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양도와 횡령죄
대상판결 : 대법원 1999. 4. 15. 선고 97도666 판결
I. 사실관계 및 재판의 경과
피고인은 1995. 4. 1.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당시 피고인이 피해자 A에 대하여 부담하고 있던 1,150만 원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하여 공소외 B소유인 주택에 대한 피고인의 임차보증금 2,500만 원 중 1,150만 원의 반환채권을 A에게 양도하고도 B에게 그 채권양도 통지를 하지 않은 채 1995. 4. 20. C복덕방에서 B가 반환하는 임차보증금 2,500만원을 교부받아 이를 피고인의 동생 D에게 빌려주었다.
피고인은 이미 A에게 그 반환채권을 양도함으로써 A의 소유가 된 1,150만 원을 보관하던 중 이를 A에게 돌려주지 아니한 채 D에게 빌려주어 이를 횡령하였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제1심 법원은 피고인이 피해자 A와의 위탁신임관계에 의하여 A를 위하여 위 B로부터 반환받은 임대보증금 중 금 1,150만원을 보관하는 지위에 있지 않다고 판단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서울지법 1996. 10. 10. 선고 96고단8038 판결). 검사가 항소하였으나 항소심법원은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였다(서울지법 1997. 2. 5. 선고 96노7892 판결).
검사가 상고하였고, 대법원은 전원합의체판결을 통해 피고인의 행위가 횡령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II. 판결요지
[다수의견] 채권양도의 당사자 사이에서는 양도인은 양수인을 위하여 양수채권 보전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자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채권양도의 당사자 사이에는 양도인의 사무처리를 통하여 양수인은 유효하게 채무자에게 채권을 추심할 수 있다는 신임관계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나아가 양도인이 채권양도 통지를 하기 전에 채무자로부터 채권을 추심하여 금전을 수령한 경우, 아직 대항요건을 갖추지 아니한 이상 채무자가 양도인에 대하여 한 변제는 유효하고, 그 결과 양수인에게 귀속되었던 채권은 소멸하지만, 이는 이미 채권을 양도하여 그 채권에 관한 한 아무런 권한도 가지지 아니하는 양도인이 양수인에게 귀속된 채권에 대한 변제로서 수령한 것이므로, 채권양도의 당연한 귀결로서 그 금전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기 위하여 수령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로지 양수인에게 전달해 주기 위하여서만 수령할 수 있을 뿐이어서, 양도인이 수령한 금전은 양도인과 양수인 사이에서 양수인의 소유에 속하고, 여기에다가 위와 같이 양도인이 양수인을 위하여 채권보전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양도인은 이를 양수인을 위하여 보관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대의견] 채권양도인과 채권양수인과의 사이에 채무자가 채권양도인에게 채무의 변제로서 금전을 교부하는 경우, 이를 채권양수인에게 귀속하는 것으로 하기로 특약을 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채권양도인이 채무자로부터 교부받은 금전을 그대로 채권양수인에게 넘겨야 하거나 채권양수인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볼 근거도 없으므로, 채권양도인이 위 금전을 채권양수인을 위하여 보관하는 지위에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채권양도의 통지를 하는 등 대항요건을 갖추어 주어야 할 민사상의 의무를 진다는 이유만으로, 명확한 법리상의 근거 없이 채권양도인이 채무자로부터 교부받은 금전이 채권양수인의 소유에 속하는 것이라 하고 또, 채권양도인이 이를 보관하는 관계에 있다고 의제하여, 횡령죄의 구성요건해당성을 인정하려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도 위배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채권양도인이 채무자로부터 인도받은 금전을 임의로 처분하는 행위를 가벌성이 큰 배신행위라는 이유로 처벌하려 한다면, 이는 형법의 자유보장적 기능을 바로 훼손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배신행위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고, 배신행위 중에서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행위의 가벌성이 크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처벌된 전례가 없는, 채권양도인의 위와 같은 행위를 새삼스럽게 처벌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법리가 명확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원칙에 따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III. 평 석
1. 대상판결의 의의
채권양도와 횡령죄에 관한 이전의 판결 중에는 채권양도인이 채무자에게 양도통지를 한 ‘이후’ 채무자로부터 금전을 변제받은 경우 양수인의 채권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임죄의 성립을 부정한 판결이 있었다(대법원 1984. 11. 13. 선고 84도698 판결). 따라서 대상판결은 채권양도인이 채무자에 대한 양도를 하기 ‘이전’에 채무자로부터 변제받은 금전을 임의소비한 경우 횡령죄의 성립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2. 평가
첫째, 피고인에게 횡령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피고인이 받은 금전에 대해 양수인이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대상판결에서 채무자인 B의 변제가 유효하고 B의 의사는 양수인 A에게 변제한다기 보다는 피고인에게 변제한다는 것으로서 B가 양수인 A에게 금전에 대한 소유권을 양도할 의사는 없기 때문에 A가 소유권을 취득한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 반대의견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수의견의 보충의견은 이 경우 민법상 소유권과는 다른 형법상 소유권 개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형법상 소유권개념(정확하게는 형법상 소유권개념이 아니라 소유개념)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예외적으로 피고인의 행위를 처벌해야 할 충분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지만, 다수의견과 보충의견은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금전은 재물의 성격과 재산상 이익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피고인이 변제받은 금전은 재물의 성격 보다는 재산상 이익의 성격이 좀더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양수인 A가 가진 권리는 금전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고 채권에 불과하므로 피고인의 행위에 의해 A가 침해받은 권리는 소유권이 아니라 채권이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피고인의 죄책으로서는 횡령죄가 아니라 예비적 공소사실인 배임죄를 문제삼아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