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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3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산 박재현을 이야기해 보자. 도계가 담담한 성품의 도학자적 스타일이라면, 제산은 좌충우돌 신출귀몰하는 천재형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두뇌와 아울러 격한 감정을 겸비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충돌하면서 스파크를 남겼다. 그가 남긴 스파크를 추적하다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의 만화경(kaleidoscope)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1996년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나 받은 인상도 대단한 재사(才士)라는 느낌이었다. 우선 제산은 관상부터 비범하였다.
보통사람이 제산의 관상을 보면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보지만, 관상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보면 제산의 얼굴은 원숭이형 관상이다. 눈과 눈썹 부분의 모습이 원숭이 같다. 자고로 원숭이형 얼굴을 가진 사람 중에서 천재가 많다. 우선 도올 김용옥부터 보자. 도올도 필자가 보기에는 원숭이형 관상이다. 도올이 TV에서 ‘도덕경’을 강의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필자는 손오공을 연상하였다. 그 변화무쌍한 초식을 동원하여 종횡무진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신통력은 도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현재 한·중·일 3국에서 도올과 같은 손오공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도올 선생! 원숭이라고 평했다고 해서 필자를 너무 욕하지 마시라! 역사적으로 볼 때 원숭이형들은 천재가 많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선생과 제산의 예를 든 것일 뿐이니….
일본의 원숭이형 천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경북 안동의 강직했던 선비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93)은 일본에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본 뒤 “원숭이 같이 생겼다”고 평가한 바 있다. 히데요시도 원숭이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히데요시는 만고에 죽일 놈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가장 본받을 만한 인물로 꼽는다. 히데요시는 평지돌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말을 끌던 미천한 마부 출신이 입신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은 물론 대국인 중국까지 삼켜버리려 했던 걸물이다.
평론가의 안목에서 볼 때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보다 히데요시의 인생이 훨씬 극적이다. 아무튼 제산은 원숭이상을 지닌 천재였다. 실제로 제산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경남 함양의 서상(西上)이라는 지역인데, 유년시절부터 ‘서상에 신동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던 인물이다. 그 천재성이 바둑으로 갔으면 이창호가 되었을 것이고, 학문으로 갔으면 도올 같은 인물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천대 받는 업종인 명리쪽으로 갔다.
그것도 결국 팔자소관이요, 주님의 섭리일 테지만 말이다. 필자가 명리학 연재를 시작하면서 ‘월간중앙’의 정재령 부장에게 “우리나라 역술가 가운데 가장 알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하자 정부장의 즉각적인 답변이 “박도사를 먼저 소개해 달라”였다. 박도사는 바로 제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월간지 부장도 이미 그 명성을 알고 있었을 만큼 제산은 이 분야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소개해 보자. 1970년대 후반(아마 1978년쯤) 전국적으로 대단한 가뭄이 들었다.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부는 비상이 걸렸고, 주무부서인 농수산부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농수산부 장관은 장덕진씨였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각료회의에서 가뭄대책을 세우라고 다그쳤고, 해당 부서 장관인 장덕진은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대책이란 양수기 수만대를 외국에서 사오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생각난 인물이 평소 알고 지내던 ‘박도사’였다.
양수기 수만대를 수입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데, 혹시 박도사에게 물어보면 무슨 수가 없을까 해서였다. 당시 계룡산에서 칩거 중이던 제산은 장덕진 장관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 내가 천기를 보니 몇월 며칠에 반드시 비가 오게 되어 있다. 그때까지 견뎌 보라”는 답을 주었다. 제산의 말을 믿은 장덕진 장관은 가뭄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양수기 수입을 차일피일 미뤘다. 얼마 후 정말 비가 온다면 양수기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날 비가 오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잘못되면 일국의 장관이라는 사람이 일개 점쟁이의 말을 듣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보름 동안 장덕진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탔다. 정말 비가 올 것인가. 하지만 비가 오기로 예언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는데도 비가 올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니 별만 총총하게 빛났다. 일기예보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장관은 ‘아! 나는 내일쯤 목이 날아가겠구나!’하고 체념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날씨가 맑은 편이었는데, 점심 때가 지날 무렵부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는 것 아닌가. 오래지 않아 장대 같은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전국적인 가뭄이 해갈된 것은 물론이었다. 필자는 이 비사(秘史)를 제산의 부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당시 제산의 집이 서울 연희동에 있었는데, 억수 같은 비가 오자 장덕진 장관이 흥분한 목소리로 ‘오후 6시까지 연희동 집으로 갈 테니 제산과 같이 만나자’는 전화를 하였다. 계룡산에 있던 제산은 장장관의 연락을 받고 급히 연희동으로 올라오는 중이었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장덕진은 6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5시쯤 되었을 때 비서관을 대동하고 미리 연희동에 와서 박도사를 기다렸다.
박도사 믿고 양수기 안사고 버틴 장덕진
제산의 내공이 절정기에 있을 때는 이처럼 언제 비가 올 것인가 하는 천기의 부분까지 꿰뚫는 능력이 있었다.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과 국가적 대사를 예언하는 능력은 차원이 다르다. 486 컴퓨터와 팬티엄 3의 차이라고나 할까. 언제 비가 올 것이라는 정도까지 적중하다 보니 1970년대 후반부터 제산의 이름은 정치인들이나 고관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다.
1990년대 초반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은 헬기를 타고 제산이 살고 있던 서상까지 제산을 만나러 온 적이 있다. 박회장과 제산은 같은 박씨라서 인간적으로 서로 친한 사이였다. 포철 박회장이 헬기를 타고 직접 박도사를 만나러 왔던 일은 몇몇 일간지에서 이를 기사로 보도해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박회장은 사석에서 박도사를 가리켜 “살아 있는 토정을 보는 것 같다”고 칭찬한 바 있다. 정치인 김복동씨와 김기재씨도 제산과 왕래가 잦았다. 이들 유명 정치인들과 제산의 관계는 사판의 대가와 이판의 고수가 만난 격이었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면 이렇다. 제산은 20대 시절 이곳 저곳을 방랑했다. 주로 지리산 일대였다. 함양·산청·남원의 운봉 등지였다. 특히 제산은 20대 춥고 배고팠던 시절 운봉에 자주 들렀다. 운봉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노개식(盧价植)씨가 살고 있었다. 운봉은 지리산 일대의 명당이다. 해발 400m의 고지대라서 여름에도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는다. 풍수적으로도 지세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름에 시원하고 땅 기운도 좋아서 예로부터 기인·달사들이 이곳에 많이 뿌리내리고 살았다.
노씨의 집안도 그 중 하나였다. 노씨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유년시절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유교 경전을 단련받아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니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어서 친구인 제산이 찾아오면 항상 차비라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고전에 식견이 있어서 호학하는 성품이었던 제산과 잘 어울렸다. 어느날이었다. 제산과 운봉의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씨가 황(黃)씨일 거야, 그리고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에 사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10시쯤 되어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과연 하수라고 하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 아닌가.
평소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 맞추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 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
“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라는 말은 ‘귀신이 귀에 보고해 준다’는 뜻이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르는데, 줄여서 통상 ‘이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接神)되는 수가 있다. 접신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 대고 정보를 알려 준다. 이보가 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마치 귀에 리시버를 꽂은 상태로 말하는 것과 같아서 두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고 귀를 쫑긋한 상태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이보통령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친구로부터 “자네, 이보로 알게 된 것이지?”하고 추궁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해서 안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격물치지의 근거를 말해 보라”하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침 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黃)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마르면 먹으려고 흰 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 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대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운봉에서 원제당 한약방을 운영하는 노개식(63)씨로부터 듣고 제산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乙亥명당의 地氣 받고 태어난 박도사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인물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는 믿음이다. 하다못해 시골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물며 제산과 같이 100년만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은 반드시 지령과 관계 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제산의 고향은 함양군 서상면 극락산 밑의 산동네다. 무주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서상 인터체인지가 나오는데 이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바로 우측에 자리잡은 동네다. 이 동네는 지리적으로 영·호남의 길목이었다. 경상도 거창·함양에서 전라도의 장계·장수 쪽으로 가려면 이 동네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영·호남을 오가는 많은 과객들이 이 동네를 지나갔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제산 집안에서는 지나가는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과객 가운데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 중 특히 풍수와 사주에 밝은 과객들도 있었는데,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제산의 집안에서는 이러한 술객들을 특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들이 사랑채에서 몇 달이고 무전취식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제산의 집은 영·호남의 문화가 활발하게 오갔던 지리산 실크로드의 중요한 베이스 캠프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 과객들 중 풍수에 밝은 이가 명당자리를 하나 알려 주었다. 소위 ‘을해(乙亥)명당’이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서 을해(乙亥)년에 태어난 손자가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을해년에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집안은 망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산의 7대조는 그 을해명당에 묻히게 되었다. 그후 이 집안에는 6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을해년에 과연 어떤 자손이 태어나는가 하고 유심히 지켜보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그 명당의 이름을 하필 을해라고 붙인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명당자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지맥의 형태가 을자(乙字)의 형태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영어의 S자 형태와 같다. 을자의 끝에는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저수지는 물이다. 십간십이지에서 해(亥)는 물을 상징한다. 육십갑자를 순서대로 짚어볼 때 을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물은 해(亥)다. 그래서 을해(乙亥)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을자 모양으로 내려간 산줄기 밑에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라서 이를 을해(乙亥)로 상징한 것이다.
67년 전인 1935년이 을해년이었다. 을해년을 맞이해 극락산자락의 박씨 집안에서는 인물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출렁거렸다. 5월에 첫손자가 태어났다. 첫손자는 장남이 아니라 3남에게서 나왔다. 집안의 분위기는 5월에 태어난 3남의 아들이 인물인가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 문 앞에 금줄을 걸어 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구렁이가 그 새끼줄을 타고 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구렁이가 금줄을 타고 간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래서 이 손자는 ‘인물이 아니다’라고 판정되었다. 바로 이어서 손자가 또 태어났다. 이 손자는 둘째 아들이 낳은 자식이었다. 이 손자는 둘째 아들이 처가살이를 했던 덕분에 서상에 살지 않고 처가 동네인 서하에서 출생하였다. 외가인 서하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손자는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을해년이 다 지나갈 무렵인 동짓달 22일 장남에게서 손자가 하나 태어났다. 그 손자가 바로 제산이다.
제산을 낳을 무렵 제산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 딸을 다섯이나 둔 상태였다. 큰아들 하나에 그 밑으로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다. 더구나 제산의 어머니는 당시 40세가 넘어 생리도 드문드문했는데 임신이 되어 창피한 데다 딸을 많이 낳아서 제산이 임신되자 또 딸인 줄 알고 낙태 시키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하였다. 간장을 바가지로 퍼먹거나 쓴 약초를 먹는가 하면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해명당의 효력이 작동했는지 제산은 마침내 을해년 동짓달에 태어나고야 말았다. 낳아놓고 보니 얼굴은 시커멓고 볼품 없이 조그마한데 눈만 반짝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조부는 과연 이 아이가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성장해 가면서 제산의 총기는 빛을 발하였다.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한번 글자를 보면 단번에 외워 버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상동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함양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바야흐로 흥미진진한 대하소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정희와 박제산,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相生의 관계로 놓아두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이때 박정희의 메신저로 제산을 찾은 사람이 바로 청와대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維新’의 앞날에 대해 점괘를 물어 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 ‘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維新이 幽神, 즉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예언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얼마후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 맞았다. 기관원들은 제산의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지리산은 예부터 기인·달사·도사들이 숨어 지내는 산으로 이름이 높다. 제산 박재현은 청년 시절 지리산 일대를 10여년간 떠돌면서 가진 수많은 기인·달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靈氣에 눈이 띄였던 것 같다. 한번 읽으면 그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리는 일람첩기(一覽輒記)의 소유자. 한국 명리학계의 빅3 가운데 한 사람인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 1935~2000).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극락산 자락에 맺혀 있는 을해명당(乙亥明堂)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제산은 과연 비범했다. 몸도 약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얌전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아이로 보였지만, IQ만큼은 대단했다.
‘서상에 신동 났다’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었다. 제산의 유년시절 이름은 광태(光泰)였다. 광태는 어렸을 때부터 ‘일람첩기’였다. 한번 죽 훑어보고 단박에 암기하는 능력을 가리켜 일람첩기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 스캐너(scanner)인 셈이다.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은 인물을 수십년간 고대했던 광태의 조부는 신동 손자를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전설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손자인 광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다. 광태가 학교에 가면서 혹시 도시락을 안 가져가는 날이 있으면, 조부는 직접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 문앞에 가서 기다렸다. 손자가 학교 끝나고 돌아오면 조부가 당신 방으로 불러 공부를 시켰다. 극성스러울 정도의 손자 사랑에 광태의 어머니는 아들을 시아버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지나치게 손자를 감싸고 도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 “너희가 무엇을 안다고 광태를 나무라느냐”고 호통치곤 했다.
후일 광태가 정상적인 인생행로를 포기하고 지리산 일대의 산천을 정처없이 유랑하는 낭인으로 전락했을 때도 손자에 대한 조부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너희 안목으로는 광태를 모른다. 내 말만 들어라. 산으로 가서 공부하겠다면 잡지 말아라. 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둬라.” 이 말이 아들·며느리에게 남긴 조부의 유언이자 당부였다. 제산은 서상초등학교를 마치고 진주농림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진주농림은 당시 5년제였는데, 제산은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으로 뽑혔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제산으로 하여금 조용히 공부나 하게 놔두지 않았다. 중2때 6·25가 터진 것이다. 피난을 가야 했다. 부랴부랴 진주에서 고향인 서상으로 올라오기 위해 목탄으로 불을 지펴 움직이는 목탄차를 탔다.
서상으로 오던 도중 이 목탄차가 비행기 폭격을 피하려다 비탈길에서 그만 엎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제산은 다리가 부러졌고, 전쟁 와중에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한 제산은 그만 앉은뱅이가 돼 버렸다. 3년 동안 집에서 앉은뱅이로 있던 제산은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집에서 놀아야만 했다. 그후 물리치료를 받아 겨우 몸이 회복되었을 때는 동년배 또래들과 많은 격차가 나 있었다. 집안의 다른 사촌들은 정상적인 과정을 마치고 이미 서울의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던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광태(제산)는 시골의 거창농고에 다녔다.
거창농고의 선생들은 수업시간에 제산 학생의 날카로운 질문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창농고 재학시절 제산과 같은 하숙방을 썼던 동기는 다음과 같은 술회를 남겼다. 하숙방에서 친구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으면, 제산은 방에 누워 친구가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제산은 몸이 약해 오랜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산은 친구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모조리 암기해 버렸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친구는 70점을 받은 데 비해 누워 있던 제산은 만점을 받는 희극이 연출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였다. 하지만 제산은 보편적인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공부를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회의가 끊이지 않았다.
거창농고 졸업 후에는 정상적인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해 이 산 저 산을 떠도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소위 말하는 ‘낭인과’(浪人科)에 입학한 것이다. 머리 좋은 천재가 낭인과로 들어가면 관심 갖는 분야가 바로 도통(道通)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나는 왜 이런 팔자인가 라는 의문을 거쳐 이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가 도대체 무엇인가에까지 이른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도를 통하고 싶은 대원(大願)이라고나 할까. 청년 제산은 ‘그것이 알고 싶다’는 불타는 욕망을 가지고 지리산 일대의 도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지리산이 어떤 산인가. 역사 이래 한국 최대의 ‘도인구락부’가 아니던가. 지금도 어림잡아 2개 대대 병력에 해당하는 2,000명 정도의 낭인과가 운집해 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이 시절 청년 제산의 모습은 거렁뱅이에 가까웠다. 춥고 배고프고 노잣돈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완전히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외로운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불가의 의례집인 ‘석문의범’(釋門儀範)에서는 이처럼 외로운 구도자의 심경을 ‘독보건곤 수반아’(獨步乾坤 誰伴我)라고 읊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 홀로 걸어가니 그 누가 나와 함께 할 것인가!’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일러 단독자(憺者)의 삶이라고 하였던가! 하지만 머리에 기름을 부은 자는 그 길을 회피할 수 없는 법.
제산은 지리산 둘레의 산청·함양·운봉·구례 등지를 방랑하면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숨어 사는 수많은 기인·달사들과 교류를 가졌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유교·불교·도교를 섭렵하게 되었다. 유교의 사서삼경과 불교의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을 비롯한 제반 불경, 도교의 벽곡(酸穀)·도인(導引)을 비롯한 호흡법과 ‘성명규지’(性命圭旨) 같은 비서(秘書)들을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말로만 듣던 천문·지리·인사로 통칭되는 재야의 학문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기인·달사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제산은 어느새 영기(靈氣)가 개발되었던 것 같다. 대체로 머리 좋은 사람들은 영기(靈氣), 즉 직관력이 부족한 수가 많다. 분석적이기 때문이다. 매사를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영기가 쇠퇴한다. 마치 모래시계의 양면과 같아서 논리가 강하면 반대쪽 사이드인 직관쪽 기능은 퇴화되게 마련이다.
반대로 직관이 강하면 논리가 약해진다. 필자가 많은 도사들을 만나본 경험에 의하면 산에서 ‘기도발’이 잘 받는 사람은 성격이 단순해 깐깐하게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쉽게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인다. 반대로 대학에서 논문 많이 쓰는 교수들을 만나보면 논리적이기는 한데 시원하게 터진 맛이 없다. 물증(物證)만 중시하고 심증(心證)은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기도만 많이 하고 학문을 하지 않으면 부황해지기 쉽고, 반대로 학문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성품이 속되게 변한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했다. 학문을 어느 정도 연마했으면 마지막에는 이를 버리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는 말이다. 제산은 타고난 명민함에 이 산 저 산을 순례하면서 기도와 선정의 묘미를 터득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되면 쌍권총을 찬 격이다. 제산의 지리산 시대를 계산해 보니 대략 10년 정도 된다. 31세에 결혼하면서 지리산 시대를 마감하였다고 보면 대략 20대 초반부터 30세까지 지리산 일대를 방랑한 셈이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말이 있듯 ‘제산을 키운 것은 8할이 지리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의 제안 “함양군수를 시켜 주마”
제산의 지리산 시대에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박대통령과의 만남이다. 제산은 지리산 시절 중엽인 22~30세 무렵 군대에 갔다 와야만 했다. 그가 군대생활을 한 곳은 부산의 군수기지였다고 전한다. 필자가 정확한 기록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제산은 부산의 군수기지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장군과 인연을 맺었던 것 같다. 그 시기가 1950년대 후반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제산은 졸병으로 군대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령관인 박정희 장군과 졸병이었던 제산이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운명’이 작용했을 것이다. 비록 계급으로는 졸병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의 운명을 감정하는 데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 있던 제산은 박장군과 계급을 떠나 인간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군대 계급으로 따지면 장군과 일등병의 관계였지만, 운명이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는 카운셀러와 내담자의 관계로 전환되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역술가 앞에서 운명을 문의할 때는 지도받는 학생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제산은 이때 박장군에게 특별한 운명을 예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장군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제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의 소유자’라고 말이다. 박장군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점쟁이 일등병의 헛소리로 흘려 듣지않고 상당히 현실성 있는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후일 제산이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 박장군과 자신은 사석에서 만나면 형님, 동생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5·16 이후에는 박대통령이 제산에게 함양군수를 한번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제산은 가끔 “박대통령이 나에게 함양군수 하라는 것도 거절했다. 그까짓 함양군수 하면 뭐하나? 이렇게 산으로 돌아다니며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지!”라는 이야기를 주변 친구들에게 털어놓곤 하였다.
남산 다녀온 후 한동안 기관원 공포증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상생(相生)의 관계로 몰고 가지만은 않았다. 도가의 경전인 ‘음부경’(陰符經)을 보면 ‘은생어해 해생어은’(恩生於害 害生於恩)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원수에게서 은혜가 나오고, 은인으로부터 원수가 나온다는 뜻이다. 은인이 원수 되고 원수가 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1950년대 후반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대통령은 70년대 초반 10월 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유신을 하려고 하는데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때 박대통령의 메신저로 제산을 찾아온 사람이 청와대의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유신’(維新)의 앞날에 대해 점괘를 물어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 ‘유신’(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저승 ‘유’(幽)자에 귀신 ‘신’(神)자 아닌가. 만약 유신(維新)을 하면 그 결과는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의미의 예언이었다. 그러자 S비서관은 제산이 끄적거린 담뱃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S비서관의 이 모습을 무심히 보고 있던 제산은 순간적으로 ‘아차, 내가 실수했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고 한다. 제산은 비서관에게 그 담뱃갑을 가져가지 말고 그냥 두고 가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S비서관은 “설마 제가 이 담뱃갑을 박대통령에게 보이기야 하겠습니까?”하면서 주머니에 챙겨 집을 나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얼마 있다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비서관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대통령이 격노했던 것이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맞았다. 기관원들은 팔을 뒤로 묶어 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한다. 1970년대는 민주투사만 남산 지하실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솔바람이 키워냈던 박도사도 초대 받아야만 했던 시대였다. 중생이 고통 받는데 도사라고 어찌 무사 하리오! 역사라는 쳇바퀴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치를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깨닫는 중이다. 그러니 사회과학자들이여, 역술가들은 역사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너무 몰아붙이지 마시라! 남산 지하실을 방문한 뒤 제산은 내면의 상처를 입었다. 이른바 기관원 공포증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 가운데 혹시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기관원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였다. 실제로 많은 기관원들이 제산을 찾아와 별의별 테스트를 하기도 하였다.
道士는 악어처럼 물 속에 숨어야 한다
명성이 알려진 도사는 익명의 다중을 상대해야만 한다. 익명의 다중. 그 가운데는 온갖 사람과 사건이 잠복되어 있다. 도사는 그 잠복된 지뢰를 미리 알고 피해 가야만 하는 고난도의 직업이다. 10개의 지뢰 중 9개를 피하더라도 마지막 1개를 피하지 못하고 그물에 걸려들면 그야말로 처참한 망신을 당한다. ‘그러고도 네가 도사냐?’하는 비아냥과 조롱을 감수해야 한다.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 비결은 은둔이다. 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은 악어 가죽을 거처에 걸어두고 보았다고 한다. 왜 악어인가. 이유는 두 가지. 우선은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악어의 두껍고 질긴 가죽처럼 욕심이 많다는 것을 통찰하기 위해서다. 다음은 악어처럼 물속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즉, 악어처럼 처신해야 한다. 악어는 평상시에는 물 속에 숨어 있는 동물이다. 오로지 두 눈만 내놓고 몸은 물 속에 숨어 있으므로 밖에서 볼 때는 잘 띄지 않는다.
악어는 밖을 잘 관찰할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상대방은 물 속에 숨어 있는 악어를 관찰할 수 없다. 나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 있지만, 상대방은 나의 움직임을 볼 수 없도록 하는 처신은 천기(天機)를 다뤄야 하는 도사의 필수 덕목이 될 수 있다. 악어가 물 밖으로 나아가 바위 위에서 햇볕을 쪼일 때는 대단히 위험하다. 노출되어 있으므로 사냥꾼의 집중사격을 받을 수 있다. 제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 해도 일단 무대 위로 올라가면 집중사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총을 쏘면 어떻게 하겠는가. 맞아야지 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사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삼십육계 놓을 자리를 확보해 두어야 한다. 36번째 마지막 계책은 역시 ‘튀는’ 일이다. 이 세상은 어찌 되든 튀어야 산다.
탈출구가 봉쇄된 무대 위로 올라간 도사에게는 불행한 결과만이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초한지(楚漢誌)에 나오는 장량은 역시 멋진 도사였다. 한몫 챙겨 산으로 과감하게 튀지 않았던가! 도사가 행해야 할 처신의 전범을 보여준 사례다. 산으로 튀지 못하고 세간에서 머뭇거리던 한신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던가.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지 않았던가.
진(晉)나라 때 저명한 풍수이자 도사였던 곽박 역시 도망가지 못해 결국 권력자에게 희생당했다. 그런가 하면 당대(唐代)의 도사 양구빈과 송대(宋代)의 도사 오경만은 머리를 깎고 산사(山寺)로 숨어 버렸다. 자고로 도가(道家) 지향적인 인물(taoist)들은 세간에서 한몫 챙겨 산으로 줄행랑을 놓는 것이 모범답안이다. 키스 앤 굿바이(kiss and say goodbye!)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일급 도사들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다. 이 역사적인 진리를 간파한 필자도 몇년전 산으로 튀려고 ‘나는 산으로 간다’는 제목의 책까지 쓴 바 있지만, 아직 세간에서 챙기지 못해 사바세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사바세계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초조해진다. 영국의 독설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자꾸 뇌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버나드 쇼가 생전에 자기 묘비명에 반드시 새겨 달라고 부탁했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살인범은 ‘一木撑天 木子之行’이라!
제산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지리산 시대 다음에는 가야산의 해인사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다시 지리산에서 공부하던 제산은 집안의 강권에 의해 결혼해야만 했다. 장손이어서 씨는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31세 때 결혼하였다. 그러나 신혼살림을 몇달 한 후 다시 산으로 간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부인에게 “나는 산으로 가야 한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공부를 해야 하니 나를 놓아 주어라”하고 해인사로 들어간다. 함양에서 해인사는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해인사가 어떤 절인가. 한국의 삼보사찰 아니던가. 순천 송광사가 국사가 많이 배출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면, 양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佛寶寺刹), 그리고 합천 해인사는 불법의 총체인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이다.
삼보사찰 가운데서도 법보사찰인 해인사는 기강이 엄하기로 유명하다. 예비 스님 과정인 행자생활에서도 해인사에서 행자생활 했다고 하면 제대로 한 것으로 친다. 해인사 행자생활이 다른 절의 행자생활보다 배는 힘들다고 한다. 행자뿐만 아니라 해인사 주지 노릇 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소문나 있다. 그만큼 원리원칙과 법대로 하는 해인사 가풍이다. 그래서 일반 스님들도 해인사에 들어가면 바짝 긴장한다. 머리 깎은 스님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머리 기른 유발(宥髮)처사는 어떠했겠는가.
사실 머리 기른 처사들은 해인사에서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 출가 수행자의 청정 공부 도량에 유발 처사들이 머무르면 엄격한 가풍이 흐려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리를 연구하던 제산의 노선은 불가의 입장에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외도(外道)에 해당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산은 해인사의 허락을 받아 장기간 머무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하숙비를 지불하지 않는 무전취식이었지 않나 싶다. 유발처사(有髮處士)가 한국에서 가장 규율이 엄한 사찰인 해인사에 장기간 머무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천대를 받았다. 그렇게 어정쩡한 신분으로 머무르는 과정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살인사건이었다. 참고로 제산은 31세이던 1965년에서 36세이던 71년까지 해인사에 머물렀다. 살인사건도 이 기간에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살인사건이란 바로 20대 중반의 처녀가 해인사 경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늦가을 이른 아침 장경각 밑에서 낙엽을 청소하는데 낙엽 밑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사찰 경내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되자 해인사는 발칵 뒤집혔다.
범인은 누구인가. 관할 합천경찰서에서는 매일 해인사 스님들을 한명씩 경찰서로 호출하여 알리바이를 심문했다. 매일 돌아가면서 스님들이 합천경찰서로 출두해야 하는 상황이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다.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계속해서 스님들을 취조할 수밖에. 이러다 보니 해인사의 청정한 수행 가풍이 잘못하면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가 타는 상황에서 홀연히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자청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제산이었다. 뒷방 요사채에서 밥이나 축내던 처사가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고 자청해 나섰던 것이다. 제산은 “이 사건은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동안 축적되었던 냉대의 설움을 한 순간에 만회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선언이었다.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단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아무개 총무 스님이 가사장삼을 입고 공손하게 큰절을 3번 해야 한다.
총무 스님이 3배를 하고 난 후 지필묵을 나에게 바치면 그 붓으로 사건의 해결책을 써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총무 스님의 삼배를 요구한 이유는 당시 해인사 총무를 맡았던 아무개 스님이 평소 제산을 천대했기 때문이었다. 해인사 측에서는 달리 해결 방도가 없었으므로 오만방자한 이 처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산이 정식으로 총무스님의 3배를 받고 난 후 붓으로 써준 글씨는 다음과 같다.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 탱(撑)자는 ‘버팀목 탱’자다. 해석하면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하는데, 목자(木子) 즉, 이(李)씨의 소행’이라는 뜻이었다.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한다는 의미는 바로 목수를 지칭한다. 목수는 나무 기둥을 세워 천장을 지탱하는 업종에 해당한다. 그 목수 중에서도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목수를 찾아보니 사건 한달 전에 대웅전 보수공사를 하느라 목수들이 해인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공사가 끝난 후 목수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그 목수들 가운데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수소문 해본 결과 한 사람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합천 경찰서에서는 즉시 형사대를 서울로 급파해 그 이씨 성을 가진 목수를 체포해 심문하였다. 알리바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씨 성을 가진 젊은 목수는 살인을 자백했다. 죽은 처녀는 목수와 사귀던 여자였고, 변심할 기미를 보이자 해인사로 찾아온 애인을 그만 충동적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인연을 맺다
이 일로 해서 제산의 명성은 경상도 일대에 널리 퍼졌다. ‘해인사에 천출귀재’(天出鬼才,하늘이 내린 귀신 같은 인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제산을 만나기 위해 많은 인파가 해인사로 몰려왔다. 그러던 어느날 50대 중반의 남자가 제산을 만나러 왔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자신을 부산 자갈치시장의 갈치장수라고 소개한 남루한 행색의 그 남자는 제산에게 다른 사람의 사주팔자를 물었다. 자신은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심부름을 왔으니 그 권 아무개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였다.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들여다보던 제산은 갑자기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보아하니 여기 써 있는 권 아무개가 바로 너구나! 네가 권 아무개지? 너는 대구검찰청에 있는 검사장이지? 나를 떠보려고 변장하고 왔구나. 네 놈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와서 갈치장사를 한다고 하면 내가 속을 줄 알았나?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나를 시험하느냐!” 하면서 내리 호통을 쳤다.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권 아무개 검사장은 망신만 당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산은 격한 감정의 소유자라서 자신의 비위에 안 맞으면 직설적인 육두문자로 감정을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뒤끝은 전혀 없었다.
권 아무개 검사장은 제산의 신통력을 혹독하게 체험하고 나서 평소 친분이 있던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해인사 갔다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제산은 한국 최고의 재벌 회장인 이병철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병철과 제산. 당대 그 분야 최고수의 만남이었다. 사판(事判)의 대가이면서 남달리 이판(理判)에도 관심이 깊었던 이회장은 젊은 제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일반에서는 삼성의 각종 인사, 특히 중역급 이상의 고위 인사에 알게 모르게 제산이 많이 관여했던 것으로 회자된다.
물론 소문으로만 전해지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다른 재벌 그룹에 비해 삼성맨 가운데 유달리 배신자가 적다는 항간의 이야기는 인사를 채용할 때 이판(理判)과 사판(事判) 양쪽으로 치밀하게 검토한 이회장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러한 이판 참모 가운데 하나가 제산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무렵 이회장이 제산에게 부산에 있는 5층짜리 빌딩을 사준 것은 사실이다. 물질 가는 데 마음 간다고 5층짜리 빌딩을 사줄 정도로 이회장은 제산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만큼 후하게 대접했던 것 같다. 재벌 회장 가운데 이회장만큼 역술가들에게 대접을 후하게 해 주었던 인물도 따지고 보면 드물다.
부산의 효주양 유괴사건을 해결하다
제산의 신통력은 다양했다. 언젠가 부산에서 유괴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그 유명한 ‘효주양 유괴사건’이다. 이때 부산경찰국장이 이 아무개 씨였다. 유괴범의 단서를 잡지 못한 부산경찰서에서는 마지막 방법으로 제산을 찾아갔다. 그때 제산은 2번이나 범인이 어디 있다는 것을 알려준 바 있다. 제산이 알려준 장소에 효주양 유괴범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부산경찰국장에 새로 부임하는 인물은 모두 제산을 찾아와 안면을 텄다. 미제사건에 대한 최후 대비책으로 제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를 내려온 이후인 1970년대 초반부터 제산은 주로 부산에서 자리잡고 활동했던 관계로 부산 사람들은 박도사(제산)의 명성을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한 사람은 박도사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 한두 가지쯤은 알고 있는 편이다. 복채는 평균 20만원 정도 받았다. 서민이 20만원이고 정치인은 200만~300만원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에 20만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일반 서민은 부담을 느낄 만한 액수였다. 하지만 효과(?)에 비하면 그 정도 액수는 싸다고 여겼기 때문에 박도사의 집은 항상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몸이 약했던 박도사는 하루에 상담해 주는 사람을 15명 이내로 정했다. 그 이상은 사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 보면 알지만 남의 인생사를 들어주고 상담해 주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지금도 부산 사람들은 옛날에 박도사가 풀어준 사주 간명지를 농 밑에 넣어 놓고 한번씩 꺼내 본다고 한다.
“방으로 날아들어온 벌이 어데로 나갈꼬?”
1996년 4월 하순경. 필자는 함양군 서상면 옥산부락에 있는 덕운정사(德雲精舍)를 방문하였다. 덕운정사는 제산의 탄생지에 자신이 직접 세운 도관(道館)이자 집이고 아카데미였다. 대지 2,000평에 50여 칸에 달하는 전통 기와집 형태다. 제산이 도회지에서 은퇴하여 말년에 이곳에서 제자도 키우고 자신의 못다한 정신수양도 하려고 지은 건물이었다. 일반주택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그렇다고 불교 사찰로 보기에는 종교적 냄새가 덜 난다. 그게 바로 도교 도관의 형태다.
제산에 대한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면하고 보니 위풍이 있는 풍채도 아니고 사람을 압도하는 압인지상(壓人之像)의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보니 이때는 이미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상태였다. 첫인상은 솔직히 약간 실망스러웠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하던데 혹시 허명(虛名)만 요란해진 경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첫 대면에서 나는 아주 평범하면서 극히 세속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주팔자를 한번 보러 왔습니다. 돈을 좀 벌 수 있겠는가 알아보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육십갑자로 된 나의 여덟 글자를 내보였다. 사주팔자를 한참 훑어보던 제산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물음을 나에게 휙 던졌다.
“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다 문창에 탁탁 부딪힌다. 이 벌이 어떻게 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사주팔자에 언제 돈 벌 운이 올 것인가에 대한 답변치고는 너무나 차원이 다른 답변이었다. 아주 세속적인 물음을 던졌는데 제산은 격외(格外)의 선문답(禪問答)으로 되돌린 것이다. 필자도 난다긴다 하는 제방의 수많은 고수들과 일합씩 겨뤄본 경험이 있어서 어지간한 초식에는 방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언제쯤 대운(大運)이 올 것’이라는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필자에게 제산의 ‘벌 한 마리’ 초식은 전혀 예상 밖의 급습이었다. 방심하다 단칼에 찔린 상황이라고나 할까.
‘아! 이 사람은 사주팔자나 보아주는 단순한 술객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들었다. 순간적으로 나온 나의 답변은 “창문에 부딪쳐 죽어버리죠!”였다. 그러자 제산은 웃으면서 “1급은 아니지만 2급은 되는구먼!”이라고 했다. “2급이라도 돼서 다행입니다”하고 다시 맞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나의 판정패였음을 직감했다. KO패 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최악은 면했으니까.
벌 이야기는 선가(禪家)에서 회자되는 선문답이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했으며 조계종 총무원장을 세번이나 역임한 경산(京山·1917~79) 스님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는 책에 그 설명이 나온다. 중국 복주 교령사에 신찬선사(神贊禪師)가 있었다. 어려서 은사를 따라 경전공부를 어느 정도 마치고 어디론가 훌훌 떠나 잠적했다. 이윽고 10년만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은사를 찾았을 때 은사는 여전히 경전만 읽고 있었다. 어느 봄날 신찬선사는 은사 스님을 모시고 방에서 문을 열어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때 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다 문창에 탁탁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신찬선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열어 놓은 창으로는 나가지 않고(空門不肯出)
창에 머리를 부딪치니 어리석다 마다(投窓也大癡)
평생 고지(古紙)를 뚫은들(百年古鑿紙)
어느 때 밖으로 나가리오(何時出頭哉)
이 시는 벌의 우둔함을 노래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스승의 우둔함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계송이었다. 십년 백년 책만 본다 한들 깨치겠느냐. 아무리 책을 보아도 저 벌이 창을 나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제산이 선가(禪家)의 1,700 공안(公案) 가운데 하필 이 화두를 나에게 던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책 좀 그만 보고 기도와 선(禪)을 할 시기가 되었다는 충고로 이해하였다.
벌 화두를 통해 이 ‘조용헌’의 기를 일단 꺾어 놓은 다음 제산은 필사본으로 된 책을 책장에서 하나 빼왔다. 검정 사인펜으로 써 놓은 책 제목은 ‘성명규지’(性命圭旨)였다. 필자는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놀랐다. 아니! 이 사람이 어떻게 ‘성명규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성명규지’는 중국 명대(明代)의 내단서(內丹書)로서 유·불·선(儒佛仙)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입장에서 성명쌍수(性命雙修)를 강조하는 일급 비서다.
국내에서도 이 책은 도교 전공 학자들 몇몇이나 알고 있을 뿐 일반인은 잘 모르는 책이다. ‘성명규지’에서 강조하는 성명쌍수는 성(性)과 명(命)을 모두 닦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은 불교의 주특기로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이고, 명은 도교의 주특기로 호흡법을 통하여 몸을 강철같이 단련하는 방법이다. 성만 닦고 명을 닦지 않으면 지혜는 밝지만 몸이 아프고 신통력이 나오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명만 닦고 성을 닦지 않으면 몸은 건강하고 장수할지 몰라도 긍극적인 지혜(ultimate wisdom)는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불교의 장점과 도교 수련의 장점을 모두 겸비해야만 진정한 도인이 된다는 입장이 성명쌍수요, ‘성명규지’의 주장이다. 말하자면 도교와 불교의 장점을 모두 아우르자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 책을 어떻게 가지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자네도 이 책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인가”하고 이번에는 제산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산이 이 책을 꺼낸 의도는 불교수행만 수행이 아니고 도교 수행도 해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도불(道佛)수행을 아우르는 비전(秘傳)의 도서(道書)를 하나 소개해 주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젊은 사람이 지리산의 스승들이나 알고 있는 ‘성명규지’를 이미 섭렵한 기미를 보이자 제산도 의외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주팔자 때문에 갔지만 그날 둘 사이의 대화 가운데 사주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4~5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금의 기인·달사들에 관한 일화들을 유쾌하게 주고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간이 다 되어 헤어질 무렵 제산은 “여름방학이 되면 거창 연수사로 공부하러 오라. 거기서 같이 지내보자”는 제의를 하였다. 나에 대한 은근한 호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해 여름 나는 중국 천태산(天台山)에서 한산(寒山) 합득(拾得)의 행적을 추적하느라 거창 연수사에 합류하지 못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인연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자는 생리를 끊고 남자는 정액을 가둬야
이 일을 계기로 제산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바뀌었다. 사주팔자나 보아주는 단순한 술객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선맥(仙脈)에 어떤 형태로든 맥을 댄 도가의 인물이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면 제산이 지리산 일대에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들과 교류했다는 말인가. 그가 관계를 맺었던 도가의 인물들은 과연 누구인가. 어떤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그 뒷조사를 한번 해보자. 그 추적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가 하나 발견되었다. 그 단서는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경북 문경 희양산의 대머리 바위에서 수도한 개운조사(開雲祖師,1790~?)를 추종하는 개운조사파(開雲祖師派)에서 애호하는 수련서다. 성명쌍수가 핵심 내용이다.
그 내용을 보면 여자가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리를 끊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참적룡(斬赤龍)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적룡을 베어라’이다. 여자의 멘스를 붉은 용으로 표현하였다. 멘스가 나오면 영(靈)이 빠져 버리므로 저수지에 수문을 세워 물을 가두듯 여자는 생리가 중단되어야만 본격적인 수행의 길로 접어든다는 내용이다. 나이가 들어 멘스가 이미 끝나버린 여자는 호흡을 통해 멘스를 회복시킨 다음 다시 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대로 남자는 정액을 가두어야 한다.
항백호(降白虎)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정액이 흰색이므로 백호로 상징하고 이 정액을 밖으로 배출시키지 않고 내면에 가두어 두어야만 수행이 진전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호로부터 항복 받아야 한다. 즉, 성적 욕망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항백호와 참적룡이 남녀 수행법의 핵심이다. 필자는 이 책을 경남 합천의 가야산에서 구했다. 개운조사의 제자인 윤양성(尹暘星, 1892~1992) 스님이 있고, 윤양성을 통해 가야산의 혜강 스님에게 전해진 책이다. 그러므로 ‘선불가진수어록’은 개운조사파의 중요한 수행 지침서인 셈이다.
여기서 먼저 개운조사파를 주목한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다. 개운조사는 조선의 고승 가운데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가장 확실하게 증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수행 경지를 말로만이 아닌 물증으로 확실하게 남겨 놓았다. 경북 문경군 화북읍 장암리 용유동 계곡 도로 옆에는 가로 세로 3~4m 크기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커다란 초서체로 ‘동천’(洞天)이라는 글씨가 각인되어 있다. 동천은 신선이 거주하는 장소를 일컫는다.
문제는 이 글씨가 사람의 주먹으로 새긴 글씨라는 점이다. 정이나 끌로 새긴 글씨가 아니다. 개운조사가 아라한과의 바로 전단계인 아나함과를 성취하고 그 증거로 남긴 물건이다. 개운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동천 글씨는 자신의 주먹으로 썼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 이 주먹 글씨를 남긴 이유는 도(道)라는 것이 헛된 관념론이라고 비방하는 사람들을 경책하기 위해서였다. 동천이라는 글씨는 도가 있음을 증명하는 물증이다.
개운조사는 불교의 승려였지만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1993년 4월 발행된 월간 ‘신시’(神市)라는 잡지에서는 1970년대까지 개운조사가 생존해 있다는 항간의 소문을 기사로 다루고 있다. 즉,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의 효창선원(孝暢禪院)이라는 암자에 제자인 윤양성 스님을 만나기 위해 개운조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개운은 다산 정약용이 기중기를 발명하던 무렵인 1790년생이니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다면 200세에 가까운 나이다.
서울 여의도에서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이야기이지만, 지리산 일대에서는 개운조사가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수백명이나 된다. 과연 여의도가 현실적인지 지리산이 현실적인지는 대 보아야 한다. 지리산 일대에 개운조사를 추종하는 개운조사파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략 200명 이상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국의 명산 골짜기에 숨어 수행하고 있다. 개운조사가 주석을 단 ‘정본능엄경’(正本楞嚴經)이 1993년 대구 대영문화사에서 활자화되었는데, 1,000페이지의 볼륨에 5만원의 정가가 붙은 수련 전문서적이다. ‘정본능엄경’이 현재까지 팔린 부수만 해도 2,300권이다. ‘정본능엄경’은 완전히 수련 전문가를 위한 서적이다. 그만큼 전문 도꾼들의 애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말이 좀 길어졌지만 ‘선불가진수어록’은 개운조사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서라는 점을 일단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제산이 이 책의 발행인으로 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오년(1978년) 3월20일에 발행된 이 책은 저자가 백운산인(白雲山人) 윤일봉(尹一峯)으로 되어 있고, 발행인은 계룡산인(鷄龍山人) 박제산(朴霽山)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렇다. ‘선불가진수어록’은 제산이 인쇄비용을 대고 만든 책이다. 1978년이면 장덕진 농수산부 장관에게 곧 비가 오니 양수기를 사지 말고 기다려 보라고 충고할 즈음이다. 이때 제산은 계룡산 신도안의 법정사에서 공부하던 중이었다. 부산에서 이름도 날리고 가족들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호구지책이 어느 정도 마련되자 훌훌 털고 다시 계룡산으로 입산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계룡산인으로 자처하였다. 각설하고 제산이 ‘선불가진수어록’을 발행했다는 사실은 근래 한국 최고의 선맥(仙脈)인 개운조사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함양 백운산 백운사의 고운 물소리
그 관계를 좀더 추적해 보았다. 제산은 지리산 시절 이미 개운조사파와 관련을 맺었다. 개운의 전법제자인 윤양성 스님, 경남 함양의 백운산에 있는 백운사 주지인 문봉스님과 함께 백운사에서 수련하였다. 함양의 백운산은 상연대(上蓮臺)라는 수도처로 유명하다. 상연대는 전국의 한다 하는 도꾼들이 한번쯤 머무르고 싶어하는 영험한 곳이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도통했다는 설이 있다. 근세에는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스님이 반농반선(半農半禪)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화과원(華果院)을 설립했던 산이 바로 백운산이다.
봄에는 노랗게 핀 산수유가 만발하는 산이기도 하다. 백운산 들어가는 계곡 옆에는 백운사라고 하는 허름한 절이 있다. 보기에는 허름하지만 이 절은 계곡의 물소리가 아주 좋다. 커다란 바위절벽 옆에 붙어 있는 이 절은 경내를 감싸고 흐르는 물소리가 일품이다. 특히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의 계절인 봄이 되면 물소리가 나그네의 마음을 붙잡는다. 번뇌를 없애는 데는 계곡의 물소리가 가장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화창한 봄날 노란 산수유가 만발한 계곡에서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만가지 시름이 모두 사라지는 경험을 여러번 하였다. 수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의식의 집중이다. 문제는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이다. 화두에 집중할 것인가, 염불에 집중할 것인가.
능엄경에서는 물소리에 집중할 것을 권하고 있다. 물소리에 대한 집중이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이 바로 청각을 이용한 이근원통(耳根圓通)이다. 관음보살이 수행해서 효과를 본 수행법이 이근원통이다. 제산은 지리산 시절 고향인 백운사에서 개운조사파의 전법제자인 윤양성 스님, 그리고 백운사의 주지인 문봉 스님과 함께 능엄경의 이근원통 수행을 경험했다. 아울러 개운조사의 성명쌍수 수행법을 이미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 계룡산에 입산했을 때 다시 양성·문봉 스님과 함께 신도안의 법정사에서 수련하였다. 계룡산에서 수련할 때는 개운조사파 수련법 외에 약간 다른 비법을 입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약간 다른 비법이란 바로 주문수행이다. 주문은 개운조사파도 역시 하지만, 이 시기 제산이 했던 주문은 ‘구령삼정주’(九靈三鼎呪)라는 주문이었다. 개운조사파는 능엄주(楞嚴呪)를 했지만, 제산은 구령삼정주를 하였다.
주문은 기도나 참선보다 효과가 빠르고 굉장한 파워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잘못하면 부작용이 크다. 마음이 강하지 못한 사람이 주문을 하면 정신이 돌아버리는 것이다. 심하면 죽거나 병신이 되는 수도 있다. 그래서 함부로 주문을 하지 못한다. 주문수련은 3가지 유형 중 하나로 귀결된다. 필자는 이를 ‘죽통병’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즉, ‘죽거나 통하거나 병들거나’ 중 하나로 귀결된다. 제산은 구령삼정주를 통하여 한소식 한 것 같다.
사주는 이론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영발(靈發)이 있어야 한다. 사주팔자를 한눈에 파악하는 신통력은 구령삼정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구령삼정주는 어떤 주문이란 말인가. 하나를 알면 그 배후의 또 하나를 알아야 한다.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그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한없는 도학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최종 근원은 어디란 말인가. 구령삼정주는 조선 후기 민간도교에서 유행했던
옥추경에포힘되어 있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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