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溪堂記(한계당기) 寒溪에 있는 집 이야기p184
재벌번역과 해설/나천수
1. 원문과 해석
한계수명야(寒溪水名也)/한계는 물 이름이다. 기원범사혈(其源凡四穴)/그 근원이 모두 네 구멍인데 개발우금성산양(皆發于錦城山陽)/모두가 금성산의 양지쪽에서 나오고 기파각자북(其派各自北)/그 줄기는 각기 북으로부터 서남교회(西南交會)/서남쪽으로 서로 모여들면서 위일고(爲一股)/하나의 큰 물줄기 되어 절이동(折而東)/꺾어져서 동으로 흐른다. 혹우여암곡(或紆餘巖谷)/언제나 바위틈을 감돌고 혹탕설담동(或盪齧潭洞)/언제나 물가의 골짜기를 물어뜯고 씻는데 세이욕절(細而欲絶)/가늘어서 끊어지려 하다가 홍이욕심(泓而欲深)/웅덩이가 되어 깊어지기도 한다.
<해설>
필자가 어려서 寒水洞으로 목욕 간다는 말을 하였다. 남간이 말한 한계의 상류 계곡이 바위틈으로 돌며 흐르는 물과 좀 더 깊은 웅덩이가 있어서 노천 목욕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한이 찰 寒자인 것이 시원한 물이 흐르기에 예로부터 그리 물 이름을 붙인 것 같다.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그 당시 담임 김영모 선생님은 미술 실기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틈만 나면 그림도구를 가지고 한계천 상류에서 중류까지 오가며 그림을 그렸던 옛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림 그리다가 발가벗고 목욕을 하고 1급수에서만 산다는 가재도 잡았던 기억이 난다. 한계천이 언제부터 나주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뀐지는 알 수 없다.
그 당시는 상류의 멋진 계곡물 있는 곳을 寒水洞이라 하고 그 아래 물은 다만 溪川이라고만 하였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인가 그때에 한수동 아랫부분을 사람들의 힘으로 흙을 날라 제방을 만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임시 철로 레일을 깔고 그 위로 기차 바퀴 모양의 운반차에 흙을 실어 사람들이 밀고 다닌 것이 엊그제 같다.
제방이 완성되자 물이 저수지 가득 차면서 과거의 아름다운 계곡의 풍광은 물속으로 수장되어 버렸다.
필자의 유년의 추억이 저수지 물속에 수장되어 있는 것이다.
한계천의 물줄기는 다보사 계곡이 제1류요, 오두재 계곡이 제2류요, 이것이 2대 주류이며, 나머지 두 줄기는 장흥동 쪽에서 흘러오는 물줄기와 도홍골 작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필자가 보산동 장흥골의 선산 참배를 걸어서 다닐 때는 반드시 한수동을 지나 장흥동 계곡을 넘어가면 바로 나주나씨 도선산이 나오기에 이 길을 다니곤 했다.
남간의 성재암기를 읽어 보니, 남간도 이 길을 통해 도선산에 다녔던 것이다. 그러니 여러 세대가 같은 길을 걸었어도 그 흔적이 없기에 모르고 있었지만 선대의 기록을 다시금 반추해보니 선대의 살았던 모습이나 후손 필자의 사는 모습은 거의 같다고 보아진다.
한계천 물은 오늘날 경현동 마을 앞에서 물줄기가 하나로 되면서 한수동 계곡의 바위틈을 돌며, 부딪치며, 웅덩이를 만들면서 동쪽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景賢洞의 옛 지명은 大谷洞이었다. 율곡선생이 이곳에 와서 지형지세를 보고 현인을 보는 형국이라 하여 볼 景, 어질 賢자로 경현이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경현서원이 들어서고 困齋 鄭介靑이 초대 원장을 하였다고 한다. 경현서원에는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 문헌공 일두 정여창, 문정공 정암 조광조, 문원공 회재 이언적, 문순공 퇴계 이황, 문충공 학봉 김성일, 추배 문헌공 고봉 기대승을 享祀 한다고 금성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다 文자 시호를 받으신 분들이다.
우리나라 지형은 크게 보면 태백줄기를 분기점으로 東高西低의 형국이라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많은데, 유독 나주의 한계천은 西入東出이라 하여 자랑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남간은 이 글의 제목을 한계당기라 하였다. 당은 집 堂이니 한계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한계천 옆에 있는 집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한계당은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글이다.
이 집의 정확한 위치는 글 내용으로 보아 짐작하기 어렵다. 이 집터가 훗날 계정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금성산 중봉쯤에 다보사가 있는데 이 절에 내려오는 이야기 또 하나 있다. 천진도인 雨華 스님(1903-1976) 이야기이다.
필자도 어려서부터 다보사로 소풍오고, 어른이 되어서도 다보사는 마음을 정화하는 淨土로 생각하고 자주 다니면서 우화스님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닉네임이 天眞道人인데, 도사라 하면 홍길동처럼 도술도 부려야 하는데, 우화스님은 다 늙어 갔어도 애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얼마나 애 같았으면 천진도인이라 하였을까.
옛날에 큰 스님, 대사로 불려진 분들도 사실은 우화스님과 같았을 것으로 생각하니 도선국사니, 사명대사니 하는 명칭도 명칭만 거대하지 그들도 우화스님처럼 애들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영국의 어느 시인이 읊었지 않는가.
어린이의 마음을 평생 지킨다는 것은 득도의 경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어린이는 이미 득도의 경지에 있었는데, 어른들이 세상사 오염물감으로 어린이를 士로 만들었다가, 官으로 만들었다가, 長으로 만들었다가,富者만들다가 득도의 경지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본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시험무대에서 잘못하자 그이유로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오듯이 말이다.
금성산, 한계천은 남간의 시절이나, 필자의 시절이나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오직 변한 것은 인간뿐이다.
남간이 지금 한계당 집 자랑하려고 이 글 썼을까. 사실은 한계당을 가탁하여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설법하고 있는 것이다.
「혹탕설담동(或盪齧潭洞)/언제나 물가의 골짜기를 물어뜯고 씻는데」 문장가다운 표현이다. 물이 흐르면서 물가 양옆의 흙을 마구 씻어 흘러내리는 것을 물어뜯는다, 란 표현을 하였다. 물어뜯으니까 결국 토양유실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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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우양봉지간(出于兩峰之間)/두 봉우리 사이에서 나와 불능오육리(不能五六里)/5, 6리를 못가서 시저주자성서우(始抵州子城西隅)/처음 맞닥뜨리는 곳이 고을 子城 서쪽 귀퉁이 이르러 분입수구이초대(奔入水口而稍大)/수구로 흘러 들어가 물줄기가 커져서 동행가오십허보(東行可五十許步)/동쪽으로 흐르기를 50여보쯤 하면 유거석림입(有巨石林立)/큰 石林이 서 있어서 좌우액분(左右掖分)/ 좌우 양 바위 겨드랑이로 나누어 희비공동부토이노(屭贔空洞負土而怒)/치고 흐르면서 빈 골짜기로 마치 성내어 흙을 깎아내리고 기퇴연복이위우마지음(其頹然伏而爲牛馬之飮)/그 기울어지고 엎드린 바위 모습이 마치 소, 말이 물 마시는 것 같고 기충연기이위원타지폭(其衝然跂而爲黿鼉之曝)/그 물에 부딪쳐 기는 모습이 큰 자라와 악어가 햇볕을 쬐는 것 같다.
<해설>
두 봉우리는 오늘날의 장원봉과 월정봉을 말한다. 한계천 물은 이 두 봉우리의 발굽 사이 계곡으로 흐르고 있다. 그 양 산록의 가장 짧은 구간을 이승만 정권 때에 농업용수 확보라는 이유로 제방을 만들었기에 한수동 계곡은 전설이 되어 버린 것이다.
子城은 본성(本城)에 딸려 따로 쌓은 작은 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서수구의 입구를 지키는 옹성(甕城)같은 새끼 성(子城)이 있었다는 뜻이다.
城이란 외부로부터 침입하려는 적을 막기 위한 성인데, 그 성에 뚫린 구멍은 오직 4대문과 수구뿐이다. 성문은 옹성을 쌓아 즉 성문을 숨기기 위하여 성문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막는 성을 말한다. 이렇듯 水口를 지키기 위해 甕城과 같은 유형의 子城을 둔 것 같다. 필자도 문화재 복원 업무를 담당하여 보았지만 나주읍성의 수구에 자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여기에서 처음 발견한 것이다.
필자의 고가(기와 집) 문앞 30미터 전방에 한계천의 물줄기가 잇다. 이 물은 서수구로부터 유입된 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이다. 어렸을 때에는 이 물에서 김장 배추김치를 씻을 정도로 맑았다. 필자의 집에서 하류 쪽 50여미터쯤 내려가면 남간이 말하는 석림(위로 솟은 바위)이 있어 그 바위계곡 사이로 물이 부딪치며 흐르는 모습이 지금도 필자의 눈에 선하다.
오늘날의 우영 아파트 앞쪽 시내물이다. 하천 정비사업 하면서 물 흐름을 방해하는 지장물의 바위는 그 후 모두 깨내어 버렸기에 오늘날에는 도저히 그 모습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석림 밑으로는 좀 큰 웅덩이가 형성되어 제법 큰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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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하여옹여궤자(又其下如甕如几者)/또 그 아래 독과 같고 궤와 같은 모양이 와이비구상하(臥而鼻口相呀)/누운 자세로 코와 입이 서로 벌리고 있어 수내평포기상(水乃平布其上)/물이 그 위를 평평하게 퍼지다가 회호환전(回互環轉)/서로 돌고 돌아 회전하다가 연후적료서행(然后寂蓼徐行)/그러한 후에 평온해져 천천히 흐르고 담염용여(澹灩容與)/물결이 조용해져 예쁜 모습으로 흘러 경정여식(鏡淨如拭)/깨끗하게 거울을 닦아 놓은 듯 해진다.
<해설>
앞 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석림으로 우뚝 솟은 바위에 부딪치는 물은 곧바로 석림 바로 밑은 깊은 웅덩이 같아 마치 옹기그릇이 입을 벌리고 있는듯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석림 바위 계곡을 지나 평지에 이르면 물은 마치 깨끗한 거울을 닦아 놓은 듯 유리처럼 평평하게 흐른다 하였다.
남간이 이 글을 지을 때는 나주 시내를 관통하는 한계천의 유역이 매우 넓고 컸다. 모래밭이 있고 백사장으로 새들이 노닐었다. 지금은 일제시대에 川의 양안에 석벽의 둑을 쌓아 하천 폭이 20미터 정도에 그쳐서 도무지 옛 시인이 읊은 상황이 연상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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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오무(才四五畝)/재주가 있는 사람은 4-5무 땅만 있어도 가수열언(佳樹列焉)/아름다운 나무를 가지런히 심고 이초옹연(異草蓊然)/기이한 풀들이 우거지도록 할 것이다 신조물지과교헌기류(信造物之夸巧獻技類)/참으로 조물주는 자랑할 만한 솜씨로 온갖 재주를 피워 지자소시설야(智者所施設也)/지혜로운 자가 시설해 논듯하다. 기수지북애(其水之北涯)/그 물의 북쪽 물가에 유구궁륭연고장이(有丘穹隆然高丈二)/언덕이 있어 우뚝 솟은 높이가 丈2인데 가이롱이전지(可以籠而專之)/(이 땅을) 차지해 독점할 만하여 여내입옥이(余乃立屋二)/내가 두 칸 집을 지었는데 간우기척(間于其脊)등성마루로 칸을 나누어 일간방(一間房)/방 한 칸은 동가거(冬可居)/겨울에 살만하고 일간상(一間床)/평상 한 칸은 하가처(夏可處)/여름에 거처할 만하다 두기면타(頭旣免打)/머리는 천장에 부딪치지 않을 만하고 슬역근용(膝亦堇容)/무릎은 겨우 펼만하다. 어시이연와(於是弛然臥)/누우면 활처럼 구부려야 한다. 올연좌(兀然坐)/여기에 우뚝이 앉아 있기도 하고 우우기(于于起)/일어서기도 하여 서서보(徐徐步)/서서히 걸으면 칙과원근지수형궤태자(則果遠近之殊形詭態者)/ 원근으로 보이는 특이한 여러 형상과 기만한 형상의 것들이 개아유야(皆我有也)/ 모두 내 것 같다. 불자각지이소(不自覺支頤笑)/나도 모르게 턱을 고이고 웃으면서 징목시(瞪目視)/ 눈을 툭 뜨고 보면 창연일입(蒼然日入)/푸르름의 해가 지는데도 이유권모불능거(而猶眷慕不能去)/ 오히려 그리움 때문에 차마 떠날 수가 없다.
<해설> 장이(丈二)는 1丈2尺의 길이, 1장은 10척, 10척은 3.58m 이니 총 12척은 대략 4.4m에 해당하니 사람 키 큰 사람 두 배 이상의 높이이다.
日帝시대에 한계천의 양안에 석축이 쌓아지기 전에 물가에 약4m 정도 높이의 언덕이 잇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금성산 장원봉 가장 끝 발굽에 해당하는 곳이다. 필자가 계정의 위치라고 말한 백민원의 하천 건너 편의 위치이다. 혹여 계정이 北崖의 위치라면 오늘날 한수제 제방 뚝 바로 아래쪽 위치에 계정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이 땅은 금하장학회에서 소유하면서 금성산의 혈기가 흐르는 기의 명당 터라 하여 소유하고 싶어 했던 곳이다.
필자가 1986년 나주시 개청하고 새마을 계장을 역임할 때 당시에 여름에 폭우로 제방 둑이 조금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필자가 새마을 사업으로 그 하단부를 제방 둑을 지지하는 보조 둑을 쌓았던 것이다. 바로 그 위치는 곧 北崖라 할 수 있으며, 계정을 읊는 시인 묵객들이 표현 하는 장소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1630년 금계리 가기터에 화재가 발생하자 서수구 밖에 한계천 옆에 지었던 계정이 바로 여기쯤 될 것 같다.
가이롱이전지(可以籠而專之)를 직역하면 “대그릇에 담아 독점할 만 하여”이다. 어찌 땅을 대그릇에 담겠는가, 이를 의역하면 차지한다는 뜻이겠다.
어시이연와(於是弛然臥)/누우면 활처럼 구부려야 한다는 글로 보아 한칸 방이 한 평 정도밖에 되지 않은 듯하다.
------------------------------------------------- 대저자계지하류(大抵玆溪之下流)/대체로 이 시내의 하류는 세심비다지(勢甚卑多坻)/형세가 매우 비루하여 모래 섬도 많고 우준급(又峻急)/또 높고 급해서 불위회저칙천협(不爲匯瀦則淺挾)/웅덩이에 물이 모여들지 않고 얕고 좁게 흐른다. 고첩석작태(故帖石作埭)/옛날에 돌을 쌓아 강의 보를 만들면서 사광차심(使廣且深)/넑고 또 깊게 하였더니 천광탕양(天光蕩漾)/하늘 태양 빛이 출렁거려 홀약무제(忽若無際)/갑자기 모든 사물의 경계가 없어지고 만중도수(萬象倒垂)/만물의 모양들이 거꾸로 드리워져 있어 람불영악(攬不盈握)/두 손으로 가득 넣어도 손에 떠지지 않으며 여파소촉(餘波所觸)/남은 물결의 부딪치는 곳에 격격유성(激激有聲)/콸콸 소리를 내니 역파쟁금축지질주(亦琶箏琴筑之迭奏)/모두 비파, 쟁, 거문고, 축의 음악연주 같아 이지사금교교(以至沙禽交交)/모래밭에 내려앉은 새들 왔다 갔다 하고 유어발발(游魚潑潑)/헤엄치는 물고기는 발랄하고 즉락차지현(則樂此之賢)/이를 즐기는 현인은 기수여(其誰歟)/그 누구이겠는가.....
<해설> 초벌번역을 보면 문장을 대충대충 건너뛰는 번역이 되어 작가의 속마음을 읽기가 어렵다. 특히 한시 부문은 뜻글자이기에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을 하지 않으면 수박 겉만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두 번의 오기를 초래하였다.
첫째, 한국문집총간 > 남간집선(南磵集選) > 南磵集選卷之一 > 文 > 에서는 “고첩석작태(故帖石作埭)”로 되어 있어 남간집의 故帖石作灞는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아 오기인 듯하다.
둘째, 또한 한국문집총간에서는 萬象倒垂(만상도수)를 남간집은 萬衆倒垂로 이 부분의 해석이 어려웠는데, 한국문집의 원문을 보고 해석이 가능하였다. 이것도 오기 한 듯하다.
위 문장의 오기는 여기에서 필자가 수정하여 기록 한다.
「사광차심(使廣且深)/넑고 또 깊게 하였더니 천광탕양(天光蕩漾)/하늘 태양 빛이 출렁거려 홀약무제(忽若無際)/갑자기 모든 사물의 경계가 없어지고 만상도수(萬象倒垂)/만물의 모양들이 거꾸로 드리워져 있어 람불영악(攬不盈握)/두 손으로 가득 넣어도 손에 떠지지 않으며」을
좀 더 깊이 있게 음미해보면 한계천의 물이 넓고 깊어지면서 출렁거림이 햇빛에 반사하면 어디가 물인지 어디가 땅인지 구분이 없다는 문학적 표현이며, 물이 잔잔해지면 수면 속에 주변 경치가 투영되어 앞산이 거꾸로 물속에 잠겨있는 듯 보인다. 이때에 그 경치를 손으로 떠내고자 두 손으로 물을 가득 채워 떠보지만 어찌 물속에 잠긴 그 경치를 떠낼 수 있겠는가.
남간의 시심은 이미 가슴 깊은 곳까지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었기에 자연 현상의 모습을 이리 문학적 표현을 해 낸 것이다.
「즉락차지현(則樂此之賢)/이를 즐기는 현인은 기수여(其誰歟)/그 누구이겠는가.....」, 바로 남간 자신이라는 반어적 문학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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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왈(或曰)/혹자는 말하기를 자구지향야(玆丘之嚮也)/ 이 언덕이 전에는 위황초진극(爲荒草榛棘)/거칠게 자라서 무성한 풀과 개암나무와 가시나무가 몽예망창(蒙翳莽蒼)/음침하게 푸른빛으로 우거져있어 호사자과이누지(好事者過而陋之)/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지나가며 천하다고 여겼는데 급금피형견소(及今披荊蠲疏)/이제 가시나무를 파내어 시원하게 통하게 하자 기상호출(奇狀互出)/기이한 모양이 함께 나오자 연함이위자천작지(然咸以爲自天作之)/모두가 여기를 하늘이 지었다고 비인역야치지(非人力也致之)/사람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궁곡심항(窮谷深巷)/궁벽한 골짜기, 깊은 마을에 있어도 유가위이처(猶可謂異處)/오히려 이상한 곳이라고 할 만하거늘, 황직성시협리여(況直城市挾里閭)/하물며 성시 곁에 붙어있어 마을의 문을 끼고 있는데 이비인간자호(而非人間者乎)/ 인간 세상사람 아니라 할 것인가 수연(雖然)/비록 그렇지만 수불지인역유류자구자(殊不知人亦有類玆丘者)/끊어져 있지만 사람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무덤 속에 있는 거나 같구나.
<해설>
한계당 집을 짓기 전의 그 땅은 가시나무 잡초 우거진 음침한 곳이었는데, 남간이 이 땅을 사들여 가시나무 잡초를 제거하자,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연함이위자천작지(然咸以爲自天作之)/모두가 여기기를 하늘이 지었다고 비인역야치지(非人力也致之)/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것은 잡초나 가시나무 무더기를 제거하였다고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지형지세가 감탄할 정도의 기이한 모양이라 하였으니, 필자는 더욱더 장원봉 발굽 위치의 지형이 남간이 말하는 그 장소라고 확신한다.
「이비인간자호(而非人間者乎)/(마을의 문을 끼고 있는데) 인간 세상사람 아니라 할 것인가 수연수불지인역유류자구자(雖然殊不知人亦有類玆丘者)/비록 끊어져 있지만 사람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무덤 속에 있는 거나 같구나.」
서수구에서 약 300여m의 상류, 山麓 속에 있으니 이를 마을사람이라 해야 하는가, 隱者라 해야 하는가. 붙어있으면서 끊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이거야 무덤 속에 있는거나 마찬가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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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자포부(夫早自抱負)/사나이로서 일찍이 포부가 있었으나 상첨피갈(尙忝被褐)/오히려 욕된 갈옷을 입었으니 세혹막지이불능수(世或莫知而不能售)/세상에 혹 알려지지 않아 팔수가 없는 것인가. 당약구안기인(倘若具眼其人)/혹시 인품을 보는 안목을 가진 자가 있어 취허불식(吹噓拂拭)/입김을 불어주고 치켜 올려주고 닦아 주어 신과청운기토홍예(身跨靑雲氣吐虹霓)/청운의 기를 토하여 무지개를 타넘는 몸이라면 칙당시위전전자(則當時謂翦翦者)/당시에는 천박한 자라고 평하겠지만 필사행개관왈(必蛇行改觀曰)/반드시 뱀처럼 기어가는 것을 다시 보면서 말하기를 외외연시대장부(巍巍然是大丈夫)/대장부로서 훌륭하다 할 것이다. 희(噫)/탄식하노니 자구지창(玆丘之彰)/이에 무덤을 밝게 하니 실유인의(實由人矣)/사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결실이니 구기유우(丘旣有遇)/무덤은 이미 때를 만난 것이니 인장연의(人將然矣)/사람이 장차 그러할 것인데 여어시위문지지(余於是爲文志之)/나는 이에 글 뜻을 이와 같이 적어서 조제벽(措諸壁)/벽에 붙여 두는 바이다.
<해설>
한국문집총간에서는 尙尒被褐(상이피갈)로 되어 있다. “오히려 그대는 갈옷을 입었으니”로 해석 된다.
갈옷은 낮은 신분을 의미하니 忝(첨)이든 尒(이)은 褐옷, 褐이불인 것이다.
1612년 한계당기 글을 쓸 때에는 사마시에만 합격하고 아직 대과를 한 번도 치루기전이라 한계당기에는 대과 도전의 걱정이 많이 녹아져 있다.
「당약구안기인(倘若具眼其人)/혹시 인품을 보는 안목을 가진 자가 있어 취허불식(吹噓拂拭)/입김을 불어주고 치켜 올려주고 닦아 주어 신과청운기토홍예(身跨靑雲氣吐虹霓)/청운의 기를 토하여 무지개를 타넘는 몸이라면」의 표현을 음미해 보면
배경이라는 백그라운드 힘을 업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조선조 과거 합격자의 통계를 보면 모두 고위직 자녀들의 독점이었으니, 이 뜻은 대과를 볼 수 있는 재정적 후원을 고위직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어쩌다가 서민의 자제들이 합격하고는 있었지만 과거 합격을 위한 특별한 지원을 가정에서 해주지 않으면 쉽게 합격하기 어려운 여건이었음을 남간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구지창(玆丘之彰)/이에 무덤을 밝게 하니 실유인의(實由人矣)/사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결실이니 구기유우(丘旣有遇)/무덤은 이미 때를 만난 것이니」을
깊이 음미해보면 백그라운드라는 배경을 썼던 간에 좀 치졸한 방법으로라도 대과에 합격하고 나면, 훗날 묘비 문에 멋지게 관직이름을 새겨 넣어 무덤을 밝게 하는데, 이것 모두가 사람이 경쟁하여 얻은 결과이니, 후세에 누가 백그라운드로 합격했다는 말을 새겨 넣을 넣을 것인가.
다만 살아생전에 역임했던 벼슬 명칭이 줄줄이 써질 것이니, 죽은 자의 무덤은 이미 때를 만난 것이라 표현 하였다.
이러한 글 지음의 남간의 속내는 무엇일까. 바로 대과의 집착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1617년 34세 때에 첫 대과에 도전하여 괴과(魁科)에 합격하였으나 試官 權縉이 正論을 썼다는 이유로 합격자 명단에서 빼 버린 것이다.
魁科란 조선 시대 때 과거(科擧)에서 가장 어려운 문과(文科)의 갑과(甲科)를 일컫던 말 이다.
1624년 44세때 문과 1차를 합격하였으나 2차에 붙지 못했고, 1629년 46세에 문과 1차에 합격하였으나 2차에 붙지를 못하여 비로소 과거의 집착을 끊었지만, 어찌 사나이로서 속마음에 대과의 욕망이 없었겠는가.
2. 마무리의 글
한계당기 전체를 조감해보면, 한계의 당(집 堂)의 이야기이지만 집에 대해서는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계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언급해 놓았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한계천도, 한계의 堂도 모두 가탁의 도구였다.
모두가 남간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은 글이었다.
향토사적 접근을 해보더라도 이처럼 한계천의 옛 모습을 자세히 언급한 글이 어디 있을까. 더더욱 나주읍성의 수구에 子城이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한 것도 큰 수확이다.
필자의 집이 그 당시 나주나씨 직장 공파의 가기의 터였으니, 내 눈에 비친 그 풍광과 남간 할아버지의 눈에 비친 풍경이 너무나 같아서 참으로 놀랍다.
남간 할아버지의 한계천 이야기를 400여년 후손인 필자에게 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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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0.12.10. 22:45 남간집을 국역 하면서 오기가 있었네요 (.고첩석작태(故帖石作埭)” 萬象倒垂(만상도수) 尙尒被褐(상이피갈 ) 필자의 해석이 맞습니다. 규장각에 소장된 남간집 원본과 (한국문집 총간) 은 동일하게 실려 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