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노씨(咸平 魯氏) 편
함평 노씨(咸平 魯氏)는 강화 노씨(江華 魯氏)에서 분파 되었는데, 강화 노씨의 원조(遠祖) 노 계(魯 啓)는 중국 은(殷)나라 부풍(扶豊)의 사람으로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세워질 무렵 기자(箕子)가 8백의사(八百義士)와 출중국(出中國)하여 동래(東來)할 때 함께 와서 정치에 많은 도움이 있어 강화(江華)에 채읍(采邑)함으로 강화의 관향이 시작되었다. 그 뒤 고려 인종(仁宗)때 노 계(魯 啓)의 원손인 노 목(魯 穆)이 통훈대부행 삼가현감(通訓大夫行 三嘉縣監)을 지냈고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 공(功)을 세워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封)해졌으니 함평 노씨가 이 분으로부터 기세(起世)하고 있으며 함평, 무안, 고창, 영암, 의령 등지에 살고 있다. 함풍현은 본래 백제의 굴내현인데 신라때 함풍현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때 모평현으로 하였다. 함평은 함풍과 모평 2현(縣)의 합명(合名)이다. 함평 노씨의 시조(始祖) 노 목(魯 穆)의 7世孫으로 함평 노씨의 중흥조인 무열공(武烈公) 노 신(魯 愼)은 문하시중이며 벽상공신이다. 성안(成顔)·희안(希顔)·유안(有顔)의 아들 3형제를 두었다.
제2파(第二派) 노희안(魯希顔)은 무안파(務安派) 또는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무안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제3파(第三派) 노유안(魯有顔)은 함평파(咸平派) 또는 한림공파(翰林公派)로 함평(咸平)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노 목(魯 穆)의 18世孫인 모금당공(慕錦堂公) 노덕현(魯德玄)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는데 임진왜란 이후 성주(星州)에 처음 입향하여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예(禮)·인수(麟守)·진(軫)이다. 제1파(第一派)는 노 예(魯 禮)로 선남면(船南面) 신흥(新興)·모전(茅田)·차동·동암리(東岩里)와 금수면(金水面) 적산(赤山)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제2파(第二派)는 운사공(雲沙公) 노인수(魯麟守)로 김천시(金泉市)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제3파(第三派)는 노 진(魯 軫)으로 칠곡군(漆谷郡) 약목면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한편 노 목(魯 穆)의 22世孫인 국헌공(國軒公) 노성국(魯聖國, 1682∼1730)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부총관(副摠管)에 훈사되었는데, 그의 후손이 모전(茅田)과 신흥(新興)에 집단으로 살고 있고, 그를 위한 윤목재(潤木齋)가 있다. 성주를 중심으로 함평 노씨의 주요인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조공 노 목(魯 穆)의 증손 노관도(魯貫道)가 고려때 수문전 태학사를 지내고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라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악은공(嶽隱公) 노 신(魯 愼)은 시조공 노 목(魯 穆)의 7世孫으로 고려 충숙왕5년(1336년) 현(現) 개성(開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공민왕때 감무(監務)에 제수(除授)되고 1359년에 송 경(宋 卿)·안우경(安遇慶) 등과 더불어 홍건적(紅巾賊)을 퇴치함에 1등공신에 녹훈되어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지고 상호군(上護軍)·정윤(正尹)등을 지냈다. 1363년 김 용(金 鏞)의 난(亂)에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적괴(賊魁)를 소탕함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었고 후일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李太祖)가 등극(登極)함에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중 일인(一人)이며 시호(諡號)는 무열공(武烈公)이다. 개성(開城)의 두문동(杜門洞),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祠), 나주(羅州)의 평거사(平居祠), 무안(茂安)의 학산사(鶴山祠) 등지에서 유림(儒林)들이 향사하고 있으니 입향조의 11代祖이다. 성안(成顔)·희안(希顔)·유안(有顔)의 삼형제를 두었다.
모금당공(慕錦堂公) 노덕현(魯德玄)은 금계공(錦溪公) 노 인(魯 認)의 손자로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성주에 처음 입향하여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예(禮)·인수(麟守)·진(軫)이다. 노유안(魯有顔)은 조선 태조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노득평(魯得平)은 세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을 역임했다. 노종주(魯宗周)는 단종(端宗)조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자 금성대군 및 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발각되어 나주옥에 갇혔으나 탈출하여 영암의 은적산에 은거했다. 관암공(冠巖公) 노 홍(魯 鴻)은 임진왜란때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진영장(鎭營將)으로 무공(武功)을 세워 원종2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훈련원 부정을 지냈다. 소산(小山) 노동호(魯東浩)는 예학(禮學)에 능했으며 후학을 기르던 신양서당(新陽書堂)이 있으며, 정유재란때 당포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시켜 공(功)을 세운 노대방(魯大邦)·노대련(魯大連) 등과, 노극명(魯克明)·노연령(魯延齡)·노성택(魯聖澤) 등은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현재 성주군 산림조합장 노오문(魯五文)씨 등이 선남에 거주하면서 함평 노씨 문중을 빛내고 있다. ※ 엮은이 : 성주군 월항면 (덤개), 이재필(李在弼) 본지 편집인 2005-11-23 17:3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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