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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수리 고분 성곽도 |
![]() 용강대묘의 성곽도 |
■ 백제
백제는 초기 한강을 중심으로 축성이 활발하였다. 백제는 도읍을 두차례나 옮기면서 도읍지인 도성을 중심으로 많은 축성을 하였다. 백제초기의 위례성 시대 (B.C.10~A.D.475)에는 주로 고구려와 말갈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성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한강을 중심으로 축조한 夢村土城, 風納里土城, 阿且山城, 南漢山城, 二城山城, 三城洞土城, 陽井城, 千戶洞 土城등이 있다. 토성은 외벽을 깍아 급경사로 만드는 削土法의 이용과 낮은 지역은 부분적으로 版築技法으로 補築하였다.
풍납리토성은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위치적으로 보아 백제의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아차산성은 한강 북쪽의 해발 205m의 고지 아차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남측방향으로 산중턱 위 부분을 돌렸는데 그 길이가 약 1km정도로 土石混築하였으며 성벽의 높이는 높은 곳이 약 10m 가량이고 동․서․남측에 성문지가있다.
公山城은 성둘레 약 2,580m로 대분분이 石城이고 일부가 土城으로 되어있다. 현재의 석성은 조선조때 개축한 것으로 보이며 동문지밖의 토성은 735m남아 있는데 이 토성은 백제 시대의 토성으로 보인다. 토성은 높이 1m내외 성기폭은 8.5m이며 상단 3m가량의 토석혼축이다. 백제 웅진성 부근은 성곽위치로 보아 공산성을 중심으로 公州管內에 熊津洞山城, 月城山城등 10여개의 성이 羅城 역할을 하였음이 조사, 보고 되어 있다.
나성은 토축으로 되어 있어 형태구분이 어렵게 되어 있으나 扶蘇山城 東門址, 즉 현재의 迎日樓앞에서 시작하여 동쪽에 있는 靑山城으로부터 남쪽으로 구부러져 石木里, 必西峰을 지나 염창리 금강변까지 토축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하나 청산성 북쪽 20m와 그 외는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 고신라
신라는 수도를 금성에 정하고 도읍을 옮기지 않고 경주에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수도가 한반도의 동남방에 치우쳐 있는 까닭으로 불편을 느껴 천도하려고 하였으나 결국은 끝까지 경주에 머물러 있었다. 경주의 남쪽에 흐르는 남천의 북쪽에 반월모양의 편평한 구릉으로 된 半月城이 있는데 이 반월성은 신라의 왕궁성으로 오래 이용되었다. 王都 방비를 위한 羅城은 만들지 않았으나 나성 역할에 해당되는 要路를 제압할 수 있는 산성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산성은 동쪽에 明活山城,남쪽에 南山城,서측에는 仙桃山城이 그것이고 그 외곽에는 關門城, 富山城, 北兄山城등이 배치되어 있다.
파사왕 22년에 남천 북쪽의 구릉에 월성이라는 성을 축조하고 왕이 월성에 옮겨 거처했다. 월성의 규모는 동서 약900m,남북 260m 정도이고 성내면적이 6만여평에 이르며 城 외곽의둘레는 2,400m 가량된다. 성벽은 토석혼축이며 남쪽으로 굽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이라한다. 성외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약간 높은 언덕을 따라 성벽을 둘렸는데 성내의 地盤高가 성외보다 7-18㎝가량 높다. 군데 군데 낮은 곳은 성외부로 통하는 門址로 생각되며 성벽의 정상에는 5폭으로 성벽선을 따라 10-20m 크기의 냇돌로 된 石列이 노출되어 길게 연결되어 있다. 주변하천을 垓字로 자연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한 성곽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는 羅城을 축조하지는 않았으나 나성의 역할을 하는 동서남북의 산성이 있었다.
3) 통일신라시대의 城
문무왕대 백제통합, 고구려 통합으로 한반도의 통일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하였다. 엣 고구려 영토를 전부 통치 지역으로 되지는 않았으나 당에 대항하여 반도를 지킬만큼 국력이 신장되었다. 삼국이 정립된 시기에는 국경을 중심으로 한 산성위주의 성곽을 축조하였으나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는 자연 읍성류의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 하였다.
초기에는 산성류가 축조되었으나 통일이 완성된 신문왕대에는 지방 중심지의 군현에 성을 쌓고 太守를 두는등 읍성위주의 축성이 이루어 지다가 경덕왕 이후에는 170여년간은 축성기록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특히 성덕왕대에 북경지역에 장성을 쌓았는데 대동강부터 덕원 부근까지 축조하였고, 한편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한 관문성이 있다. 이 관문성은 현재 城門址로 추정되는 석축이나 倉址등이 군데 군데 남아 있는데 잘 다듬어진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동해를 향해 쌓아서 왜병의 침입을 막는 전초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약 15km달하는 이 성은 신라의 가장 큰 석성으로 신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리운다.
4) 고려시대의 城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강한 의지로 북방경략에 힘을 기울여 북방의 영토확장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자연 북방접경지역의 축성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태조는 왕궁을 세우면서 皇城을 쌓았는데 그 크기는 모두 2천6백칸의 소규모로 아직 도성으로서 외형을 갖추지 못하였다. 한편 북쪽의 거란과 여진에 대비하기 위하여 덕종때부터 정종때에 걸쳐 약12년간의 긴세월을 소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다.
고려후기에는 元의 지배하에서도 축성이 이루어지고 왜구와 홍건적에 대비 해변에 축성을 많이 하였다. 강화성은 고려때에는 內城, 中城, 外城이 있었는데 內城은 주위 약 1200m로 동, 서, 남, 북의 三門으로 구성된 지금의 강화성인데 이는 고종 19년 천도 당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군은 자연 근거마련을 위한 성곽축조를 하였는데, 이때 축조한 성곽이 용장성이다.
용장성은 궁성을 기존 절터인 광덕사를 이용 개축하고 궁성 주변에도 토축의 성벽을 둘렸다. 초기에 변방을 중심으로 활발한 축성이 이루어 졌는데 특히 예종때 윤관장군이 동북방의 여진을 정벌하고 그곳에 9성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후기에 와서 元나라의 횡포로 사회가 혼란하였지만 국가재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축성은 계속 이루어 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으로는 홍건적과 왜구가 들끓는 말기에 읍성류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때가 오늘날의 읍성이 축조되는 시점으로 보여진다.
5) 조선시대의 城
조선조의 창업과 동시 부국강병을 위해 축성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말의 外侵에 시달린 경험을 바탕으로 북경행성의 축조등 성곽축조를 중점적으로 실시하였다. 특히 麗末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沿海邑城의 축조도 계속되었다. 특히 읍성은 麗末에 축성된 것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읍성이 없었던 곳은 신축하였다. 이 시대의 읍성으로 현존하는 것이 많다.
태조는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도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 태조 5년에 각도 民丁을 徵發하여 축성을 완료하였다. 처음에는 토축이었으나 나중에 석축으로 개축하였다. 개축된 석성은 둘레가 약 17km,높이가 40척 2촌이었다. 성에는 대문이 4, 間門4, 계 8문이었다. 현존하는 성문과 성벽은 숙종, 영정조 때에 수축된 것이 대부분이다.
국보 4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대문의 工役은 태조 5년 2월에 완성되었고 여러차례 개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보물 1호인 동대문은 태조때 축조되었으나 현재의 성문은 고종 6년에 전부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8문중 현재 남아 있는 城門은 南大門, 東大門, 光熙門, 肅淸門이다. 이 중 東大門과 敦義門은 甕城이 있었다.
조선조 초기 도성의 축조가 있는 뒤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북방변경에는 적침략에 대비 行城의 축조가 성행하였다. 특히 세종, 성종 때에는 邑城의 축조가 활발하였는데 이당시 읍성축조의 특징은 토축이었던 것을 석축으로 개축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규모가 적은 것은 크기를 늘리는 등 현존하는 대부분의 읍성중 이 당시에 축조된 것이 많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 행정구역수 330개소에 읍성이 갖추어진 군,현이 160개소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335개의 행정구역 중 읍성이 있는 곳이 96개소인데 그 중에서 하삼도(下三道)인 경상, 전라, 충청에 축조된 것만도 62개소에 이른다.(심정보, 한국의 읍성연구, 1995, p.341)이 당시 읍성의 대부분은 석성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산지에 축조된 산성과는 달리 평지나 구릉지(平山)지역에 축조한 경우가 많아 원형, 방형 형식이 많았다. 성의 규모도 시가지 일부를 포함, 客舍, 官衙등의 건물을 두고 있어 행정, 군사적 요소를 갖는 양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조의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산성축조형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유사시에 천연자연지세가 유리한 산성에 入堡하여 오랫동안 굴복치 않고 항쟁할 수 있는 것도 산성 특유의 장점을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麗末부터 화약과 화포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전쟁양상이 변화하게 되어 종전의 방어시설도 개선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성곽의 방어시설물은 보강이 요구되어 읍성에는 敵台, 女墻, 甕城, 垓字등은 규격화 하게 되었고 성벽은 견고 하게 하였고 높이도 자연 높아졌다.
2. 城郭種類와 分類
2.1 거주주체에 따른 분류
성곽의 분류는 여러 측면에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분류되는 방법의 하나가 거주주체에 따른 구분이다. 축성시 누구를 위해 조성하였느냐에 따라, 평시 거주여부에 따라 도성, 왕성, 황성, 재성, 행재성, 읍성, 창성, 진, 보등으로 구분된다.
1) 都城 또는 京城
도성은 왕이 평시 거처하는 궁성을 포함하여 한 국가, 권력의 상징인 왕이 평시 거주하는 행정의 중심지에 내곽인 궁성과 외곽인 나곽을 갖춘 형태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도성은 삼국 초기부터 발달되었는데 중국과는 달리 평지에 조성된 바둑판식의 중국식이라기 보다 산성에서 발전된 방식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지형여건에 맞게 민가와 관청건물을 수용하고 자연지세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방어력도 높혔다. 도성은 절대권격의 왕이 왕권을 강화한 시기부터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2) 宮城, 王城, 皇城
봉건사회에서 절대권자인 왕이 거처하며 통치하는 곳에는 궁궐을 짓고 필요한 관청건물이 축조된다. 이를 중심으로 성벽이나 담장으로 둘러싸는데 이를 통틀어 궁성이라 한다. 도성내에는 왕이 있는 궁궐을 비롯하여 백성들과 행정관청을 두루 갖춘 지역을 말하는데 도성내의 도성을 궁성이라 할 수 있다.
궁성은 도성이 축조되지 않는 곳에도 있을 수 있어 반드시 도성이 축조된 내에만 있느 것만은 아니었다. 궁성은 여러 명칭으로 사용되었는데 왕이 거처한다 하여 왕성이라 하기도 하고 황제인 경우는 황성이라고도 불리웠다. 시대별로 대표적인 궁성은 고구려 평양의 안학궁성, 백제의 부소산성내의 왕궁지, 신라 금성내의 월성, 고려의 만월대 궁지, 조선조의 경복궁들을 예시할 수 있다.
3) 行在城
행재성은 재성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절대왕권시대의 왕이 거처하는 성을 재성이라 하는데 통상 도성내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행재성은 평상시에는 상주하지 않으나, 국방상, 행정상 중요한 지점에 국왕이 임시로 가서 있는 성을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이경(離京)의 궁성을 말하는데 고려시대 수도 개경이외에 국방, 행정상 중요한 남경, 서경등지에 궁성을 축조해 놓은 성을 말한다.
4) 邑城
읍성은 거주주체가 왕이 아니고 군, 현 주민의 보호와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계 한 성이다. 도성과 읍성에 대한 구분은 [有宗廟先君之主 曰都, 無曰邑 邑曰築 築曰城 口其城郭也]이라 하여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을 도라하고 없으면 읍이라 하여 이러한 곳에 방형으로 시설된 것을 성곽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도성과 읍성을 개념적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읍성형식은 중국과 일본등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읍성이 언제부터 축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현존 읍성의 성격을 갖춘 성곽의 형태는 여말 왜구에 대비하여 연해 위중에 읍성을 축조한 것이 처음이 아닌가 보여진다.
우리나라 지방도시 발달이 배후에 진산을 두고 시가지를 형성하므로서 자연발생적으로 독특한 읍성의 형식이 발달된 것으로 생각된다. 읍성은 평산성의 형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평지에 축조된 평지성의 형태는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많이 보인다. 읍성은 여말 왜구에 대비하여 연안 지역에 축조되었으나 조선조 초기에 활발히 축조되었는데 성종때 전국의 행정구역수는 330개소인데 이 당시 읍성의 수는 190개소나 된다. 읍성의 설치지역을 분석해 보면, 충청 20개소, 경상 45개소, 전라 39개소, 함경 23개소, 평안33개소로 위 5개도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북방 및 왜구에 대비 해안 지방에 중점적으로 설치하였다.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 원형, 자연지세형 등이 있는데 초기 평지의 읍성은 방형으로 각 밯양의 중심부에 성문을 두었다. 시대의 경과에 따라 원형에 가깝게 조성되었는데 성둘레가 클수록 자연지세형에 따랐다.
읍성위치는 읍치의 장소로 현재 도시로 발전된 지역이 대부분이다. 전국 읍성중 완형(完形)에 가깝게 보존된 것이나 보고서로 알수 있는 것은 동래읍성, 수언성, 옿주성,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 남도석성, 경주읍성, 진주읍성 9개소 뿐이고 일부라도 남아있는 읍성은 강릉읍성등 63개소로 조사되었다.
(1) 조선시대 읍성내의 시설물
- 객사 : 흔히 객관으로 부르기도 하며 글자의 뜻으로 보면 지방관이 왕명을 받아 지방을 여행할 때 머무르는 숙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숙소의 기능보다 객사의 중앙에 마련된 정청에서 고을 수령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 동헌 : 넓은 의미에서 객사를 포함한 관아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수령만의 집무처인 정청건물 및 관청만을 지칭하고 이를 보통 아사라고 한다. 아사의 정청인 동헌은 군수나 현감이 공무를 집행하는 공간이고 이들의 가족은 내아라 불리는 내동헌에 기거한다.
- 부속건물 : 온돌과 마루, 민도리집 계통의 소박한 양식의 건물들로 홍살물, 외삼문, 내삼문, 동헌에 이르는 중심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ㆍ 향청 : 좌수, 별감의 집무처이며 관내민정을 살펴서 민의를 대표하고 수령의 행정을 지방토호의 입장에서 지원하는 자문기관
ㆍ 책방 : 아사 별실의 하나로 부사의 비서사무를 맡은 책방이 거처하던 곳으로 고을 원의 자제들이 독서하는 곳이기도 하다.
ㆍ 읍사 : 주사, 부사, 군사, 현사등의 범칭인데, 고을의 등급에 관계없이 현사로 불리는것이 일반적이었다. 육방의 수석인 호장의 집무소이다.
ㆍ 작청 : 이서들의 집무처로서 공식적으로는 인이청 또는 이청이라 하였지만 길청, 연청이라고도 불렸다. 조선후기에 작청은 조선초기 읍사의 기능을 완전히 대처하면서 이서집단의 중심기구로 자리잡게 된다.
ㆍ 서원청 : 서리(징세원)의 집무처로서 우너래 입추에 설치되는 임시기구였으나 독자의 청사를 갖고 상설기구화 되었다.
ㆍ 군관청 : 군관은 장교라고도하여 고을의 군기관리와 양역에 의한 군병의 소집, 조련등 일반 병무를 주관하며 지방 속오군과 연대하여 향토방위의 임무도 수행한다.
이 외에 통인청, 형이청, 공방청, 관청, 토포청, 장관청, 교련청, 장방, 관노청, 훈련청, 무학당, 약방, 교방, 형옥, 사창, 군기고, 대동청등의 건물들로 구성된다.
5) 기타 城
(1) 왜성(倭城)
왜성이라고 하는 것은 풍신수길이 선조 25년(AD 1592) 임진년 소위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공하고 그 부하들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하거나, 또는 왜군내의 타군과의 연락, 아군의 공격에 대비코자 곳곳에 축성하였다. 임진란때 축성한 왜성은 西生浦城, 同端城, 林浪浦城, 機張城, 東萊城, 釜山城, 釜山城의 支城(支城), 甘同浦城, 龜浦戰城, 金海城, 加德島城, 安骨浦城, 熊川城, 同端城, 永登浦城등 18성이다.
(2) 한식산성(韓式山城)
한식산성이란 축성당시의 사정은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은 백촌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위협을 느끼고 있을대 백제 망명고관인 답본촌초등 백제인의 지도아래 北九州를 중심으로 산성이 수년간에 걸쳐 대야성 등 6개소가 축조되었다.
(3) 신농석(神籠石)
西日本에 위치하는 성곽유적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 유적 역시 표고 300M내외 산중복 두부형으로 가공된 돌을 산정을 둘러 일렬로 나란히 축조하였다. 명치시대에 고량산의 석열이 학계에 소개될 즈음 [신농석]이라 불리워져 현재와 같이 부르게 되었다.
2.2 목적에 의한 분류
1) 행정적인 城
성곽을 축조하는 제일차적인 목적은 군사적 방어 시설물로서의 가치이다. 그러나 모든 성곽이 군사적인 목표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평시 행정적인 측면이 중시되면서 유사시를 대비한 성곽으로 都城이나 邑城등이 대표적이다.
2) 군사적인 城
성곽을 축조하는 목적은 두말할 나위없이 군사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다. 평시에은 성내에서 생활이나 근무를 하지 않으나 유사시에 입보하여 농성할 수 있는 준비만을 갖춘 것이나 성곽만 준비해 두었다가 여건에 맞게 농성에 필요한 무기와 물자를 휴대해 입성하는 경우 등이 있다.
2.3 지형에 의한 유형
성곽이 위치하고 있는 지형의 형태에 따른 분류방법으로 항시 적절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력을 높히려 노력하였다. 성이 있는 위치를 대별하면 산지, 평지, 편산지 또는 야지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산성(山城)
① 산정식(山頂式) 산성
성곽의 축조된 지형이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공간을 둘린 형태로 이러한 형식을 산성이라 한다. 그 외에도 산정식 산성을 발권식 산성(鉢圈式山城), 퇴뫼식 산성등으로 불리워지나 같은 형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산정식 산성은 일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축성년대가 上代인 것이 많다. 그 예로 최근 발견된 제 2선수촌이 들어있는 진해의 龜山城이 있다. 산정을 중심으로한 소규모 산정식산성은 형태가 대체적으로 요철이 작은 원형 또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한다.
② 포곡식(包谷式) 산성
포곡식산성은 성내에 계곡을 포함하는 형식으로 자연, 규모가 산정식보다 크다. 포곡식산성은 계곡을 내포하여 주변의 산세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둘렀기 때문에 城內水源이 풍부하고 활동공간이 넓을 뿐 아니라 외부에 노출도 방지해 준다. 이러한 포곡식은 지형여건상 자연지세에 맞게 자연곡선형이다. 보은의 삼년산성, 익산의 오금산성, 목천의 목천토성, 즙안의 산성자산성 등이 이에 해당된다.
③ 복합식(複合式) 산성
복합식 산성은 성내에 산정과 계곡을 공유하고 있는 형태로 일부는 퇴뫼식 산성(山頂式 山城)이고 일부지역은 포곡식산성이 결합해서 이루어진 복합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식산성의 형태는 자연 일정한 규모이상의 산성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규모가 큰 산성이든가 도성이 이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평양의 대성산성, 공주의 공산성, 부여의 부소산성 등이다.
2) 평지성(平地城) 산성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평지에 축조한 성은 그리 많지 않다. 평지성은 산성에 비해 성벽에서의 방어력을 유지하기 위해 성벽이 일반적으로 크고 성벽 축조시 공역을 많이 들였다. 그 예로 서울 풍납리토성, 진도의 남도석성, 경주의 경주읍성, 울주의 언양읍성 등의 평지성이 있다.
3) 평산성(平山城) 평산성은 구릉지와 평탄지을 각기 일부씩 포함하고 있는 지세에 축조된 성을 말한다. 평산성의 경우 산지를 이용한 산성의 장점과 평시 거성으로서의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평산성은 군사적인 방어 시설물로서의 성곽 기능과 邑治의 행정적 기능을 두루 갖춘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평산성은 성곽이 위치한 지형형태에 의한 구분이지 결코 지역의 標高등에 의한 것은 아니다. 만경읍성은 전형적인 평산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만경읍성 북편은 모악산의 줄기인 두산 일부를 포함하고 두산 앞쪽의 평지를 위주로 한 성곽으로 원형에 가깝다. 이러한 평산성의 성곽은 대부분 읍성류도 서산의 해미읍성, 수원의 화성등지에서도 볼수 있다.
2.4 지리에 의한 유형
1) 국경성(國境城)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한강을 중심으로 세력 다툼이 치열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중부권지역에 각종 성곽유적을 많이 남기고 있다. 곧 전통적으로 국경지역에 축성을 활발히 하여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2) 해안성(海岸城)
고려말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적에 대비하여 해안 지역에 읍성류의 성곽이 많이 축조되었다.
3) 강안성(江岸城)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때에는 바다나 강을 이용한 교통이 발달되고 수송도 하천을 이용하여 주로 이루어 졌다. 강이나 하천은 이렇듯 수송수단임과 동시에 장애물로서의 역할도 하여 국경이 강이나 하천을 경계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대동강변의 장안성, 백제의 금강변의 공주 공산성, 부여의 부소산성, 서울의 풍납토성을 예시할 수 있다.
4) 내륙성(內陸城)
국경성의 대응 개념으로 接境地域이 아닌 내지의 성곽을 의미한다. 도성, 읍성을 비롯한 각종 성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 많다. 한성주변의 남한산성, 북산산성 등 수많은 성이 내륙성이라 할 수 있다.
2.5 축성재료에 의한 분류
성곽의 성벽축성 재료는 당시의 전투방식 및 무기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방어력 제공의 主手段이 성벽이기 때문에 어떠한 성벽을 축조하는냐 하는 것은 그 성곽의 방어력을 좌우한다. 우리나라 성곽은 성벽의 축성재료로 나무, 흙, 돌, 전돌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1) 목책성(木柵城)
초기 성곽에서는 목책을 널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목책은 재질이 나무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존되지 못하여 오늘날 목책의 완형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목책성은 단순히 나무가지 등으로만 축조한 것 이외에 나무가지를 꽂아 장애물로서 목책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다.
(2) 토성(土城)
오늘날 까지 남아 있는 성곽중에는 흙을 주재료로 하여 축조한 것들이 많다. 土城은 石城과 함께 우리나라 성곽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목책성과 함께 古形式에 속한다. 토성은 목책성에 비하여 공력이 많이 들고 그 규모 또한 크다. 주재료인 흙은 축성지역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석재의 운반이 어려운 산지에서는 토성이 많이 축조되었다.
(3) 석성(石城)
산악이 많고 양질의 화강석이 풍부한 우리나라는 석조건조물을 문화유산으로 많이 남기고 있다. 석조문화유산중의 하나가 석성이다. 성곽이라 하면 석성이 우리나라의 성곽을 대표하고 있다. 성벽의 축성재료로 석재가 가장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다른 어느 축성재료보다 방어력이 잘 제공해 주고 있고 성곽주변에 적당한 석재산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성은 初築 당시부터 석성인 경우도 있으나 처음에는 토성이었던 것을 석성으로 개축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남한산성, 공산성 등이 있다.
(4)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
축성재료로 흙과 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한 경우로 여러형태로 나타나는데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①성벽축조위치에 城基로 기초석을 한단 돌린 경우와 석심으로 몇단씩 석축하여 외부에 흙을 성벽 즉 土壘를 조성한 경우
②土石을 적절히 혼합하여 토루를 축조하여 순수한 흙으로 축조한 경우보다 견고하게 한 경우
③석축에 토축구간이 일부 병용된 경우
④위와 반대로 토축구간에 석축이 중요 지점이나 성문주변에 석축을 한 경우 등이 있다.
(5) 전축성(塼築城)
벽돌을 성벽축조의 주재료로 하여 축성하는 경우로 우리나라의 경우 그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다. 전축성은 부분적으로 이용되어 성전체를 전축하기 보다는 女墻등지에 부분적으로 사용하여 왔다. 남한산성, 서울성곽, 강화산성, 수원성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6 평면형상에 의한 분류
(1) 페합여부에 의한 구분
① 폐합성(閉合城)
성곽의 성벽이 위곽된 형태가 일정한 공간의 확보여부와 성벽이 상호 연결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개념이다. 폐합성은 성벽이 일정한 방어공간을 유지하고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는 성곽을 말한다.
ⅰ.方形城-성곽의 성벽이 둘러쳐진 모양이 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우리나라의 경우 수적으로 많지는 않으나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즐겨 이용했던 형식이다.
ⅱ.圓形城-성곽의 위곽된 모양이 원형이거나 반원형인 경우도 정형의 성곽의 형태인데 이를 형태에 따라 만월성, 반월성등으로 불린다.
ⅲ.不定形城-성곽이 위치한 지형에 맞게 성곽을 축조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일정한 형상이라기 보다는 자연지형에 맞는 자연곡선형이 되었다. 산성의 경우는 전부 이러한 형식에 해당되고 평산성의 경우도 대부분이 이 형식이다. 산성을 위주로 발달한 우리나라 성은 자연지세에 따랐기 때문에 자연히 부정형성이 대부분이다.
② 開放城
일정지역을 성벽으로 완전 둘린 것이 아니고 일부구역을 가로 막은 형태의 성을 말한다.
ⅰ.遮斷城-차단성은 험한 산골짜기에 城內外로 통하는 要路를 막는 구실을 하는 城이다.
ⅱ.長城, 行城-국경지역을 위주로 天然的인 방어에 유리한 지세를 이용하여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 하고자 쌓은 것으로 일명 행성이라 하기도 한다. 장성은 기존산성을 이용하기도 하고 山勢가 험한 지역은 간단한 削土法으로 성벽을 구축하였다. 행성이나 장성은 그 기능이 차단성과 같다. 다만 규모가 차단성보다 큰것을 말하는데 장성은 국경지역이나 중요지점을 전면적으로 가로 질러 막는 성곽으로 산성, 차단성등을 연결한 총칭의 城을 말한다.
(2) 線形狀에 의한 구분
①曲線形
성곽의 평면형상을 두고 볼 때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그대로 지형, 지세를 이용한 것이 기본이었다. 이 경우 평면은 부정형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곡선형의 성벽은 중국이나 일본의 성곽과는 성격의 차이가 있는 우리나라 성곽 특징중의 하나이다.
②直線形
평지에 성곽을 축조할 경우 원형이든가 방형의 성벽을 둘리는 형식을 취했다. 방형의 경우 성벽은 직선형을 갖게된다. 고려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널리 축조된 읍성류를 대별하면 방형, 원형, 자연곡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중 방형과 다각형 형식의 성곽은 직선형의 성벽을 갖고 있다.
③混合形
황주읍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부는 직선형의 성벽을 축조하고 山地에서는 자연지형에 맞게 자연곡선형으로 하기도 하였다.
(3) 기타형식
①曲城
곡성이란 성곽의 종류라기 보다는 성곽의 일부 시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곡성의 설치목적은 성벽에 접근하는 敵을 早期 觀測하고 성벽에 접근한 敵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곡성은 위치한 여건에 따라 명칭이 다른데 특별히 城門 좌우에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敵臺라 하고, 그 외의 것은 致, 致城, 또는 城致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2.7 重複度에 의한 구분
(1) 單郭城
성곽의 위곽된 성벽이 한줄로만 된 형태가 단곽성인데 우리나라의 성곽은 대부분 단곽성이라 해도 좋을 만큼 대부분이 단곽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는 단곽형태를 많이 취하나 좌우대칭형인데 반해 우리는 자연지세에 따를 형태로 대칭으로 하거나 중복하여 설치하지 않았다. 이러한 단곽의 성곽은 어떤 특징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고 주민 다수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단곽의 성곽은 성벽의 일부가 적에게 뚫리게 되면 뒤통수를 얻어 맞는 격이 되어 무용지물이 되고 말뿐만 아니라 오히려 취약점을 노출시켜 敵이 이용하기도 하였다.
(2) 複郭城
단곽에 대응되는 의미로 성곽의 성벽을 중복하여 둘러쳐 감싼 형태이든가 원래는 단곽인에 방어면적이 넓거나 좁아 방어에 편리하게 넓히거나 줄여서 축소한 형태로 기존성벽에 덧붙이거나 갈라 놓은 형태가 많다. 都城에 있는 王城이나 宮城은 도성을 外廓 즉, 羅郭으로 하여 복곽의 형태를 하고 있다. 重複度에 있어서도 二重郭, 三重郭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3. 城郭의 構成要素
3.1. 성문(城門)
성문은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통로로서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戰勢가 유리할 때에는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기도 하는 통로이다. 성문은 성곽의 축조시기, 재료, 목적, 위치, 규모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여러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성문은 초기 木柵에서는 가운데를 비워두고 출입하거나 임시구조물을 걸친 원시적인 형태에서 土壘의 일부를 절단 또는 축성하지 않거나 엇비켜 중첩해 두는 형태등 차츰 성문의 형식이 발전해 門樓를 세우고 성문의 각종 부대시설을 구비하여 오늘날의 위엄을 갖춘 훌륭한 성문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성문은 축성목적에 따라 正門, 間門, 暗門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城門이라 하면 正門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곽의 형식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建造物은 바로 城門이다. 성문의 수는 성곽의 규모, 축성목적, 지형 등 諸要素에 의해 정해졌는데 기본적으로 4개를 두었다. 방향도 동서남북으로 하여 가능하면 간격도 균등히 하여 출입의 불편을 줄이고자 하였다. 도성의 경우 그 규모가 말해주듯 4대문 외에도 小門, 間門등을 두어 통행의 불편을 덜었다.
1) 성문의 종류
(1) 土城門 - a.토성벽의 일부를 이용 성문의 한 형태로 토성문과 좌우에 토단을 두 어 일반 성벽보다 높게 쌓아 성문의 취약점을 보강한 형태
b.토성벽을 성문부분의 개구부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중첩되게 하여 土壘가 옹성의 역할을 하게 하므로 성문을 보호한 형태
c.성벽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으로 성벽은 토성이나 성문은 석성의 성문과 같은 형식으로 축조한 형태
(2) 石城門 - 현존 성문은 전부 석성에서 보여주고 있다. 석성의 성문형식은 다양하다. 성문의 축조재료는 석재를 비롯 목재, 철재, 기와등으로 이루어졌다. 읍성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4방향에 성문을 두었다. 그러나 성문은 방어에 취약점이 되는 곳이 되기도 하므로 가능하면 불요불급한 곳에는 내지 않았다.
2) 성문의 평면형식
성문의 주요구성요소는 出入口, 陸築, 門壘,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甕城, 敵台, 기타 각종 시설이 있다. 성문의 평면형식을 대별하면 개방형식과 연결형식으로 볼 수 있는데 개방형식은 토성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연결형식은 석성에 많다. 개방형식의 경우 단순한 절단형과 중복형이 있으며 연결형식에는 성문이 성벽과 나란히 장방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나 일부는 성벽과 동일 축선상이 아니고 서로 어긋나게 함으로써 그 사이에 성문을 설치하여 성벽과 직각을 이루게 한 것도 있다. 성문에 초루를 세운경우는 산성보다는 행정적인 성격을 띈 도․읍성에 많다.
3) 성문의 구성요소
성문을 구성하는 시설로는 일반적으로 陸築, 出入口, 門扉, 門樓등이 있고 그외에도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시설이 있는데 이를 통털어서 성문의 구성요소라 한다.
(1) 육축(陸築)
體城과 연결하여 성문을 내는 곳에 일반 성벽보다 두껍고 높게 설치한 것으로 도,읍성은 산성에 비해 가공석을 많이 사용했는데 축석 방법은 성돌을 조금씩 안으로 들여 넣어가며 쌓았으나 외관으로 보아 수직벽을 이루고 있다. 육축을 축조하는 목적은 출입구를 내어 통행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성문조성과 방어력을 확보하기 위해 육축 중앙에 개구부를 내었다.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나 상부에 문루없이 육축으로만 마감한 경우도 있다. 육축은 성곽의 종류별, 성격 등에 따라 규모가 달랐다. 육축은 일반 성벽보다 큰 돌을 사용하고 중요 성문에서는 외부 표면석은 물론 접합테두리까지 정교하게 가공하여 축조하였다. 산성의 경우는 일반 성돌보다 큰 자연석을 적절히 쌓아 가공하여 이용한 경우가 많았는데 석축 방법도 일반 성벽에 비하여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현존하는 가장 큰 육축중 하나는 수원성의 장안문으로 높이 7.5m 통후는 12.39m나 된다. 육축에는 반드시 漏穴을 두었는데 이는 육축위의 雨水등 침투한 물을 배수하기 위함이었다. 육축위에는 女墻을 두었는데 일반 성벽위의 女墻보다는 다르게 전돌을 쓰거나 정교하게 한 경우가 많았다. 육축위의 여장은 일반 여장과는 달이 적의 火攻에 대비한 역할도 하였다. 또한 여장은 여장의 朶口가 없는 連結女墻이 대부분인 것이 특징이다.
(2) 開口部
城의 內外를 연결해주는 통로가 개구부인데 개구부에 아무 시설이 없는 것에서 각종 부대시설을 한 형식까지 다양하다.
①평문식(平門式)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데 성문의 개구부를 중심으로 내외의 地盤의 수준이 같은 것으로 개구부의 입면의 모양에 따라 開据式, 平据式, 虹霓式이 있다.
![]() 약수리 고분 성곽도 |
![]() 용강대묘의 성곽도 |
![]() 용강대묘의 성곽도 |
②현문식(懸門式)
![]() 현문식 |
![]() 수원 팔달문 |
![]() 전주 풍남문 |
![]() 암운 |
![]() 수운 |
(1) 開放式
성벽의 일부를 터놓거나 성벽을 절개하여 지형적으로 배수가 필요한 지역에 성벽위로 배수하거나 성벽일부를 축조하지 않는 형식으로 일명 切開式이라 한다.
(2) 開口式
水口의 규모가 적은 곳에 많이 쓰인 방식으로 우리나라 성곽 배수구의 主種을 이루는 형식이다.
(3) 橋梁式
교량식수문은 배수용량이 많은 하천이나 계곡에 사용한 형식이다.
(4) 其他式
성내외로 물을 통하게 하기 위해 水口나 水門의 형식을 갖추어 배수하지 않고 성곽의 성벽축조재료가 石材나 通水가 가능한 土砂를 통하여 自然排水되게 한 경우도 많다.
옹성식 성문
6) 城門保護施設
(1) 옹성(甕城)
옹성은 성문을 밖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외부에 설치한 이중성벽을 말하며 형식에는 사각형옹성, 반원형 옹성, 특수형 옹성이 있다.
(2) 적대(敵台)
성문좌우에 설치한 雉를 특별히 敵台라 하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주변 가까운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만든 방어시설물의 하나이다. 敵台의 가장 잘 발달된 제도를 보여주는 곳이 수원성인데, 수원성의 장안문의 경우 성문으로부터 좌우로 약 60m정도 떨어져서 대칭으로 敵台를 각기 하나씩 설치하였다.
(3) 기타시설
城制가 가장 발달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수원성에는 甕城, 敵台외에도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五星池, 비예 등이 있다.
3.2 城壁
(1) 체성
![]() 옹성식 성문 |
![]() 목책 |
![]() 녹각 |
![]() 단일경사 성벽 |
![]() 유단경사 성벽 |
![]() 판축법 |
![]() 삭토법 |
![]() 보축법 |
![]() 성토법 |
④토석혼축(土石混築)
축성재료로 돌과 훍을 함께 써서 축조한 성벽축조 방식이다. 성벽의 단면을 살펴보면 내부에 일정한 석축을 쌓고 외부에 흙을 쌓는 방법과 흙과 돌을 적절히 혼합하여 축조하므로써 일반 토축 성벽보다 견고하게 하는 방법, 토성벽 한부분에 石列이 있는 경우 등이 있다. 토석혼축의 성벽은 외관상으로는 토성과 같이 보이나 단면을 확인해 보아야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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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석혼축성쌓기 |
⑥기타
성벽축성재료로 흙, 돌, 나무, 기와등의 여러종류를 사용하여 축조하는 성벽형태로 궁궐을 둘러싼 宮城壁의 경우가 있다. 宮城壁은 宮墻이라 하는데 도성내의 內城壁이다. 조선조의 正宮인 景福宮의 경우 正門인 光化門을 비롯 사방에 城門을 두었는데 성문과 성문사이를 연결한 성문은 담장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담장형식의 宮墻은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기도 하고 유사시 외적으로부터 궁궐을 안전하게 방비할 수 있는 구조로 하여 일반 여염집 담장과는 그 규모나 형식을 달리 하였다.
(2) 여장(女墻)
體城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女墻이라 한다.
①형식
여장에는 총안이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여장은 설치위치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총안, 타구 등이 없는 경우도 있다. 형식에는 평여장, 볼록여장, 반원형여장이 있다.
②구조
여장은 외측에서 보면 성벽의 연장으로 성벽을 높게 축조한 역할을 하고 내측에서는 적으로부터 은폐된 활동공간을 제공한다. 여장은 적공격에 대한 방어기능을 제공하는 동시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근, 원총안 타구 등의 구조물을 갖추고 있다.
![]() 성벽 명칭 |
(3) 미석(眉石)
미석은 體城과 여장사이에 납짝한 돌로 튀어나오게 설치한 시설로 女墻을 쌓기위해 맨윗단의 높이가 일정치 않으므로 일정하게 조절하는 기능을 갖기위해 설치한 듯 하다. 구조가 여장 아래 외부로 내밀고 있어 성벽에 타고 기어오르는 敵兵에게 불리하도록 된 구조이기도 하다.
(4) 총안(銃眼)
성벽 위에서 여장을 이용 적으로부터 노출되지 않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여장에 총이나 활을 쏘기 위한 구멍을 말한다. 여장에는 원총안(遠銃眼)과 근총안(近銃眼)이 있는데 원거리를 관측하고 사격을 할 수 있는 원총안, 성벽에 바짝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위한 근총안으로 급경사로 뚫었다. 총안의 형태는 대부분 正方形, 長方形으로 되어 있으나 예외적으로 원형, 호로형(표주박형)의 형태도 보인다.
![]() 여장(女墻)과 총안(銃眼) |
![]() 미석(眉石) |
![]() 원총안 근총안 |
(5) 현안(懸眼)
현안 성벽의 외벽면을 수직에 가깝게 뚫어 성벽 가까이 온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을 말한다.
(6) 치(雉)
![]() 치 |
(7) 각루(角樓)
각루는 성곽에서 성벽에 부착된 치(雉)의 일종으로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것을 角樓라 한다. 方形城에서는 모퉁이에 설치하였고 산성등 자연지세를 이용한 경우에는 지형상 돌출되어 관측과 지휘에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8) 공심돈(空心墩)
성벽에 설치한 돈대(墩台)의 하나로 角樓, 鋪樓, 砲樓가 위치한 곳과 같은 雉의 자리에 높다랗게 설치한 시설물인데 내부가 비어 있어 공심돈이라 한다. 공심돈은 수원성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서북, 동북, 남 공심돈 3개소가 있다.
(9) 용도(甬道)
성벽의 일부를 지형에 따라 좁게 성벽을 성외부로 길게 내뻗혀 양쪽에 女墻을 쌓는 城道를 말한다. 甬道가 설치된 지형은 성곽의 지형여건상 방어에 필요한 지형이나 전체를 감싸기 곤란한 지형이다. 해안성, 산성등 요철이 심한 지형을 이용한 성에서 넓은 정면의 성벽을 지키기에는 훈련된 병사가 많이 필요하는 경우에 조성되었다. 성곽은 잘 지키기 위해 적정한 방어면적을 갖는 위郭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형상 꼭 확보해야 되는 곳을 전부 둘러싸지는 못하더라도 방어상 꼭 필요한 지점만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인 성곽시설의 하나이다. 이러한 甬道는 雉의 역할도 수행하면서 중요 방어거점을 확보하므로써 城의 방어력을 높힐 수 있다.
(10) 해자(垓字)
성벽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城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성곽시설의 하나이다. 垓字는 적의 기동에 장애를 주는 하천, 바다등을 이용한 자연해자돠 인공적으로 호를 파거나 고랑을 낸 인공해다로 대별된다. 해자는 성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 있는 경우도 있다.(예:평양나성) 해자를 설치함으로 성벽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방어력도 증가되었다.
3.3 성내시설
성내의 시설에는 성곽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다. 행정적 성격이 많은 도성과 읍성의 경우는 산성류에 비해 성내시설이 다양하다.
(1) 음료
외침을 당하여 입성한 경우 가장 중요한 필수요소의 하나가 음료이다. 일정기간 농성을 위해 병사의 식수뿐 아니고 군마 또는 일정기간의 취사, 세탁등에 필요한 물을 성내에서 해결하여야 한다. 모든 성에는 성곽이 위치하고 있는 내부에 샘, 우물, 저수지등이 있었다.
(2) 장대
전투시 군사의 지휘에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장대는 모든 성에 다 둔 것은 아니고 성곽의 규모가 크고 중요한 성곽에 장대를 둠으로 유리한 지형적 조건이 있는 곳에 설치하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는 성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3) 도로망
성곽을 중심으로 한 성내외의 도로망은 성문을 통해서만 도로의 발전이 가능하였는데 행정적인 성격을 많이 띈 도,읍성에서는 잘 발달되었고 산성의 경우 성문에 이르는 제한된 도로가 고작이었다.
도로망은 성내의 객사, 관아등 중요건물과 성문간의 연결로 이루어지고 있다. 읍성을 비롯 모든성의 출입은 성문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문의 수와도 큰 연관이 된다.
(4) 성내건물
성내에 있는 건물은 성곽의 축성목적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도성의 경우 종묘사직을 비롯 왕궁등 시정을 펴기 위한 각종 건물이 들어 있어 성내 각종 건물은 여러가지가 있다. 반면 읍성의 경우 가장 중요한 건물은 객사였다. 그 외에 중요 행정시설로 고을 수령의 거주지인 아사, 수령이 공사를 처리하는 곳인 동헌, 일명 정당, 정청, 지방출신 인물들이 수령을 보좌하연 자문기관인 향청은 지방고을에서는 수령 다음가는 관아였다. 그 외 성내 주요시설로 각종 창고가 있는데 위치, 용도 등에 따라 다양하였다. 그 외에도 성내에는 각종 제사를 위한 시설, 상업시설 등도 있었다.
![]() 성내 시설물 배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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