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책 읽기 좋은 직장
1)아파트 관리실
작은 매형의 추천으로 아파트 관리실의 영선(시설물 점검 보수 등을 하는 기능직)
이라는 직책에 취업을 하였다.
자부하건대 관리실 측에서 적임자를 고르긴 고른 셈이다.
수 많은 직업을 거치면서 안 해 본 일이 별로 없는 팔방미인이니 아파트의
잡다한 시설물을 관리하는 데에는 더 이상 적임자가 없을 것이다.
첫 출근한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마도 정월 대보름이었을 것 같다.
관리실 직원들의 윷놀이 단합대회가 벌어졌는데
신입사원인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만 흥에 겨워 신이 나서 노는 것이다.
경비아저씨들도 웃어대며 윷가락을 던지고 난리를 치는데
내 차례는 아예 오지도 않아 뒷전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나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단합대회면 개개의 직원에게 오락의 시간을 골고루 배려를 하고 참여를 시켜
화목을 도모하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 그래 좋다. 잘 들 놀아라. 대신 일 년 후에 한 번 보자.
난 오기가 생겨 혼자 결심을 했다. 용두사미라는 말은 나를 두고 생겨난 말인 듯
난 어디를 가나 처음에는 생사를 걸고 파고드는 근성이 있다.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요령을 터득하는 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우선 주민들한테 친절하고 남보다 조금만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금새 신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입주민들의 애로사항이 관리실로 접수되면 번개같이 해당 세대를 찾아갔다.
상담 후 손볼 것은 손을 봐주고 적절한 조치와 함께 인정어린 말 한마디 던져주면
만사 오케이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새로 온 영선씨는(어떤 할머니는 이름으로 알고
이렇게 불렀다)일도 잘하고 착하기도 하다”는 소문이 주민들 사이에 쫙 퍼지게
됐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것도 하루 종일 있는 것이 아니다.
8시간 근무 중에 길어야 한두 시간이다. 나머지 시간은 대기만 하면 되었다.
정말 좋은 기회가 왔다. 월급도 목공소 같은 데 보다는 많았고 체력에 달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
중앙난방 방식의 아파트였기 때문에 5톤짜리 노통연관 보일러 두 대가 가동되고 있었다.
보일러 취급기능사 시험을 보기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관리실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보다
책을 보고 있으면 시간도 잘 가고 이따금씩 들리는 주민들은 오히려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6개월간 공부하여 <보일러 취급기능사2급>자격증을 땄다.
연이어 마침 전주기능대학에서 순회교육을 하는 <보일러 시공기능사2급>과
<고압가스기능사2급>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런데 왜 꼭 기능사2급인가? 거의 비슷한 수준의 문제인데도
대학졸업 학력이면기사2급으로 껑충 단계가 올라가는 것이 나로서는 아쉽고 섭섭했다.
그렇다! 오랬만에 공부를 해도 되는구나.
학력의 차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공부하는 도리 외에는 없음을 깨달았다.
내친 김에 어려서 못했던 공부를 다시 해보자.
교재는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딸 아들 교재를 그대로 보면 되었다.
아파트 일을 시작한지 일 년이 되었다. 난 기관장 직책을 맡았다.
관리소장 다음 자리다.
당시 소장이 여소장이었는데 사법시험 준비를 하다가 주택관리사 시험에 합격한 인재였다.
그러나 시설 쪽 실무는 내가 소장보다 고수였다.
이제는 정초의 윷놀이사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관리소장을 꿈꾸며 주택관리사 시험을 봤다. 두 번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만만치 않았다. 그야말로 기능사2급의 수준을 생각하고 덤벼든 것이 잘못이었다.
대학을 필히 나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대입검정고시를 봤다. 역시 수학이 또 복병이었다. 25점! 과락으로 떨어졌다.
아들의 중학교 1학년 교재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공부하기도 참 쉬워졌다.
티브이를 켜면 쉽게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그런데 수학공부가 중학교 2학년 2학기 과정으로 올라가니 더 이상 진전을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공부하기가 어려웠을뿐더러 나의 수학쪽 이해의 머리에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그냥 그 상태로 다시 시험을 치렀다.
이번에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초공부를 한 것이 효험이 있어 수학50점이 나왔다.
평균 60점이야 훨씬 넘었으므로 합격을 했다.
신이 나서 여기저기 전화를 했으나 다른이들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았다.
다만 엄마는 매우 좋아하셨고 잘했다고 창찬해 주셨다.
늙어가는 아들을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의 인재로 알고 계시던 우리 엄마!
2)엄마! 나 대학교 들어갔슈.
1998년 나는 갑자기 틴에이져가 된듯 했다.
수능시험을 보기위해 화학과목의 교재 한 권만 구입했다.
다른 과목은 딸과 아들이 배우던 책들이 있어 굳이 따로 사지 않아도 됐다.
꼭 대학입학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수능이란 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이길래 우리나라의 꽃 같은
학생들에게서 젊음을만끽할 수 있는 권리를 무참히 빼앗아 가는지
알아보기 위함도 한 목적이었다.
아울러 내 실력이면 몇 점 정도가 나올까? 그 것도 궁금했다.
추운 초 겨울날 친척 조카를 포함한 어린 학생들 틈에 섞여 시험을 치렀다.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응시한 나와 일반 학생들과는 마음의 초조함이 달랐으리라.
점수는 275점으로 나왔다. 가까운 지방대학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직장을 버리고
대학생활을 할 형편은 못 되었다. 생각 끝에 방송통신대학교에 들어가기로 했다.
몇 달 후 우리 딸 방실이가 방실 웃으며 얘기를 해줬다.
“아빠, 어제는 고3때 영어선생님을 만났는데 이러잖아.
‘방실아, 내가 이번에 수능 시험감독 들어갔는데 글쎄 사십대 후반쯤 되는
아저씨도 시험을 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사람이 우리 아빠예요’라고”딸의 그 말을 듣고 흐뭇해진 이유는 뭘까?
드디어 입학을 했다. 99학번의 대학생! 요즘이야 웬만하면 다 대학생이 되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한 동네에 대학생이 한 명 있을까 말까한 실정이었다.
선망의 대상이던 그 대학생이 지금 바로 나다.
“엄마! 엄마 큰아들이 인자 대학생 됐시유”
엄마의 눈에 어린 물기를 보며 난 속으로 졸업식 때 엄마의 머리에 학사모를
씌워드리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3) 콘도미니엄 시설직 근무
대천해수욕장에 콘도미니엄이 들어섰다.
신입사원을 뽑는다기에 입사원서를 냈다.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면접을 봤다. 보일러가 최적의 연소상태일때
화염의 색깔이 무었이냐고 물었다.
열관리 자격시험을 본지 3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그런 문제는 기본이었다.
어쨌거나 기관장은 필히 내가 될 것이다 자신하고 기다렸는데
10일간의 신입사원 기본교육을 받고 와보니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원들의 대부분이 20대였고 각 팀장들이 30대, 본부장이 나와 동갑이었다.
시설팀장의 나이가 나보다 어렸으므로 아마도 내가 기관장이 되면 업무지시에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라서 일부러 젊은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는지도
모른다. 신임 기관장을 처음 만나서 인사를 했다.
그는 나를 시험하려는 듯 한가지의 질문을 나에게 슬쩍 던진다.
난 대답을 회피하면서 잘 좀 부탁한다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1년 후에 나는 당신의 그 직책을 탈취(?)하겠노라고
속으로 스스로 다짐하면서.........
업무는 아파트 기관실과 대동소이하였으나 시설 규모가 좀 컸고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냉동기를 운용한다는 것이 생소한 사항이었다.
아파트 관리실처럼은 아니더라도 여기서도 책읽을 시간은 많이 있었다.
기관실 한 쪽에 고물책상을 들여다 놓고 대학교 교재를 책꽂이에
떠억하니 꽂아 놓았다. 지나다니며 흘끗흘끗 바라만 봐도 스스로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젊은 직원 한 사람은 그런 나를 보고
“큰 형님 나이에 대학 나와서 뭐하려구 그러우?”했다.
한 술 더 떠서 나이든 동료 하나는 “방송국에 취직하려우?” 묻기도 했다.
나를 웃기는 사람들, 그들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따로 있겠지만 나만큼 즐겁지는 않으리라.
기관실의 각종 소음은 오히려 책속으로 정신을 집중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시끄럽지만 규칙적인 기계음은 사람들의 대화소리보다 훨씬 공부에 방해가 덜 되었다.
책과 눈의 거리가 35센티미터라는 원칙은 늙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이다.
점점 원시가 되어가기 때문에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1미터는 떨어져서 봐야
글씨의 초점이 맞는다. 이런 점을 한탄할 필요는 없다.
조명을 밝게 해 놓고 저만큼 떨어져서 보면 된다.
기관실에서 이렇게 책과 멀리 떨어져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하! 보일러의 이상음을 감시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오감을 작동하여 근무하는 것이 모든 기계실 감시작업의 기본 수칙이므로
이건 완전히 일석이조의 혜택이 아닐 수 없었다.
4) 첫 출석수업
근무시간을 야간으로 바꾸고 출석수업을 받으러 갔다. 방송대 대전학습관,
지금은 지역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그땐 그렇게 불렀다.
국문과 학생들은 특히 여학생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의가 나보다는 젊은 주부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교수님들도 다 젊은 분들이었다.
나는 갑자기 젊어진 듯 착각에 휩싸인 채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강의내용이 달콤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신선하고 재미있는 세계가 있었구나!
어젯밤 야근으로 눈은 무거웠지만 전혀 졸립지가 않았다.
교양영어 시간에 들어온 여교수님, 꼭 우리 딸 방실이와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는
예쁜 선생님이었다. 체격도 자그마한.......
강의실에 들어오자 마자 모든 말을 영어로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새내기 대학생인 내게 어리둥절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선생님이 먼저 인사를 한다는 점이다.
중학교 때는 차렷! 선생님께 경롓! 이었는데...
어찌 됐든 영어로 출석도 불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네” 아니면 “예”로 대답을 한다.
나는 장난끼를 발동하여 “yes sir”로 대답했다.
그랬더니 학생들은 와! 하고 웃고
선생님은 역시 영어로 말하기를 여성에게는 “yes mam”이 적절한 대답이라 했다.
그 말을 알아듣는 것도 거의 눈치로였다.
그 것이 계기가 됐는지 교수님이 reading 과 construction을 나만 두 번씩 시켜
학우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나의 적극성을 좋게 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출석수업의 평가시험에서는 생각처럼 높은 점수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기만 했다.
재미있는 과목도 있었지만 내 능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이 더 많았다.
역시 학문의 길은 험난하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모든 시간을 학과 공부에 할애하고 틈만 나면 방송강의 녹화테이프를 봤다.
가장 속이 상한 것은 열 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고 암기를 못하는 점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암기과목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기말 시험을 보고나서 바로 답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대학신문에
정답이 발표되면 다시 채점해 보는 시간도 즐겁고 스릴이 있었다.
한 학기만 장학금을 놓치고 대부분의 학기는 장학생으로 다녔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정작 완전한 장학생이 된 적은 단 한 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점 3.3이상이래야 전액 학비면제 장학생이 되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한 번 얻은 3.3점에도 기구한 사연이 있다.
애초에는 3.24........점이었는데 정답정정 한 문제가 나중에 밝혀지면서
0.0..점이 올라 소수점 두 자리에서 반올림되는 덕에 3.25....가
3.3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면앙정가에 관한 그 문제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2학년이 되던 해 즉 2000년 여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연이어 한 달 후 나를 사위 겸 아들, 때로는 친구처럼 대해주던 장인이
세상을 뜨셨다. 나의 열렬한 팬 두 분이 가신 것이다.
내가 졸업하면 가장 좋아하실 두 어른을 잃고 나는 잠시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콘도에 입사한지 1년 3개월이 지났다.
전임 기관장은 해고를 당하다시피 퇴직을 했다.
일처리도 일처리지만 동료직원들과의 화합적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 탓도
퇴직의 큰 원인이 됐다. 영선반장도 그만 두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기관장 업무와
영선 일을 이어 받았다. 내 자랑이 되겠지만 영선반장이 이틀 걸려 할 일을 나는
한나절에 해치웠다.
동료직원들은 내가 기관장이 되기를 미리부터 바라고 있었던 만큼 대환영이었다.
가스안전관리까지 맡고 있었으므로 일인 삼역을 하는 셈이 됐다.
가스안전관리 책임자는 4년제 대학을 나와 나보다 두 급수 높은 단계의
자격증을 소지한 젊은 애였다. 물론 실무는 내가 훨씬 밝았지만
자격증이 문제였던 것이다. 또 한 번 학력의 차이에서 겪게 되는
비애를 맛 본 것이다. 어서 졸업을 해서 나도 기능사가 아닌 기사자격증을
따야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쨌든 1년은 좀 넘었을망정 입사직후 전임기관장과 악수를 하면서 속으로
다짐했던 기관장 자리의 확보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어깨는 무거워졌다.
업무량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나를 밀어준 동료들의 처우문제까지
신경을 써야 하게 되었으니 종종 사측과의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은 나의 밥그릇부터 챙겨야 했다.
세 사람 몫을 하니 세 사람분의 급료를 달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의 내 급료에다 20%의 액수만을 더 올려달라는 것이
나의 요구사항이었다. 더 정확히 따지자면 실은 또 한 사람의 일까지 하게 됐는데
그 일은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오수처리장 관리업무였다.
오수처리장이란 정화조라고도 하고 더 쉽게 설명하면 똥통을 말하는 것이다.
슬러지를 떠내거나 악취와 소음으로 요란스러운 정화조실에서 일할 때
나는 쓴웃음을 짖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이씨 왕가의 후손인 내가 대형 뒷간 청소나 하고 있다고 조상님이 굽어보시며
호통을 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나의 월급인상 요구는 사측의 무성의로 날짜만 늘어 나갈 뿐 관철되지 않았다.
마지막 시한을 내가 정하고 본부장한테 직접 요구사항을 말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 월급봉투를 받고 액수를 확인한 나는 그길로 집에 와서
유니폼을 싸가지고 콘도로 갔다.
미련없이 아듀!
그리하여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백수생활을 한 두 달의 휴직기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