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시냇가 언덕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 할 일도 없어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언니가 읽고 있는 책을 한두 번 슬쩍 넘겨다보았지만, 그 책에는 그림도 대화도 없었습니다.
' 그림도 대화도 없는데, 시시한 책을 언니는 무슨 재미로 읽고 있는지 모르겠어 '
엘리스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날은 몹시 더웠기 때문에 졸려서 머리가 멍했으므로 데이지 꽃으로 화환이라도 만들어 볼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 그렇지만, 일부러 꽃을 꺾으러 가는 것도 귀찮아 '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별안간 분홍색 눈빛을 한 한 마리의 흰토끼가 엘리스 바로 옆을 깡충깡충 뛰어 지나갔습니다.
그것만이었다면 그다지 놀랄 것도 없었습니다.
「 큰일났다, 큰일났어, 늦었으니 」
하고, 토끼가 혼자 중얼대고 있는 것을 들었을 때도 엘리스는 그것을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토끼가 조끼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끄집어내어 힐끔 시간을 보고는 또다시 당황하며 뛰어갔을 때는 엘리스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토기가 조끼를 입는다거나, 호주머니에서 시계를 끄집어내는 따위를 아직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엘리스는 토끼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리하여 들판을 가로질러 울타리 밑에 있는 커다란 토끼 굴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엘리스도 그 뒤를 쫓아 굴속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이 굴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미처 하지도 않고...
토끼 굴은 얼마 동안 터널 모양으로 똑바로 뚫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리막이 되어 미끄러지듯 내려가다가 그만 아래로 뚫린 굴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 앗! 」
하고, 소리쳤을 때엔 이미 깊은 우물 같은 굴속으로 떨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엘리스는 떨어져 내려가면서도 가만히 주위를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굴은 굉장히 깊었던 모양이죠.
'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까? ' 하고, 생각할 시간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밑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깜깜하여 아무것도 뵈지 않았습니다.
굴 주위를 살펴보니 찬장과 책꽂이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지도와 그림 등이 못에 걸려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엘리스는 떨어져 내려가면서 찬장에서 병 한 개를 집었습니다.
<오렌지 마멀레이드>라고 씌어진 상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 이것봐, 빈 병이구나 '
실망한 엘리스는 병을 버리려고 했습니다.
만일 밑에 누군가가 있으면 그야말로 큰일.
그래서 눈앞에 와 닿은 찬장 위에다 살짝 얹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 그렇지. 내가 한 번 이렇게 떨어져 본 일이 있다면 모두들 정말 대담한 아이라고 감탄할거야 '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떨어져 내려갔습니다.
언제까지 떨어지면 끝장이 날는지요.
「 벌써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내려왔을까
몰라? 틀림없이 지구 중심 가까이까지 왔을 거야.
그러니까 가만 있자, 어림잡아 6천 킬로미터는 떨어져 내려온 셈이로군 」
왜 엘리스가 이런 말을 했는가 하면,
그러한 것을 여러 가지 배워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옆에 아무도 없으니 아는 체하기엔 적당한 시기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셈을 해보는 것도 좋은 복습이 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 근방의 위도와 경도는 얼마쯤 될까? '
엘리스는 위도나 경도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그렇게 말을 해보니까 왠지 모르게 훌륭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 이대로 끝까지 떨어져 내려가면,
지구를 꿰뚫고 말지도 모를 일이야.
머리를 아래로 하고 걷고 있는 사람들 틈에 느닷없이 나가게 된다면 매우 우스울 거야,
틀림없이.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대... 대조인이라 했던가? 」
대조인이란 대척자(지구 저쪽에 사는 사람, 모두가 정반대인 사람)의 잘못으로서,
마침 아무도 듣고 있은 사람이 없어 다행이구나,
하고 나중에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 그렇지만, 그 사람들에게 거기가 어느 나라냐고 물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저, 아주머니, 여기가 뉴질랜드이어요, 오스트레일리아여요? 」
엘리스는 이렇게 지껄이면서 인사를 하려 들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셔요. 공중에서 떨어져 내려가면서 인사를 하다니,
당신들인들 그런 짓을 할 것 같아요?
아래로 아래로 여전히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아무 할 일도 없고 하여,
또다시 혼잣말을 지껄이기 시작했습니다.
「 오늘밤에 내가 없기 때문에 다이나가 몹시 쓸쓸해 할거야 」
다이나란 고양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 짬짬이 누군가가 다이나에게 우유를 주는 것을 안 잊어 줬으면,
다이나, 네가 지금 여기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니.
공중에는 쥐는 없지만 박쥐라면 잡을 수 있어.
박쥐는 쥐와 꼭 닮았지. 그렇지만 고양이가 박쥐를 먹을지 몰라? 」
엘리스는 차츰 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꾸벅꾸벅 졸면서 그대로 지껄였습니다.
「 고양이는 박쥐를 먹을지 몰라... 고양이는 박쥐를 먹을지 몰라... 」
이렇게 말하는가 했더니,
「 박쥐는 고양이를 먹을지 몰라... 」
하기도 하더니, 어느 새 콜콜 코를 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스는 다이나와 손을 잡고 노는 꿈을 꾸었습니다.
「 다이나, 너는 박쥐를 먹어 본 적이 있니? 바른 대로 말해 주렴 」
하고 말했을 때였습니다.
별안간 푹! 하고 마른 잎더미 위에 떨어졌습니다.
떨어져 내려가는 것은 이제 가까스로 끝난 것입니다.
상처는 한 군데도 나지 않았습니다.
앨리스는 이내 일어섰습니다.
위쪽을 쳐다보니 캄캄했습니다. 앞쪽엔 길게 뻗은 길이 있었습니다.
조금 전의 그 흰토끼가 재빨리 뛰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엘리스는 그 뒤를 쫓았습니다.
토끼가 어느 골목 모퉁이를 돌 때,
「 큰일났어, 정말 너무 늦어버렸어! 」
하는 소리를 간신히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 때까지는 바로 뒤를 쫓고 있었는데,
그 모퉁이를 돌아가 보니까 이미 토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천장이 얕은 기다란 넓은 방안이었습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한 줄의 램프가 방안을 환히 비춰 주고 있었습니다.
넓은 방 안 벽에는 문이 몇 개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창문이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갈 수가 있을까? '
엘리스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맥없이 방 한가운데에 와보니 거기엔 세 발 유리 테이블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 단 한 개의 작은 황금열쇠가 얹혀 있었습니다.
' 틀림없이 이 열쇠가 어느 자물쇠엔가에 맞을지도 몰라 '
그러나 어쩌랴! 그 황금열쇠는 어느 자물쇠에도 맞질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돌리고 있을 때,
낮은 곳에 커튼이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커튼을 걷자 거기엔 38센티미터쯤 될까말까한 조그마한 문이 있었습니다.
황금열쇠를 그 자물쇠 구멍에 넣어 보니 꼭 맞았습니다.
앨리스는 그 작은 문을 얼른 열었습니다.
쥐구멍 만한 구멍이 뚫어져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니,
굉장히 아름다운 뜰이 보였습니다.
엘리스는 기어나가,
그 눈부신 화단과 분수가 치솟고 있는 뜰을 얼마나 거닐어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구멍은 머리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좁았습니다.
' 비록 머리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몸이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아, 내 몸이 망원경 모양으로 줄어들게 할 수는 없을까. 맨 먼저 하는 방법만 알면 반드시 될텐데 '
줄곧 신기한 일만 계속되었기 때문에,
엘리스는 이제 무엇이고 안 될 것이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두커니 서 있어 봤댔자,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 참, 유리 테이블 위에 또 다른 열쇠나,
사람을 망원경 모양 줄어들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써 둔 책이 있을지도 몰라 '
이런 생각을 하면서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는 조그마한 병 한 개가 있었습니다.
' 확실히 조금 전엔 없었던 거야 '
병목에 매어 둔 종이 꼬리표에는 <나를 마셔 주셔요>라는 글귀가 큼직하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영리한 엘리스는 성급하게 입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 혹시 독이 있다면 적혀 있을지도 모르니, 우선 잘 살펴보아야지... 」
앨리스는 간단한 교훈들을 명심하지 않아서 매우 혼이 난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읽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빨갛게 단 부젓가락을 잡았다가 화상을 입었다던가, 무서운 짐승에 물렸다던가...
그러나 병에는 그 어디에도 <독>이라고는 씌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한 번 혀끝으로 맛을 보았습니다.
앵두를 섞은 파이와 커스터드,
태피와 파인애플과 구운 칠면조와 캐러멜과 구운 버터 토스트 등을 섞어 만든 굉장히 맛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금새 빈 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 아이, 기분이 이상해진다 」
맥이 풀린 목소리로 엘리스는 말했습니다.
「 틀림없이 망원경처럼 줄어드는가 보다 」
정말 그대로였습니다.
이내 약 25센티미터 정도의 키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 야, 신기하다. 이만하면 그 아름다운 뜰에 나가 볼 수 있겠지 」
기뻐서 엘리스의 얼굴은 꽃처럼 활짝 피었습니다.
그리고 좀더 줄어드나 안 줄어드나 하고, 2, 3분 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 초와 같이 완전히 녹아 없어질지도 몰라.그렇게 되면 나는 어쩌지 '
초가 녹아 없어진 다음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참동안 더 있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스는 곧 뜰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황금열쇠를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채 잊어버리고 왔지 뭡니까.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보니 이것은 또 웬일입니까.
아무리 해도 손이 닿지를 않았습니다.
열쇠는 유리를 통해 아래서 빤히 보였지만,
하는 수 없이 급히 테이블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자꾸만 줄줄 미끄러져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잇는 동안에 엘리스는 그만 온 몸의 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엾게도 너무나 지쳐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 이렇게 울고만 있다고 무슨 수가 날줄 아니! 」
엘리스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 빨리 울음을 그쳐! 」
이윽고 눈물이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테이블 밑에 조그마한 유리상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열어 보니 조그마한 과자가 한 개 들어있었습니다.
그 위엔 건포도로 <나를 먹어라>하는, 예쁜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 좋아, 먹고말고. 키가 커지면 열쇠를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이고, 줄어든대도 뜰에 나갈 수 있을 게 아냐. 이래도 저래도 괜찮지 뭐 」
엘리스는 과자를 조금 씹어 보았습니다.
두 손을 머리 위에 얹은 채,
「 줄어들까? 늘어날까? 」
하고, 근심스럽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아무런 변동도 일어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신기한 일만 자꾸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은 만큼,
아무변화가 없는 것은 따분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스는 그 과자를 전부 먹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