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흥영화사가 제작한 곽지균 감독의 1991년작인 [젊은 날의 초상]은 아시다시피 이문열의 단편 두개를 묶어서 각색한 영화입니다. [젊은 날의 초상]은 이문열의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3편의 중단편을 [젊은 날의 초상]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엮어서 만든 소설집이고 각각의 제목은 [그해 겨울][하구][우리 기쁜 젊은 날]입니다. 애초 의도가 연작 소설이 아니었고 같은 주인공이 나오는 중단편도 아니지만 3편의 이야기가 70~80년대를 보낸 젊은이들의 고뇌와 방황과 청춘과 젊음을 다루는 일맥을 보이기 때문에 한편의 장편으로 봐도 무방해요. 이 [젊은 날의 초상]에서 곽지균과 장현수는 [우리 기쁜 젊은 날]과 [그해 겨울]만 발췌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영화화한거죠. 그리고 이 방법은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원작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단편 하나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엔 내용이 짧고 세 편을 묶자니 내용도 넘치고 호흡 유지도 곤란하죠. [그해 겨울]과 [우리 기쁜 젊은 날]을 같이 엮이엔 무난할지 몰라도 [하구]는 너무 동떨어진 배경이에요. 영훈의 일정으로 추가하기엔 개성이 강하죠. 영훈이 방황하는 과정은 [그해 겨울]과 [우리 기쁜 젊은 날]로 충분합니다. 두 편만 각색한 아이디어가 좋았다기 보단 당연한 선택이었죠. 문제는 끼워넣는데 급급해서 충분히 자연스럽게 연결하지 못했다는 거지만 그렇게 튈 정도는 아닙니다.
원작에서 추가된 사항은 술집 작부인 배종옥의 비중입니다. 원작에서도 영훈이 방우로 일하는 과정이 삽입되지만 술집 작부에 대한 묘사는 한 두페이지 정도에서 끝나요. 배종옥이 맡은 윤점순 역도 원작에선 이름도 없고 단 몇 줄로 설명이 그치는데 반해 영화에선 중반부를 끌어가다시피하죠. 영훈이 방우 일을 그만 두고 길을 떠날 때도 동행하며 칼잡이를 만나 셋이 추운 겨울에 눈 쌓인 언덕과 산을 걷는 장면 등은 [삼포 가는 길]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산속 기생방 소제를 도드라지게 한 이유는 지방 배급을 목적으로 한 적당한 눈요깃거리를 의도한 바겠지요. 또한 영화의 시선과 원작의 시선이 긍극적으로 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원작에서 영훈은 시대적 상황에 놓여 신념과 이상을 헤매다 자포자기한 채 여행을 떠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아를 찾아갑니다. 이 여행을 통해 영훈의 내면의 발견에 주력한다면 영화에서 영훈은 주로 여자 관계에 의해서 의식을 발견합니다. 대학생 때 부잣집 딸내미인 옥소리 - 방우 생활에서 술집 작부인 배종옥 - 후반부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간호선생을 하고 있는 이혜숙. 영화는 시대적인 고민보단 이 세 명의 여인을 부각시키는데 배우진은 근사하지만 삐걱거리죠. 흥행도 염두해두어야 하고 검열을 피해갈 순 없으니까 택한 길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 당시엔 이문열 원작이라면 캐스팅하기가 수월했으니 최대한 뽑아내고 싶었을 거에요.
그러나 영화가 적극적으로 추가한 세 명의 여인을 다루는 과정과 원작과의 절충점을 못찾아서 후반부에 이를 수록 헤맵니다. 영훈의 방황과 그의 고통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극이 후반부에 이를때면 균형잃은 감정으로 처음의 진지하고 이상주의자였던 영훈의 감정은 얄팍해지며 좀 낯간지럽게 변해버려요. 초반 영훈이 학교를 떠나는 이유는 어렵게 돈벌어서 코피 쏟아가며 공부해 겨우 붙은 대학 생활이 알고 보니 별 것 없었고 학업이냐 운동권으로 남느냐에 대한 타의에 의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도 모자라 빈부 차이과 여전히 궁핍한 본인의 생활에 염증을 느낄 무렵 단짝 친구가 시위를 하다 죽은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입니다. 연인은 떠나고 친구 둘은 죽고 자괴감에 빠지는건데 후반부 이혜숙을 만나면서 초반부의 일련의 일들이 도로아미타블이 되어버리는거죠.
영훈이 처음 학교를 벗어나면서 [그해 겨울]이 시작되는 건데 1막이라 할 수 있는 [우리 기쁜 젊은 날]과 내용 자체가 뚝 끊겨 버려요. 그가 학교를 벗어나 첫 여행 길에 들른 고향에선 문중의 상을 치르게 되는데 여기서 첫사랑 정님 누나를 만나죠. 그리고 방우 생활을 끝내고 점순이와 칼잡이와도 헤어지고 몸만 잔뜩 상해서 들른 곳이 정님이의 거처고요. 여기서 말을 바꿉니다. 영훈이 방황하는 1차 목적은 시대적인 고민이 아닌 정님 누나가 어릴 때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임신하고 남자한텐 배신당하고 집에선 쫓겨난 것들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지금 이 꼴이 됐다고. 그래서 삶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다는 식으로 말하자 정님은 뜬금없이 "너는 문학을 하게 될 거야"라며 용기를 복돋아주죠. 영화는 둘 중 하나를 포기하던지 제대로 두 단편을 합일하던지 했어야 해요. 이렇게 영훈의 고민을 두 가지 버전으로 한 영화에 보여주는 건 주인공을 주변없이 만들 뿐이거든요.
곽지균 감독이야 멜로물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고 제작자들이나 관객들도 곽지균 영화에서 정통 멜로물에 대한 기대를 하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도 멜로의 비중이 큽니다. 흩날리는 꽃가루, 클래식 배경 음악, 화사한 영상톤 같은 게 전형적인 곽지균 감독 스타일이죠. [젊은 날의 초상]은 곽지균의 최고작이자 그의 최전성기 시절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1991년도 대종상에서 7개 부분을 수상 했고 흥행에도 성공했는데 그해 국내 영화 흥행 5위권 안에 들었어요. 허나 탐탁치 못한 성적이었습니다. 1991년도는 직배 영화에 폭격맞은 전쟁터였습니다. 잔뜩 주눅 들었던 한국 영화계였고 그 와중에 개봉한 [젊은 날의 초상]이 완성도나 재미 면에서 흡족할 만한 수준을 보였는데 이에 고무되어 영화 이상의 후한 평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무슨 예술 영화 정도로 포장해서 6개월이나 억지춘향식으로 개봉 관에 걸었는데 상영한 기간에 비하면 관객이 많은 게 아니라서 여러 사람 불안하게 했죠.
[젊은 날의 초상]은 이문열의 소설들 중 손꼽히게 사랑받는 소설인데 충무로에 이문열 소설 판권이 가장 최고조로 치달았을 때 만들어졌던 작품입니다. 1992년도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후 더이상 이문열 원작 영화를 볼 수가 없죠. 라이벌 만들기 좋아하는 문화계다 보니 굳이 이문열 라이벌로는 인지도와 판매율로 봤을 때 동시대 작가로는 최인호가 있겠는데 최인호 소설이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화가 되가는 반면 이문열의 소설은 90년대 초반에서 끊겨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결혼이야기]이후 기획영화가 도발하면서 이문열 원작을 영화로 만들기엔 적합하지 않은 풍토가 되어버렸고 또 하나는 이문열이 90년대 중반 이후 오랜 기간동안 창작 소설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소설 중 성공적으로 영화화 작업이 이루어졌던 경우는 주로 단편이었고 장편은 해설 위주라 각색하기가 난감했어요. 분량이 간소한 장편인 [사색]이나 [선택]같은 소설도 영화로 만들어지기엔 무리가 있었던 설정이고요.
그러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까지 이문열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하는 과정은 꽤나 지적이고 믿음직한 행보를 예상하기에 충분했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구로 아리랑]의 영화적 평가도 좋았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문열 원작 영화는 [젊은 날의 초상]입니다. 똑부러지게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배우들이 좋고(심지어 옥소리 연기마저도) 색감과 음악, 촬영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영화가 주는 느낌이 좋아서 dvd로도 구입했어요.
정보석은 최상의 캐스팅입니다. 당시 배우들 중 정보석을 대체할만한 이미지가 딱히 떠오르지가 않을 정도로 적역이었어요. 지금은 온갖 드라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 까닭에 이지적인 이미지가 사라졌는데 영화 위주로 활동하던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적인 이미지의 대표 배우였죠. 정보석 이전엔 그런 이미지가 없었어요. 유약한 듯 하면서 강단있어 보이고 80년대 고뇌하는 지식인의 이미지를 드러나는 남자배우가 없었죠. 뭐 그런 이미지가 소모될 만한 작품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기도 하고요. 당시 정보석의 등장은 신선했어요. 그 무렵 내한한 잘만 킹 감독은 정보석의 어떤 면을 보고 그가 만들 차기작 에로물에 캐스팅 제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날의 초상]에서의 연기는 [아그네스를 위하여]와 더불어 정보석의 외향적인 이미지에 가장 크게 기댔으며 그게 성공적으로 먹힌 작품입니다.
조감독으로 참여한 장현수 감독이 학교 선배였던 배종옥은 그의 제의에 이 작품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영화판에서 인정받은 작품입니다. [칠수와 만수]로 영화 데뷔를 했지만 역이 빛나질 못했고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는 흥행에 실패했죠. 여배우가 세 편을 말아먹으면 영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 고민해서 선택한 작품이라네요. 어느 날 장현수 감독이 옥소리가 맡은 대학생 역과 술집 작부 역 중 고르라고 해서 술집 작부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선택했다고 해요. 지금 보면 연기가 어색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배종옥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시원시원하고 야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배우들 중 연기도 제일 좋았고요.
이혜숙은 지금도 아름답지만 이때 정말 빛이 났어요. 여배우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릴 때 나왔던 작품이었죠. 이 해에 [은마는 오지 않는다][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와 더불어 [젊은 날의 초상]까지 세 편 다 히트하고 평도 좋았고 몬트리올에서 상받은 게 화제였기 때문에 지금의 전도연 못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건 겨우 30대 초반이었음에도 그 당시 한국 영화에서 30대 여배우가 맡을 만한 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곧장 t.v드라마의 아줌마 역으로 넘어갔죠.
문제의 옥소리는 요즘 말로 '발연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구로 아리랑]이나 [젊은 날의 초상]을 택한 걸 보면 그래도 영화 보는 안목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저 예쁘기만 합니다. 사실 역도 복잡하지 않아요. 교내 퀸 됐다고 활짝 웃는 모습에선 진솔함마저 느꼈습니다. 발음만 좀 알아들을 수 있게 하면 거저 먹는 역인데 그래도 영훈이가 첫눈에 반할만한 미모라는 건 수긍하게 하니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이 밖에 조재현의 신인시절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영훈의 단짝 친구로 학생 운동하다 옥상에서 뛰어 내려 죽는 역이에요. 김승우와 신현준의 단역 시절 모습도 볼 수 있는데 태흥영화사 오디션 통해 데뷔했으니 공채탤런트마냥 출연했던 거겠죠.
요즘도 틈틈히 [젊은 날의 초상]을 봐요. 김수철이 담당한 음악도 좋았고 전체적으로 아려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그 매혹적인 잔상이 오래 남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