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첨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 5편, 6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7)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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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Matichon) 2013년 12월 26일 태국 육군의 한 행사장에서, 쁘라윗 웡수완(우측) 전 국방부장관이 공양물을 전달하려 하자, 쁘라윳 짠오차(좌측) 현 육군사령관이 거들고 있다. 2008년 정치위기에서 막후 중재자로 나섰던 쁘라윗 웡수완 장군은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 정권이 출범한 후 국방장관을 맡았다. 그는 소위 '동쪽의 호랑이'(부라파 파약)로 불리는 군부 내 '육군 제21연대'(=왕후근위대) 출신 계파의 맡형이자 후배들의 멘토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쁘라윗 웡수완, 아누퐁 파오찐다, 쁘라윳 짠오차 장군은 모두 제21연대장--제2사단장--제1군구사령관--육군본부 참모장--육군사령관으로 이어지는 황금 보직을 서로 밀거니 끌거니 하면서 거쳤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쁘라윗 장군도 군부의 최종적인 막후 실세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역시 쁘렘 띠나술라논 추밀원 의장을 비롯한 왕실 주변 군 출신 원로 정객들의 심부름꾼 정도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크세] |
[2008년 12월 2일, '헌법재판소'가 친탁신계 집권당인 '국민의 힘 당'(PPP)에 대한 정당해산 명령을 내린 후,] 군부는 동요하고 있던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의 동맹세력들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군부의 압력은 국회의원들이 당적을 옮기고 [보수 야당인 '민주당' 총재]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를 차기 총리로 선출하는 일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군부의 장성들은 당근과 채찍을 휘둘렀다. 군부는 자신들의 동맹세력에 충성심을 보이는 국회의원들에게는 거액의 금전적 유인책을 제공했다(태국 언론들에 따르면, 1인당 4천만 바트[한화 약 13억원]였음). 반면, 계속해서 탁신 진영에 남아 있겠다는 국회의원들에 대해선 쿠테타를 일으킬 것이라며 위협했다.
'민주당' 사무총장인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 1949년생 [역주] 2014년 현재의 반정부 시위 지도자)은 극도로 부패한 인물이다. 수텝은 국회의원들을 회유하는 밀실협상들에 발을 깊숙히 담그면서 개입했다. 이러한 공작은 특히 부리람(Buri Ram) 도 지역의 대부로 불리는 네윈 칫촙(Newin Chidchob: 1958년생)의 계파에 집중됐다. 네윈 역시 대단히 부패한 인물인데, 그는 이전까지 탁신의 튼튼한 동맹세력이었다.
폴 챔버스(Paul Chambers)는 [2010년에 발표한 논문] <군화의 그늘: 태국의 민군관계 평가>(In the Shadow of the Soldier’s Boot: Assessing Civil-Military Relations in Thailand)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태국 군부는 현재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 (Prem Tinsulanonda: 1920년생)에 친향적인 세력이 주도하고 있으며, 이 계파가 바로 '왕후 근위대'(Queen’s Guard: 육군 제21연대) 출신 파벌이다. 군부는 친탁신계 국회의원들이 의원직을 유지한 상태에서 반탁신 성향 정부를 출범시키는 협상과정에 조력하도록 하는 방식이 자신들에게 최선의 이익이라고 보았다.
군부의 이러한 간접적 방식의 개입에서, 총대를 맨 사람은 친-쁘렘 계파 군인들 중 친화력과 넓은 인맥을 갖고 있던 군 장성 2명이었다. 한명은 당시 육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chinda: 1949년생) 대장이었고, 다른 한명은 퇴역 장성인 쁘라윗 웡수완(Prawit Wongsuwan: 1945년생) 대장이었다. 그리고 육군본부 참모장을 맡고 있던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대장이 이들의 활동에 동참했다. 쁘라윗이나 아누퐁과 마찬가지로, 쁘라윳 역시 '육군 제2사단' 예하 '왕후근위대'(제21연대)에서 근무한 인물이다. 실제로 '왕후근위대' 근무경력은 이제 태국 군부의 최고위직 인사들 사이에서 유대감을 형성하는 핵심적 원천이 되고 있다.
2008년 12월 초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고나자, 이들 실세 군인들과 여러 정당들 사이에 반탁신 성향의 연립정권을 구성하기 위한 대화가 시작됐다. 여기에는 군소 정당들은 물론이고 친탁신계 [예비정당인]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 태국을 위한 당) 소속 몇몇 인사들까지도 포함됐다. 3명의 군 장성들은 탁신의 심복이자 정치적 관록을 지닌 네윈 칫촙과도 접촉했다. 네윈은 흔들리고 있었고, 자신의 이전 주군에 대한 충성심도 낮은 것으로 판명되어 있었다. |
아누퐁은 네윈을 비롯해 자신들의 충성심을 판매할 의사를 지닌 여러 핵심 정치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아누퐁은 12월6일 방콕(Bangkok)의 '비파윗 랑싯 로드'(Vibhavadi Rangsit road)에 위치한 '보병 제1연대' 영내의 육군사령관 관사에서 네윈과 만났다. 이 자리에는 쁘라윳 참모장도 참석했고, 이러한 과정에 추밀원 의장 쁘렘의 영향력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었다. [보수 영자지] <더 네이션>(The Nation)은 협상과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이전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한 정당의 핵심 지도자에 따르면, 군부 고위인사 한명의 요청에 따라 대부분의 정당들이 '민주당' 진영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한다. 해당 군부 인사는 거역하기 어려운 사람의 메세지를 중간에서 전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통은 또한, [새로운 친탁신계 정당인] '프어타이 당'이 계속해서 집권할 경우 반정부 시위대가 다시금 거리로 쏟아져나올 것이란 점을 대부분 정당들이 인식하고 있는 상태라고도 전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프어타이 당'이 차기 정부를 구성할 경우 군부가 반드시 쿠테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12월5일 밤, '민주당'의 수텝 트억수반 사무총장과 니폰 프롬판(Niphon Promphan) 의원은 [해산된] 연립정권의 핵심 지도자들을 만났다. 여기에는 이번에 해산당한 '찻타이 당'(Chart Thai Party: 태국 민족당)의 사난 카쫀쁘라삿(Sanan Kachornprasart: 1935~2013)과 솜삭 쁘리싸나난타꾼(Somsak Prissanananthakul), '루엄짜이 찻파따나 당'(Ruam Jai Thai Chart Pattana Party: 통합 국가개발당)의 쁘라딧 파따라쁘라싯(Pradit Pattaraprasit)과 수왓 립따판롭(Suwat Liptapanlop: 1955년생), '프어팬딘 당'(Puea Pandin Party: 조국당)의 피닛 짜루솜밧(Pinij Jarusombat)과 쁘리차 라오하퐁차나(Preecha Laohapongchana), 네윈 칩촙, 그리고 현재는 기능정지 상태에 들어간 여당인 '국민의 힘 당'(PPP) 소속 소라앗 끌린쁘라툼(Sora-at Klinprathum)이 참석했다.
이 회의 초기 '민주당'은 3개 정당 및 네윈 계파에게 이전 정권(='국민의 힘 당' 정권)에서 할당됐던 것과 동일한 비율의 각료 자리를 배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날 밤 탁신 전 총리의 부인인 퍼짜만 다마퐁(Potjaman Damapong: 1956년생)이 갑작스레 비행기를 타고 방콕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결론 도출을 서둘러야만 했다.
'민주당'은 다음날(12.6) 오후 5시에 기자회견을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민주당'이 기자회견을 갖기 직전, 핵심 인사들이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사령관의 관사에서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민주당'의 핵심 지도자들인 수텝 트억수반과 니폰 프롬판, 그리고 '민주당'을 지지하기로 한 쁘라딧 파따라쁘라싯과 솜삭 쁘리싸나난타꾼, '프어팬딘 당'의 수찻 딴짜런(Suchat Tanchareon), 헌재의 판결에 따라 함께 해산당한 '마치마 티빠타이 당'(Matchima Thipathai Party: 중도 민주당)의 솜삭 텝수틴(Somsak Thepsuthin), 그리고 네윈 계파의 일부 의원들이 포함됐다.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정당은 [친탁신계] '프어타이 당'과 [군소정당인] '프라차랏 당'(Pracharaj Party) 뿐이었다.
해당 정치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회의는 비밀리에 진행됐다. 그에 따라 군인들이 '태국국영 석유공사'(TPP) 체인의 한 주유소에 가서 오토바이를 이용해 정치인들을 태우고 육군사령관 관사로 왔다. 그곳에는 전직 육군사령관인 쁘라윗 웡수완 장군과 육군본부 참모장 쁘라윳 짠오차 장군도 참석해 있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 회동에 참석한 정치인들이 아누퐁 육군사령관에게 '민주당' 주도 연립정권의 구성에 관해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아누퐁 사령관은 만일 차기 정부가 이전과 동일한 세력이라면 태국이 더욱 깊은 정치소요로 휘말려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모든 정당이 국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회의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민주당' 및 4개 군소정당 지도자들은 예정된 시각보다 2시간 늦은 시각에 '수코타이 호텔'(Sukhothai Hotel)의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자신들이 차기 정부의 구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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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hananuwat Srirasant) 태국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지역적 기반을 가진 군소 계파 지도자들과 상속형 정치인들(소위 '정치 명문가' 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네윈 칫촙은 '부리람의 대부'로 불리는 토호 정치인이자 상속형 정치인에 속한다. 그는 태국 프로축구의 명문팀인 '부리람 유나이티드'(Buriram United FC) 구단주이기도 하다. 2014년 2월 25일, 중국 '지난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안 챔피온스 리그' 경기를 앞두고, 네윈이 '부리람 유나이티드' 선수단에게 격려의 발언을 하고 있다.
2008년 2월 28일 탁신이 제1차 해외망명에서 귀국하자, 네윈은 '수완나품 국제공항'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2008년 12월 그는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아피싯 웻차치와의 '민주당'과 보수 연정에 참여해 탁신에게서 등을 돌렸다. 또한 2009년 4월에 레드셔츠 운동의 파타야 시위가 전개되자, 그는 자신의 주군이었던 탁신이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여' 태국사회 혼란의 원인을 제공한 주역이라며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2011년 7월 총선에서 네윈의 계파는 '품짜이 타이 당'이란 당명으로 참가하여, 500석 중 111석을 차지할 목표를 세웠지만, 불과 3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후 '품짜이 타이 당' 내에서 중도파로 분류되는 솜삭 텝수틴은 자신의 파벌 의원들만 이끌고 잉락 친나왓 총리의 '프어타이 당' 주도 연정에 참여할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압승을 거둔 '프어타이 당'은 다른 당이라면 몰라도 '품짜이 타이 당' 출신 인사들과는 절대로 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입장을 굳혀, 솜삭 계파는 결국 연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크세] |
네윕 칫촙은 태국 정치에서 오랜 기간 악명을 지닌 인물이다. 네윈은 1958년생으로서, 그의 아버지 차이(Chai)는 버마의 독재자 네 윈(Ne Win: 1910~2002)을 기리기 위해 아들에게 '네윈'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네윈 칫촙의 아버지 차이 칫촙은 마을 이장 출신으로, 상당히 이문이 많이 남는 채석장 사업체를 설립한 인물이다. 차이 칫촙이 먼저 부리람 지역의 대부가 됐고, 이후 네윈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았다.
네윈 칫촙은 탁신 친나왓의 절친한 친구가 됐는데, 그것은 탁신이 매우 귀히 여기는 재능들을 갖고 있어서 가능했다. 우선 그는 어둠의 정치공작 전문가였다. 여기에는 유권자 매수, 협박, 공갈, 뇌물, 대중 선동 등이 포함된다. 미국 대사관은 네윈을 "악명높은 부정공작 협잡꾼"(infamous dirty-trickster)이라 묘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원래 크메르계 혼혈인(=캄보디아계 태국인)이었기 때문에 흑마술(주술)에 능한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크리스 베이커(Chris Baker: 1948년생)와 파숙 퐁파이찟(Pasuk Phongpaichit: 1946년생) 부부는 2008년 '시암 소사이어티'(Siam Society: 시암학회)에 제출한 논문 <정령들, 별들, 그리고 태국 정치>(The spirits, the stars, and Thai politics)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네윈은 탁신을 끌어들일만한 재주 두 가지를 갖고 있었다. 첫째는 유권자 매수였다. 네윈은 유권자 매수를 시도했다가 절차상의 문제만 간신히 피해나갔다. 2005년 총선 당시, 네윈은 여당 조직을 통한 현금 살포를 이용해 대규모 유권자 매수 공작을 조직하도록 남부지방에 파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지역 '민주당' 당원들이 그 과정을 녹음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네윈이 가진 2번째 재주는 그가 크메르인이란 점이었다. 태국인들은 캄보디아를 대단한 영적 능력의 원천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크메르인들이 강력한 영적 기술들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네윈은 자신이 특별한 영적 기술을 갖고 있다고 단 한번도 주장한 바가 없지다. 하지만, 그가 크메르계 혈통이라는 이유로 그에게는 그런 이미지가 달라붙어 있다. |
2008년 말, 네윈은 자신의 정치적 주군이던 탁신을 배신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탁신에게 전화를 걸어 "보스, 이제 끝났습니다"(It’s over, Boss.)라고 말했다. 이 말은 까칠한 성격에 무능력한 아피싯 웻차치와가 이제 태국 총리가 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호주국립대학'(ANU) 교수인] 앤드류 워커(Andrew Walker)는 [자신이 운영하는 온라인 저널] <뉴 만달라>(New Mandala)에 2008년 12월 8일 게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2006년 9월 쿠테타를 통한 군부의 조력, 2차례의 정당해산, 새로운 헌법의 제정, 행동주의적 성향을 지닌 사법부, 왕실의 후원, 초과격 왕당파들이 조성한 정치위기와 6개월에 걸친 가두소요의 고조, 정부에 대한 군대의 불복종, 그리고 경제적으로 대재앙이 됐던 공항 점거 사태를 통해, 마침내 '민주당'은 태국의 차기 정부 구성에 타격 가능권까지 다가섰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걸어온 길은 결코 명예롭지 못한 길이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이제 국회에서 내려지게 될 것이다. 만일 '민주당'이 국회에서 충분한 수의 표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들은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갖게 된다. |
아니나 다를까, 2008년 12월 15일 국회는 아피싯을 태국 총리로 선출했다. 2008년의 '조용한 쿠테타'(silent coup)는 그렇게 완결됐다. 엘리트 계층과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의 후원 속에서 국회가 뒷받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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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14년 현재 보수야당인 '민주당' 총재를 맡고 있는 아피싯 웻차치와 전 총리와 그의 동갑나기 부인 삠펜 사꾼타파이(Pimpen Sakuntabhai) 교수. 저명한 내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피싯은 '이튼 스쿨'(Eton College)에서 중등교육을 받았고, '옥스포드 대학'(Oxford University)의 "철학, 정치학, 경제학 통합과정"(PPE)에서 제1등급 우등생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수재이다. 이후 동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2008년 정치위기가 '조용한 쿠테타'로 마무리되면서 국회 내 투표를 통해 총리직에 올랐지만, 2010년 레드셔츠 운동의 대규모 시위를 유혈진압하면서 '손에 피를 묻힌' 옥스포드 동문이 되고 말았다.
아피싯의 교육과 성장과정은 태국 엘리트 계층 자녀들이 전형적으로 거치는 과정을 대표하고 있다. 이들은 성장기의 많은 시간을 태국보다는 영국 같은 외국에서 보내며, 이중국적의 보유도 거의 필수사항이다. 이들은 태국의 농촌지역 사람들에는 무지하면서도, 런던이나 파리 사람들의 생활 패턴은 잘 이해하고 있다. [크세] |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 정부는 출범 시작부터 극복 불가능한 정통성 부재 현상에 직면했다. 게다가 신임 총리와 그 동맹세력의 위선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피싯은 군부가 막후에서 채찍질하여 자신을 총리로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새로운 총선만이 태국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결코 태국 유권자들의 민의가 반영됐다고 볼 수 없는 방식인 국회 내 투표를 거쳐 일단 총리로 선출되고 나자, 그는 총선 실시에 관한 자신의 열정을 갑작스레 포기했다. 그는 이후 민주적 권위를 부여받기 위한 총선을 실시하지 않은 상태로 30개월 동안 권력에 매달렸다.
아피싯은 또한 '옐로셔츠'(PAD) 시위대가 저지르는 범죄적 행동들과 태국 군부의 정치적 개입 성향에 대한 불쾌감도 표시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올려주는 공작을 펼치도록 내버려두었다. 아피싯은 자신의 통치권에 관해 현학적이고 법률적 정당성만을 되풀이해서 말할 뿐, 수백만명의 태국이들이 지닌 납득할만한 분노에 관해서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유권자들은 소위 '민주당'이란 당명을 지닌 정당이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표출해놓은 바램을 짓밟아버린 일에 분노하고 있었다.
마이클 몬테사노(Michael Montesano)는 자신의 논문 <파타야 정상회의 실패 상황의 파악: 4월의 4일간, 태국의 4가지 병폐>(Contextualizing the Pattaya Summit Debacle: Four April Days, Four Thai Pathologies)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피싯은 진정으로 권력유지에 매진했다. 자신의 [총리가 되는] 길에서 공항 점거농성자들과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그리고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사령관의 조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피싯은 자신이 총리가 된 방식이 완벽하게 적법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국회의 임기가 끝나면] 어쩔 수 없이 총선을 치를 수 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는 차기 총선에서 승리할 조건을 만들 필요를 느끼면서, 자신이 '정상적 정치'라고 보는 것을 추구하는 데만 웅크리고 들어앉기 시작했다.
그가 '정상 상태'(normalcy)의 비전을 들고 나온 것은 사실을 고의적이고 공개적으로 부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태국의 정치위기가 2005년 말과 2006년 초 이래로 깊어만 가고 있다는 점과, 그것이 태국을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탈시켜, 심지어는 "혁명적인" 시기로까지 몰아넣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
심지어 미국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조차 아피싯이 보여준 [거의 종교적 태도에 가까운] 독실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아피싯이 11월 말의 방콕 공항들 점거사태에서 정점에 달했던 무질서에 기대어 총리가 됐다는 점에 비춰보면, "실패한 정치"(failed politics)를 종식시키겠다는 그의 다짐은 역설적으로 보임. 그러한 무질서는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여당이었던 '국민의 힘 당'(PPP)의 정당해산 명령을 더욱 서두르게 만들어주었고, 평시에 비정치적 성향을 지녔던 거대 비지니스맨을 포함한 방콕의 많은 엘리트 계층들에게 탁신 친나왓과 관련이 없는 새로운 정부의 출범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강화시켜줬던 것임. |
(자료사진: The Nation) 까싯 삐롬야는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를 "조폭이라고 지칭하는 등 걸쭉한 입담을 가진 인물이다. 그가 외무부장관으로 재임하는 기간 내내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의 외교관계는 불화를 지속했다.
가령, 외무부장관의 임명은 새로운 정부의 위선을 잘 드러내보여준 사례이다. 외무부장관에 임명된 까싯 삐롬야(Kasit Piromya: 1944년생)는 장기간의 외교관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탁신 정권에서 배제를 당하자 옐로셔츠 운동(PAD)에 가담했고, 집회장 무대에서 여러 차례 절규에 가까운 연설들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수완나품 국제공항' 봉쇄에도 연루되어 있었고, 외교사절들 및 외신기자들 앞에서 공항 점거가 "너무 재밌다"(a lot of fun)고 바보 같은 말을 내뱉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한 까싯이 새로운 행정부의 심장부에 출현했다는 것은, 법치를 강화하겠다는 아피싯의 약속이 정직하지 못한 것임을 보여준 일이었다.
아피싯 정부가 가진 이중기준은 12월15일 국회의사당 바깥에서 항의시위를 했던 탁신 지지자들에게 경찰이 신속히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데서도 드러났다. 이에 관해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치안당국과 법원이 탁신 지지자들의 무질서 행위에 대해, 엘로셔츠(PAD) 지지자들의 무질서 행위보다 매우 덜 관용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존재함. (최근의 공항 점거사태와 관련하여 PAD 지도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떠한 영장도 발부된 적이 없음.) |
하지만 아피싯의 타협 중 가장 중요하고도 위험스런 일은 그의 '민주당'이 네윈 칫촙 및 네윈의 정당인 '품짜이 타이 당'(Bhumjai Thai Party: BJT, 태국의 자랑 당)과 동맹을 맺은 일이었다. 아피싯은 총리로 취임하면서 부정부패에 대한 "무관용"(zero tolerance) 정책을 천명했다. 하지만 그는 네윈 및 네윈의 패거리들에게 극도로 의존해야만 했다. 네윈의 파벌은 이미지 면에서 정직하고 깨끗할 것으로 가정되고 있던 총리와 금방이라도 깨져버릴듯한 연립정권을 뒷받침해주는 대신, 가능한한 뿌리 밑둥까지 착취하기로 마음먹었다.
12월20일 새로운 내각은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네윈의 '품짜이 타이 당'은 부정한 방법으로 현금에 빨대를 꽂을 수 있는 가장 돈되는 장관 자리 3개를 차지했다. 그것은 교통통신부, 상무부, 내무부 장관 자리였다. 게다가 내무부장관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이다. 내무부는 전국에 걸쳐 태국 사회의 깊숙한 곳까지 촉수를 뻗칠 수 있고, 지방 공무원들에 관한 광범위한 조종 능력을 지녔으며, 선전과 홍보도 할 수 있는 부처이다.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은 "나쁜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맹비난을 가했던 인물이지만, 1980년대에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국회에서 가장 그늘진 대부들 중 한명인 반한 실빠아차(Banharn Silpa-archa: 1932년생)와 거래를 주고받으며 권력을 유지한 바 있다. 12월27일, 아피싯이 취임인사 겸 신년하례차 그러한 쁘렘을 예방했을 때, 쁘렘은 이상하게도 새로 출범한 정부의 끔찍한 취약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더 네이션>(The Nation)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국왕의 최고 자문위원인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은 일요일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의 지도력에 낙관적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적 곤란 상황을 해소할 수 있게 된 것은 태국의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년하례에서, "지난 몇년간 국민들이 행복하지 못했다. 새로운 총리가 세워진 일은 태국의 행운이다. 나는 신임 총리가 소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아피싯 총리는 각료들을 이끌고 신년하례를 위해 쁘렘 의장을 찾았다. 쁘렘 장군은 발언에서, 비록 많은 정치적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겠지만, 아피싯 총리가 정치적 과정의 복원에 성공할 것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쁘렘 의장은 정부가 5가지 원칙을 갖고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인내, 관용, 희생, 솔선수범, 국민들의 신뢰 획득이다. 그는 아피싯 총리와 각료들이 힘든 과제들에 직면하여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을 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각료들이 국가, 국왕,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데 성공적이길 기원했다.
쁘렘 의장의 격려사가 끝나자, 아피싯 총리는 정신적인 지지에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
쁘렘 의장과 그의 옐로셔츠 동맹세력은 자신들이 이뤄낸 "조용한 쿠테타"의 결과가 그들을 따라다니는 망령으로 되돌아오리란 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많은 태국인들은 자신들이 뽑은 정통성을 지닌 정부가 제거당한 데 대해 극도로 분노해 있었다. 국왕의 위신은 더욱 실추됐다. 이제 탁신 역시 왕당파가 사용했던 군중동원 전술을 따라할 수도 있었고, 또 그렇게 할 것이었다. 제임스 스텐트(James Stent)는 2010년 발표한 <태국의 혼란에 관한 사색>(Thoughts on Thailand’s turmoil)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08년 옐로셔츠들이 정부청사의 총리 집무실을 여러 달 동안 점거하고, 이어서 '수완나품 국제공항'과 '던므앙 공항'을 며칠 동안 봉쇄하고 태국의 국가위상과 태국 경제에 위해를 가하면서, 공공 기관들을 불법 점거하는 시민불복종의 선례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상대편도 그런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은 고려하지 못했다. |
미 대사관은 2008년 말 시점의 태국 민주주의 상황을 평가하는 외교전문에서, PPP 정부의 통치 능력을 마비시켰던 옐로셔츠의 난동을 이제 '레드셔츠 운동'(UDD)이 배워서 아피싯 정부를 방해하는 데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미 대사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이 이끄는 새로운 연립정권이 친탁신 레드셔츠 운동으로부터 동일한 방식의 가두투쟁을 통한 괴롭힘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됨. 그러한 전술은 이전의 PPP 주도 연립정권이 PAD 시위대로부터 직면했던 상황과 동일한 것임. PAD가 시위를 고조시켰을 때보다 현재 긴장은 완화됐고 쿠테타에 관한 논의도 줄어들었지만, 태국 정치를 특징짓는 양극화가 종식될 전망은 보이지 않는 상태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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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ydney Morning Herald) 해리 니콜라이데스의 자필 수기(좌측)와 법정 내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는 모습. |
2009년 1월 19일, 왕실모독 처벌법(lèse majesté law: 형법 제112조) 위반으로 수감 중이던 호주인 해리 니콜라이데스(Harry Nicolaides)가 자신의 유죄를 인정했다. 왕실모독 혐의로 고발된 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국왕사면령을 받는 것 뿐이다. 니콜라이데스에게는 징역 6년형이 선고됐지만, 유죄를 자백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관행에 따라 징역 3년형으로 감형됐다. 니콜라이데스가 법정 내 유치장 쇠창살 뒤에서 발목에 족쇄가 채원진 채 수척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진은 신문과 TV 보도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것은 태국의 국제적 이미지에 또 다른 재앙이었다.
<시드니 모닝 해럴드>(Sydney Morning Herald)는 2월7일자 보도를 통해, 니콜라이데스가 자필로 작성한 교도소 내 처우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헤드라인으로 보도된 이 수기에는 <태국 군주를 모욕한 작가가 지불한 중세적 댓가>(The medieval price an author pays for insulting Thailand’s monarchy)란 제목이 달렸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나의 책 <신빙성 : 그 진실이 바로 그 진실인가?>(Verisimilitude: Is the truth, the truth?)는 허구의 형식으로 된 상당히 어설픈 초기적 시도였다. 겨우 50부만 출판했고, 팔린 것은 7부 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태국을 사랑하며, 왕실도 존중한다. 누군가를 침해하려던 의도는 결코 없었다.
나는 아플 여유도 가질 수 없다. 정신적 긴장이 너무 강해서이다. 내 가족들은 매일 내게 닭고기와 샐러드를 사식으로 넣어주고 있다.
국왕의 81회 생일 때, 나는 먼 거리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다. 일부 재소자들은 눈물을 흘렸고, 단순한 국왕 이상으로서 자신들이 아버지로 여기는 한 남성을 칭송했다. 나는 태국인은 아닐 수 있지만, 한명의 아들이다. 따라서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나는 국왕사면령을 신청했다. 나는 국왕이 나의 고통을 이해하여 내가 그의 은총을 맛볼 수 있게 해주길 기원한다.
내가 닭고기를 먹고나면, 태국인 수감자들이 내가 먹다 남긴 찌꺼기를 넘겨달라고 간청하곤 한다. |
2009년 2월 21일, 니콜라이데스는 국왕사면을 받았고, 이후 호주로 강제 송환됐다. 맬버른(Melbourne)에 도착한 그는 기자들에게 "8시간 동안 울었다"고 말했다. 그는 방콕에서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에야 모친이 자신의 수감기간 중에 쓰려졌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들었다.
왕실모독죄를 엄격히 단속하는 것은 아피싯 정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였다. 그것은 아피싯 정권이 자신들의 실존을 왕당파 기성체제의 계략에 빚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008년말, 아피싯은 자신의 최초 정책연설을 통해, 신정부가 "군주의 수호"에 최고의 역점을 둘 것이라 선언했다. '민주당' 및 옐로셔츠 진영 동맹세력의 뒤틀린 세계관에서, 군주를 수호하는 일이란 시리낏 왕후를 지지하고 푸미폰 국왕을 무시하면서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를 반대하는 음모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포함했다.
라넝락 수완차위(Ranongruk Suwanchawee: 1956년생) 정보통신부 장관은 자신의 남편이자 계파 지도자인 파이롯 수완차위(Pairoj Suwanchawee: 1949~2011)가 정치활동 금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남편 대신 꼭두각시로 장관직에 임명된 별 볼일 없는 인사였다. 그녀는 정보통신 분야에서 [왕실모독 관련] 단속을 강화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할 것이란 점을 신속하고도 매우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라넝락은 군주제를 모독할 가능성이 있는 인터넷 웹사이트들을 감시하는 공무원들로 구성된 소위 "전쟁 상황실"(war room)이란 것을 설치했다. 그리고 2,300개의 페이지가 차단됐다고 발표했다. 한달이 지날 때마다 새롭게 차단하는 웹사이트의 수는 사상 최고치를 계속해서 경신했고, 아피싯 정권은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폐쇄된 웹사이트의 페이지 수는 금새 수만 건에 달했다.
2010년, 심지어 방콕 근교에 전화기를 들고 있는 아피싯의 사진이 담긴 광고판이 등장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부적절한 웹사이드를 발견하신다면", "1212번을 누르세요"라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었다. 물론 이 광고판 속의 아피싯의 모습만 놓고보면, 무심코 조우한 인터넷 위반사항을 핫라인 전화를 통해 신고하는 일이 시민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것인지, 아니면 부적절한 온라인 컨텐츠를 발견한 시민이 신고를 위해 다이얼을 돌릴 경우, 운이 좋으면 위반 URL을 열심히 받아적으며 조치를 취할 준비를 하는 총리와 직접 통화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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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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