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16
신앙의 밤을 만났을 때
시40:1-17
분당우리교회 이찬수목사님의 설교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아는 후배 목사가 어느날 찾아 오셨답니다.
찾아온 후배목사님은 언어감각이 탁월한 분이셨답니다.
세계 많이 쓰는 언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히브리어 고대언어에도 능통했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셨던가 봅니다.
이분이 히브리어를 공부하여 학자가 되고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유학중에 절망적인 일이 벌어졌답니다. 병이 찾아온 것입니다.
뇌의 신경세포 더 정확히 말하면 ‘해마’라고 하는 인간이 학습한 것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기능을 가진 신경세포에서 언어 쪽으로 올라가는 중추 신경세포가 파괴되는 병을 만난 겁니다.
이 병에 걸리게 되면 더 이상 무엇을 암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더 참담한 것은 이미 암기하고 있던 것 까지도 점점 까먹게 된다는 겁니다.
어떤 때는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면 앞에 무슨 말씀을 전했는지 생각이 안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공부를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와 목회중에 이 목사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사랑하는 후배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후배 목사를 위로하느라 이런 말을 하셨답니다.
“목사님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너무 안타깝고 억울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목사님의 말을 들은 후배 목사님이 말하시기를
“목사님 아닙니다. 저는 지금 이 과정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하시더랍니다.
이 목사님은 후배 목사의 말이 습관적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형식적 인사치레나 습관적인 말이 아니라 진심이더라는 겁니다.
그 후배 목사님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음을
고후11장에 나오는 바울의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을 하더라는 겁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내내
수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같은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 조차도 바울을 대적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사도냐? 누가 당신을 사도로 임명했냐?
당신이 사도다운 신비로운 체험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등등
개인적으로 참 모독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공격을 당하면서 내가 복음을 전해야할 이유가 뭐있냐? 치우자
그렇게 무너졌을 건데...바울은 그런 공격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자신을 향한 도를 넘는 인신공격에 답이 고후11:22이하였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4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 11장에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받은 고난을 주욱...말씀하신 후에
12장에서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1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1-4) 할렐루야...
이 후배 목사가 바울의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주욱....말하면서
바울 자신의 사도됨을 대적자들의 원하는
화려한 경력이나 신비로운 경험으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라고 하시면서
그 후배목사가 바울의 사도됨을 증거하는 자료로 제시한 것이 두 가지라는 겁니다.
1)고후11:33절,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 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느니라
2)고후12: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아멘입니까?
고후11:33절 말씀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창문으로 광주리를 타고 도망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고후12:7절은 육체의 가시입니다...이것을 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합니다만
그중에 다수의 학자가 이 육체의 가시를 간질병이라고 봅니다.
간질병은 당시에 귀신이 들락날락거리며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자기의 사도됨을 그것으로 증명했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창문을 통해서 우스꽝 스럽게 바구니를 타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가는 자
또 하나는 귀신이 사람을 갖고 노는 자...이것을 사도됨의 증거로 내 세운 것은
바울 자신은 그렇게 초라하고 볼품없고 연약한 자라는 겁니다.
실제로 바울이 고후11:3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이유가 뭐냐...
자기는 이렇게 약함에 불구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누가 하신 거라는 겁니까? 하나님이 하신 증거라는 겁니다.
그 후배 목사가 이전에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내려오면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 큰 은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할 때 이런 마음이 들었다는 겁니다.
당연하지 내가 이 설교 한편을 위하여 얼마나 많이 준비했는데..
또한 내가 이 방면에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면 설 수 없다고 하면서
이제야 전적으로 하나님이 내안에서 일하시니 감사와 은혜 그 자체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저는 이찬수목사님도 존경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노력하여 공부한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병과 투쟁하면서
자기의 애써 쌓은 지식을 잃음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고백한 그 후배 목사님을 생각하니
그분이 얼마나 깊은 은혜의 소유자인가를 깨닫고 이름도 모르는 분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주여...주님이 그 목사님의 손을 놓치 마소서...
그리고 자기의 지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게 해주소서... 기도했습니다.
오늘 시편은 누구나 다 좋아하는 말씀이 1,2절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1,2절만 중요한 게 아니라 40편 전체가 다 중요합니다.
시편40편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조를 이루는 시편입니다.
전반부는 다윗이 자기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하여 엄청난 기도를 쏟아 부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고 그 응답으로 인하여 난 이렇게 주를 섬겼다는 겁니다.
그 내용이 1-1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다 읽을 수 없고...1-2절만 같이 읽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끓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다윗은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하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뒷부분이 설명합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즉 다윗은 기도하고 기다리고 기도하고 또 기다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을 기가막힐 웅덩이에서 건져 주셨다
건져 주신 하나님을 향한 삶이 3절 이하에 고백합니다.
3절, 자기 입에 새 노래 하나님께 올릴 찬송이 있다
5절, 주님께서 자신에게 놀라운 일을 많이 하셨다
그 주님이 하신 일을 전하려고 하니 너무 많아 셀수가 없다
6절, 주께서 자기 귀에 주신 말씀도 있다
8절, 나는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긴다. 주의 법이 나의 마음에 있다
9절, 그래서 나는 주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전하는 입을 닫지 않았다
10절, 주의 성실하심과 구원하심을 선포하였다...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사람앞에 전했다.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자신을 죽이고자 쫓아 다니던 사울이
길보아 산 전투에서 전사하므로 사울왕정 시대가 끝났을 때
이제는 자신이 살았구나라는 안도하는 마음에서 고백한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윗은 사울이라는 가시로 인하여 얼마나 많이 기도했을까요?
그렇게 기도하고 기다리고 기도하고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 주시니...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겁니다.
그러니까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합니다.
말씀이 들려 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심을 선포하되 그 입을 닫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후에 이런 삶만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11절 이하에서는 분위기가 갑자기 돌변합니다.
11절에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보호해달라
12절에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나의 죄가 나를 덮친다.
내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더 많아서 내가 낙심하였다
13절에 여호와여 내게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해달라..속히 나를 도와 달라
14절에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하는 자가 있다
15절에 나를 향하여 조롱하는 자도 있다
17절에 나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이다. 주께서 나를 생각해달라...이런 내용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앞부분엔 어떤 위험한 상황속에 있지만
뒷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내용인데
오늘 말씀은 어떤 큰 어려움을 믿음으로 벗어나고 보니
또 다른 더 큰 어려움이 다윗을 덮쳐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왜 이런 시를 썼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왜 이 시를 성경의 한 장으로 선택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에 들어설 때에...많은 은혜를 받고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그럴 때는 신앙생활이라는게 너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이 신비로움을 뛰어 넘어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은혜의 충만함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겁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거기다 나도 모르게 죄를 죄인줄 모르고 삽니다.
영적인 면에서 점점 끝모를 추락하는 내 자신이 보입니다.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는 사라지고...까닥모를 불안과 두려움 조급함에 점점 싸여 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래서 안되겠다는 생각에
우리도 다윗처럼 욥처럼 주님을 찾아보기도 해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을 불러봐도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급기야 도대체 하나님은 계시는건 맞는건가?
계시는게 맞다면 왜 자기백성이 이렇게 영적으로 어렵고 힘들고 고통받는데
침묵하시기만 하느냐...고 하박국처럼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 영적인 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40년동안 광야에서 영적인 밤을 지내야했고
요셉은 13년간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이라는 영적인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에, 예레미야는 진흙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단계를 겪게 하실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신앙의 인물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많아서 주셨을까요?
욥은 이런 영혼의 밤에 대해서 욥23:8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가 없구나
그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무엇 때문에 신앙의 밤을 주신다는 겁니까?
우리로 정금같은 믿음의 사람되게 하시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신앙의 밤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살이에도 밤이 있듯이 영적 세계에도 필요하니 하나님이 밤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속에 밤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리어 밤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왜 밤이 있으니 쉴 수 있고 밤이 있으니 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은 뭐하는 겁니까? 내가 죽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살아 있는 사람은 불면증 걸린 사람들입니다.
밤에는 온 가족이 집이란 테두리 안에서 다 같이 누워 죽는 시간입니다.
그때는 뭐가 없다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원망 불평 다 내려 놓는 시간입니다.
잠이 든 시간만큼은 이 모든 것들이 내게서 떠나는 겁니다.
한동대 김영길총장님이 한동대를 설립할 때...목표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대학이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대학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려다보니
평범하지 않는 설립과정들과 재정난을 겪으면서 온갖 구설수와 어려움을 겪고
급기야 일간지에 김영길총장님을 비난하는 성명서까지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내 되는 김영애권사님은 통곡하며 울었다는 겁니다.
그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식사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을 일을 당한 상황에서
김영길총장님은 집에 들어오시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식사하시고 코까지 골면서 주무시는 겁니다.
사모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물었답니다.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시고도 억울하지 않으세요..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세요’라고 하니
총장님의 대답이 걸작이셨답니다. “난..죽었는데 뭐...죽은 사람이 뭐가 억울해?”
영적인 밤...믿음생활에 밤이 왔을 때...내가 죽었음을 선포하면 됩니다.
거기에 길이 있고...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때..비로서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다윗이 영혼의 밤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1-2절에서는 기도입니다.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것을 11절 이하에서도 다시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
2) 17절하반절입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아멘
다윗이 시험을 이기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비밀이 뭐지요? 신앙의 밤을 만났을 때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예수를 붙잡으셔야 합니다.
유기성목사님 본문을 설교하며 쓴 예화를 인용합니다.
부산제일교회 사찰 집사님, 어떤 사람이 지하 교육관에서 술에 취해 잠을 자기에
깨워서 나가달라고 했더니 멱살을 잡고 소리지르기를
“나 전도사야, 나 시험들었어, 시험들어 그런 거라고, 왜 이래!”하더랍니다.
이러면 해결 받을 수 없고...희망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기도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내가 시험에 들었습니다..도와 주세요...기도로 도와주세요
내가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상 것을 다 잃어도 오직 주님만 붙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런 성도는 희망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은택이가 집에 왔다가 직장으로 돌아가야 해서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태워준 적이 있습니다.
고속버스 터미널 식당가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정말 발 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보는데...제 눈에 사람들마다 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게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이러저리 가면서도 핸드폰을 쳐다봅니다.
음식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면서도 핸드폰을 봅니다.
음식을 먹는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뭐만 쳐다봤다..핸드폰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도 핸드폰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아...맞다...이거네...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핸드폰 만큼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본다면
문제가 있을까요? 혹 문제가 있을지라도 문제를 문제로 여길까요?
핸드폰은 눈만 뜨면 챙깁니다. 잠시만 안보여도 어떤 사람은 불안하다고 합니다.
어느 권사님은 새벽기도 오셨다 핸드폰을 차에 떨어뜨리시고 찾는다고 당황하신 분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깊이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답해봅시다.
주님을 핸드폰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핸드폰보다 더 많이 찾고 더 바라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