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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중학교제6회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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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도 역사.이야기 스크랩 조도 천주교의 역사
麗尾박인태 추천 0 조회 29 12.10.24 11: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조도 천주교의 발자취 □

 이 고장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을 살펴보기 위하여 천주교 진도 본당 약사와 천주교 목포 산정동 본당 역사를 살펴보고 구전에 오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 진도본당 약사 (여명기)
 진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70년경 제주도의 선교를 담당했던 프랑스인 신부가 작은 범선으로 목포로 항해하던 중 심한 풍랑으로 상조도 동구리 공소에 상륙하여 선교와 함께 공소를 개설한 것에서 비릇된다.(구전에는 상조도 율목 진작지에 배가 다았다고 함)
 이어 1900년부터 1904년에 걸쳐 조도 동구리 공소, 조도 창유리 공소와 함께 지산면 인지리 공소가 개설되었다.
 처음에는 민간인 집을 매수하여 공소로 사용하였으며, 목포 산정동 본당의 초대 주임 신부였던 드예신부(deshayes MAP 曺有道)가 1909년까지 동구리, 창류리, 인지리 공소를 방문하고 관할하며 세례 및 예비자 교리를 실시하였다.
 ------------------------               이하 생략            -----------------------------


★ 목포 산정동 교회(창설기)
------------------------ 전략
 목포 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된 드예신부는(1897-1909)1900년 미사를 봉헌하고 병자나 喪家를 방문한 것을 목적으로 60세 이상의 할머니들로 성모회를 조직하였으며 당시 본당 신자 수는 300여명에 이르렀다,
또한 드예신부 목포본당을 거점으로 무안 우적도성당, 제주성당, 나주 노안성당을 이 지역초대교회의 구심점이 되게 하였으며 도서지방 사목에도 많은 역점을 두어 소흑산도, 상조도, 하조도, 진도, 도초도, 자은도, 자은도, 압해도, 신광, 기자도, 안창도, 해남, 애란, 하의도, 인지리, 소포리, 사천리 등에 공소를 신설하였다.
이어 1909년 목포본당의 드예신부가 元山으로 전출되고 노안 양천리 본당의 뚜르내신부가 부임하였는데 곧이어 1910년 8월29일 치욕적인 한일 합방이 이루어 졌다,

 교회에도 일제의 압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부응이 널이 전파되어 신자수가 7만이 돌파하니 1911년 1월23일 교황 비오10세는 조선교구를 분리하여 대구교구를 신설하고 전라도는 대구교구에 소속 시켰다.

★ 口傳에 의하면 “ 불란서 신부가 제주에 선교 차 갔다오다 풍랑으로 상조도 율목 진작지에 내려 동구에 들렸고 수녀님이 말을 타고 피리를 불고 다였다” (조도공소 회장 최진군의 증언)
 옛날에는 제주에서 키우는 말(조랑말)을 큰 범선에 싫고 육지(목포)로 운반하였으니 조도는 제주와 목포의 중간 지점이니 신부 일행이 말 실은 배를 탓을 경우도 있음직 하나 수녀님이 피리를 불고 다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1900년도에는 아직 수녀가 본당에 비치되지 않았다.

★ 광주교구사 2 도서지방의 복음 전파(본당설립 p109)
 도서가 많은 지역 특성 때문에 전남 완도 와 신안 일대의 섬들은 중죄인들의 유배지로 이용되었으며 천주교 신자 중 많은 박해기간 때 이곳으로 유배되었다.
흑산도; 정약전, 유항검의 아들 曰碩, 김이백등 10여명.
임자도; 權相學,
신지도; 유항검의 아들 曰文, 김흥년, 이홍일.
그러나 이들은 죄인의 신분으로 섬에 유배되었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다.
그후 1900년 초기에 이르러 전남의 여러 도서지방에는 많은 공소가 새워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이시기에 목포지방을 담당하였든 드예 신부가 자신에게 맡겨진 내륙지방뿐만 아니라 도서지방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봄, 가을 정기적인 성사 집행을 위한 여행과 수시로 섬을 방문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런데 도서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어 가던 도중 교민들과 섬 주민들간에 분쟁이 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천주교인에게는 규정된 세금만을 요구 하고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3-4배의 세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관리들이 그리하여 섬에서는 집단 개종이 일어났으며 그 영향이 다른 섬들에게로 파급하였다.
 1900년 남해 여러 도서 지방에서는 45명이 영세를 받았으며 압해도에서는 400-500명의 많이 세례를 받고자 희망하였는데 이유는 이권획득(세금. 납부등) 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1904년에는 섬 지방의 3분의2가 교인이었다.

                  ..........................    중략    ..............................


 이처럼 도서지방에 복음이 급격히 전파되어 가던 도중 1905년과 1906년에 걸쳐 전라도의 도서 지방과 연안 각지에서 일진회 회원들과 교인들의 충돌로 인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발생장소는 전라남도 소속의 지도, 기재도(記在島), 진도, 완도, 조도, 소안도(小安島와 해안지방인 영암군 이진(梨津)이었다.

                   ..........................    중략    ..............................

○ 조도에서는 1905년 5월초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인 姜行吉과 姜良寄가 靑藤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金聖根의 배에 탔는데 이 배에는 뱃사공 朴中彦등 세 명과 曺台淳 등 행인 네 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이 중에는 金興萬과 崔德林이라는 두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배가 小羅島(지금의 작은 나부섬?) 앞을 지날 때 폭풍이 일어 돛폭을 잡으려던 박중언이 뱃폭에 부딪쳐 바다에 떨어져 죽고 만 “박중언 익사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조도의 土豪였던 朴昌鉉은 관의 권세를 빙자하여 횡포가 심했다.
그는 1904년 겨울부터 1905년 봄에 이르기까지 조도에서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람의 수가 100여 명 이상이나 되고 지산면 공소가 폐지된 이후에도 입교자가 계속 증가하여 300여이나 증가하였고 증가하였고 이들이 관리의 남징(濫徵)에 크게 반대하고 나서자, 천주교를 피해 입히기 위하여 신문에 기사를 게재하고 면장에게 천주교의 폐(弊)를 조사케 하여 각 관청에 신고하게 하는 등 각종 비방을 일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김흥만과 최덕림 두 아이에게 교인이 박중언을 죽인 것으로 거짓 자백하게 하여 강행길과 강양기 두 교인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목포의 드예 신부에게 보고하니 신부가 추자도에 판공 가는 도중 진도군에서 군수 만나기를 청하여 진도군청에 가니 공소교인 200여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의 복사가 군수에게 함께 조사할 것을 제의하고 심문하니
김층만, 최덕림 두 아이가 거짓 자백했음이 밝혀졌다. 이에 박창현을 잡아 목포로 압송하고 징계하려 하였으나 박창현이 그 섬의 권세 있는 자였던 까닭에 그에게서 소요비 등 3,000냥만 받기로 하고 조도로 돌려보내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또 조도는 絶島 임에도 교우가 거주하는 까닭에 亂黨 30여명이 교우를 만나는 되로 심지어는 부녀자까지도 곤욕을 치르게 하였다.


 이것이 광주교구사에 실인 내용이나 내가 지금 생각키로는 1900년도 조도는 교우수가 100명- 300명에 이르렷다 하나 어느 다른 기록에도 없고 口傳에도 없는 것으로 보와 다른 고장(지산면등) 의 교우들이 충돌을 피해서 혹은 섬 교우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관폐를 막기 위하여 들어온 일시적인 수가 아닌가 추측한다.

 

그러면 이 사건에 連類 된 박창현씨의 교육 공로 비를 ?여 본다.

鳥島야 靑山은 말들이 없고

多島海 푸른 물결 남실거리며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하는데

여기 고이 잠드신 거룩한 임 계시다.
西紀1861年 柳吐里에서 태어나신 先生은 本貫이 密陽朴氏며 이름은 泰澍(태주)요 兒名은 昌鉉이라 불렀다.
韓日乙巳條約이 締結된 直後 全國을 휩쓸던 聖敎徒들의 暴擧는 드디어 죄 없는 百姓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욱하고 북 밭이는 義憤을 억누를 새 없이 單獨으로 救民奮鬪하시던 先生은 마침내 오라를 받고 木浦로 光州로 押送되었으나 天佑神助로 無事歸鄕하셨다.
先生은 문득 깨달은 바 있어 私財를 던져 鄕學을 베푸니 1908年 隆熙2年 이름하여 鶯遷學校라 곧 鳥島國民學校의 前身인 것이다.


이곳에서 育英20年 수많은 俊秀를 輩出하는 동안 於焉 先生의 人生은 저무셨다.
더욱이 漢文에 依存하던 當時의 敎科書도 國文으로 編纂指導하신 先生은 겨레의 先覺者요 新敎育의 先驅者요 鄕土開拓의 化身이시다. 그 거룩하신 先生의 功德을 잊을 길 없어 이에 鄕土諸位의 뒷받침아래 同窓生一同의 寸志를 모아 한 덩이 빗돌로 記念하는 바이다.

西紀1967年 10月 2日

 

鳥島國民學校 同窓一同 謹堅

極靑 金明允 撰    長田 河南鎬 題    

 

 이상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조도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900년 전 이고

● 동구리는 박원기씨내외가 1897년 이전에 몽탄(최진군증언)에서 동구리에 와서 朴京祚(본명 미상 1866.-1962 초대 공소회장)씨 옆집에 살면서 조도면 여미리(동구부락) 668번지(99평 현재 허안당 거주)에 공소를 세우고 기도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목포산정동 드예신부는 판공 성사차 제주에 갔다 오다 풍랑으로 동구에 상륙하고 신자를 발견하고 세례도 주고 하여 신자수가 동구부락 거의가 믿게 되었고,   
 1959년 진도 본당 신부 주 에래미아(1959.6. 24.-1959.10.24 재임) 공소가 협소하여 0000번지로 이전 하게되었다.

 

 공사비는 대지 구입비는 558번지 공소를 11만원에 허안당에게 팔아서 충당하고 신축비는 주신부님께서 주선하여 추었다.(동구 허안당 증언)
이어서 허용준(가늘도 1897-1976 대장간 하조도 오경완과는 內外從임)씨가 2대 공소회장 그리고 그 아들 허요한이 대를 이었다.

☆ 참고 목포 산정동 드예신부가 판공성사차 제주에 갔다오다 의 경우 그 년도는 1899년 이전이고 드예신부 산정동 재임기간 1898 - 1909 이니, 1898년 일 것이다.
제주본당(현 중앙 주교좌 본당)이 설정되든 1899년 초대주님 폐네 신부 와 보좌신부 김원영 신부가 매입한 한옥이 첫 성당이었다. (평화신문 2002. 11. 24. 12면 참조)
진도 본당 약사에서 1870년은 목포에 신부가 부임하기 전임.

● 하조도의 경우 1900년을 전후하여 조도면 창유리 657-1 182㎡에 장봉연(다두 1877-1936)이 초가3간을 지어 공소로 사용하니 하조도에서 처음 시작하는 선교당(신고당) 이다.
그 뒤 목포 산정동 본당 드예신부가 관할하였고 (동구보다 1-2년 늦은 것 같음) 이때에는 신부님이 목포에서 1년에 2. 3차오셔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신자수가 몇 분이 아니어서 상도와 같이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다.
1931년 4월 29일 장봉현씨는 이 집을 목포 산정동 본당 (6대 주재용 朱在用 바오로 1922. 9.24-1932재직)에 등기이전 해주고 장성으로 나가니 그 동생 장봉선 (張奉善 말구 1882.11.25-1951.626) 씨가 대를 이어 선교 활동 및 집을 관리하였다.
신자로는 오경완(吳京完 도마 1881.8.2-1951.6.56생 직업; 대장간)) 현 최진군 회장의 외조부님이 공소 회장을 맞고. (장봉선씨는 한글이 서틀었음) 박승률 (분도 허민자의 외조부 자식은 딸 하나 歌舞에 能함)등 여러분이 계셨다.
㈜ 초창기의 천주교 전래를 살펴보면
상조도; 김원기(내외) - 박경조 - 허용준 -허요왕로 이어지며,

일제시대에도 동구 1개 부락 주민 거이가 천주교 신자 였다.

○ 1939. 5. 17 상조도 공소 이전등기(668번지 99평) 광주구 천주교화 유지재단
○ 1959 상조도 공소 439 - 2(426㎡)로이전,(1967. 2. 22. 광주교구로 이전)
하조도; 장봉현 - 일직 출입이 많은 분으로 외지에서 천주교를 배워 왔을 가능성이 많음 .
오경완 - 상조도 허용준부터 전교됨
박승률(분도)등 10여명 되었다.

○ 1910년 한일 합방 후로는 교세가 극히 세약하었으며 주일마다 있는 공소모임도 재대로 갖이 못 하가고 숨어서 활동하였다. 그어나 상조도 경우에는 조금 좋았으리라 생각된다.

○ 1954. 11. 7. 진도본당 승격으로 목포 산정 본당에서 진도본당으로 관할권이 이전되고, 진도 초대신부인 장옥선 (루치오 1954. 11. 7.-1959. 6 25.재직) 신부님이 취임하고 미국 원조물자인 구호양곡에 힘입어 신자수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 1955. 초대 회장으로 최용겸 (미카엘)씨가 취임하니 공소예절이 활성화되고 자주 본당신부님도 오셔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 1957. 공소가 협소하여 본당 장옥선(루치오) 신부님의 도움으로 낡은 공소를 팔고 현 위치 인
창유리 568번지의 古家를 사서 이전하고 광주 대교구 현 하롤드(미국인)님이 오셔서 신자들을 독려하니 교세가 최고에 이르렷다.

○ 1978. 최형락 (바오로1978-1981) 신부님이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공소에 많은 관심을 갖고 관리하였다..

○ 1980년 2대 공소회장으로 최진군(요셉)씨가 취임하고 공소가 노후하여 석가레가 썩고 비가 세어 공소로는 쓸 수 없게 되자 본당신부(최형락 바오로) 와 협의하여 광주대교구 주교의 허락을 받아 공소를 신축키로 하였다.
공사비는 장상진(말가리다) 친정어머니 문 마리아 손자 장영종(부산 부두에서 노동 일을 하다 사고로 비명에 감)의 영혼을 위하여 본당신부에 봉헌한 50만원을 기금으로 하여 바자회를 열어 그 수입금과 최진군 (요셉)회장의 집을 팔아 목재를 사들이고,

○ 1981년 2월. 19일. 공소 신축공사를 착공하였다.
바자회는 한철엽(래디나 헌 최회장의 부인)이 주축이 되고 장상진(말가리다) 박진주(사무엘)
장병월(말지나) 김춘단(말다) 김정섭(시라) 읍구 이 소피아등이 2-3인 1조가 되어 광주 서울 등지 본당을 찾아 2년간 활동한 결과 수입금이 250만원에 이르고 이를 돕기 위한 서울 광주교우들의 성금이 360만원에 달했다.
본당 최형락 신부님이 편지하여 서독 교우들로부터 790만원의 기금을 마련하고,
1981년 8월 15일 성모승천 기념일에 윤공희(빅토리노) 광주대교구 대 주교 님이 오셔서 경진성사를 배푸러 주시고 300만원의 신축 비를 지원해주셨다.
우리공소 교우들은 영세하여 공소신축의 잡일을 맡고 신축 비로는 74만원밖에 보태지 못했다.
1982년 8월 공소가 준공되니 진도본당 조정현(비오) 신부님이 보태주신 100만을 합하여 총공사비가 2000만원에 이르렀다.

○ 1982년 8월 22일 본당 조정현 신부님과 광주대주교 윤공희(빅토니오 2000년11월 30일 은퇴) 님을 모시고 거룩하게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 그리고 공소의 조성물은 종탑; 문마리아의 손자 장영종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수 성심상, 성모상 (외부) ; 이명규(아키나스)
예수성심상, 성모상(내부) ; 김옥엽(안젤라) 40만원 봉헌
십자고상 ; 유양순(안젤라) 15만원의 봉헌 금과 본당지원 20만원
십자가의길 14처 최진군 회장이 세움으로 써 작은 성당의 규모를 갗우게되었다.

 

 1984년 조도성당

 

 

○ 1986년 자력으로(신자들의 성원으로) 장의자 20조를 구입하여 100명의 자석을 확보하고.

○ 1987년 박희동(요한) 본당신부님이 취임하고 공소 사제관으로 창유리 561번지 대지 35평 건평10평을 사들어 수리하여 교우들과 상담의 장소로 하였다.

○ 2000년 3월 봉고차 (15인승 5년간 적금 식으로 모금한 800만원과 특별성금으로(1200만원 부족금 월활부금) 구입하여 공소교우들의 교통수단과 교세확장에 힘쓰고 있다.
※ 특히 상조도 동구 교우들이 100여 년간 이어오던 공소가 지도자가 없어 일부는 개종하고 전 공소회장의 자손 박신옥(가별), 허안당(안당) 두 분을 비롯하여 15여명이 나오니 봉고차가 더욱 긴요하게 쓰이고 있다.

○ 2001년 2월14일 이준한(토마스) 신부님이 진도본당 주님대리로 부임하여 매주 일요일(오후8시)미사를 봉헌하고 금요일에는 반모임 인 소 공동체를 지도하고 있어서 전 과는 달라지고 있다.
끝으로 우리공소는 본당으로 승격하여 상하조도13개리(하조도8개리, 상조도5개리) 교우들이 신앙의 혜택을 받아야 하겠고 공소가 폐지된 동구리에는 기념비(진도 최초로 천주교가 전래된 곳) 와 성모상을 세워 조도에 오신 천주교인들이 탐방할수 있는 유적지로 영구히 보존했으면 한다.

○ 현재 교우 수는(2001년 3월) 41세대 60명 예비자 15명 포함하여 75명이며,

공소 활동 부서는
공소회장 최진군(요셉)
운영회 회장 여병윤(베드로)
총무 이관규(노별도) 공소운영과 사목활동을 맡고
레디오 마리에 단장 박진주(사무엘)
서기 박길림(가밀로) 매주 화요일 모임을 갖고
성모회 회장 김춘단(말다)
총무 장홍자(안나) 매월 첫째 일요일 모임을 갖고
소공동체 모임 사랑반 반장 박진주(사무엘)
믿음반 반장 박길림(가밀로) 매월 1회 모임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 2002년 1월22일 진길 성당으로 승격
지금까지 공소특구였던 9개공소(나리, 신동, 오산, 가계, 응덕, 의신, 정자, 창유 월가.)를 성 유진길 본당으로 신설한다.,
사무실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568번지
주보성인 성 유진길(아우구스피노)
주임신부 이 준 한(토 마)
관활지역 나리, 신동, 정자, 월가, 응덕, 의신, 가계, 오산, 조도, 동구.
(9개 공소가 1개의 성당이 됨)

선교사
○ 200? 년 월 일 진길성당 임원구성
본당 사목회장 허 정(마지아)
총 무 조경석
조도 구역장 박 길 림
총 무 장 군 찬
소공동체 구역장 박 진 주(사무엘)
창리 1반장 장 호 암(요한) 총무 강 아네스
창리 2반장 장 상 진 총무 이관규
유토리 반장 장 청 길(요한)
어류포리 반장 정 성 주
동구리 반장 설 대 오(바오로)
○ 2003년 3월 12일 서 정 웅(베드로) 신부 병 수양차 성당에서 거주 주일미사(10;00) 집전
○ 2003년 5월 집붕 강철 칼라 로 개조 ( 서신부 4백만원 시공비 부담)
외부미장
도서 400여권 서 신부 기증 .
2002년 1월 28일 총무 이관규 회임 장군찬에게 인계.
○ 2003년 8월 서 신부 귀가
○ 2003년 월 일 전회장 최진군 집을 사서 移居
○ 2003년 월 일 신학생 주성호(레오 목포 연동성당) 이준(대건 안드레아 여수선원동 성당
2명 성당에서 상주하면서 공동체 예절 집전
○2003년 12월25일 신학생(복교차) 철수 .

 

장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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