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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사 의 허구 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 사직대제(社稷大祭)-2
지명선 추천 0 조회 93 09.04.11 10: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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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111호
명 칭 사직대제(社稷大祭)
분 류 놀이와의식
지정일 2000.10.19
소재지 서울 종로구 관철동 12-2
시 대 조선시대
보유자 이건웅
관리자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


※ 본문설명

사직대제는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국가적인 제사로, 사(社)는 땅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의미한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이와 함께 땅과 곡식의 신에게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풍요를 기원하는 사직제를 올렸다.

삼국시대부터 행해진 사직에 대한 제사는 자연에 감사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조선의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궁궐과 함께 종묘, 사직단(사적 제121호)을 마련하여 경복궁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도 사직단을 세워 백성의 편안함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사직단은 북쪽에 신위를 모시고 동서로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을 배치하였다. 제사는 보통 2월과 8월에 지내고,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나 격식은 때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으나 점차 중국의 방식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제사의식은 소·돼지·양의 생고기를 비롯한 각종 곡식을 마련하고, 전폐·영신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 및 망예을 의식화하여 진행한다.

사직제에 사용되는 음악, 무용, 음식, 의복, 의기(儀器) 등을 비롯하여 제사를 행하는 우리 고유의 제사절차 등은 전통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제사의식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터줏대감이나 산신 등에 제사하는 민속이나 전통관습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사직대제는 고종 31년(1894)에 이르러 신관제(新官制)로 바뀌었고, 순종 2년(1908) 일본의 강압에 의해 폐해졌다. 이후 1988년 10월 종묘제례의 기능보유자인 이은표 옹의 고증을 통해 복원하여 봉행되어 왔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대에 있는 사직대제봉행위원회에서 사직대제를 보존·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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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충설명

조선시대에는 천·지·인(天·地·人)에 대한 국가의 제례로 원구제, 사직제, 종묘제가 있었는데, 그중 사직제는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오곡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에게 드리는 국가적인 제사이었다.

사직제의 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왕실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종묘대제와 더불어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중요한 예식이었다. 조선은 태조3년(1394)에 경복궁 동쪽의 종묘에 대비시켜 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하고, 사직단의 동서쪽에는 각각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을 배치하였다. 사단에는 국사(國社)의 신위를 봉안하고 후토신(后土神)을 배향시켰으며, 직단에는 국직(國稷)의 신위를 봉안하고 후직신(后稷神)을 배향시켰다.

사직대제의 제의(祭儀)절차, 제수(祭需), 제복(祭服), 제례악(祭禮樂), 무용(佾舞) 등은 조선 전·후기와 대한제국 시기마다 편찬된 의례서에 따라 각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전기에는 성종5년(1474)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의례절차에 따라 제례를 거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조선후기에는 정조7년(1783)에 작성된 『사직서의궤』에 의해 유교적 의례로 봉행하였다. 한편 황제국임을 선포한 대한제국 시기인 1897년부터는 『대한예전』에 의해 독립국가로서 황제의로서 시행되었고, 현재의 의례는 대체로 대한제국의 의례를 따르고 있다.

사직대제는 시기적으로 2월과 8월 및 동지와 제석(除夕)에 거행되었다. 왕이나 황제가 친히 거행하는 친제의(親祭儀)의 의식절차는 시일(時日), 재계(齋戒), 친림서계(親臨誓戒), 진설(陳設), 친전향축(親傳香祝), 거가출궁(車駕出宮), 친성생기(親省牲器), 성생기 (省牲器), 전폐(奠幣), 진숙(進熟) 및 거가환궁(車駕還宮)의 순서였다.

현재 사직단에서 거행되는 사직대제는 전폐부터 영신례(迎神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및 망예(望예)를 의식화하여 진행하고 있다. 사직단에 진설되는 제수는 소·돼지·양의 생고기를 비롯한 각종 곡식을 늘어 놓으며, 초헌관의 제복은 구장면복을 갖추고 제관은 금관조복을 갖추어 의식을 이끌어 간다.

길례(吉禮)의 일종인 사직대제는 악공이 음악을 연주하고 일무원이 무용을 하는 악무(樂舞)가 펼쳐지는 의식이다. 제향악(祭享樂)으로는 순안지악(順安之樂)과 숙안지악(肅安之樂), 옹안지악(雍安之樂)에 맞추어 문무(文舞)를 추고, 초헌례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이 연주될 때 문무가 무무(武舞)로 바뀌어 서안지악(舒安之樂) 등이 연주된다. 아헌례와 종헌례에는 수안지악과 소무지무(昭武之舞)가 사용되었으며, 철변두(徹변豆)에는 옹안지악, 송신(送神)에는 순안지악이 사용되는 등 악무(樂舞)도 계속 바뀌면서 엄숙한 행사공간을 이끌면서, 국가의 주권을 상징적으로 표출한다.

사직대제(社稷大祭)는 2000년 10월 19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으며 보유자로 이건웅, 보유단체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인정되었다.





 

 

 

 

112 종묘 사적 125호 서울 종로구 조선 태조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관련 자료 

kr.blog.yahoo.com/jakoo821/1942.html?p=1&t=3

 

 

종 묘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궁궐의 동족에 종묘를 건립하고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현재의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으로 되어 있는데, 종묘는 원래 정전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정전 건물은 태조 3년(1394)에 직기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되었고, 영년전은 세종 3년(1421)에 완공되었다.

정전과 영녕전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년(1608)에 재건죄었으며,

그 후 몇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사적 제125호인 종묘는 뛰어난 건축적 가치와 60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제례행사 등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001년에는 종묘제례 및 제례악이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월남 이상재선생 동상

월남 이상재선생은 1850년 충남 서천군에서 태어나 일찌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의 개화상을 시찰하고 개화사상의 선구자가 되었다.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이를 통하여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개화구국의 지도자역할을 하였으며, 1888년 자주독립수호 및 구국운동선언의 일환인 헌의6조를 상소하였다.

1918년 일제의 무단정ㅣ 하에서 비밀리에 기독교.천도교.불교 지도자들과 만나 3.1독립운동을 배후에서 도왔고, 1924년 보이스카웃연맹 초대 총재로 추대되어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다. 1927년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신간회 회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바로잡는 길잡이가 됨은 물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한국인의 사표가 될 것이다. 이 동상은 1996년 4월 10일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월남 이상재선생 동상 건립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종묘 앞의 작은 건물과 지저분한 가판대 등을 정리하고 종묘공원을 만들어 한층 말끔하고 시원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다만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북적거린다.   


망묘루(望廟樓)

망묘루는 임금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망묘루라는 이름은 제향시 임금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의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현재 건물 가운데 1칸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공민왕 신당


영정과 준마도

이곳은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이다.

공민왕은 고려 31대 왕으로 원나라 세력을 내몰고 나라의 자주권뿐만 아니라 잃었던 북방 영토를 회복하였다.
조선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짓도록하고,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를 함께 그린 영정, 준마도를 모셨는데, 현재는 복제품이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어숙실(御肅室)

왕이 제사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종묘의 정전 동쪽에 자리한 어슥실은 재궁(齋宮) 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불린다.

이 건물은 태조 4년(1395)에 정전과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중에 불탄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지었다.



정전(正殿)1(국보 제227호)


정전2


정전3

정전은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19실에 태조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 19위, 왕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의 단일 목조 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총101m)이며,

전면에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든 넓은 월대를 조성하여 사묘(祠廟)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내고 있다.


영녕전 정문


영녕전(永寧殿)(보물 제821호)

영녕전은 정전에서 옮겨진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별묘(別廟)이다.

세종 3년(1421)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 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16실에 왕의 신주 16위, 왕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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