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셋째 주일(4.19혁명기념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4월 14일(주일)
전도서 12:1-8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즐겨라!“
전도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헛되다’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헤벨'(הֶבֶל)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대부분 헤벨을 ‘헛되다’는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의 관점에서 보면, 헤벨이 단순히 헛되다는 뜻으로만 쓰이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어요. 헤벨은 원래 ‘숨, 입김, 안개, 이슬’ 등 잠깐 있다 사라지는 현상을 말해요.
그리고 헤벨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게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가치판단으로 쓰이기도 해요. 하지만 잠깐 있다 사라지는 입김이나 안개나 이슬 등이 무의미하고 헛된 건 아니지요. 그러니 헤벨을 단지 헛되다는 말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되겠지요. 나중에 보겠지만 헤벨은 일차적으로 잠깐 있다 사라지는 현상으로 보는 게 적절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를 읽는 독자가 헤벨의 의미를 문맥 속에서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까닭은 헤벨이 전도서를 이해하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지요. 헤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면 전도서가 어떤 말씀을 하고 무엇을 강조하는지 그 맥락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전도서의 저자가 누굴까 궁금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잠언처럼 전도서 전체를 둘러봐도 ‘솔로몬’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아요. 다만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이란 말은 다윗의 아들이라기보다는 그의 후손이라는 넓은 의미로 쓰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전도서의 저자가 다윗의 후손이란 뜻은 아닙니다.
우리 말 전도자(傳道者), 곧 ‘도(道)를 전하는 자’로 옮긴 히브리어 ‘코헬렛’(קֹהֶלֶת)은 ‘불러 모으다’는 어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 뜻은 사람들의 모임을 이끌거나 그 모임에서 말하는 사람을 의미해요. 여기서 코헬렛이 전하고자 하는 ‘도’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코헬렛(전도자)이 솔로몬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코헬렛이 말하는 지혜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중요하지요.
전도서는 잠언과 욥기와 더불어 ‘지혜서’(智惠書)에 속합니다. 지혜란 장르는 시대와 역사, 문화를 초월하는 인류 공통의 기반을 두고 있어요. 거대한 창조 세계 속에 아주 작은 피조물인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물음은 고대나 현대나 어느 시점에서도 항상 되물어 온 거예요. 전도서는 서기전 3세기경에 나온 산물이에요. 하지만 전도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지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요.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전도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그 의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전도서의 관점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헤벨’(הֶבֶל)입니다. 헤벨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여 문맥을 따라가다 보면 창조 세계에 발 딛고 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헤벨은 입김, 안개, 이슬 등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전도서 1장 2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 개정은 어떻게 번역되어 있는지 볼까요?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1)
헛되다고 반복하니까 마치 허무주의를 부추기듯 싶습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말하고 싶은 건 인생이 단지 허무하다는 게 아녜요.
여기서 헤벨이란 단어가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어요. 가톨릭 성경과 우리말 성경은 “허무”로, 또 우리말로 번역된 모든 성경(개역, 공동번역, 새번역, 쉬운성경 우리말 성경 등)이 “공허한, 텅빈”(vanity) 또는 “무의미한”(meaningless)으로 번역하고 있어요. 이런 번역은 아마도 동양적 사고와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벨’ 본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면 전도서 1장 2절이 이렇습니다.
“코헬렛은 말합니다. 잠깐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입니다. 잠깐 있다 사라지는 이슬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안개일 뿐입니다.”
지금 전도자 코헬렛은 전도서를 읽는 독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헤벨은 원래 입김(시 62:9)이나 수증기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새벽녘 풀잎에 맺히는 이슬이나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헤벨이란 말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지혜란 무엇인가』, 송민원 지음, 감은사, P.193-194)
여기서 전도자가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이 입김, 이슬, 안개와 같다는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속성과 같지요. 그런데 전도자는 단순히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게 아녜요. 3과 4절이 이어서 인간의 유한성을 설명하고 있어요.
3절을 보기 전에 4절에 나온 ‘영원’이란 말을 먼저 보겠습니다. ‘영원’(올람/עוֹלָם;eternity)은 ‘감추다, 숨기다’는 '알람'(אָלַם)이란 말에서 나왔어요. 그 뜻은 ‘아주 먼 옛날(太古)’입니다.
그러고 보면 영원은 헤벨의 반대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현대인들은 ‘영원’이라고 하면 무한히 먼 미래를 떠올리지요. 이와 달리 과거지향적인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원을 아주 먼 과거로 인식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땅은 영원히 있도다.”(4절) 할 때 영원이란 말은 단지 먼 미래를 뜻하기보다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쭉 존재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해 아래에서 인간이 아무리 온갖 수고를 한들 과연 무엇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3절), 곧 전도자는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한 거예요.
오늘 본문 3절에 “무엇이 유익한가?”에서 ‘유익’으로 옮긴 히브리어 이트론(יִתְרוֹן)은 본래 ‘남다, 남기다’는 히브리어 '야타르'(יתר)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 남아있는 상태, 곧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파생된 말이 ‘유익’ 또는 ‘보람’ 등 어떤 것에 가치판단이 반영된 뜻이에요.
그러니까 전도자가 ‘무엇이 유익한가?’ 할 때 이트론은 아무것도 무언가를 남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남길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여 ‘유익’이란 번역은 적절치 못한 거지요.
이런 의미에서 3절을 보면, 이 땅에서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이 정하신 패턴(원리)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4절을 보세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개역 개정)
여기서 한 ‘세대’(도르/לַדֹּֽור)는 30~40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긴 시간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עוֹלָם)의 관점에서는 잠깐 있다 스쳐 가는 시간(헤벨)일 뿐이지요. 그리고 ‘땅’(에레츠/אֶרֶץ)은 지구 전체, 또는 온 세계를 뜻합니다. 하여 영원은 헤벨과 대립하는 아주 긴 시간을 뜻하지요.-(『더바이블전도서』, 송민원지음, 감은사, P,35)
이런 의미에서 보면, 4절을 이렇게 풀어 번역할 수 있어요.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와도 이 세상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 서 있다.“, 곧 한 세대 사람들이 가고 또 다른 세대 사람들이 와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변함없이 여전하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전도자는 인간이 잠깐 있다 사라지는 입김, 이슬, 안개와 같은 존재, 곧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이란 눈으로 보면, 사람이 100~120세를 산다 해도 잠깐 있다 사라지는 존재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잠깐 머물다가 떠나는 인간이 아무리 애쓰며 수고하고 노력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전도자의 지혜는 거대한 우주적인 눈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이제 전도자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해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곧 불변성(不變性)입니다. 전도자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올람(영원)과 헤벨로 나눕니다. 올람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지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해와 바람과 강물이 여기에 속해요.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이리저리 불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람과 반대되는 개념이 있다고 했어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헤벨입니다. 올람 반대편에 헤벨, 곧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창조 세계를 잠깐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여기서 전도자가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던져주는 자기반성적 지혜가 흥미롭습니다. 그게 바로 전도서의 핵심 주제이면서 기본 전제인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과 인간을 분명하게 서로 비교해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의 영원성과 그 창조 세계에 잠깐 머물다가 가는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선 헤벨 존재인 인간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이란 거대한 우주 속에 작은 먼지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창조 세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5~7절 말씀이 바로 변함없는 올람, 곧 창조 세계의 불변성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해는 언제나 뜨고 집니다. 오늘 밤 서산 너머로 지는 해가 다음 날 어김없이 떠오릅니다. 바람도 항상 붑니다. 남풍이 불었다가 북풍이 붑니다. 어제 불었던 바람은 오늘도 붑니다. 강물은 언제나 바다를 향해 흐릅니다. 그래도 바다를 다 채우지는 못합니다. 흘러간 강물은 돌아와 다시 흐릅니다.“-(『더바이블 전도서』, P.256)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잠시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인 인간은 변함없는 창조 원리에 어떤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거지요.
8절에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표준새번역은 ”만물이 다 지쳐 있다“고 번역했습니다. 표준새번역이 히브리 원문에 따라 번역했어요. ‘피곤하다’는 말로 번역한 히브리어 야게아(יָגֵעַ)는 형용사로 ‘지친, 기력이 쇠약한’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만물의 운행이 지쳤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곧 만물이 지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만물은 앞에 나온 해와 바람과 강물, 그리고 땅에서 발생하는 자연현상을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만물의 운행은 변하지 않지요. 말하자면 그 운행이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운행이 계속해서 반복된다(9절)는 걸 알 수 있어요.-(위의 책, P.39-40)
8절에서 전도자가 의도한 바를 좀 더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만물이 지쳤음을 어떤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만물이 힘들어 운행을 멈춘 것을 어느 한 사람도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만물, 곧 해와 바람과 강물이 지치고 힘들다고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해가 그만 뜨고 바람이 그만 불고 강물이 그만 흐른 적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런 것을 보도듣도 못했습니다.-(위의 책, P.256)
그렇습니다.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은 어떤 이도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패턴)가 바뀌는 걸 경험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전도자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원리가 변하지 않고 계속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반복됩니다.
9절에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는 말이 뒤따라 나옵니다.
여기서 ‘새것(하다쉬/חָדָשׁ)이 없다’는 것은 창조의 원리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겁니다. 이건 창조의 원리를 정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 것입니다.
전도자가 말하려는 건 이런 것입니다.
”이미 존재한 게 또 존재하고, 이미 행해진 게 또 행해진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9절)
사실, 미래지향적인 현대인에게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은 실망스러울 거예요. 그러나 전도자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창조의 원리가 변함없이 계속 반복된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잠시 살다 갈 뿐, 어떤 것도 남기는 것(이트론/יִתְרוֹן)이 없고, 새로운 것(하다쉬/חָדָשׁ)도 덧붙일 수 없는 거지요.
우리는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경험이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왔습니다. 전도자는 이미 있었던 게 다시 계속 반복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원리를 사람이 새롭게 바꿀 수 없다는 뜻이에요.
하여 10절에서 전도자는 말합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보고 “보라, 이것은 새로운 것이다.”하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계속되어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건 새로운 것입니다’하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하는 뜻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계속 반복되어왔을 뿐이라는 거지요.
여기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있어 온 것’, 곧 전도서는 굳이 지혜를 담보하는 잠언처럼 옛것을 배울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말하자면 애써서 옛것을 지킬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 이유는 옛것은 늘 반복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지혜를 보증하는 옛것을 새로운 젊은 세대가 배워야 한다고 말해요. 하지만 전도서는 그렇지 않아요. 지혜를 보는 관점이 잠언과 전도서가 차이가 있지요.-(『지혜란 무엇인가』, P.201)
그래서 전도자는 누군가가 애써 옛것에 새로운 것을 덧붙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건 이미 오래전 세대에도 계속되어왔으니까요. 올람이란 과거지향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표현도 창조의 원리에 대한 불변성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1절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다’(11절)는 말이 창조 원리의 불변성과 이어지고 있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잠시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헤벨)인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변화를 줄 만큼 새로운 것, 기억될 만한 것을 남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기억’(직카론/זִכְרוֹן)은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을 잊지 않는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이자 지혜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말하는 ‘기억’은 다른 지혜를 말하는 거예요. 곧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변하지 않다는 거예요. 이런 원리에 잠깐 머물다 가는 인간은 어떤 이도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에 영향을 끼칠만한 새로운 것이나 기억될 만한 것을 남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예전에 있던 걸 모르는 거예요. 시야를 길게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11절). 그러니 잠시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인 인간이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바꿀만한 어떤 흔적을 남길 수도 없고, 기억될 만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도 없는 거지요.
우리 인간은 영원이란 시간에 비해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입김, 이슬, 안개와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해 아래에서 애써 수고해도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원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만 있던 게 뒤에 다시 있을 뿐이지요.
오늘 전도자는 ‘영원한 것’(올람)과 ‘잠깐 있는 것’(헤벨), 곧 하나님과 인간을 대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잠시 머물다 가는 유한한 존재(헤벨)인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어요.
영원(올람)의 세계에 사는 헤벨인 인간이 지닐 삶의 자세를 전도자는 ”현재 이 순간을 충실(忠實)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라는 말씀이 전도서 3장 12절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고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직역성경)
좀 더 쉽게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중에 알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더바이블 전도서』, P.266)
그렇습니다. 유한한 존재(헤벨)인 인간이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원리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써 수고하고 노력해도 헤벨인 인간은 영원의 세계를 다 파악할 수 없어요. 게다가 창조 원리에 아무것도 덧붙이거나 남길 수도 없어요.
그러니 전도자는 주어진 일상의 순간순간을 기뻐하며 즐기라는 거예요. 애써 수고하고 노력하여 얻은 것을 기쁨으로 누리라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 주신 ”선물“(13절)인 거예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라틴어로 이렇게 속삭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주어진 것을 즐겨라!“
창조 세계에 잠시 머물다가 가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지금 주어진 일상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는 거예요. 그 순간을 기뻐하고 즐기며 누리는 거지요. 미래는 예측할 수 없어요. 그러니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고 날마다 현재 이 순간을 충실히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선한 일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산하 시인의 시집에 <악의 평범성 3>이란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에 잠시 머물다가 가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꼬집고 있습니다.
한 번 같이 낭독하겠습니다.
<악의 평범성 3> - 이산하
몇 년 전 경주와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 포항의 한 마트에서 정규직은 모두 퇴근하고
비정규직 직원들만 남아 헝클어진 매장을 수습했다.
밤늦게까지 여진의 공포 속에 떨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아기 엄마들이었다.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지진은 무너진 건물의 속살과 잔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간의 부서진 양심과 잔인한 본성까지도 보여준다.
정말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불쑥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내일모레가 4.16 세월호참사 10주기입니다.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사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기억하며 삶으로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요?
세월호참사 때 단원고 교사인 고 최혜정 선생님이 그랬다잖아요.
“걱정하지 마. 너희들 먼저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
비록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유한한 인생이라지만 적어도 최혜정 선생님과 같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 /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세계가 영원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것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앞으로 남은 인생이 얼마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람 됨됨이로 현재 이 순간을 기쁘게, 신나게, 충실히 선을 행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