 '명사화'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⑥프랑스 정신은 현실을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문접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것은 프랑스어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품사, 즉
전치사나 접속사들이 특히 중요시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⑦프랑스 정신은 모든 일에 논리적 질서를 확립하여 낱말 상호간의 관계를 선명하고 상세하게 표시하는 데 있다. 프랑스어
에서의 요소연속의 순서는 점진적이다. 즉,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사람 또는 사물을 그것의 특성이나 그것이
하는 일을 말하기 전에 언급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문법적 순서는 '주어+동사+보어 또는 속어'이다.
⑧프랑스어의 낱말은 대체로 짧고 세기의 악센트가 약한 특성을 가진다. 한편, 프랑스어의 분석적 경향은 개념 상호간의
관계를 분해함으로써 프랑스어로 하여금 구조상의 정확성과 엄격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⑨ 현대 프랑스어는 '이성의 언어'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의 요소별 분해는 프랑스어로 하여금 경우에 따라서는 치밀성
과 특히 표현상의 유연성을 요구하는 수많은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프랑스 언어의 형성] ①오늘날 프랑스어는 골(Gaule) 지방에서 사용되던 라틴어 중에서도 빠리와 일-드-프랑스(Ile-de-France)를 중심으로
사용되던 언어가 여러 변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②봉건시대에 로망어는 북부 지방의 오일어(Langue d'oil)와 남부 지방의 오크어(Langue d'oc)로 세분화 된다.
③ 근대에는 일-드-프랑스(Ile-de-France)의 중심인 빠리에서 잘 다듬어진 언어가 프랑스 전역에 걸쳐 국가 언어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④ 18세기 말에는 새로운 사상들이 도입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특히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왔고 그리스에서 많은 신조어들이 차용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어는 귀족계층의 언어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대학과
여러 교회에서는 여전히 라틴어가 공통으로 사용되는 언어였다.
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부터 19세기까지 중산층 계급의 권력장악과 기계 산업의 발달, 그리고 교육에 있어 일반화를
이루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 언어에 있어 중앙 집중화 현상으로 인해 문법은 표준화되고 각 계층의
사람들은 점점 올바른 철자법을 익히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표준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쓸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라틴어 사용도 점점 줄어들어 학교에서의 교과 과목도 하나로 축소되었다.
[프랑스의 사회 와 프랑스어] 프랑스어는 세계 1억 2천만의 인구가 사용하며 35개국이 국제 기구에서 공용어로 사용. 벨기에와 스위스, 룩셈부르그, 모나
코 등의 유럽 국가와 마그레브 le Maghreb 지역을 포함한 아프리카, 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와 중동의 레바논, 북미의
카나다, 그리고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群島, 카리브海 인근의 중남미 島? 식민지 등에서 사용. 프랑스어 언어 공동체는
프랑스어권 정상회담 Sommets de la francophonie 이 1986년이래 40여개국의 참여하에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프랑
스 정부에서는 프랑스어권의 문화적 결속을 강화하려는 차원에서 文化部 Ministere de la culture 의 개념을 행정부에 처음
도입했다. 민간 차원에서 프랑스어 보급에 기여한 기관으로 알리앙쓰 프랑쌔즈 Alliance francaise 는 전세계 학생들에게 프
랑스 언어와 문화를 소개하는 교육 이념을 1883년부터 실천하고 있다. 미디어 분야에서 프랑스어권을 대상으로 하는 텔레비
젼 TV 5가 인공위성을 통하여 지구촌 시청자들에게 방송되고, 인터넷 Internet 분야에도 프랑스를 홍보하려는 웹사이트가 다
수 개설. (프랑스 페이지 Pagefrance :
http://www.pagefrance.com/)
1)유럽 L'Europe
유럽 연합 Union europeenne 과 스위스를 포함한 국가에서 프랑스어의 사용 빈도(26.5%)는 영어(35.5%)에 이어 두 번째
이며 독일어 (25.2%), 이태리어 (19.3%), 스페인어 (13.6%)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벨기에의 경우 네덜란드어인 플라망
flamand 을 사용하는 북부 지역에 비하여 왈론 지역 Wallonie으로 부리는 남부에서는 프랑스어가 통용된다. 스위스는 프랑
스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쥬네브 Geneve 와 로잔느 Lausanne 등의 도시)을 가리켜 로망어 스위스 la Suisse romane
이라고 부른다. 룩셈부르그公國 Duche de Luxembourg 에서는 프랑스어가 유일한 공용어로 사용. 모나코 Principaute de
Monaco도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사용. 동부 유럽에서는 루마니아 Roumanie 에 가장 많은 프랑스어 사용자.
2) 퀘벡 Le Quebec
1763년 퀘벡州 Province de Quebec를 설치한 이래 이 지역을 지배하는 영어권 주민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현재까지도 카나다에서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되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3) 아프리카 L'Afrique noire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모로코 Maroc, 알제리 Algerie, 튀니지 Tunisie등의 국가들과 세네갈 Senegal,
모리타니 Mauritani, 기네 Guinee, 아이보리 코스트 Cote d'Ivoire, 토고 Togo, 카메룬 Cameroun, 가봉 Gabon, 차드
Tchad,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Centrafrique, 루안다 Rwanda, 부룬디 Burundi, 자이레 Zaire, 마다가스카르 Madagascar
와 마이요뜨 Mayotte, 모리쓰 Maurice 섬, 프랑스領 레위니옹 La Reunion 섬 등.
4) 마그래브 지역 Le Maghreb
회교도이며 아랍어를 사용하는 북아프리카의 마그래브 국가들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20세기 중반에 독립하
였다. 알제리에는 정치적인 독립에도 불구하고 경제, 문화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이 남아 있다. 최근 프랑스 거류민에 대한
회교도 근본주의자들 fondamentalistes의 테러가 극성을 부려 프랑스인과 다수의 외국인 거주자들이 이 지역을 떠나는
추세이다. 마그래브 지역의 프랑스어권 문학은 식민지 지배에서의 해방이라는 민족주의 차원에서 전투적이고 정치적인 색
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5) 서인도 제도 Les Antilles
앙띠이 Antilles 라고 불리는 중남미의 서인도 제도에는 구아들루쁘 la Guadeloupe와 마르띠니끄 la Martinique 등의 섬이
프랑스領 으로 남아있다. Ariane 號의 발사지로 유명한 귀안느 la Guyane 는 남미 대륙의 북동부에 위치.
6) 인도차이나 3국 L'Indochine
아시아에서 대표적인 프랑스어권은 인도차이나 반도이다. 현재는 베트남 Vietnam, 캄보디아 Cambodge, 라오스 Laos 등
의 3국이 독립하여 있으나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있었다.
7)폴리네시아 群島 La Polynesie francaise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지역은 모두 5개의 열도에 140여개의 섬은 산호초 지대로도 유명하다. 최근까지 프랑스의 해저 핵실험
이 실시되던 곳이다.
[프랑스의 역사] 프랑스의 고대 사
1)선사시대 동굴벽화
전기 구석기 시대(약 2만년 전)의 문명은 프랑스 남서부의 뻬리고르(Perigord) 지방에서 발굴되고 있다. Les Eyzies, La
Madeleine, Mas d'Azil, Cromagnon, Lascaux등이 이 시대의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동굴인데, 동물들(순록,
황소, 메머드, 들소, 말 코뿔소)의 모습이 동굴벽에 그려져 있다.
2) 켈트 족 시대의 골 (la Gaul celte)
현재 브르따뉴(Bretagne) 지방에 남아 있는 거석(巨石) 건조물들을 통해 프랑스에 최초로 거주하였던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브르따뉴 지방에는 청동기 시대 (기원 전 1,800-700년까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기원전 1,000년 경
켈트 족이 서유럽에 정착하였다. 이 가운데 현재의 프랑스 지역에 자리잡은 이들은 골 사람이라고 불리웠다.
3) 로마 시대의 골 (la Gaul romaine)
골은 지중해의 로마 속주로 편입되었다. 오래 전부터 번성했던 농촌의 기반 위에서 도시문명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로방쓰(Provence) 지방은 많은 도시와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아를르(Arles)의
원형경기장과 극장, 오랑쥬(Orange)의 극장과 개선문이 있다. 로마 지배하의 골에서는 초기 형태의 크리스트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라틴 문화의 영향으로 문학작품을 탄생하였고, 교육이 발달하여 골 사람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4) 프랑크 왕국
5세기에 게르만 족 계통의 프랑크 족이 골을 정복하였다. 클로비스(Clovis)는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빠리를 수도로 정하였
고, 496년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
5) 카롤링 제국
771년에 프랑크 족의 유일한 왕이 된 샤를르마뉴는 계속적으로 군사원정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Leo Ⅲ)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받음으로써, 프랑크나 크리스트교의 양면성을 지닌 로마제국이 창건됨. 한
편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고대하여 성직자와 귀족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건립하였다.
중세 프랑스 역사
1) 봉건시대 (La feodalite)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중세는 왕권이 축소되고,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조직이 발전되었다. 넓은 영토를 소유한 영주들은
주권자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재판을 하고, 세금을 징수하면서, 자신들의 지역의 방어를 맡았다. 가신들에게 충성과 군사적,
재정적 도움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그대신 영주들은 그들에게 땅과 봉토를 부여했고 튼튼한 성에서의 보호를 보장했다.
농민들은 농노나 자유농민이었다.
2) 교회의 영향 (Linfluence de leglise)
교회의 이름으로 11세기와 13세기에 십자군에 참가하게 된다. 회교도들(이교도)의 손에 넘어간 성스러운 땅을 되찾는다는
구실 하에 영주들과 수도승 병사들은 많은 이익의 근원인 식민지 중앙-아시아에 파견된다.
3) 문화적인 생활 (La vie culturelle)
중세시대는 오랫동안 야만의 시기로 여겨졌으나, 문학은 풍부했다. 투르바두르와 투르베르에 의해 운문으로 쓰여진 무훈시
는 전쟁의 탐험을 이야기했다.(롤랑의 노래) 기사소설은 기사도 연애담을 이야기했다.
4) 경제적인 변화들
(Les transformations economiques) 12세기와 13세기에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인들과 장인들은 길드로 조직되어 있
었으며, 부르주아들(부르그(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도시의 행정을 관리할 수 있게 허락해 줄 특권들을 영주로부
터 얻어내려 했다.
5) 백년전쟁 (Le guerre de Cent Ans)
1337∼1453 13세기와 14세기는 매우 어려웠다. 기근과 전염병인 페스트가 국민들에게 참혹한 피해를 주어 농민폭동이라
는 민중반란을 야기했다. 한편, 영국의 왕들은 결혼할 때에는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었는데, 프랑스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물론 거부했으므로 많은 전투가 있었으며, 영국인들은 프랑스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 쟌다르크 (J'EANNE d'ARC)
동레미(로렌지방에 있는)에서 태어난 한 젊은 목녀는 프랑스를 구하라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었다.
16세에(1428) 그녀는 군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프랑스가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쟌다르크는 체포되어 마녀로 재판받아 화형당했다. 쟌다르크는 프랑스 국가주의의 첫번째 상징 중 하나이다.
프랑스의 구체제 - L'Ancien Regime
15세기말 프랑스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전력을 정비하면서 외부로 팽창해 나가려는 움직임과 함께 새로운 지적, 이학적
욕구가 싹텄다.
1)르네상스 (La Renaissance)
1515∼1610 프랑스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이탈리아의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단계를 거쳤
다. 첫번째는 1530년경까지의 건축경향을 들 수 있다. (아재-르-리도(Azay-le-Rideau), 슈농쏘(Chenonceaux)와 같은
루아르(Loire) 강변의 성을 들 수 있다.
이 성들은 망루, 총안, 경사가 급한 지붕을 특징) 두번째 단계에서는 퐁땐느블로(Fontainebleau)파를 중심으로 보다 복잡
한 장식유파가 등장하였다. 이 유파는 나무, 화장벽토, 프레스코를 조화롭게 결합시키고자 하는 기교주의 화풍이 특징적이
다. 세번째 단계로 1550년경에 이르러 이탈리아 및 고전고대의 영향과 국민적 전통이 결합되어 프랑스의 고전양식이 등장
하였다. (루브르(Louvre) 궁과 뛰일르리(Tuileries)궁)
2) 종교 개혁
루터와 캘빈의 자극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교회의 부와 권력의 남용을 비판하며 성서의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
다.(프로테스탄주의) 카톨릭 교회와 교황은 교의와 종교예식의 원칙들을 세우며(트렝트 공의회), 예수회의 종교적 질서를
창조하면서 반종교개혁운동을 했다.(예수회 수도사들과 예수회 : 반 개혁의 시기에 스페인인 이그나스 드 로욜라에 의해
1540년에 설립된 카톨릭의 종류) 교황에게 충실한 교황예찬자들과 개혁을 지지하던 위그노들 사이의 종교적인 갈등은 시
민전쟁 즉 종교전쟁으로 악화된다. 생 바르텔르미의 학살(1572년 8월 24일) 사건은 하룻밤에 파리의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
했다. 어머니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 속에서 키워진 앙리 4세가 1589년 프랑스의 왕이 되었을 때(부르봉왕가의 첫번째
왕), 그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3) 17세기 (Le ⅩⅦ siecle)
위대한 세기 (Le Grand Siecle) * 루이 13세와 리쉴리에 (Louis ⅩⅢ et Richelieu) : 1617∼1643 섭정기간이 지난 후
루이 13세는 왕좌에 오르게 되고 리쉴리에 추기경의 도움으로 통치한다. 지방의 고등법원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왕은 권력
의 중앙집권 정책을 시작한다. 그는 상업과 해운, 그리고 진정한 식민지 제국의 건설을 장려한다. 프로테스탄트와의 투쟁이
재개된다.
* 태양-왕의 명성 (Le rayonnement du Roi-soleil) 수상이었던 마자랭이 죽은 후 루이 14세 자신이 통치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귀족들이 왕권에 대항했던 프롱드난에서 교훈을 얻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이것이 절대 왕정이다. 신과 같은 권력을 지닌 군주로서의 왕은 지상에서 신을 대표하며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국가는 바로 나다).
* 콜베르와 중상주의 (Colbert et le mercantilisme) 콜베르 수상은 특히 산업과 상업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수입을 제한하고 왕립제조소를 만들었다. 그는 교역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해 도로와 항해로를 정비하였다. 한편, 종교
적인 갈등들은 매우 난폭했다. 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했으며,탄압이 또다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덮쳤다. 사람들은
또한 예수회와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카톨릭 운동인 쟝세니스트파들을 박해했다. 루이 14세의 가장 큰 성공 중 하나는
문화적인 명성 즉 고전주의의 승리이다. 회화, 조각, 음악 아카데미의 창조. 문학에 있어서는 부자연스럽고 꾸밈이 많은
허식이 주종을 이룬다.(몰리에르, 라신, 코르네이유)
4)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 국민병은 바스티유 요새를 공격한다(왕실 감옥). 바스티유의 점령은 프랑스 혁명의 시작으로 그리고 절대
왕정의 종말로 여겨진다.
프랑스인 대혁명 (1789∼1799)
프랑스 혁명은 왕권의 제한에 의해 시작되어 법률, 행정, 사회,종교적 격동을 야기시키며, 전 세계의 많은 국가혁명의 본보
기로 사용된다. p.117-p.118 계몽사상가들의 주장과 비판정신, 미국 독립혁명, 구체제가 직면한 재정위기, 그리고 민중의
비참한 생활은 혁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 혁명은 1789년 5월 5일 삼부회(Etas Generaux)의 재소집으로 시작되었
다.
1)1789년 ∼ 1792년 7월4일 정치혁명 : 바스띠이으(Bastille)의 함락은 절대군주제의 몰락을 상징하였다.
사회혁명 : 봉건제와 특권이 폐지됨으로써 부르쥬아 프랑스가 구 귀족적 프랑스를 대체
법률혁명 :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될 위대한 원칙을 제시
행정혁명 : 왕국의 행정이 재조직 1792년 : 국민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 공화국의 이념은 자유,평등,박애
2) 국민의회 (La Convention) (1792∼1795)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군대는 젊은 장군들의 (보나파르트 장군의) 지휘 하에
재조직되어 수많은 승리를 가져온다. 로베스피에르는 대 공포정치를 강화하지만 6주후에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
일) 그는 실각한다
3) 5집정관 정부 (La Directoire) (1795∼1799) 5명의 집정관에게 - 행정권, 양원 - 입법권과 같은 권력을 준다. 공화국은 혁
명주의자들과 왕당파의 폭동으로 위협을 받고, 결국 공화력 3년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일) 보나파르트 장군이 쿠
데타를 일으킨다
19세기의 프랑스
집정시대 (Le Consultat) (1799∼1804)
코르시카의 소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는 프랑스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는 구체제와 인사들로
구성된 집정관을 자신의 통치에 연결시킨다. 카톨릭교도들을 집합하기 위해 교황과 1801년 협약을 맺는다. 행정을 재조직,
프랑스 은행의 설립과 박람회의 조직으로 산업발달 꾀함. 민법전의 개작은 1804년 완성된다(나폴레옹 법전).
제 1제국 (Le premier Empire) (1804∼1815)
1804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황제라고 불리게 되고 교황에 의해 나폴레옹 1세라는 이름으로 축성받게 된다.
나폴레옹은 유럽원정길에 오르는데, 1814년부터 패배가 계속된다.
파리 조약(1814)은 프랑스를 1792년의 국경으로 되돌려 놓고 나폴레옹이 왕위를 포기하도록 했으며, 루이 18세 왕에 의해
지도되는 입헌 군주제를 권좌에 올려 놓았다. 엘바섬으로 추방당한 나폴레옹은 파리로 행진하여 승리의 입성을 하고 100일
동안 권력을 다시 잡는다.
(1815년 3월 20일부터 6월 20일까지) 그러나 유럽은 동맹하게 되고 나폴레옹은 두번째로 패배한다.
왕정복고 (La Restauration) (1815∼1830)
왕정복고는 루이 18세(1815∼1824)에 이어서 샤를르 10세(왕정주의자:자유주의자, 1824∼1830)를 우두머리로 해서 대립
을 야기한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재건이 있은 후 상황은 다시 나빠지고 1830년 7월 혁명이 있게 된다. 영광의 3일간인
3일동안, 파리는 폭도들의 손에 들어간다. 샤를르 10세 왕은 자유주의 운동에 의해 지명된 오를레앙 공작(루이-필립)의
섭정 임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7월 왕정 (La Monarchie de Juillet) (1830∼1848)
1830년 7월 혁명으로 들어선 루이 필립쁘(Louis Philippe)의 부르쥬아 군주정 역시 사회질서의 유지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지 못하였다. 결국 7월 왕정은 1848년 2월 혁명을 견디어낼 수 없었다.
제2공화국 (Le Ⅱe Republique) (1848∼1851)
정치적인 생활에서 제외된 쁘띠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한다. 1848년 2월 혁명. 루이-필립은 왕위를 양보하고,
공화국이 선포된다. 계속되는 동요와 공산침략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1848년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나폴레
옹 보나파르트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회를 해산시키는 구실을 제공해 준다.
제2제정 (Le Second Empire) (1852∼1870)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 나폴레옹 3세라는 이름으로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그는 매우 전제적
인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자유를 억제, 식민지 확장 정책, 여러차례의 군사적인 승리가 있었으나 프러시아에 대항하여,
커다란 패배를 당한다. 1870년 9월 4일 의회는 황제의 폐위를 선포한다. 프랑스는 결정적으로 공화국으로 접어든다.
제3공화국 * 코뮌(La Commune)
1871년 3월 ∼ 5월 프러시아인들은 프랑스를 침략하고 매우 힘든 휴전 조건을 제시한다. 이에 반대한 반역자들은 파리 코
뮌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시평의회를 선출한다. 피의 주일(1871년 3월 22∼28일)동안 30,000명도 넘는 파리 코뮌당원들
이 싸우다가 죽는다. 1879년에서 1899년까지 권력을 쥔 온건한 공화주의자들은 민주적인 공화정을 공공하 하였고 자유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심각하게 분열시킨다. (1894∼1899) 드레퓌스는 독일을 위해 일한 간첩혐의
로 고발된 유태인 장교로 면직되어 유배되었다. 드레퓌스파라는 좌파세력과 민족주의적이고 유태인 배척자들인 반드레퓌
스파들(우파)이 대립했다. 한편, 파나마의 재정 스캔달등으로 결국 1899년 클레망소와 콩브에 의해 지휘되는 급진당에게
권력을 주게된다. 급진주의자들은 1905년 종교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법을 가결시킴으로 세속화의 정치를 강화한다.
20세기의 프랑스
14∼18년의 전쟁 [세계 제 1차 대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간의 삼국동맹, 프랑스,영국, 러시아간의 삼국협상의 동맹이 이루어졌다.
전쟁은 사라예보의 습격이라는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 발발하며, 유럽 전역을 전쟁으로 끌어들인다. 1914년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 18년의 대공세 : 동맹군의 편으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독일의 공세는
실패한다. * 베르사이유 조약(1919년 6월)은 독일에게 군사력의 축소, 전쟁의 피해보상, 수많은 영토의 손실을 요구한다.
1,2차 세계대전,두 전쟁 사이
1919∼1939년 사이의 프랑스 (Entre-deux-guerres : la France de 1919∼1939) 프랑스는 전쟁으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
았다. 시설들은 파괴되고, 화폐는 평가 절하 되었다. 국민연합(우파와 중도파), 좌파 동맹(사회주의와 급진파), 국민연합 같
은 동맹이 계속된다. 스타비스키 사건은 극우파 연맹들의 과격한 시위사건의 계기가 되며, 좌익당들은 민중전선이라는 연
맹을 결성한다.
민중전선 (Le Front populaire)
1936∼1938 1936년 5월 선거에서 승리한 민중전선은 레옹불룸이라는 사회주의자에 의해 최초로 주재되는 사회주의적이고
급진적인 형태의 정부를 권좌에 놓는다. 그러나 민중전선은 실패하여, 노동자들을 실망시킨다. 왜냐하면 프랑화의 가치절
하와 생활비의 상승을 피할 수 없었으며 부르주아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결국 1938년 우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된다.
2차 세계대전(La Seconde Guerre mondiole) :
1939∼1945 독일과 동맹국인 이탈리아는 유럽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폴란드 침략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1940년 6월 : 붕괴 (Juin 1940 : la debacle) 프랑스는 동부전선에 요새(마지노선)을 구축했었으
나 정부는 파리를 떠나고 국민들은 남쪽으로 도망가게된다. (대피난) 행정부는 피점령지역까지 포함해서 프랑스령으로 남
아 있으나, 사실상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 자리잡은 독일 정부가 모든 나라를 통치했다. 뻬땡(P. Petain)정부는 비쉬를 수도
로 선택하고 독일과 밀접하게 협조하지만, 결국 비점령지역은 1942년 11월부터 군사적으로 점령되고 만다.
* 외적인 항독운동 (La Resistance exterieure) 드골은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하여, 연합군(영국과 미국)의 편에서서
싸운다.
* 내적인 항독운동 다양한 경향들을 조직망들(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유태인들, 민족의 권리의 수호자들 등)이 생겼다.
1942년 모든 이러한 조직망은 항독국민의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고 드골과 관계를 갖게 되며, 항독운동으로 확산된다.
항독투사들의 도움으로 연합군들은 점차로 프랑스의 모든 영토를 구출한다.
4공화국
재건의 프랑스(La Ⅳe Republique : la France de la renconstruction) :
1945∼1958 드골에 의해 지휘된 임시정부는 공산당을 포함하여 항독운동의 모든 세력들로 구성된 민족적 단일정부로서,
대 민주개혁을 펴나간다. (여성에게 투표권 인정(1945년), 사회보장제도 창설, 수많은 기업들의 국영화) 프랑스는 미국의
재정원조(마샬플랜)를 수락하고 미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
한편, 식민지 충돌이 터진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독립으로 끝나게 되며, 알제리 전쟁은 1954년 시작한다.
5공화국 (La Ⅴe Republique)
5공화국은 (1958∼1969) 내적으로는 정부의 권한을 확립하고,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의 위신을 표명하려는 드골 장군의
개인적인 권력에 의해 두드러 진다. (대통령제) 드골은 미국과의 모든 동맹을 포기하고(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탈퇴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중국의 인정)과 협정을 맺으며, 제3세계의 독립을 추구하는국가들에게 호소했고, 경제적인 팽창을 이룩한
다. 그러나 경제적인 성장은 사회적인 불평등을 강조하게되어 1968년 5월에 학생들의 대시위가 터지게 된다.
결국 드골은 물러나고 두개의 커다란 정치력이 대립한다.
즉, 1958년 이후 권력을 갖고 있는 우파와 대립되는 좌파. 1972년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정부의 코뮌 프로그램
에 조인한다. 죠르주 퐁피두는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1969∼1974), 사회적인 많은 개혁을 실행한다. 그후, 우파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우파는 드골 지지파와 지스카르파로 나뉜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계속성안에서의 변화'의 후보로서 경제 자유주의와 정부 역할 축소지지자이며, 쟈크 시락은 수상으로
드골파이다. 1981년 처음으로 좌파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사회적이고 자유로운 방안들에
대한 선거와 권리행사에 의한 도약정치로 두드러진다.
1988년 직접보통선거에 의해 프랑수아 미테랑은 재차 7년 임기에 착수한다.
[프랑스의 기후] 서쪽의 해양성 기후
별로 춥지 않은 겨울 (평균 6℃), 신선한 여름 (15℃에서 19℃) 일년 내내 풍부한 비가 온다. (연중 180일에서 240일)
동쪽의 대륙성 기후
눈을 동반한 추운 겨울, 무덥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여름(20℃)
남쪽의 지중해성 기후
온화하고 짧은 겨울(8℃), 덥고 건조한 여름(23℃)으로 최적의 기후 론강 골짜기를 따라 북쪽에서 불어오는
국지풍의 Mistral이 있다.
[프랑스의 국명 및 영토] 프랑스 공화국 La Republique francaise가 공식 명칭이다.
식민지 보유 측면에서 영국에 이어 세계 제2위를 자랑했었던 프랑스는 아직도 외교적 차원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고, 프랑스
문화나 언어는 세계 각지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는 UN 및 그 산하기구 - 세계보건기구 WHO, 유네스코 UNESCO, 유니세프
UNICEF 등 - 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프랑스는 본토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특수한 해외 소재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5개의 해외 자치주 Departement d'Outre-Mer (D.O.M) :
과달루프 Guadeloupe, 기아나 Guyane, 마르티니크 Martinique, 레위니옹 Reunion,
셍-피에르-에-미크롱 Saint-Pierre-et-Miqueron
해외 영토 Territoires d'Outre-Mer (T.O.M.) :
뉴 칼레도니아 Nouvelle Caledonie,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Polynesie francaise,
왈리스-푸투나 제도 Iles Wallis et Futuna, 마이요트 Mayotte 등
프랑스의 지역별 특징
프랑스 메트로 폴리텐느(France metropoiitaine)(코르시카를 포함한 프랑스 본토를 지칭하는 개념)는 크게 22개의 레지옹
region(한국의 도에 해당)으로 나누어진다. 이 22개의 레지옹은 95개의 데파르트망 departement으로 또한 세분되며 거기
에다 4개의 해외 소재 데파르트망을 추가할 수 있다.
지역별 특성은 아주 뚜렷하나 지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크게 5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각 지역별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북부 Le Nord :
노동자의 숫자가 많고 실업률이 아주 높음. 농부 숫자가 적고, 인구 구성원 중 상대적으로 젊은이 비율이 높음. 전화 가설을
낮고, 의료진 숫자가 아주 적음.
2. 중서부 Le Centre-Ouest :
농부 및 자동차 등록수가 많음. 외국인 숫자가 아주 적고,인구가 적다. 이혼율이 낮고, 범죄율 또한 아주 낮음.
3. 동부 L'Est :
노동자 인구, 독신 남녀, 외국인 비율 높음. 실업율이 낮고, 농경기계화 발달.
4. 중남부 Le Centre-Sud :
노령자 및 저학력자가 많음. 출산율이 낮음.반대로 사망률은 높은 편이다.
5. 일 드 프랑스 L'Ile-de-France :
경제 인구 구성 측면에서 아주 독특한 측면을 이루고 있다.
노동자, 농부, 노령자,초대형 마켓, 비학력자, 자동차 등록대수가 적고, 사망율이 가장 낮음. 반면,타지방에 비해 기업체
간부층, 독신녀, 외국인, 이혼자, 전화, 범죄율, 의료인 숫자는 가장 많음. 연간 1인당 수입액도 가장 많다.
[프랑스의 지방주] 지방 분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1982년 이후 자율적인 행정권을 보유한 22개의 레지옹 region으로 프랑스는 분할되어진다.
레지옹은 각 데파트망과 코뮌느(commune,데파르트망을 더욱 세분한 행정 단위)의 경제, 사회, 문화의 발전을 주요임무로
삼고 있다. 22개의 레지웅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1. 알자스 Alsace : 주요도시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 (39만), 면적 8,280㎢, 총인구 160만
2. 아키텐느 Aquitaine : 주요도시 보르도 Bordeaux (70만), 면적 42,300㎢, 총인구 280만
3. 오베르뉴 Auvergne : 주요도시 클레르몽-페랑 Clermont-Ferrand (25만), 면적 26,000㎢, 총인구 130만
4. 부르고뉴 Bourgogne : 주요도시 디종 Dijon (23만), 면적 31,580㎢, 총인구 160만
5. 브르타뉴 Bretagne : 주요도시 렌느 Rennes (24만), 면적 27,200㎢, 총인구 280만
6. 상트르 Centre : 주요도시 오를레앙 Orieans (28만), 면적 39,460㎢, 총인구 230만
7. 샹파뉴-아르덴느 Champagne-Ardenne : 주요도시 샬롱-쉬르-마른느 Chalons-sur-Marne (4만 8천),
면적 25,740㎢, 총인구 130만
8. 코르시카 Corse : 주요도시 아작시오 Ajaccio (5만 9천), 면적 8,680㎢, 총인구 25만
9. 프랑슈-콩테 Franche-Comte : 주요도시 브장송 Besancon (12만), 면적 16,200㎢, 총인구 110만
10. 일-드-프랑스 Ile-de-France : 면적 12,012㎢,총인구 1,066만. 파리와 주변 위성도시들로 구성됨.
11. 랑그독-루시용 Languedoc-Loussillon : 주요도시 몽펠리에 Montpellier (25만), 면적 27,380㎢,
총인구 210만
12. 리무젱 Limousin : 주요도시 리모쥬 Limoges (17만), 면적 17,000㎢, 총인구 72만
13. 로렌느 Lorraine : 주요도시 낭시 Nancy (33만), 메츠 Metz(19만),면적 23,000㎢, 총인구 230만
14. 미디-피레네 Midi-Pyrenees : 주요도시 툴루즈 Toulouse (65만), 면적 45,350㎢, 총인구 240만
15. 바스-노르망디 Basse-Normandie : 주요도시 캉 Caen (19만), 면적 17,590㎢, 총인구 140만
16. 오트-노르망디 Haute-Normandie : 주요도시 루앙 Rouen (38만), 면적 12,317㎢, 총인구 175만
17. 노르-파-드-칼레 Nord-Pad-de-Calais : 주요도시 릴르 Lille (96만), 면적 12,530㎢, 총인구 395만
18. 페이 드 라 르와르 Pays de la Loire : 주요도시 낭트 Nantes(49만), 면적 32,124㎢, 총인구 301만
19. 피카르디 Picardie : 주요도시 아미엥 Amiens (16만), 면적 19,450㎢, 총인구 180만
20. 프와투-샤랑트 Poitou-Charentes : 주요도시 프와띠에 Poitiers (16만), 면적 26,000㎢, 총인구 160만
21. 프로방스-알프-꼬트-다쥐르 Provence-Alpes-Cote-d'Azur : 주요도시 마르세이유 Marseille (111만),
면적 31,400㎢, 총인구 430만
22. 론느-알프 Rhone-Alpes : 주요도시 리용 Lyon (126만), 면적 43,700㎢, 총인구 539만
[프랑스의 자연] 위치 : 지중해, 대서양, 북해를 연결시켜주는 유럽 문명의 교차로 북위 42°∼ 51°,서경 5°∼ 동경 8°,
영국 표준시간보다 1시간 빠르고, 우리나라보다 8시간 늦다. 국경 : 3면이 바다, 3면은 육지에 접하고 있으며 6각형의 형태.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로는 북쪽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동쪽의 독일과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고 남쪽으로 스페인 등이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놓인 피레
네 산맥속에 안도라 Andorra 라는 쇼핑천국인 소국도 있다.
면적 : 약 55만㎢, 유럽 최대의 넓이(소련제외)이며, 우리나라의 2.5배.
높고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산들 : 알프스 산맥(유럽의 최고봉 몽블랑 : 4807), 피레네 산맥(3298m), 쥐라 산맥(1723m).
오래된 산들 : 중앙 산지(le Massif central), Vosges 산맥.
평원 : 파리 분지, 아키텐 분지, 팡그독 해안평야
강 : 루아르 강(1010km)은 가장 긴 하천, 센강(776km)은 파리를 지나는 하천으로 내륙수로에 매우 유용, 가론 강은 자주
범람, 론 강은 수력발전의 중심지.
[프랑스에서 공중전화 걸기] 공중 전화는 지하철 역이나 현대식 버스 정거장, 카페 안,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주택가에는 공중 전화가 드문 편이니
거리에서 공중 전화를 하려면 대로변으로 나가자. 요즘은 대부분의 공중 전화가 카드식이다.
전화 카드는 타바(Tabac)라고 하는 담배 가게나 키오스크(kiosque)라고 하는 신문 가판대, 노란 바탕에 깃털펜이 그려진
프레스(Presse)라는 간판이 달린 주택가의 신문 가게, 지하철 역 등에서 살 수 있다. 종류는 50단위(1 Unite는 파리 시내간
1통화를 기준으로 하는데 1프랑이 조금 못된다)와 120위니테 2종류다. 50위니테짜리 카드로 한국까지 5분 정도 할 수 있다.
밤 10시 이후에는 할인된다.
카드는 지금 서울 시내 버스 카드의 원리와 같은데 카드 끝부분에 회로 칩이 내장되어 있고 카드 투입구에 끼워 사용한다.
프랑스의 공중 전화는 디자인이 예뻐서 기념으로 간직하기에도 좋다. 파리에서 파리 시내로 전화할 때는 지역 번호 01을
포함한 전화 번호 10자리를 누른다. 시외로 전화할 때도 마찬가지. 한국에서 프랑스로 할 때는 국가 번호 33을 누르고 0을 뺀
지역 번호를 누른 다음 나머지 8자리의 전화 번호를 누르면 된다.
1. 액정 판에 Decrocher라고 되어 있으면 수화기를 든다.
2. Patienter라는 글자가 뜨면 잠깐 기다린다.
3. Numeroter라는 글자가 뜨면 00-82-XX(0을 뺀 지역 번호)-XXX(국번)-XXXX(뒷자리 번호)를 순서대로 누르면 한국으로
전화할 수 있다.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하고 싶다면 00-00-82를 누르고 안내 방송(한국어로 나온다)이 나오면 0을 누른 다음 상대방 전화 번
실어 보내자.
우체국은 La Poste라고 하는데 창구 담당 직원에게 한국으로 보낼 엽서를 주고 Pour Seoul, Coree du Sud라고 말하면
무게를 달고 요금을 알려준다. 보통 서울까지 엽서 한 장에 5프랑 내외다.
큰 우체국에 가면 우표 자동 판매기가 있는데 자동 판매기 하단의 저울에 엽서를 넣고 안내문에 따라 버튼을 누르면 우표가
나온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스티커형 우표라 더욱 이국적이다. 작동법은 영어로도 나오는데 현금 인출기를 사용하는 방법
과 같으므로 어렵지 않다.
창구에서 우표를 샀으면 우표를 붙인 다음 직원에게 주면 되고 자동 판매기에서 샀으며 옆에 있는 우체통의 오른쪽 투입구
즉 Ponvince et etranger라고 적힌 구멍에 넣으면 된다. 왼쪽 투입구에는 Paris et banlieue라고 되어 있는데 파리와 근교
에는 근처에 맥도널드나 퀵(프랑스판 맥도널드) 같는 패스트 푸드점이 있나 살펴본다. 다행히 패스트푸드점이 있다면 이곳
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공짜니까. 그렇지 않으면 근처 카페를 이용한다. 웨이터에게 Ou sont les toilettes?이라고 물어
보면 가르쳐 준다. 나올 때는 잘 이용했으니 Merci라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말 것. 그런데 몇몇 카페에서는 화장실 앞에서
이용료를 받기도 한다.
마지막 방법. 거리 곳곳에 위치한 간이 화장실을 이용한다. 프랑스의 간이 화장실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우리나라 간이 화장실은 공짜지만, 프랑스이 간이 화장실은 돈을 받는 대신 매우 청결하고 쾌적하다. 사람이 한 번 이용
하고 나오면 문이 닫히면서 자동으로 실내 공기가 정화될 정도다. 이용 가격은 몇 년 전에도 지금도 단돈 2프랑. 2프랑짜리
동전만 들어가므로 지갑에 2프랑짜리 동전 몇 개쯤은 넣어가지고 다니는 것이 든든하겠죠? 단 주의할 것은 이 간이 화장실
은 문이 닫히고 5분 뒤에는 자동으로 열리게 되니 그 전에 볼일을 다 봐야 한다. 처음 이 간이 화장실이 생겼을 때 강간 범죄
생각 없이 물을 주문하고 나중에 계산서에 포함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파리의 물을 마시기가 찜찜한 사람은
미네랄 워터를 시켜 마시고(보통은 에비앙을 병째 글라스와 함께 준다) 그렇지 않으면 Une carafe d'eau, s'il vous plait라
고 하면 물병에 수돗물을 받아준다. 파리지앵들은 대부분 그냥 이 물을 마시므로 며칠 정도 마신다고 몸에 탈이 나지 않을 것
이다.
[프랑스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기초 상식] [프랑스의 면적]은 551,000Km2이며 22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이 지역들은 또 다시 95개의 지역구로 분할되어 있
으며, 36,000개의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굴곡]을 포함하여 3,120km 혹은 직선 거리로 1,600km이며, 이 해안선은 각기 다른 해안선들과 대서양에 면해 있다.
12km에 이르는 유럽에서 가장 큰 해변인 볼이 루아르-아틀랑티크에 있다. 가장 높은 사구가 114km에 이르며 아키텐
지방의 지롱드에 위치하고 있는 필라다.
[가장 놓은 산]의 정상은 사보이 지역의 몽블랑 산이며, 그 높이는 4,807m다. 6,000종에 이르는 야채와 340종에 이르는
치즈, 그리고 450종류 이상의 포도주가 포도주 산지 등록이 되어 있다.
[상징]프랑스 국기의 색상은 파랑색, 흰색, 빨강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1789년 혁명 이후). 상징은 수탉인데, gallup은 수탉과 동시에 골족을 상징한다. 1789년 민중에 의해 바스티유 감옥이
찬탈 된 7월 14일은 국경일이다. 라 마르세예즈라는 곡이 국가이며 이 곳은 1792년 루제 드 리즐에 의해 작곡되었다.
현재까지 프랑스의 통용 화폐는 프랑과 상팀이며, 올해부터는 유로화가 함께 통용되고 있다.
[언어]프랑스어이며, 알자스어, 바스크어, 부르타뉴어, 카탈로니아어, 코르시카어,오크어 등 여러가지 지방 방언이 있다.
[기후]온화한 편이며,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도 않은, 한 마디로 기분 좋은 날씨다.
[자료 제공 : 프랑스 정부 관광성]
본 내용은 프랑스 문화와 사회'(프랑스 문화 연구회편집: 어문학사 출판)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날씨
시각
시차는 7시간
전화 거는 방법
'프랑스 전화하는 법' 정보
프랑스 > 프랑스 전화하는 법
프랑스 → 한국
통신사번호 + 한국 번호(82) + 지역번호 + 전화번호
예) 프랑스에서 서울(02)의 123-4567로 전화하는 경우
통신사번호 - 82 - 2 - 123 - 4567
한국 → 프랑스
통신사번호 + 프랑스 번호(33) + 지역번호 + 전화번호
예) 한국에서 파리(1)의 123-4567로 전화하는 경우
통신사번호 - 33 - 1 - 123 - 4567
언어
프랑스어는 25개국 이상의 공용어로
알제리,
벨기에,
캐나다,
룩셈부르크,
스위스,
저지 섬 등 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와 코르시카에서는 약 4,400만 명, 캐나다에서는 625만 명, 벨기에에서는 320만 명, 스위스에서는 100만 명 이상, 모나코에서는 1만 3,000명, 이탈리아의 발레다오스타에서는 10만 명, 미국(특히 메인 주와 루이지애나 주)에서는 약 240만 명이 프랑스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약 50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과 400만 명의 인도차이나 사람에게 프랑스어는 중요한 국제통용어가 되어 있으며, 많은 크리올 프랑스어 사용자들도 공식석상에서는 표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표준 프랑스어는 대략 12세기 후반에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파리 방언(일 드 프랑스 방언)에서 비롯된다. 파리 방언은 원래 몇몇 북방적 특징을 지닌 북부 중앙지방의 방언이었다. 그전에는 다른 방언들, 즉
노르만 방언(브리튼에서는 앵글로노르만 방언으로 발전하여 대략 14세기까지 사용되었음)과
피카르디 방언과 같은 북부지방의 방언들이 우세했으며, 특히 문학 분야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비예코트레 칙령(1539) 이후 프랑시앵 방언이 유일한 공식언어로 정립되었다. 그때부터 표준 프랑스어가 지역방언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작가들로부터 칭송받았던 방언들은 근대 프랑스어의 문법과 어휘가 놀라울 정도로 표준화되고 정련됨에 따라 17, 18세기에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까지는 프랑시앵 방언과 선두를 다투었던 북부 프랑스의 피카르디왈론 방언과 서부 프랑스의 노르만 방언이 교육받지 못한 시골사람들의 말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프랑스 북부지역에서의 언어변화는 다른 로망스어 지역에서보다 더욱 신속하고 철저했으며, 14세기 이후 라틴어 어휘 차용이 점점 더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로부터의 영향은 비교적 경미했다. 게르만 프랑크족 침입자들의 영향이 강세나 이중모음과 비모음의 풍부함과 같은 고대 프랑스어의 외래적 자질들을 설명하는 데 종종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15세기경에 더욱 부드러운(단조롭기까지함) 억양으로 변화한 것, 각 단어의 강세가 없어진 것 등은 인접 언어로부터의 영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거의 모든 외국사람들이 발음상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를 제1외국어로 채택하게 된 것은 모든 시대에 걸친 프랑스 문학의 위대함뿐만 아니라, 특히 18세기에 프랑스 문법이 세밀하게 성문화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결과 이탈리아어가 상대적으로 습득하기 쉬운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로망스어권의 외국어 사용자들이 대부분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학습하며 종종 애정과 경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어로 된 최초의 문서는 842년에 작성된
〈스트라스부르 서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샤를마뉴의 두 손자의 서약 내용을 로망스어로 옮겨놓은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필사본이 사건 이후 정치적 선전의 의도에서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라틴어인 것처럼 슬쩍 위장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다른 학자들은 라틴 문자화하려는 그러한 경향들이 당시 구어로 씌어지던 프랑스어를 문자로 기록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스트라스부르 서약〉이 북부지역 프랑스어로 씌어졌다면 그것이 어떤 방언에 속하는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피카르디 방언으로, 다른 사람들은 프랑스프로방스 방언으로 주장하며 그밖의 다른 견해들도 있다. 고대 프랑스어로 기록된 2번째의 현존하는 필사본은 성(聖) 외랄리아의 짤막한 기록들로서, 그 연대(880~882)와 장소(발랑시엔)가 정확하게 드러나 있으며, 피카르디 방언으로 씌어져 있다. 10세기의 두 필사본 〈그리스도의 수난 Passion du christ〉·〈성 레제의 생애 Vie de st. Leger〉에는 북부와 남부 방언의 특징들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다른 필사본 〈요나 단편 Jonas fragment〉은 최북단지역의 것임이 명백하다. 이후에는 노르만 방언이 문학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추측컨대 이 방언은 조야한 요소들이 제거됨으로써 표준어로 더욱 잘 기록되었을 것이다. 필사본은 2가지 전통인 최북단지역과 서부지역에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둘이 서로 교차함으로써 결국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는 프랑시앵 방언이 생겨난 것 같다.
오늘날의 방언들은 주로 지리적인 기준에 따라 분류되며, 대개 시골 말에만 남아 있다. 주로 벨기에에서 사용되고 있는
왈론 방언은 1600년경 이래 융성한 방언문학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방언들은 ① 중부지역의 프랑시앵 방언, 오를레앙 방언, 부르보네 방언, 샹파뉴 방언, ② 북부지역의 피카르디 방언, 북부 노르만 방언, ③ 동부지역의 로렌 방언, 부르고뉴 방언, 프랑스콩투아 방언, ④ 서부지역의 노르만 방언, 북브르타뉴 방언(켈트브르타뉴 지역 부근), 앙제 방언, 메네 방언, ⑤ 남서부지역의 푸아티에 방언, 생통제 방언, 앙굴렘 방언 등으로 분류된다.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는 크리올어를 제외하고,
캐나다 프랑스어가 가장 독자적인 발전을 보였다. 캐나다 프랑스어는 원래 남서부방언의 유형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내내 캐나다 프랑스어는 프랑스 본토의 주석자들에 의해 예외적으로 '순수'하다고 여겨졌지만, 1760년 이후 프랑스에 대신하여 영국의 영향이 우세해지자 파리 프랑스어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표준 프랑스어에 비해 불분명하게 발음되고, 입술의 움직임이 더 적어지며, 더욱 단조로운 억양을 갖게 된 것이다. 자음의 소리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며(t, d가 각각 ts, dz로 바뀜), i나 e에 뒤따르는 k나 g는 구개음화된다(혀가 경구개 또는 입천장에 닿으면서 발음됨). 비모음은 비음의 성질을 상실하며, 어휘와 구문이 상당히 영어화된다. 비록 지식인들이 교양상의 목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우지만(대학 교육을 받은 일부 프랑스계 캐나다인 중 영어를 못할 수도 있음), 표준 프랑스어로 발음하거나 사용하게 되면 때때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영국인 동포들이 학교에서 파리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캐나다의 프랑스어 사용인구는 비교적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 퀘벡 주민의 80%가 프랑스어를 그들의 일상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프랑스어는 영어만큼 사회적인 특권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분리주의 운동은 여전히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갖고 있는 불만의 감정을 입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