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코스모스, κόσμος) 또는 세계
2023 09 19. - {나21011삶23하늘}
인류가 구석기를 지나 신석기로 들어서면서, 그나마도 자연 속에서 먹고 사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조금 하게 되었다. 먹거리의 변화: 재배와 사육. 이 삶의 양식은 구석기의 동굴문화에서 신석기의 아마도 움막 문화로 발전했을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약육강식의 터전에서 구석기의 불과 신석기의 돌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불과 돌의 이용은 금속(우선, 구리, 규석, 철)을 다루면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인류가 삶에서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은 기후변화(기상학)의 도움이었다. 빙하기를 지나 지구가 온난해지면 거의 기원전만년경에 동굴 밖의 삶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고, 비와 눈, 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면, 불과 돌도끼 등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대해 스스로 방어하고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사람이 슬기인이 되기까지 경험적으로 축적되고 전승된 지식은 불의 조작, 도구제작, 기상학 등은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는 삶의 방식이었겠지만, 사람이 지상에서 여러 곳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수렵과 채집을 벗어나, 여러 식물의 재배와 몇몇 동물의 가축화를 통하여 생활의 안정과 안락을 가져오는 것이다. 삶의 터전이 중요하다.
삶은 먹고 싸고, 자고 일한다. 한편으로 식량이 될 쌀농사와 밀농사를 풍부히 할 수 있는 지역으로 나일강,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인더스강, 황허강 등은 집단생활을 이루었고, 다른 한편 산중에서 신석기시대를 지나 구리의 활용으로부터 청동기 시대에서는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중요하게 등장하였다. 이쯤에서 거의 기원전 5천년경 쯤일 것이다. 이로서 터전들에 따른 문화들의 양태가 싹트기 시작했다. 환(桓, 영원의 뜻이라 하지만, 구결로 환하다, 밝다에서 왔다고들 한다)의 신화가 전개되는 것도 이 시기쯤인데 비해, 오직 분명한 역사의 기록은 이집트 무덤들에서 왕가의 기록으로 쿠프라왕의 피라밑이 5천3백전 쯤으로 여긴다.
인간이 삶의 터전을 자기의 일부로 만들고자하는 노력은, 먹거리와 도구제작을 넘어서, 잠자리를 만들고, 함께 모여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장소(성채, 도시)를 만드는 일도 필요했다. 오직 자연 조건에서 단순히 살기 위한 옷차림(의복)에서, 제도 속에서 치장하며 어떤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화는, 터전 안에 지위를 갖는 장소(집강소, 성소)를 만들어감에 따라 직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직분들이 분화하면서 분류되었을 것이고,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도시의 기능에 따라서, 이 직분들 중요성에 따라서 계층신분이 되었을 것이다. 계층 또는 계급이란. 터전에서 공적이라는 이름아래 사적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위계질서라는 제도 속에 직분을 계급으로 자리매김하였으리라.
사람들이 청동기 시절에는, 성채 안의 직능과 성채 바깥의 여러 직능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달랐을 것이다. 성내를 폴리스, 성밖을 노마드로 유비적으로 나눈이는 들뢰즈이다. 나로서는 이렇게 토지(영토)와 관계 속에서 생산과 생산연관에서, 손의 모습과 유비적인 십진법의 수가 활용되었을 것이라 보고, 그럼에도 토지 생산이 기후와 연관이기 때문에, 매년 돌아오는 홍수와 태풍의 영향을 고려하는 성채의 제사장은 12진법을 전수자들에게만 천문[책력]이라는 방식으로 전승했을 것이다. 중국에서 하도와 낙서의 차이도 그러하다. 전수자[지식인]들은 이런 산술의 수와 기하의 곡선 사이에 차이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밖의 인민들도 둥근 항아리에 담는 양과 사각형의 되로 담은 양의 차이를 알지만, 그런대로 유비적으로 비슷한 양을 같은 양으로 취급하는 정도의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그런데 산중에서 시작된 철기를 다루는 방식을 안다는 것은 거의 삶의 터전의 방식에 전환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도구는 생산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전쟁의 도구로서 약탈과 착취로도 쓰인다.
- [이 이중성은 자연의 이중성, 인간 자연(본성, nature)의 이중성에도 연관있을 것이다. 자연(본성)에서 왜 남과 여가 분류되고, 의식(영혼)과 행동(신체)이 분활되는지를 자연에게 물어야하지 않겠는가? 신학이 가짜라는 것은 신에게 물으면, 신탁처럼 인간이 대답할 것이고, AI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답은 알레고리 또는 우화일 뿐이며, 이런 가상성은 소설뿐만이 아니라 영화 등등에서 넘쳐나면서 전승되고 있다. 알레고리를 유비로 생각서도 안되고, 과학이 동원하는 연관이나 관계처럼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런데 왜 알레로기와 유비가 성행하는가 그것은 있다와 이다의 구분이 없는 서양언어들(산스크리트어, 그리스, 로마, 프랑스어, 영어, 독어) 때문일 것이다. 우리 입말은 있다와 이다가 전혀 다르다.]
삶의 총체에서 하늘의 운행과 지상의 노동(농사), 또는 도구제작 방식들에서 돌의 제작방식과 금속의 제련, 그리고 이들의 양자 연관에서 새로운 도구의 발전과 여러 사고(사유)방향들, 이런 것들이 서로 부딪힐 수 있었다. 먹거리의 농사에서 철기는 생산연관을 바꾸어 놓았고, 도구제작에서 거푸집은 동일형태를 많이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성채이든 밖이든 삶이 풍부해지고 잉여 생산물이 나오는 시기, 거지로서 현자들이(싯달다의 출가계기는 거지 현자의 만남이라고들 한다) 나오는 것은 이런 시대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삶에서 모자람을 보충하는 노력보다 잉여가치를 공짜로 먹는 안락과 편안이 무엇인지를 [아마도 극소수가] 알았다. .
안락의 여유에서, 농경과 목축이 이미 잉여가치의 생산이라는 것도 알았다. 경제학자들은 노동에 의해 잉여가치의 생산을 정확하게 말하려 하지만, 그 씨 하나에 열매를 얼마나 맺히고, 가축이 새끼를 얼마나 낳을지는 인간으로서 모르고, 단지 신(la Nature)만이 안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이때 신석기 시대 이래로 철기에 이르기까지 신이라는 용어는 신화든 철학이든 신학이든 개념 또는 관념이 아니었다. 개념 없는 인간이란 의미는 아니다. 그런 개념들에 어떤 인간을 대입시켜, 게다가 판단하려 드는 것이 문제거리였다. 이 문제을 아는 이들에게서는, 잉여 생산을 차지하는 방식에서 전쟁을 통한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 농사와 장사, 정치 보다 수백배의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수많은 나라에서 그리고 신의 용어를 형성하는 터전들에서 전쟁이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경험의 축적에서 직선 위의 산술과 원의 곡선에서 기하가 성립되고, 이들의 종합에서 불일치와 부조리 문제를 풀어보려는 노력은 삶의 터전에서 전쟁 없이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하는 현자들의 사유에서 이다.
삶은 먹거리, 잠자리에서 출발한다. 이런 삶에서 터전(영토)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훌륭타(아가토스, ἀγαθός)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았다. 훌륭한 인간은 먹고 싸고 자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서, 여러 지식을 종합하는 능력도 있어야하고, 터전에 사는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도록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훌륭타는 것을 안다. 그 훌륭타는 종합은 산술적 조합이라기보다 기하적 조화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플라톤에 이르러서는 정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훌륭타가 도시국가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도시국가 안에서든 밖에서든 정의가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라면, 즉 이런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전쟁의 두목인 황제나 참주가 집권해서도 안 되고, 그리고 해결을 위해 신화의 신들을 끌어들여서 안 된다고 한 이는 소크라테스였다. 적어도 중국에서 공자의 시대에도 전쟁이 아니라 논변으로서 인민의 삶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었고, 갠지스강의 싯달다도 인민의 삶에서 인연연기의 이해를 통한 고통의 해소를 삶의 평안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소수의 전쟁자들은 탐만치에 사로잡혀, 겉보기에는 전쟁의 승리를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전쟁광 집단의 사고방식이 다른 터전의 지배에 의한 잉여의 착추와 약탈에서 성채를 높이는 것을 자랑[오만]으로 삼는데 있었다.
현자는 정복자에게 조화를 가르치고 싶지만, 정복자 옆에서 잉여의 떡고물을 먹고 싶어하는 지자들은 성채의 높이 더욱 높게 만들어, 개돼지 취급당한 식민자들은 감히 함께할 수 없게 만드는 제도를 구축하고, 그 제도에 맞는 사고체계를 만들었다. 그 사고 체계를 위계질서에 맞게 만드는 작업은 시대마다 다른 가설들을 동원해서 만들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가설들 위에 선가정을 먼저 두었다. 이 선가정에 종교의 신이 있다. 고대의 영웅들이 신격화되었듯이, 시기마다 지식을 동원하여 제도의 위계를 만든 지자들을 성인이니, 군자니, 보살이니 하면서 높이 받드는 것도 이런 선가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대통령을 빛나는 발광체로, 또는 형광등 백개의 아우라로, 중세의 도미니크파 신도와 같은 표현처럼 구름 위에 빛나는 태양으로의 묘사는 철학에서, 이데아론에서, 빌려온 것이다.
정복자의 성채, 위계의 터전에서, 그리고 바깥의 노마들과 더불어 삶의 조화를 찾는 현자는 훌륭타와 조화롭다를 이룰 수 있는 근거와 이유를 반성하고, 성찰하고, 명상하고, 집중하여 총체적 경험을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지자의 아첨과 향유와 달리, 현자는 지혜와 함께(상부상조, 공감성)을 추구했다. 어쩌면 선전제로서 ‘산다’는 것은 땅위에 하늘 아래 산다. 산다, 숨쉬며(프뉴마), 먹고, 싸고, 자고, 일한다. 왜 일하냐, 동물로서 인간은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들의 세계는 서로 서로 먹이와 되살림의 순환에 있듯이, 인간도 그 되살림의 순환 속에 있다는 것이 선전제가 아니라 실재성이다. 이 기나긴 되살리는 순환들이 영겁회귀일 것인데, 신체의 삶이 끝나면 다른 신체(생명체)가 소비하고 재생산을 한다. 현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순환의 순간(두께 있는 지속하는현재, 일생)이라도, 신체를 지니는 과정에서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자는 먹거리도 잠자리도 어느 정도 해결되어 한 평생(일생) 동안에 조화로운 삶, 즉 일생의 두께(과정)에서 먹고 자고라는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터전 위에 하늘 아래’ 라는 것을 주목했을 것이다. 물론 하늘의 운행이 중요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잘 알았었기에, 중동에서는 12별자리에 상징의 그림을 그렸고, 동양에서는 12지의 동물을 알레고리로 표상했을 것이다. 현자들과 달리 지자들의 전쟁이 잦아질 때, 이 때는 각곳에 황제들이 지배하는 시기이다. 황제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맞춘 것은 그리스철학을 원용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일 것이다.
유학을 받아들인 조선조 지식인들도 세상을 나서기 전에 당연히 당대의 기본소통이었던 경전(사서삼경)을 익히고, 그리고 천문지리를 깨달아서 나가야 한다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천문지리, 하늘의 이치와 땅의 경험, 이것이 아마도 청동기부터 이어져 왔지만, 학문적으로 기하와 산술의 기원(아르케)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는 플라톤이었다.
터전에서 삶의 잘 이끌기 위해, ‘훌륭타’라는 사람이 되는 것을 도덕론이라 하자. 그 도덕론에는 훌륭한 사람이 하는 일과 해서 안 될 또는 못할 일을 구별한다. 공자도 길을 나서는 세 사람에서, 한사람에게 해야 할 것을 배우고, 다른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을 것을 배운다고 했다. ‘훌륭타’라는 인간이 성채의 위계에서 어느 지위에 있느냐고 물으면 지적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직분의 기능을 아느냐 정도일 것이다. 일생에서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지자도 현자도 잘 안다. 위계 계급이 아닌 여러 분야들이 각각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것도 현자이다. 옛 기준으로 일생 환갑, 즉 예순의 작은 순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이라는 천구 순환의 과정을 모방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철학자도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이런 천구순환을 넘어서 우주의 대순환을 사유했다. 이는 이집트의 발달한 책력을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상식을 토대로하여 경험을 체계화하여 수학적인 방향(양식)으로 전개해 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플라톤시대에 이집트든 바빌론이든 은하수의 별들이 은하계라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안드로메다자리의 별하나가 전파 천체망원경을 통해 설명하는 수많은 별들이 모인 성단이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의 운행이 지상의 삶에 먹거리 농사뿐만이 아니라, 잠자리, 옷차림 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 운행의 설명이 지상에서 선을 긋고 행선지로 여행가는 길이를 숫자로 세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것도 안다. 하늘의 60진법과 지상의 10진법이 그 당시에는 체계상 대체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정도로 잘 알지 못했다. 게다가 하늘의 운행이 땅의 터전위에 그려서 표현해 보아도, 경험적으로 360도가 되는 것도 아니라, 달력(책력)을 만드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지식을 가진 자들이 이집트의 제사장들이었고, 아마도 파라오는 제사장을 겸할 수 있는 능력이거나, 공동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대의 지자들은 땅(지구)위에 하늘아래 산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어떤 관계 또는 연관, 비유(아날로지)와 알레고리 사이에 있다는 것으로 여겨, 전승된 지식들을 종합하여 탐구를 계속했으리라. 땅위에 하늘, 그것의 끝을 상식(오관)을 통해 알 수 없지만, 의식(영혼)은 그 한계를 넘어서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내가 보기에 그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도 한계 안에서 이고, 데카르트의 무한의 사유도 한계 안이며, 칸트까지도 한계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한계 안에서 사유했으며, 이 한계를 학문적으로 넘어서는 것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실증적으로 넘어서는 것은 1945년경의 전파망원경에 의해서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종합들도 AI가 무한히 작업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의 한계처럼 한계 안에 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하듯이, 그 한계는 아무도 모른다, 신[부처]만이 안다고 할 때, 그 신은 아직 설명 가능하지 않은 신인 셈이다. 벩송의 표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또는 중세 중기에 신의 모습을 모른다는 점에서 ‘정해지지 않은(부정) 신학’에서 말하는 신이란 용어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이야기를 알레고리라고 여겼고, 그 신들처럼 황제나 참주가 인간의 삶의 지배할 것이라는 하는 설명을 유비적이라 여겼다. 하늘과 땅이 대비는 알레고리와 유비를 거의 동시에 경험적으로 포함하고 있어서, 두 물체의 기원(아르케)을 설명하기 위해 따로 떼어내지 못할 정도였던 것은 상식(5관)을 기반으로 사유했기 때문이다.
상식상 지구를 기준으로 하늘의 운행의 주기적 순환은 운동이었지, 정지는 아니었다. 그 운동을 동일하게 계속해서 하며, 눈으로 보기에 변화도 없고, 영속적이고 영원해 보이며, 그리고 그 자리 그대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부동(움직이지 않는)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불멸이라 불렀을 것이다 또는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 불멸이 신이라는 용어에 쓰인 것은 신화와의 알레고리 때문일 것이다.
불멸의 하늘과 변화의 땅 사이에, 인간과 모든 물체(기상, 돌, 광물)와 생명체가 거주하고 있다. 이 거주처를 그리스인은 우주(코스모스 κόσμος, cosmos)라 부르고, 로마인은 우주(univers)라 부르고, 르네상스 이래로 세계(le monde, the worls, die Welt)라 부른다. 중국에서 종요(鍾繇,151-230)의 천자문(千字文)에까지 우주(宇宙)는 이런 알레고리에서 성립한다. 현대적 의미의 학문은 아니지만, 상식에 부합하는 경험적 종합을 체계화하는 노력을 계속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것을 휠레(ὕλη 물질)이라 부르기도 하고, 자연(퓌시스, φύσις)라고 하면서, 이것의 기원적 물(소마, σώμα, 몸)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늘과 땅을 포함한 모든 경험적 물체(소마, 휠레, 퓌시스)는 이 터전에서 모든 것을 만들고 변화시키고 변형하고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이는 전체적 모습이 그 당시 현존모습으로 있다는 것이 조화롭다고 여기는 비유는 낙관적이다. 왜 이런 변화가 인간의 삶을 평등하고 동일적이게 하지 못하고 불평등하고 이질적으로 내놓았느냐고 본다면 비관적이다. 우주, 즉 자연 전체의 모습에서 변화 속에서 불변의 체계, 또는 천체 운행과 같은 규칙적인 체계를 찾아내어, 그에 맞게 조화롭게 사는 것이 도시국가든 노마드든 진솔한 삶이며, 정의로운 삶이고, 이런 삶의 양식을 만들며 살려고 노력하는 이가 ‘훌륭타’이며,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보았다. 이 행복한 삶을 사는 이를 현자라 부른다.
훌륭한 인간이란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이고 또한 타인에게도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살기 위해서 도시국가의 삶의 일체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각자는 자기 능력을 발휘하여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그 삶은 하늘과 땅에 필연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자연 또는 물질로 된 우주를 탐구하는 자가 진정으로 현자에 이른다는 생각을 한 이들이 그리스인들이다. 이들이 이런 사유과정에서 분별과 대조에서, 분류와 계열에서, 차이와 차히를 분간하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 서양 2천5백년 철학사이다, 20세기에 와서는 동서양이 구별없이 기초교육으로 열여덟까지는 수학의 미분화와 생물학의 세분화를 배우며 무한과 무한정을 사유하게 하는 것도 이런 영향이다.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우주와 세계(세상)의 동일시하는 비유는 지나갔다. 21세기에는 지구를 넘어서 표현하는 이 사유의 폭을 우주라 부를 수 있다. 칼 세이건의 우주(Cosmos, 1980)라는 책에서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우주의 저 넓은 한계를 다루고 있지만, 여전히 지자의 한계 속에 있다. 현자는 지구상에서 사람들의 사이의 일생(une vie)과 인간 종의 온생애(la Vie)의 연관을 탐문한다.
열여덟 나이부터 수년간에 21세기의 법조문을 외워서 위계의 상위를 차지하고 인민을 착취하면서 사적 재산을 부풀리는 자들은 조선시대 같으면 사악한 자들로서 귀양 가거나 사약을 받았을 것이다. 조선조의 현자들은 어려서 열여덟에 사서삼경을 넘어서 12경전을 통찰하여 사회라는 터전으로 나갔다. 이런 전통을 무시하고, 일제시대부터 고시자들은 법조문을 외웠지 삶에 대한 총체적 사유를 한 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법칙과 규칙의 전제를 인민에게 두지 않고 제국주의에 두고 있으며, 이들의 선전제로서 자본주의의 이익착취를 받아들이면서 법의 집행을 통해 조폭의 부두목도 아니고 마치 삼두목 사두목처럼 떡고물과 삥땅을 뜯고 있다. 현대의 노동 분업이 긴 것만큼이나 잉여생산은 엄청나다. 잉여와 착취에 눈이 어두워 눈에 들보가 들어간 자들이, 비판자의 눈에 티끌을 문제삼아 감옥을 보내려 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오죽하면 고위공무원들이 남아도는 돈이 많아서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소리가 이 기본심금인 인민들 사이에도 돌겠는가.
세상이라는 우주를 생각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세상은 전지구적으로 엮여있다. 인민이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삶의 터전에 생산력을 높여놓으면, 자본 제국에게 수탈당하고(아이엠에프), 일본에게 착취당하면서도(현정세), 상부의 고시자들은 개돼지 취급하는 자들에게 고혈을 빠는 시대에, 만에 하나 또는 백만에 하나라도, 현자의 길을 추구한다면 사유를 달리하고 입말을 달리하여야 할 것이다.
통시적으로 긴 역사에서 우주를 사유한다는 것은 세상을 경험적 총체로서 다루는 것이다. 생애와 온생애의 긴 과정을 생각하며, 노력하고 점수(漸修)하며, 현자의 길을 만들어보자. 만에 하나가 아니라, 백만에 하나라도, 8천 5백만의 입말을 하는 이들 속에서 달리 사유하는 이가 8백여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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