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당한 스데반의 설교
이천우 목사
사도행전 6장 8절-7장 6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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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46-53절 / .........46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47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49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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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으며 여기에는 유대교 대제사장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집사로 임명받은 일곱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인 스데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사람들 앞에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큰 기사와 표적'은 큰 기사 따로이, 표적 따로이 각각 행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 앞에서 놀라운 이적을 베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이적의 행함은 이것의 앞에 붙고 있는 말인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것으로 있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고 그러한 스데반을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 나가게 하시며 놀라운 이적을 행하게 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능력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체포를 당합니다. 어느날 스데반이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으로 '자유인의 회당'(리버디노 회당)이라고 불리는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 일로 여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서 어떤 자들이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능히 당해내지 못하자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서 스데반이 모세를 저주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격분하여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율법학자들과 함께 스데반을 붙잡아 의회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은 계속하여서 "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모세의 율법도 모두 없애버릴 것이라고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소."라고 하며 스데반이 성전과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는 말을 유포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과연 그런 사실이 있는가를 물었고, 스데반은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판으로서 이 모두를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어디에다가 성전을 지을 수 있겠는가를 말하면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처럼 목이 뻣뻣하여 조상들이 오실 의인을 예언한 선지자를 죽인 악행을 하였으나 이들은 그 의인을 잡아죽이는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성령을 거역하였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스데반의 말을 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는 소리쳐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하며 손으로 자신들의 귀를 틀어막아 스데반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스데반을 향해 달려들어서 성밖으로 끌어내고는 돌을 들어 쳐죽였습니다.
이때 스데반은 돌들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속에서 "주 예수여,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끓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한 것은 그가 성전과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는 말을 하여서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의 말에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또 모세의 율법도 고치겠다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 스데반이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의도적으로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스데반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말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성전관과 모세의 율법관과 다른 말을 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성전관과 모세의 율법관은 어떤 것이길래 스데반이 성전과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는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과연 스데반은 그러한 말을 했기 때문에 고소 당한 것일까요?
성전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돌로 만든 성전이 등장하기 전에 천으로 만든 성막을 만들어 이스라엘 한 가운데 두게 하신 데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광야에 머물게 하고 있는 중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율법을 주실 때 성막도 만들게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26장 1절에서 말씀하신 '너는 성막을 만들되 양장 열 폭을'이 그것인데 이 말은 "너는 열 폭 천으로 내가 살 성막을 만들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성막이란 용어는 히브리어로는 미쉬칸이라고 부르는데 '머물 곳'을 의미하며 장막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막 곧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뜻합니다.
우리가 성막이란 이 용어만 두고 생각한다면 천으로 만든 집에 불과한 성막을 하나님이 거하여 계신 곳이란 한정된 공간과 집의 구조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막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곳에서만이 아니라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에 이르기까지 모세 오경 전반에 걸쳐서 언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막을 하나님이 만들라고 지시한 이유는 이 용어가 의미하고 있는 '머물 곳'이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여서 그곳에 임재하여 계시고자 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신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있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신의 인식은 하늘에 계신 분으로 위엄 있고 권세가 있는 분으로 감히 지상의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참신이신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 함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과연 사람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과 같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과 사람이 같아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사람 또한 거룩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룩하시나 사람은 그렇지 못하고 죄로 더러워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구별을 짓는 곳을 두시고 이곳에 자기 백성을 두어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또한 자기 백성들도 거룩한 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로 들어와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과 함께 하시는 방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성막이 마련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막이 마련되지 않으면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 두시고 각 지파를 동서남북 사방에 배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성막이 어떤 곳이길래 하나님께서 이곳에 거하시는 것이며, 또한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또한 거룩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가?요. 성막에는 죄인인 사람을 거룩한 자로 만드는 특별한 효험이 있는 것인가요? 성막 그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다 거룩한 자로 구별시킨 자를 두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에게 속한 자가 되게 하여서 이스라엘도 거룩한 자로 삼으시는 것에 의해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먼저 거룩한 자로 삼으신 자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봉사할 레위 지파를 선택하시고 여기에서 또한 아론과 그 자손을 선택하여서 제사장 삼아 성막에 두시고 이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구별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제사장 된 아론과 그 제사장직을 잇는 아론의 자손들은 성막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서 제사장에 속한 이스라엘이 되게 하여서 이스라엘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성막에 두시고 이들과 만나시는 관계를 가져나가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자기 백성들이 알게 하시고 그에 대한 믿음에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에서 해 나가셨습니다.
제사에서 드려지는 희생 제물에 의한 헌제사역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흘려지는 피가 있으며, 이 피를 인하여 하나님의 죄용서가 있으며, 이 피 흘림으로 나누어져 공급되어지는 살로 인하여 화목한 생명을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막은 이곳에 제사가 드려질 때에 비로소 그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봉사하여 섬기는 제사장 또한 그가 행하는 제사 사역의 희생제물과 일체를 이룰 때에 비로소 그 직무 수행을 온전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사장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것 같이 자신의 죄사함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제물을 드리는 제사 행위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해서 있어야 하며, 또한 성막도 계속해서 필요하게 됩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리가 가진 더 나은 제도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더 위대하고 완전한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안쪽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리셨습니다. 그 피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흘리셔서 그 피로 몸소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히 9:11-12).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있는 참성전을 본떠서 지은 땅 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은 우리의 친구로서 하나님 앞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땅 위의 대제사장이 해마다 정한 날에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뿌린 것처럼 자신의 몸을 해마다 희생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래야 한다면 세상이 시작되던 때부터 몇 번이고 간에 계속해서 거듭하여 죽으셔야 했을 것이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의 끝 날에, 죽음으로 죄의 세력을 영원히 제거하시려고 단 한 번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치 인간들이 한 번 죽은 뒤에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들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려 한 번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우리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히 9:24-28)
그러나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성막을 주신 의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임의대로 성전을 생각하고 다루어 갔습니다. 성전은 어느 때부터 그리스도 없이 제사 의식화가 된 곳으로 바뀌었으며, 이런 그들에게서는 성전 생활을 관습화된 전통을 좇아서 형식적으로 행하고 이를 구원에 충족되는 하나의 의로 여기기에 속죄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대적하여 죽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남는 것은 위용 있는 건물로서의 성전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갖는 성전 중심은 사실상 이방인들이 신전을 만들고 이를 성역화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그에게 약속하신 때가 이름으로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모세를 세워 하나님의 율법인 살아있는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으나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이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줄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면서 모세를 거부하고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이 만든 것을 섬기며 즐거워하였고 광야에 있는 40년 동안 내내 몰록의 신과 별의 신인 레판과 그 밖에 자신들이 손으로 만든 우상을 떠메고 다녔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손에 붙인 것이지 않느냐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부터 메고 다닐 수 있는 성전, 곧 증거의 장막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정복한 새로운 땅 가나안에 그 장막을 운반해 가서 보존하였는데
다윗이 야곱의 하나님을 위해서 영원히 보존될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으나 성전을 건축한 사람은 다윗이 아닌 솔로몬이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판으로서 이 모두를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어디에다가 성전을 지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처럼 목이 뻣뻣하여 조상들이 오실 의인을 예언한 선지자를 죽이는 악을 행하였는데 이제 너희들은 그 의인을 잡아죽이는 악을 행하여 성령을 거역하였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통해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너희들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스데반이 하는 말을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고 달려들어서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또한 이를 책망하는 스데반을 죽이는 악행을 한 것은 자신들의 죄가 끄집어 내지기 때문이었으며, 그 죄가 심판 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받아 흘린 피에 의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율법을 거역하고 단지 이것의 보존을 위해서 필요했던 성전을 중요시 여기며 이 성전 생활에 의한 자기 의를 구원의 길로 삼았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악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사입니다. 교회사는 유대인들의 성전 중심의 종교관이 재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베드로 성당의 건축입니다. 베드로 성당은 바티칸 언덕에 세워졌습니다.
로마는 원래 7개의 언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테베레강 건너의 카톨릭 신자들 공동묘지인 바티칸 언덕이 바로 오늘날 베드로 성당이 서 있는 곳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100m 너비에 500m 길이의 타원형 경기장 겸 처형장이 남쪽에 있었으며 거기에는 이집트에서 빼앗아온 250톤 나가는 동물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돌은 300여년간의 신자들의 처형, 특히 사도 베드로의 순교까지 지켜본 돌이라고 하여서 대단히 귀중히 여겨오다가 중세기에 와서 오늘의 위치인 베드로 성당 광장 한복판에 옮겨져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베드로 성당은 3번째 지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누각처럼 사도 베드로 무덤 곁에 '기도소'식의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6년에 만들었는데 그 양식은 바실리카식이었습니다. 이 성당은 약 1200여 년간 사용되어 오면서 낡아 남쪽 벽에 2~3m 너비로 몇 개의 틈이 벌어지는 등 보수가 필요하자 1400년경부터 베드로 새 성당 건축이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217대 교황)에 의해 개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사 기간중 면죄부의 남발과 종교개혁 파동으로 공사가 부진한 적도 있었으나 미켈란젤로와 그의 제자들에게 의해 작품이 진행되어 마침내 1626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반 8세 때 준공되었으니 120년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1450년부터 신축설계가 거론되어 1506년 부활절 다음 주일에 본 건물을 착공하였으며 마무리 작업까지에는 이보다 더 긴 세월인 33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베드로 성당은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 성당은 동서의 길이가 211m이고 남북의 길이가 150m, 천정 평균 높이 45m 중앙돔의 직경이 50m 그리고 종각 꼭대기까지는 153m입니다. 내부 넓이는 약 5,500평 정도 되며 지하실 소성당들까지 합쳐서 50여 개의 제단이 있습니다. 수용인원은 약 2만7,000여 명에 이릅니다. 이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에 없는 구원의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죽은 자를 연옥으로부터 구원한다고 하는 '면죄부'(속죄부)요 이것을 베드로 성당 건축의 재정 확보를 위한 판매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카톨릭교회의 신자의 신앙은 이 베드로성당을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성전 중심의 신앙관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따라지고 있습니다. 카톨릭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말입니다. 최근 경기도 성남시의 분당구의 야탑동에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형식으로 25m 높이에 3800평 대지, 연건평 1만 8350평에 이르는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이 건물 안에 들어갈 최고급의 각종 재료와 장식품은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 것이며 이 안에 들어오는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감격해 하며 감동이란 명분으로 그 마음을 굴복할 것입니다.
이 안에서 들리는 설교의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 은혜로스러울 수가 없을 것이며 이 안에서 울려퍼지는 찬양대의 목소리는 온 마음에 잔잔한 호수로 작용할 것입니다. 소망교회가 그것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 교회 예배당을 짓는데 600억이 들어갔다고 하였었는데, 이 기록을 간단하게 깬 것입니다.
이렇게 큰 교회 예배당을 왜 짓습니까? 당연히 이곳에 수용되어서 채워질 교인수를 생각해서입니다. 이 엄청난 건물을 짓기 위해서 동원된 용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윗의 성전 건축 소원과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들어간 엄청난 재료와 그렇게 해서 완공을 본 성전으로 인한 기도를 교인들에게 요구하면서 또한 이곳에 교인수를 채울 책임과 의무를 부과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게 되는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죽음을 당하신 십자가의 복음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주는 죄에서 구원 얻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날마다 이건 매주 이건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음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생각에 있는 모임의 공동체 성격을 띠고 또한 흩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한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당만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와 채워진다고 하는 그릇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만, 교회당 건물에 의해서 믿는 자들의 신앙이 형성되고 또한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이요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 의한 교회당이란 언제든지 가변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이는 것이기에 그때 그때마다 달리합니다. 어디서이건 간에 모여서 그리스도와 한몸된 성격을 띠고서 하나님을 예배하면 됩니다. 가정을 예배의 처소로 삼으면 그곳이 교회당이며, 상가를 예배의 처소로 삼으면 그곳이 교회당이며, 또한 건축된 건물을 예배의 처소로 삼으면 그곳이 교회당입니다.
이곳은 믿는 자들이 단지 예배의 장소로 삼는 곳에 불과하며 예배를 드린 후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된 믿는 자들은 삶의 현장으로 흩어져 천상적 교회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령 회의를 위해 어떤 건물을 장소로 사용하였을 경우 회의가 끝난 후에는 더 이상 회의장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세미나실로도 사용이 되고 연회석으로도 사용이 되고 다른 업무를 위해서도 사용이 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만든 지상의 성전에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성소에 계신 분으로서 제한된 공간에 속해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발판이며, 이 하늘과 땅을 하나님이 만든 것인데 또 다시 땅의 어디에다가 다른 성전을 만든단 말입니까? 성전의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 알지 못하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살기등등한 눈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쳐 갈 때 벧엘에서 들의 풀을 요를 삼고 하늘의 별들은 이불 삼고 돌은 베개삼아서 잠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자기와 함께 하시며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나는 여호와이다.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네게 그리고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땅의 먼지만큼 많아질 것이다.
동서남북 어디를 가든지 네 후손들이 그곳에서 가득하게 될 것이다. 또한 너와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뭇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지켜 주겠다. 네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지라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는 내가 결코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재확인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는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그의 고백은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바로 이곳에 계시는구나. 그분이 바로 여기에 계신데도 내가 그것을 몰랐었구나"하면서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 아닌가? 이곳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문이다"라고 하고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창 28:13-19).
천으로 만든 성막이나 돌로 만든 성전이 있기 전인 때부터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의 개념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반드시 다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 하나님의 약속의 실천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실 일인 구속을 말씀하여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이분 안에 있는 우리는 참성전입니다. 이미 참성전에 들어와 있는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또 무슨 성전을 필요로 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매주일을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