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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4 09:19 국방기고/울프독의 War History
[군과 인간 가족 -5 話]
노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봉사할 따름이다. -1-
한국이 전쟁의 참화와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던 1965년, 경남 마산 근처 빈곤한 농촌에서 살던 한 젊은이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였다. 6주간의 배고픈 기본 훈련을 끝내고 고된 후반기 기관총 주특기 교육까지 이수한 이 젊은 이등병은 중부 전선의 6사단 7연대로 보내졌다.
[최강 부대를 자부하는 6사단 7연대 압록강 진격 기념식 날]
6사단 7연대는 6.25 전쟁 때 춘천 전투, 동락리 전투, 음성 전투, 낙동강 신령 전투들에서 대승을 했었고 평북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에 최초로 도착했었던 부대로서 초산 부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연대원들에게 국군 최강 연대라는 소속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는 부대였다.
이곳 7연대 교육대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던 젊은이에게 인생의 전기가 되는 한 기회가 찾아왔다. 1군 하사관 학교에서 하사관 후보생들을 모집하고 있으니 지원할 사람은 빨리 지원하라는 명령이었다.
젊은이는 고민하였다.
다섯 남매의 맞이인 그의 집은 가난했었고 그의 어깨는 무거웠다. 가난때문에 대학을 갈 수가 없었던 그가 갈 수 있었던 사회의 순탄한 길은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그 무렵의 젊은이들도 가져보았을 야망이니 푸른 꿈이니 하는 열정의 명구(名句)들은 힘든 현실을 몸으로 겪고 있었던 그에게는 꿈같이 호사스런 소리들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고민하던 그는 훈련소를 거치면서 자신이 군대 생활에 괜찮게 적응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 힘들고 박봉으로 인기가 없었던 직업 군인의 길이었지만 그 길이 가슴에 크게 클로즈 업 되고 있는 것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직업 군인이 되면 최소한 굶을 염려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고민하던 그가 일생의 큰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오갈데 없는 나에게 내민 이 국가의 손을 붙잡고 나의 숙명을 정면 돌파 해보자 !”
그는 1군 하사관 학교 선발 시험에 합격했고 다음해 1월 입교했다. 1군 하사관 학교는 사회인들은 잘 모르는 기관이었지만 창군 이래 다수의 인재들을 육성해낸 명문 군 교육 기관이었다. 이곳을 졸업하고 군의 각 부대에 배치되어 국군 지휘와 행정의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수많은 부사관 인재들이 남긴 공적이 이를 증명한다.
인간 개조소라는 별명으로 불린 1군 하사관 학교는 엄격한 교육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낙오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체벌을 동반한 교육들이 후보생들을 인내의 극한까지 몰고 가며 밤낮없이 단련시켰었다. 식사 시간을 딱 3분만 주고 이 시간 내에 직각 식사로 식사를 끝내는 규칙도 있었다. 내무 생활 역시 군기가 센 교육 기관답게 잠시의 한 눈도 팔 여유를 주지 않았었다.
마산의 젊은이는 힘든 훈련을 무사히 다 마치고 1966년 5월 강인하게 단련된 육군 하사로 변신하여 1 군 하사관 학교를 수료하였다. 그리고 6사단 7연대로 보내진 그는 분대장으로 첫 보직을 시작하였다. 그때 6사단은 경기도 가평에 주둔하고 있었다. 6사단은 66년 9월 가을이 깃드는 강원도 철원으로 이동하였다. 따뜻한 남쪽 바다 마산의 젋은이는 철베리아라는 별명이 있는 추운 북쪽 철원에서 다부지게 인생을 개척해가기 시작했다.
[강가부 원사]
그는 이곳 철원 7연대에서 죽도록 노력하여 부사관 최고 직급인 주임 원사가 되었고 가정을 가졌으며 자식을 두었다. 이제 철원은 그가 떠날 수없는 고향이 되었고 최강 명문 7연대는 그가 일생을 보낸 집이 되었다. 1965년에 입대한 그는 7연대에서 33년을 보내고 1997년 퇴역 하였다.당시 직급은 7연대의 주임 원사였었다.
현재 72세의 그는 철원에서 살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초산 전우회 회장인 그는 강가부 [姜嘉夫] 퇴역 원사다.
[1993년 교민 초청으로 미국 방문을 했을 때]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사람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오랫동안 그를 기억한다고 한다. 나도 7연대 카페에 자주 나오는 강가부라는 ID를 보고 70년대 한국에서 어린이들에게 유명했던 아동 만화의 주인공 강가딘이라는 강아지를 연상했었다. 그러나 한자 이름을 보고 바로 일본식 작명임을 알아보았다. 출생지가 일본이 아닌가 물었더니 “맞습니다. 나고야에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부모는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일본식 이름이 맞다는 것이었다.
강가부 씨가 태어나던 그 때는 창씨개명이 강요되던 때였었다. 일본에 살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받던 비인간적인 차별과 모욕이 자식들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쓸개를 씹는 기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지은 경우가 많았었다. 가부[嘉夫]라는 이름은 일본 발음으로 요시오라는 이름이다.
강가부 원사는 분대장 소대 선임하사를 거쳐 중대 행보관 직책에 이르기까지 일선 부대에 근무하며 20대를 다 보내고 29살에 상사가 되었다.30이 조금 넘어 1974년에 7연대 본부로 올라와 연대 인사과에서 참모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2015.09.08 09:00 국방기고/울프독의 War History
[군과 인간 가족 -5 話-]
노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봉사할 따름이다. -2-
강 원사가 직업 군인의 길로 들어설 때 국군 부사관들의 처우는 당시 가난했던 한국 경제의 상황을 반영하듯 무척 열악했었다. 앞서 말했듯이 세계 최빈국의 대열에서 헤매이던 한국의 서민들은 '먹는 문제 해결'이 급선무였었다. 부사관으로 군에 있으면 그런대로 생존의 기본인 먹는 문제는 해결이 되었지만—군도 가난해서 힘겹게라도 해줄만한 것은 그 것뿐이었다.
[7연대 초대 연대장 민기식 대장]
먹는 것 외에 입고 사는 문제는 최저의 수준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간부들은 모두 부대 부근의 촌락에서 독채 전세도 아닌 셋방을 얻어서 생활하여야 했었다. 자식도 교육시켜야 했었고 늙으신 부모님들도 모셔야 했지만 국가에서 주는 봉급은 그런 것까지 여유있게 해결해주지 못했었다. 당시의 간부들은 내핍과 절약으로 버티어야하는 만성적인 빈곤한 생활에 시달렸다.
고된 근무를 하는 부대는 부사관들의 80%가 전역을 신청했으나 군은 이를 불허했었다. 지금처럼 그 사표를 다 수리해주었다면 그 때 국군은 붕괴했으리라. 현재 시각으로 볼 때 그 무렵의 군의 간부들이 가난을 버티며 군무에 충실했던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더구나 장병들의 근무 여건 역시 최악이었다. 여름에는 필수적인 모기장을 지급하지 못한 부대도 많았었고 겨울에 필수적인 난방 시설도 연료가 없어서 시간제로 가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부들이 근무할 사무실과 책상들이 필요했었으나 모두에게 이런 기본 시설마저도 부족했었다. 사무실이 없는 부사관들은 행정반 주변 밖의 양지 쪽에 엉거주춤 앉아서 근무해야 할 경우도 많았다.훈련 교보재도 없어서 훈련과 교육이 어거지로 행해지기도 했었다.이런 부족함은 경험많은 부사관들이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몸으로 때워야 했다.
[7연대 1기 서근석씨[46년 2월 입대] -7연대 초대 주임원사]
그런가하면 당시의 장교들의 권한은 지금보다도 훨씬 강한 것이어서 나이 먹은 부사관들이 어리고 덜된 초급 장교들에게 비인간적인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런 힘든 환경에서 군 생활을 해나가는 부사관들이 살아 남는 수단은 인내와 성실이었다.그저 매사 참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주임 원사 보직 신고식]
강가부 씨는 몸을 던지며 최선을 다했다. 강가부 씨가 성실하게 근무하자 상관들은 그를 인정해주고 순조롭게 진급도 시켜주었다. 그는 7 연대 본부로 온 뒤에 25년간 계속7 연대 본부에서만 근무했었다. 첫 보직은 연대 인사과였지만 여러 과를 거치며 원사로 진급하였다. 국가 경제 발전에 따라 군 간부들에 대한 급여도 획기적으로 향상되어 강가부 씨는 비로서 한숨을 돌리며 가족들과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철원 평야에 세월이 가고 그의 이마에 주름이 늘어가는 초로의 세월, 그는 긴 군대 생활의 황혼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7 연대 주임 원사로 발령받았다.부사관으로서 최고 계급인 원사에 최고 보직인 연대 주임 원사까지 올라간 셈이다.
[근속 30년 기념식]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7연대 신병으로 배치되어 철원 땅에 자리를 잡고 7연대의 텃새 삶을 산지 30여 년, 이제는 고향이 된 철원의 풍요로운 평야가 33번째의 수확을 기다리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 황금 물결을 일렁이는 1999년 10월 31일, 강가부 씨는 퇴역식을 가졌다. 부인과 전역한 선배, 7연대 장병들, 그리고 6사단장- 나중에 국방장관을 지냈고 지금은 주중대사인 김 장수 장군-7연대장 참석하에 전역식을 치렀다.
장기간 국가에 봉사한 그의 공적은 국가는 잊지 않고 보국훈장 광복장의 훈장을 주었다. 이 훈장은 33년 이상 근무에 아무 징계 사항이 없는 퇴직자들에게만 수여하는 값있는 훈장이었다.
그리고 강가부 씨는 다음 날부터 평생 입었던 군복을 벗고 평일에도 홀가분한 평상복으로 외출할 수가 있었다.군을 떠나면 대개 친지들과 옛 뿌리가 있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새 삶을 찾아서 서울 같은 대도시로 떠나는 것이 일반 현상이지만 온 몸을 바쳐서 철원의 7연대에만 삶에 몰두했었던 강가부 원사는 철원을 빼놓고는 갈 곳이 없었다. 강가부 씨가 고향인 마산을 떠난 뒤에 형제들도 하나 둘 고향을 떠났기에 그 곳은 어린 시절 가난의 고통만 떠 오로는 먼 타향이었다.
상관의 처제와 상관의 부하 관계에서 평생 전우 관계가 된 강가부 씨 부부
강 가부 씨는 퇴직 전부터 그곳 철원에 은퇴 후 살아갈 터를 틀기로 했었다. 그는 은퇴 전 철원군 동송읍내에 낡은 집을 사서 헐고 새집을 지어놓고 은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은퇴 후에 군인이 겪을 심리적 트라우마를 알고 있었다. 선배들은 그에게 진지하게 말했었다.
“군 생활에서의 정신 세계를 빨리 청산해라. 그래야 네가 은퇴 후에 살아갈 사회에 고통없이 적응을 할 수가 있다.”
은퇴 후의 쓰리고 힘든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선배의 너무나도 진지하고 고마운 충고였다. 오랫동안 충실한 직장 생활을 하면 직장순치증[職場馴致症이라는 병을 겪게 된다. 즉 직장에 길이 들었다가 나이 먹고 직장을 떠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해진다.
이것은 동물원의 맹수들을 보면 이해가 쉽게 간다. 백수의 왕 사자도 동물원에 가두어 두고 매일 먹이를 주다보면 사자는 먹이란 인간이 주는 것으로 길이 들어 버린다. 그 사자를 갑자기 아프리카 초원에 방사하면 사자는 초원을 쏘다니며 사냥을 해서 먹을꺼리를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 동물원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먹이를 가져다 줄 사람을 기다린다.
10여년 전에 바로 철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상당해서 치료를 받고 완치한 두루미를 아무 생각 없이 철원 평야에 방사했더니 그 사이 인간과의 삶에 길이 들은 두루미들은 넓은 휴전선 안으로 날아다니며 먹이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찾아 도로로 나왔다가 차에 치어 죽은 녀석이 있었다.
바로 오랜 직장 생활을 했던 인간도 이처럼 직장에 길이 들어버려 새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것이다.
직장에 순치된 사람이 갑자기 자기의 일부가 되었던 환경이 없어지면 불안해하고 무력감과 소심증에 빠져들다가 그 증세가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악화된다. 서구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사회 문제로서 이를 ‘은퇴 쇼크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항상 몸담았던 직장만 그리워하고 직장에서 지시에 길든 피동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매사에 능동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2015.09.10 20:33 국방기고/울프독의 War History
[군과 인간 가족 -5 話-]
노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봉사할 따름이다. -3-
강가부 씨 자신은 이런 은퇴 후에 오는 심리적 증후군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었지만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은퇴 후 먼저 빨리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은 정확하게 했었다.
강가부 씨는 은퇴 전부터 동네 시니어 산악회의 어른들과 친해두었었다.은퇴와 함께 강가부 씨는 비교적 새 것인 96년산 무쏘 중고차를 샀다.그리고 그 차로 이들 시니어 등산가들을 모시고 일 주일에 두 번씩 산행을 갔다. 3년간 쉬지 않고 자기가 운전을 하고 이들을 모시고 다니며 산행을 했다. 그는 어지간한 남한의 산들은 모두 올라가 보았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었다. 농번기 철에는 일당을 주는 농삿일에도 뛰어들어 힘들게 일해주고 일당을 벌어왔다. 직장순치증의 극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긴 직장 생활에서 몸에 익은 권위 의식의 탈피다. 강가부 씨는 이런 일당받는 노동일까지 하면서 그 권위 의식을 극복해왔던 것이다.
3년의 세월이 지나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도 적응이 된 어느 날 그는 제2의 직장을 잡을 수가 있었다. 대한민국 국가 무공 수훈자회 강원도 지부 철원군 지회 사무국장직이었다. 국가 국방관련 8개 단체들이 입주한 철원군 보훈회관에 무공 수훈자회의 사무실이 있었다.여직원은 없고 강가부 씨 혼자 사무실을 관리했다. 보수야 크지 않았지만 출근할 고정 사무실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였다.
[철원 현충탑 참배]
철원군의 유공자들은 225명이었다. 근무는 자유로웠지만 일을 하기로 들면 많았었다. 큰일로서 회원들은 국립 현충원과 대전 현충원을 1년에 한번씩 방문할 때 매사 준비하고 인솔도 하는 일도 있었고 또 추석 전에 회원들과 같이 철원 일 대 호국의 추모비들이나 전적지들을 청소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주로 하는 일들은 농사짓는 회원들을 도와서 영농의 도움을 주고 길흉사에 서로 찾아보고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것등의 개인적인 성격의 것들이었다. 유공자중에 나이가 들어 홀로 사는 독거 노인들도 있었는데 강 가부 씨는 정기적으로 위문품을 들고 가서 문안을 드리는 일도 있었고 미망인이 되어서 홀로 사는 유공자 미망인들도 찾아가 위로해주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하였다.
돈을 받고도 진심이 없으면 하기 힘든 배려와 인정의 자원 봉사활동 성격의 일들이 사무국장의 직무였다. 강 가부 씨는 비로소 남은 여생 동안 자신이 몸을 던져 해야 할 일을 여기서 발견했다.
그간 그는 퇴직한 후에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세월의 이끼가 쌓여가며 왜소해지는 선배들의 모습을 자기도 닮아 이 세상에 안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떠날 가능성에 속으로 괴로워 했었다.그런 그가 유공자회에서 찾은 길은 바로 ‘봉사’였었다.
국가가 33년 근속의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기에 생활을 위해서 힘들게 일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국가에 보은하는 차원에서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이 봉사의 길에서 찾았던 것이다.
봉사는 서비스다. 한국에서는 서비스가 접객업소의 이상적인 영업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편향되게 쓰이지만 원래 영어의 본뜻은 그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것이었다.
무사가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심도 서비스로 번역된다. 봉사는 보람을 느끼지 않으면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로 여겨져 기피의 대상이 된다. 강 가부 씨가 보람을 가지고 서비스를 바치고 싶은 분야는 물론 군(軍)이었다.그 중에서 자신이 성장하고 늙어온 6사단 7연대였었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유공자 협회 사무국장 3년차일 때 강 가부 씨는 초산 전우회 회장이 되었다.이어서 6사단에서 퇴역한 간부들의 모임인 청성 전우회 부회장직도 맡았다.
[초산부대 전우회원 철원모임]
그가 초산 전우 회장직을 맡으면서 그의 모체 7연대를 향한 봉사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정녕 그가 하고 싶었던 노년의 초산 부대원을 초산부대 후원의 서포터스로 그 규모를 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초산 전우 회장으로서 제일 먼저 손댔던 것은 전우회 조직을 철원의 몇몇 전우들로 이뤄진 친목계 성격의 조직을 전국적인 조직으로 키워낸 것이었다. 그의 확대 방침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강가부 씨는 초산 전우회의 연속 발전을 위해서 외연을 넓히고 젊은 인재들을 계속 영입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해서 이를 관철했다.
강가부 씨는 넓어진 조직을 바탕으로 7연대 봉사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부대 행사 때마다 참석했었고 화환을 증정했으며 회비를 갹출, DMZ 투입 대대원들을 찾아가 위문품을 전달했었다 .대대가 GOP 임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회원들과 같이 영접해서 장병들의 사기를 올려주기도 하였다. 한번은 GOP 투입 대대가 후방으로 철수했는데 심야 12시에야 철수를 완료할 수가 있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이 늦은 시간에도 영문에서 피곤한 철수 장병들을 맞아 격려하여 주었다.
강가부 씨가 하는 매일의 봉사 활동은 대대 4개의 카페를 드나들며 방문하는 장병들의 부모님들을 댓글로 영접하는 것이었다. 관계자들은 잘 몰랐으나 육군 카페를 방문하는 부모님들은 영접해주는 사람들이 없으면 잘 방문하지 않는다. 오늘 날 많은 육군 카페가 비활성화되었는데 그 근본 원인은 주인격인 담당들이 관리를 소홀히 하여 댓글 영접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는 카페 방문 부모님들을 주인장을 대신해서 각별히 영접을 해왔고 그 부모님들과 유대 관계를 잘 이끌어왔다. 강가부 씨는 이런 면에서 7연대의 카페 활성화를 위해서 큰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는 카페에서 사귄 7 연대 장병 부모님들이 안산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그곳까지 내려가 참석해서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7연대 초산부대 카페에서 활동하는 부모님들이 안산에서 모임을 가졌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필자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자녀 분은?”
“어! 아들 딸 두 명을 두었어요 사위는 군인인데 남양주에 있는 부대에서 상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그러나 아들에 대해 물어보니 표정이 흐려진다.
“ 나이가 37살인데 장가를 못 갔어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 했던 아들인데 그만 20대 늦은 나이에 공무원이 되는 야심을 품었단다.그리고 몇 년간을 시험에 도전했지만 감질나는 점수만 나오고 합격을 하지 못해서 할 수없이 꿈을 접었지만 늦은 나이라서 취업도 하지 못하고 지금은 알바 비슷한 직업을 가졌으나 안정적인 직업은 아니라고 한다.
“내가 그 놈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70이 넘은 나이에도 매사에 억척같고 적극적인 강 가부 씨는 잘 안 풀리는 아들의 인생에만은 무력함과 안타까움을 터놓는 약한 부모의 모습을 보인다.
그는 72세의 봄을 못자리판 설치가 한창 바쁘게 돌아가는 철원 평야에서 맞으며 전방에서 철수하는 대대원들의 영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열심히 궁리 중이다.
그가 봉사를 위해서 기동하는데 힘을 다해주는 무쏘는 이제 20세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그는 아직도 고장 없이 잘 굴러다니는 무쏘를 보며 자기가 80이 되어도 이런 봉사 활동들을 무리없이 잘 할 수 있는 건강이 유지되도록 속으로 기도하고 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철원군 지회장
7연대 전우회장
청성전우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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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편의 자서전을 보는 것 같네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묵묵히 이 나라를 지켜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우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떻게 국방부 블로그에있는 글을 가져오셨네요.
부끄럽습니다.
아님니다
진작에 올릴려고 했었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손자뻘되는 울 아들들을 위해 애쓰시는 회장님 감사드림니다
울 전체회원들의 작은 선물이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회장님
앞으로 쭉ㅡ
좋은 날 만 기다리고 있으니
늘 건강 하시길 바랍니다
강가부 회장님의 지난 역사를 보게 되어 감사합니다
회장님도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진우아빠 저도 이글을 접한적이 있는데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었네여
잘 올려주셨습니다.^^
글올려주신 진우아버님께 감사드리고 회장님은 앞으로 쭈욱 건강하셔서 봉사해주세요!!
회장님건강하시구 꾸준한활동부탁드립니다
와~회장님 대단하세요~
우리회장님 최고에요~
늘 건강하시고 언제까지나
저희와 함께해주세요~~
영광이란 말로 대신합니다...
마치 전쟁이후의 역사를 보는 감동입니다....^^
제가 같은 아바카 회원인게 자랑스러워지내요 회장님^^
위인전 한권을 읽은듯 합니다~~~강인한 뚝심과 봉사정신이 함께 하심이 ~~회장님 존경스럽고 자랑 입니다^^꾸벅
회장님 발자취를 보니 감동이 뭉쿨합니다.
건강 관리 잘 하셔서 봉사도 열심히 해주세요 6사단 하면 제일 먼저 회장님을 떠올릴것 같아요
많은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격려를 해주시는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일일이 답글을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숨은이야기를 꺼집어내어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저의건강이 지켜지는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제가할수있는 능력껒 활동을 할것입니다.
내일은 11시에 3사단백골부대 이번국군의날에 대통령부대표창받은것 자축연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태봉제 본행사에참석하여 밤9시넘게까지 같이할것이고
모래 8일 토요일에는 춘천2군단으로가서 2군단장님과함께 점심식사를한후
오후2시부터 춘천역앞에서 6,25전쟁당시 7연대가전투한 춘천지구전승기념행사및 전투재현행사에
참석한후 철원으로 올것입니다.
많이 바쁘군요.
이렇게 활동할수있도록
뒤에서 뒷바라지해주는 우리안방마님한테 언제나 고맙게 생각합니다.
집안일은 둘째고 움직이는데는 모두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래도 묵묵히 도와주는 우리안방마님힘으로 활동을 할수있습니다.
만약에 못하게 한다면 서로 갈등이 생길것인데
도와주어서 언제나 고마운마음입니다.
울안방마님도 유방암수술하고 투병생활까지 하면서도
저에게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엇습니다.
저도 안방마님에게 신경을쓰 좋다는약은 거이다제공하여
지금은 저보다 건강이 더좋습니다.
나이먹으면서 부부간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사회활동을 할수있도록 도와주는
안방마님을 오늘은 한번 보듬어 주어야 겠습니다. ㅎㅎㅎㅎㅎㅎ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늘 감사드립니다
뚝심!!!
존경합니다.
회장님의 역사를 보면서 박수와 멋지게 수고하신 목진우아버님께 감사를~~두분다 짱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