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구청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동별 유래 ~
ㅇ 학장동의 유래
학장초교와 홍깨마을 주변 모습 1955
학장동은 마을 앞의 학장천 물이 흘러내리던 옛날 모래펄 지역인 서북쪽 저지대와 동남쪽으로 구덕고개를
끼고 산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마을이다.
1967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유적을 답사할 때 도로변에서 기원을 전 후한 김해문화기에 해당되는 토기
조각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패총유적이 발견된 것을 보면 옛날 바닷물이 만입해 들어왔던 사상
지역에 어패류가 풍부했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임을 말해준다.
학장동의 지명은 옛 성터였던 <학성>과 옛 장터였던 <장문평>에서 유래한다. 동래부지에 목장성이 있었
다는 기록에 보면 <엄광산 기슭 강변으로 부터 부산범천 산장 15리까지>로 나와 있다. 목장성인 학성은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방어성으로 쌓았을 것인데 후세에 이를 수축하여
목장성으로 활용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보기도 한다.
<학성>이란 지명은 사상팔경의 <평사낙안>처럼 이곳 강변의 모래펄에 학처럼 귀한 새들이 찾아오는 풍경
을 보고 붙여 졌을 것으로 보이며 <장문평>이란 지명은 옛날<장시,장터>란 뜻으로 이 마을에서는<장문안>
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구덕고개로 사람의 내왕이 있었고 고갯배도 들어왔을 것이며 목축을 하던 동네
라서 농 ·수산물과 가축의 유통을 위한 조석시로서 장터가 열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장동의 명소로는 예로부터 이름난 구덕령 고갯길이 있다. 이곳 구덕 골짜기에는 옛날 숲이 많이 우거져
여우가 많이 나와서 야시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구덕 냇거랑>이다.
구덕천의 바위 틈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예로부터 물이 차기로 소문이 났으며 물이 뱅뱅 돌만큼 깊은
<가메우소>라는 웅덩이도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구덕 골짜기 산에는 명당터가
9곳있는데 이 중에 현재 4곳에는 묘가 들어섰고 5곳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학장동에 전해오는 지명중에는 <홍깨>가 있는데 학장에서 주례쪽으로 흐르는 개울을 말하며 둑길 너머
저지대에는 옛날 <대동도>라는 섬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ㅇ 주례동의 유래
주례본동과 냇바닥 그리고 학장천 1950년 12월
주례동은 예로부터 아래쪽 큰 동네인 주례본동과 고갯길 쪽의 작은동네인 냉정마을로 형성되어 왔다.
조선시대 기록으로 1740년에 편찬한 동래부지에는 사천면 상단 주례리로 나와있고 1872년 제작한
경상도지도에는 사상면 주례촌과 냉정촌이 나와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던 기록에는 주례의
하천인 동천과 남천, 그리고 사목포 나루터가 기재되어 있다.
주례의 본 동네 앞에 물길이 합쳐지는 곳을 <냇바닥>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강물이 들어와서
나루터가 있었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솔밭이라고 했으며, 주례마을의 중심지는 <골새>였고
<동녘>에도 인가가 있었다. 주례동에서 널리 알려진 곳은 고갯길 중턱에 있던 <냉정>의 약수였다.
'80년대 냉정샘
1714년에 편찬된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조선13도의 물 중에서 이름난 약수로서 냉정의 물을 꼽고있다.
주례동 지명의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사상지역에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주례는 옛날 한 마을의
농사를 동네사람들이 힘을 합쳐 농악을 울리면서 일을 해내었던 공동체로서의 <두레>를 한자로 표기하여
<주례>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주례가 지형적인 동평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는 곳으로서 <두루>라는 어원과 낙동강변의 변두리
로서 <두리>와 동평현에서 주례로 나와야 앞이 트인 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드르>를 들고 있는데 우리의
토속어인 <두레, 두루, 두리, 드르>등에서 주례가 되었다는 풀이를 하고 있다. 주례동은 이처럼 낙동강변
에서 동평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요지였기 때문에 냉정 산 위쪽으로 있던 성터는 학장동의 학성과 연결
된 목장성인데 방어성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성터는 해방이후까지 학장동에서 냉정, 개금을 거쳐 가야공원까지 남아있었는데 6·25때 미군이 하야리아
부대를 조성하면서 성벽의 돌을 옮겨가 버려 성터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터로 난 길을 따라 가야, 개금, 주례사람들이 냉정 뒤쪽 호랑이굴이 있었다는 오지봉의 구덕재를 넘어
대신동으로 내왕했다. 그런데 주례에 있던 사목포나루터는 가축을 취급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으로서 목장과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
주례동의 산기슭에는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고 그 철로를 따라 구도로가 있었는데 냉정 고갯길 쪽으로
새도로가 나면서 지난날 부산에서 서부 경남으로 나아가는 국도가 되었던 것이다. 옛 성터가 있던 산중턱
에는 현재 동서대학교와 경남정보대학이 들어서서 대학촌을 이루고 있다.
ㅇ 엄궁동의 유래
1963 엄궁수문옆 낙동강둑에서 "낙동강칠백리" 영화촬영하는 모습 , 동네 사람들 구경 많이 나와있네요.
1971 엄궁수문옆 강둑에서 주례,학장 방향으로 ...야외전축도 보이고 소울,사이키데릭 양판도 보이네
'80년대 엄궁강변 모습
엄광산의 서쪽 강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엄궁동의 원 지명은 산 이름따라 엄광리였다. 엄광산은 <엄비치산>
으로서 해가 오랫동안 비치는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며 그 아래 마을이 엄광리가 된 것이다. 엄광이란 지명
에는 옛날 이곳이 신을 섬기고 받들던 성스러운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1914년 일제시대 산이 활처
럼 생겼다고 엄궁리로 개칭하였다는 말이 있다.
옛날 엄광리의 강변이었던 현 농산물 유통단지 앞쪽으로 서감전의 <장인도>와 마주보고 있었는데 이섬을
엄궁사람들은 물 건너 있다고 <건너섬>이라고 했다. 그리고 배가 와서 닿았던 엄궁선창에는 상선들이 들어
와 객주마당이 형성되었고 주로 선창가 주변에 사람이 살았는데 이곳에는 연자방아도 있었다고 한다.
강변에는 갈대 밭으로 된 <쇠갈밭섬>이 있었는데 그 섬자리의 일부는 강으로 편입되고 일부는 육지로서
강변도로로 변하였다. 이곳의 산쪽에는 전설의 <장군샘>이 있었는데 이 물을 먹으면서 작은 산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하며 하단으로 넘어가는 길은 산을 깎아 지금의 도로가 만들어졌지만 옛날에는 산복으로 난 고갯
길로 오르내려야 했다. 그리고 사상쪽으로는 모래둑길로 다녔고 일제때에는 1935년에 생긴 낙동강 제방길
로 구포까지 걸어 다녔다. 그만큼 엄궁은 교통이 불편한 마을이었다,
엄궁 강변과 새갈밭(쇠갈밭,새알섬)1978년
엄궁에는 잉어와 민물장어, 그리고 숭어가 많이 잡혔는데 이곳의 최고 명물은 재첩이었다. 강 하구지역인
엄궁강변 모래펄에는 재첩의 수확이 특히 많았는데 농사도 별로 없던 이 마을의 부녀자들은 거의 모두가
재첩국 장사를 하였다. 이들은 밤새 고아서 만든 재첩국을 양철동이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걸어서 새벽
어두운 밤길에 마을을 떠나 구덕령을 넘어 대신동으로 가거나 하단을 돌아 괴정을 거쳐 대티고개를 넘어
부민동, 아미동등 시내까지 거리를 누비면서 큰소리로 <째찌꾹(재첩국) 사이소>라고 외치며 다녔다.
이처럼 재첩국은 과거 부산사람들이 매일 같이 듣던 잠결의 첫소리였고 동시에 기상을 알리는 신호처럼 된
것이다. 그리고 부산을 찾는 외지인들에게는 재첩국아줌마의 소리가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어주었다.
엄궁동에는 일제시대부터 8·15 해방 이후까지 양어장이 있어 붕어낚시의 명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
피난 시절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한적이 있었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라 하여 뒤에 이 마을을 <평화촌>
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낙동 강변은 철새도래지로서 갈대가 우거진 평화롭고 낭만적인 마을이었
는데 현재는 일부 중소 공장들이 들어섰고 산쪽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ㅇ 감전동의 유래
감전동 항공사진 (1947년)
감전동은 오랜 옛날 낙동강 하류와 하구였던 사상지역 내륙 깊숙히 바닷물이 들어 왔던 지역으로서 토사
가 퇴적하여 생긴 모래톱 섬이었는데 강에서 북쪽은 <유도>였고 남쪽으로<장인도>가 있었으며 안쪽으로
<감도>가 위치하였던 것이다.
섬이었던 감도는 조선시대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여름철이 되면 논밭이 홍수의 피해를 입었던 곳인데
1788년 사상지역에 제방을 쌓아 주었던 이경일 동래부사의 공덕이 새겨진 축제혜민비에는 <감동도 일원
에 돌을 세워 새로 물길을 내고 좌우로 둑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의 사천면 상단에는 감동의 기록이 없다. 이때는 감동은 높은 지대에서 농사를 짓기는 했으나
대부분 저습지와 갈밭지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1904년에 기록된 문서에는 사상면 감동과 서전리가 나와
있는데 근세에와서 호구가 늘면서 독립된 동네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던 기록이나 토지문서에 나오는 <감도>, <감동도>라는 지명은 신의 뜻이 담긴 신성
한 땅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감전동은 옛날 바닷물이 들어 왔던 곳으로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퇴적된
비옥한 섬이라 <감도>로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한다.
1968 서감전마을(서전마을,서편마을)과 장인도마을 모습
그리고, 감전동의 서쪽 낙동강변에는 <서발>이라는 곳이 있었다. 서발은 강물에 의한 유사의 퇴적으로
모래톱의 생성과 변동이 많았기 때문에 새로 생긴 뻘이 라는 뜻으로 새뻘이 서발이 되었거나 서쪽 뻘이라서
서발이라 하였을 것이며 그것이 논밭으로 변하여 서전리가 되었을 것이다. 감전동은1914년 감동과 서전을
합쳐서 생긴 지명이다.
감전동의 지명중에<장인도>가 있는데 이섬은 갈밭지대가 많아 집이 한두채밖에 없었던 섬으로서 강변 모래
펄에는 재첩이 많이 잡혔다고 한다. 제방을 쌓았던 기록에 나오는 <강자도>도 학장동의 건너섬인 <대동도>
와 함께 감도와 이어진 섬으로 보인다. 감전동의 이색적인 지명중에는 <포푸라마치>가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수해방지를 위한 토종 포푸라 나무가 많이 서 있었다고 하는데 강수로를 통한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서감전 입구에는 신선한 생선회를 파는 술집이 포푸라나무 밑에 몇집 있었는데 이곳을
<포푸라마치>라 불렀고 오늘날에도 이지역은 주점가가 형성되어 있다.
ㅇ 학장초등학교의 유래
1966년 학장초교
현재의 학장초등학교
학장초등학교는 1949년11월에 설립인가를 받아 1950년5월10일 학장동 홍깨마을에서
개교하였다고 한다.
학장리,주례리,엄궁리 아이들과 감전리의 장인도마을 아이들이 학장초등학교를 다녔고
모라초등학교는 1948년에 사상초등학교 모래분교로 개교 하였다가, 1954년4월애
모라초등학교로 정식 개교하였고 모라리와 삼락리 아이들이 다녔으며
사상초등학교는 1918년도에 사립명진학교로 개교하여 1920년에 사상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아 사상면(지금의 사상구)의 감전리,괘법리,덕포리.모라리,삼락리,엄궁리,주례리,
학장리 등 8개리 아이들 모두가 사상초등학교를 다녔으며 학장초등학교와 모라초등학교
가 분교해 나간 뒤에는 괘법리,덕포리 아이들과 감전리의 서감전마을(서편마을)과
동감전마을(감동마을) 아이들이 사상초등학교를 다녔다.
사상공단이 1975년도에 완공되면서 사상지역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여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말 까지 사상지역의 초등학교가 여러개(감전,동주,엄궁,괘법,덕포 등) 생기기 전까지는
사상지역의 초등학교는 사상초교,학장초교,모라초교 3곳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