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의 무좀의 발병 내력과 치료기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나는 대학 2학년 때까지는 발에 무좀이 없었다. 1970년 대학 3학년 때 학도군사훈련단(학훈단)에 입단하여 1971년 4학년까지 2년간은 대학에서 방과 후에는 군사과정 이론과 실기 교육과 훈련을 받고 2년간 여름방학에는 창원의 향토사단(39사단)에서 한 달간씩 입영교육(병영훈련 ; 진주농대, 부산대, 동아대,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을 이수하여 1972년 ROTC 10기 소위로 임관하였다.
註《1》 ; 1961~1971까지는 학도군사훈련단(학훈단)으로 명칭하다가 1972년부터는 학생군사교육단(학군단)으로 개칭되었다. 현재는 지역권 별로 향토사단에서 입영교육을 받지 않고, 육군학생군사학교에 동시 입영한다고 한다. 여름방학 2번에 걸쳐서도 향토사단 훈련 중에도 전투복 군복과 군화는 헌 것을 지급받아 훈련했다. 지금과는 격세지감이다.
1970년 126학도군사훈련단(학훈단 ; 당시 진주농과대학, 현 경상대학교) 사관후보생과정(학훈사관후보생)에 선발되어 첫 군사훈련 받으려면 훈련복(전투복)과 군화를 지급받는다.
당시 수도권 서울의 다른 대학은 어떻게 지급했는지는 다시 동기생에 확인해 보아야 하겠지만, 지방대학에서는 무더기로 던져주는 군화와 전투복(군복) 헌 것을 자기 몸 치수에 맞쳐 찾아서 세탁하여 입거나 착용하여 군복 상의에는 다시 명찰을 붙여서 사용했다. 얼마 후에는 새 군복 지급에 의한 착용으로 학훈단 교육을 받았다.
군화는 헌군화이지만 깨끗이 새척하여 구두약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새것처럼 다듬어 3학년 때는 1년간 사용했다. 지금 생각하면 군 지급 새군화를 학훈단 장교단 상부에서 뒤로 빼돌린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라가 월남파병으로 어려운 시대라 3학년 학훈사관후보생에게 새 군화 지급이 안 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대는 월남파병 시기와 겹치기에 군에서 사용후 현역 사병이 사용한 헌군화를 학훈단에 지급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 세대의 ROTC는 이렇게 학훈단 군사교육을 이수했다.
참고적으로 당시 '국군파월'이 있었다. 한국이 박정희시대에 베트남전에 국군을 파병한 것를 말한다. 베트남전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4년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8년간에 걸쳐 자유 베트남을 돕기 위하여 국군을 파견하였다.
2년간 기존 장병이 신었던 헌군화를 착용하는 바람에 무좀이 발병하여 1972년 소위 임관 후부터인 광주보병학교 입교 때부터 새군복이 지급되면서 새군화가 비로소 지급되었다.
2년 4개월 간의 의무복무를 마치고 1974.6.30 중위로 전역하여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대학 학훈단 시절 헌군화 착용으로 인한 무좀 발병 원인으로 무좀 연고 10여 종을 수시로 사서 바르기도 했지만, 무좀이 더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는 있어도 근원적인 발본 색원 퇴치는 되지 않았다.
당시는 연고만 약국에서 사서 발랐지, 약은 복용하지 않는 치료법이었다. 무좀 연고를 바르면서 집사람에게 학훈단 3학년 때의 내려받은 헌군화 무좀 때문이란 말을 자주 뱉었기에 49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이 생생하다.
10여 년 전에 피부과에서 주 1회씩 먹는 약과 무좀 연고 처방을 받아 6개월간 치료하여 무좀과 오른발 엄지발톱 무좀(발톱이 뚜꺼워진)까지 퇴치한 경험이 있었다.
등산화 착용으로 등산을 자주하다 보니 이번에는 두 발 중 오른발 바닥이 왼발보다 심하게 옛날처럼 무좀이 다시 재발, 더 번져서 허어연 떡살이 가득하여 안 되겠다 싶어, 다시 피부과에 들려서 약 처방을 받아 주 1회씩 식후에 3캡슐 약 복용과 연고 6개(소분되었기에 변질 방지 냉장고에 보관 요청)를 약국에서 받아 현재 치료를 진행 중이다.
10년 전보다 새로운 약이 나왔는지, 임상효과 상 약효가 좋아진 것 같다. 2019.1.21(월) 저녁부터 캡슐 복용과 연고 바르기가 시작되었다. KBS 가요무대를 보면서 연고를 발랐기에 날짜도 기억하기 좋았다.
처방 약명은?
티나졸 3캡슐 주 1회씩 4주(4회분)
라파엘크림 소분 땅갑치(경남 방언, 표준어 ; 조가비:프라스틱용기) 6개
항진균작용을 나타냄으로써 진균에 의한 각종 감염증과 피부 감염증을 치료하는 약이라 한다.
연고는 일과 후 집에 들어와 발을 세척한 후 수건으로 닦아 건조시킨 후, 의자에 걸터앉아 발을 들고서 연고를 충분히 바른다. 의자에 앉아 안 쓰는 적당한 크기의 프라스틱 식품 용기 뚜껑을 없애고 발을 걸쳐서 올리면 다리도 편하고 연고가 묻지를 않아 편리하다.
TV를 보며 연고가 스며들 때까지 기다렀다가 취침시에는 이불에 묻을 수 있기에 얇은 여름 양말을 신고서(착용) 취침한다. 다음날 아침에는 그 양말을 벗어 보관하여 다시 저녁에 재사용하기도 한다.
2019.2.11(월)은 4주째로 접어든다. 무좀치료의 경과가 너무 좋아 치료경험담을 게재하게 돠었다. 약이 좋은지 현재의 치료 추세라면 6개월이 아니고 2개월 정도로 단축될 것 같다. 다시 무좀치로 임상내용 경과를 추가로 기록할 예정이다. 발바닥 무좀으로 고생하는 분들에 대한 체험 지침서 기록이 되기를 기대한다.
발바닥 무좀은 남성들에겐 최초 원인 제공이 국방의무 훈련 중의 장시간 군화 착용으로 오기 때문에 남자들은 변명꺼리가 되지만, 여성들의 발 무좀은 프라이버시로 부끄럽게 여기며 외부 노출을 꺼리며 대부분 숨기려 한다.
오늘날은 여성들도 산악회 활동을 많이 하기에 등산화 착용으로 발 무좀 발생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발 무좀을 숨기는 여성 산악회원에 나의 치료 체험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신성한 국방의 의무로 군화를 착용하고, 그 병역의무의 훈장(勳章)과 같은 잔흔(殘痕)의 자랑스러운 발바닥 무좀 치료 체험기를 올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내노라하는 민선 선량 정치인이나 고위층 관료 중에는 병역의무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아 무좀 치료기를 쓰면서 이 사람들은 이런 '신성한 국방의무 군화 무좀' 이력(훈장)이 있음을 알기는 할까? 하며 되새겨 본다.
무좀 치료의 임상 결론?(2019.3.21자, 추록한다)
2019.1.21부터 치료를 개시하여 2달째인 3.21에는 발무좀이 거의 100% 완치되었다.
오른발의 엄지발가락의 뚜꺼운 발톱까지 치료하기 위하여 3.18에는 2개월분을 추가로 처방 받아 1주일에 한번씩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다. 발톱도 현저히 개선되고 있다.
註《2》 3학년 때인 1970년 8월 향토사단(39사단) 병영훈련(6개 대학 ; 진주농대, 부산대, 동아대,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중,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중장) 4년(1965.8~1969.5)을 마치고 전쟁 영웅으로 귀국,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3년 5개월 재직 ; 1969.5~1972.10)으로 재임시, 학훈단 병영훈련장을 찾아 대병력을 집합,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파병, 월남전 참전 초대 사령관의 생생한 전쟁기(개선장군 복명기)' 등으로 기억되는 특강을 했는데, 당시 너무 감동을 받았기에 22살 때의 병영훈련으로 49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특강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채명신 장군의 특강은 내가 평생에 받은 강의 중에 가장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나는 당시 후보생 중 우리 중대는 앞쪽에 배열되었기에 전쟁 영웅 채명신 장군에 대하여 도열 배석한 사단장(소장)과 연대장 및 참모단과 부대 장교단의 존경과 경의에 따른 엄정과 긴장 절도와는 달리 강의 내용은 삼국지 재갈량의 남만정벌(맹획)을 예로 들며 전쟁 체험담을 유명 교수 학자의 명강처럼 여유충만, 자신만만으로 부드럽게 진행된 것으로 지금도 기억된다. 날씨가 너무 무더웠기에 특강 후에는 5~10인당 수박 1통씩이 배분되기도 했다.
註《3》; 채명신 장군 프로필 더보기에 의하면 1972.10 육군 제2군사령관 중장을 끝으로 대장 진급도 안 시키고(승진 탈락), 1982까지 만 10년간 해외 외교관으로 주스웨덴, 주그리스, 주브라질 대사로 옮겨졌다. 당시 대학생을 비롯한 국민들의 대단한 인기 부상으로 볼 때, 박정희시대 정치권력 역학의 견제와 안배 용병술에 의한 해외 파견 안치(귀양살이) 격이라 할 수 있다.
註《4》베트남전쟁 국군파병(1964.9~1973.3)의 초대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의 별세(1926.11.27~2013.11.25, 88세) 관련 신문보도 내용 사진 3장을 이미지로 하단에 추가 게재한다.
<1> 2016.11.28자 조선일보 ;
''장군, 그리운 병사들 곁에 눞다''
고 채명신 예비역 중장 ''병사 묘역에 묻어달라'' 유언
''전사자(戰死者)묘역서 눈물, 초대 주 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1966년 7월 일시 귀국해 서울 동작동 서울현충원의 월남전 전사자 묘역을 찾아 눈물을 닦는 모습이다''
<2> 2016.11.28자 중앙일보 ;
''나 채명신은 전우를 사랑해 이곳에 묻힌다''
장군 유언 따라 병사묘역에
<3> 21016.11.29자 동아일보 ;
''참군인 채명신, 그리운 병사들 곁에 영원히 잠들다''
제2병사묘역 앞줄에 단(壇)도 없이 누워
2019.1.21(월)~2.1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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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72.3.1~1974.6.30 기간의 육군 소위, 중위 월급은 13,000~15,970원으로 약 16,000원, 2명의 동기생이 기억하여 확인해 주었다. 당시는 박정희 10월유신시대(1972.10.17~)로 베트남전쟁(1955.11.1~1975.4.30) 참전시기(1964년 9월 ; 제1차 베트남 파병~계속)와 겹친다.
나는 ROTC 10기생이다. 현재의 소위 봉급 수령액 191만원과 대비시 1:119.6 비율이 된다. 당시는 월남전 참전으로 남북긴장상태 대치로 군대 기강과 훈련도 거셌다.
소위 월급 얼마나 주는지 검색해보니 요즈음은 많이도 주네?(2019년 1월 기준)
기본급 - 165.4만원
직급보조비 - 12.5만원
정액급식비 - 13만원
다음 이어짐~
으로 월 191만원은 고정(기타 수당 제외)으로 나온다.
191만원×1년 6개월=3,438만원이 된다.
2019.2.11 자,
사)경남향토사연구회 카톡 그룹채팅 거제시지회장 이승철(82)님의 댓글입니다.
《''참 좋은 자료입니다. 밤에 소변 자주 보는 야뇨증에 좋은 비방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