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고백이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돌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학 친구 주희와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나의 손을 잡는 그에게 난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작업실을 빠져나와 버렸다..
기분 나쁜 건.. 아니겠지?
" 기집애. 너 취직 안 할거야? 어디든 원서는 써봐야 할 거 아니야. "
" 모르겠어.. 나두.. "
" 암튼... 야!! 모르겠다는 게 말이 되냐? 빨리 정신차리고
나랑 같이 원서나 내러 다니자!!
팔자 편하게 작업실에서 그림이나 그리지 말구. "
주희는 생각없이 사는 날 보고 뭐라고 했다.
한때는 나...
미대를 목표로 열심히 살던 애였다.
근데..
지금의 내 모습.. 내가 봐도 참 한심해...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 야!!!!!!! 최수진!! "
저 멀리 입구에서
식당이 떠나갈 듯하게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그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짙은 회색의 독특한 디자인의 미니스커트와
가슴팍에 주머니 달린 스판 소재의 검은 나시티를 입고,
검은 생머리를 흩날리면서 쓰고 있던 썬그라스를 신경질적으로
벗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여자..
나의 둘도 없는 친구, 강지호.
" 야.. 저 사람... 니 친구 맞지? 멋쟁이 친구.. "
" 어.. 그런 거 같다.. "
" 멋지다... "
주희는 지호의 팬이다..
가끔 학교에 놀러올 때마다 스치듯 몇 번 보고서 반한 모양이다.
물론 지호 성격상
여지껏 통성명 조차 안했다.
주희가 인사를 하면 보기 좋게 무시를 했기 때문이다.
자기 말로는 안 들렸다지만...
주희는 상처 많이 받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지호는 썬그라스를 식탁위에 탁 내려놓고 내 맞은 편에
신경질 적으로 앉는다.
" 야!! 너 왜 전화 안 받아!! "
" 전화? "
아... 맞다...
작업실에다 두고 왔지..
" 미안.. 두고 나왔다. "
" 이 미친.. 내가 진짜 니 찾아다니느라고 죽는 줄 알았어!! "
지호 씩씩대는 거 보니까
화 많이 났나보다
" 아.. 안녕하세요.. "
지호팬인 주희의 용기있는 인사
4년만에 통성명 하게 생겼군..
" 누구야? "
하지만 싸가지없는 지호의 반응
" 아.. 내 친구 주희야.. 이주희 전에 말했잖아. "
" 아.. 하!! 그동안 미안했어요. 내가 씹을 라고 씹은 게 아니라
귀가 안 좋아서~
뭐 여하튼, 얘랑 같이 다니느라고 고생 많으시네요. "
미친년.. ㅡㅡ;;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말 밖에 없드냐.
오랜만에 학교를 찾은 지호와 함께 맥주 6캔과 팝콘을 사서 본관
잔디밭에서 떡 하니 누웠다.
" 키아~ 좋다!! "
" 너 갑자기 왜 왔냐? "
" 친구가 오랜만에 방문을 해주었는데..
반가워하지는 못할망정 왜 왔냐니!! "
" 그러니까 왜 왔냐구.. "
" 니 보고 싶어서 왔지 이년아!! "
짜~식
가끔은 이런 기분 좋은 소리도 해준단 말이지..
역시 내 친구야
" 인철이랑은.. 잘 되가? "
" 걔랑 나랑 잘 안 될 일이 뭐 있겠냐.. 사귄 게 자그마치 4년인데..
이제 싸우는 것도 지겹다. "
" 청혼 안 받아줄거야? "
" 몰라..... 결혼이 애들 장난이냐? "
" 인철인.. 계속 하자고 하지? "
" 요즘엔 그래도.. 내가 하도 뭐라고 하니까 뜸해졌어..
결혼... 만약 한다면.. 물론 난 인철이랑 할거야
근데 지금은 아니야.. "
지호는 맥주캔 하나를 다 마시더니 우적우적 꾸겨서
쓰레기통에 골인 시켰다.
" 아~ 싸!! "
저 좋아하는 모습이란...
나이가 23이다 이년아..
" 그나저나. 너 진짜.. 태형이랑 어떻게 되는 거야? "
" 뭐가... "
" 니네 잤잖아. 그것도 아주 한달에 두번씩은 태형이가 찾아와서
자고 간다며?
근데.. 아직도 사귀자는 말은커녕, 좋아한다는 말도 없어? "
지호는 심각하게 나에게 물었다..
나와 태형이 문제에 가장 신경을 써주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난 태형이와 있었던 일은 지호에게
빠짐없이 말한다.
" 응.... 모르겠어.. 나두.. 진짜.. "
" 태형이 새끼 좋게 봤는데... 아주 이런 면에선 매너가 빵점이네!!
뭐하자는 거야? 그리고.. 너.. 넌 뭐하는 거야?
왜 그렇게 멍청하게 있냐? 니가 딱 말해.
아주 그 새끼 니 단물만 쏙 빼먹고 도망가겠단 심보 아니야?
죽을라고 "
지호가 화났다.
답답한 자신의 친구가.... 너무나 짜증이 나겠지
" 암튼 니네 때문에 내가 잠이 안 와 잠이!! 너.. 걔 그렇게 좋아?
사랑하는 거야? "
" 응.. "
" 뭐? "
" 나 태형이 너무너무 사랑해... "
" 에라이 이 미친!! "
지호는 날 확 껴안았다..
지호의 품에서... 너무나 따뜻한 지호의 품에서
나도 모르게 다시 눈물이 난다...
우리는 술을 진탕 마셨고, 지호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다음날
속이 쓰려서 학생 식당에서 육개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앞에 식판을 내려놓는다.
" 안녕? "
임재호다..
지호 때문에 잊고 있었던
어제의 고백이 다시 떠오른다.
" 네.. "
" 점심이 좀 이르네요 ? "
" 네. "
" 오늘도 그림 그릴 거에요? "
" 네. "
나의 형식적인 대답...
그는 나의 대답에 살며시 미소짓는다.
그 후 우리는 아무말이 없었다.
옆에서 웅성웅성대는 여자애들도 신경쓰였고,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는 재호란 사람도 신경쓰였다.
난 재빨리 밥을 먹고 식당을 빠져 나왔다.
작업실.. 난 다시.. 태형이의 얼굴을 그린다.
태형이..
그렇게 올라가고선... 연락이 없다..
전화하고 싶지만..
자꾸 매달리는 느낌을 줄까봐 먼저 못하겠다.
탈깍!
문 소리가 난다..
또 그다..
" 나도 작업할 게 있어서요.. "
태연하게 웃으며 내 옆에 자리를 잡는 그는
스케치를 시작한다.
난 그를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계속 태형이만 그렸다.
날 옆에서 주시하고 있는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쳐다보지 않고 계속 내 일만 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옆에서 누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 왜 자꾸 봐요? "
" 네? "
난 그가 그리고 있던 걸 봤다....
그는.....
날 그리고 있었다.
" 뭐죠? "
" 그냥.. 나도 수진씨 얼굴을 그리고 싶어서요. "
이 사람..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 난 수진씨를 그리고.. 수진씨는 그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은 누굴 그리고 있죠? "
너무나 맑고 투명한 그의 눈동자....
" 처음 이 학교에 온 날, 수진씨 보고.. 세상에 이렇게 예쁜
사람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나를 제대로 한번 쳐다봐 주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워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매일 작업실 지나가면서..
말 걸고 싶고.. 그랬지만..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용기가 안 나서 망설이다가...
어제 결국 말 한 거에요.. "
이 사람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구?
날.... ?
" 그림을 보면 수진씨가 그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수진씨의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수진씨를 힘들게 하는 지 알 수 있어요..
수진씨...
어제도 말했지만.. 날 받아주면 안 될까요?
나한테 기대면 안 될까요? "
너무나 진지하게 부탁하는 이 사람...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설레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태형인걸...
" 교수님께선 절 잘 모르시 잖아요.
절 어떻게 보셨는 지는 모르겠지만... "
" 그럼... 이제부터라도 알게 해줘요. 나... 잘 할게요... "
난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하려고 본
그의 스캐치...
정말... 날... 너무 똑같이.. 그렸다...
그 짧은 시간에...
마치 오래 봐왔던 사람처럼...
내 특징들을.. 다 뽑아내서...
정말 나처럼.. 그려냈다.
" 기회를 줘요.. "
그의 애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난 그를 거절했다..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작업실에 날 찾아왔고,
학교 앞에서 날 기다렸고,
학교 식당에서는 항상 내 앞에 앉거나
내 옆에 앉았다..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로 우릴 쳐다보아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내 곁에 있으려고 노력했다..
이 너무나 고마운 호의...
부담스럽지만... 또 싫지는 않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
좋았다....
힘들지 않았다.
거의 한달 동안... 그의 노력으로..
우린 천천히 가까워졌고,
그때 동안은..
태형이는
날 찾아오지도 않았고,
연락 조차 없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태형이니까..
이렇게.. 한순간 내가 편한 거에 빠져서..
내 사랑을 잊을 순 없잖아..
그건... 비겁한 거야..
난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서울에 있는 태형이의 학교에 찾아갔다.
태형이가 조금은 재호씨의 호의에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나의 마음을 다시 닫아주기를...
바라며..
태형이의 학교 앞 커피숍에서...
태형이가 좋아하는 비엔나 커피를 마시며 그를 기다렸다.
" 왔어? "
" 응... "
" 왠.. 일이야? "
태형이의 표정...
조금은 나의 방문이 불편한 듯 보인다.
" 미안해... 공부하느라 바쁠텐데.. "
" 아니야.. 무슨 일 있는 거야? "
이때 예쁘장한 알바 아가씨가 주문을 받으러 왔구
태형이 역시 비엔나 커피를 시켰다...
태형이의 커피가 올 때까지..
우리 사이엔 적막이 흘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마음에
난 입을 열었다.
" 태형아... 난 너한테 뭐니? "
태형이.. 조금은 놀란 듯 날 바라봤다...
그 일이 있은 후 난 한번도
태형이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 너... 알고 있지? 나 4년 넘게.. 너만 봐온 거...
이제는... 그만... 나도 너한테 무슨 확신을 받고 싶어...
이렇게 널.. 기다리는 것도.. 조금.. 힘들다... "
태형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커피잔을 보며
숨을 크게 쉰다...
" 미안해... "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태형이의 한마디..
" 나 정말 누날 어떻게 생각하는 지 모르겠어..
누나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
최수진
정신차려..
너....
알았잖아...
태형인 아니라는 거 알았잖아...
" 정말 미안해... "
" 아니야... 괜찮아.... "
" 사실... 은지가.. 돌아왔어... "
은지.. 은지라면.. 태형이를 힘들게 하고
떠났던... 태형이의 여자친구?
그랬구나... 그래서....
연락이 없었구나....
" 잘됐네... 정말 잘 됐다.... "
" 누나.. "
" 공부는 잘 되 가지? "
난 애써 말을 돌렸다... 아님..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거 같아서...
지난 사랑에 힘들어하던
태형이에게 다시 찾아온
사랑을 축하해주면서,
그에게
아무런 부담주지 않은채,
쿨하게 떠나보내고 싶으니까..
난 그에게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
난 태형이와 헤어지고 지호와 화영이를 만났다.
녀석들은 내가 서울에 올라왔데자,
바쁜일 다 내팽겨치고 한걸음에 달려와 줬다.
" 미친놈. 야야 차라리 잘 됐어. 오히려 정말 잘 된거야
확실히 끝난거잖아. 됐어. 됐어. 이제 더 이상 미련 갔지말고
더 좋은 남자 만나면 돼. "
내 어깨를 꽉 안아주는 화영이...
화영이는.. 지금 연예인들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고 있다.
연예인들이랑 같이 다니면서.. 하는 거..
요즘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4인조 미소년 그룹과, 그 그룹이랑 같은 기획사인
여가수 두명을 담당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는 얼마 안 되서 분명 그만둘 거라고 무시했었지만
정말 그 일이 화영이에겐 적성이었던 것이다
인정받고 있고..
화영이도 굉장히 만족스러워 한다.
바빠서 자주 못 보고 있지만...
아... 그리고 동규랑은 아직도 러브러브다.
" 아~ 진짜 콱 가서 죽여버릴 수도 없구 "
지호는
소주 한 잔 원샷 하고는 긴 머리가 귀찮다며 틀어올리고는
젓가락을 비녀삼아 꼳는다.
" 동규는 어떠냐? "
" 동규? 동규.... 걔 은근히 순수하잖아.
여자랑 자면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놈이지....
오히려 그런 것 때매.. 여자가 더 부담을 느끼게 만들잖아.. 걘.. "
하긴.. 동규만큼 착실하고 순수한 애가 없지..
화영인...
정말 동규한테 믿고 의지할 수 있겠다...
" 동규는... 잘 지내? "
" 응.. 잘 지내지. 걔 이번에 대표 선수로 뽑혀 갖고는 무슨
이상한 샤블샤블 어쩌구 대회 나간다고
얼마 전에 일본 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