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아동문학 약사(略史)에 대한 시고(試稿)·2
노 창 수
(시인·문학평론가)
Ⅲ. 아동문학의 시기별 특징과 작가 작품
한국 아동문학에 대한 통사적 기술에는 그 논의의 방법을 제한하는 수순이 있다. 그건 시기별, 영역별, 장르별로 뒷받침할 문학사 정보자료를 제한적으로 제시하며 추동해 가는 일이다. 방대한 자료를 다 섭렵하지 못하는 연구자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진술 태도를 어떻게 취하느냐의 문제도 한 관건으로 작용한다.
아동문학이 발전해온 매듭을 시기별로 갈래짓는 입장과 그에 관한 전개 방법은 통사관에서 빼놓을 수는 없겠다. 한 시기를 구분하는 일엔, 대체로 정치사회적인 입장, 문화운동적인 입장, 그리고 문학작품의 창작적인 입장, 아동문학가의 기질과 태도의 입장 등이 진술과 기술의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같은 논의는 이미 앞장에 피력한 바 있다. 다만 아동문학 발전사의 시기를 조망할 위치를 어느 지점에서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요구되는데, 이 글에서는 그 시기를 과거로 보지 않고 당대의 현재형으로 보면서 파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문학사, 예술사, 문예사조사가 과거형의 기술을 택하고 있음에 문장 전개 방식이 식상하다는 것 말고, 문학통사(文學通史)의 서술에 박진감이 결여되어 먼 회상적 이야기로만 읽혀지는 등 후학들이 흥미를 잃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례는 순전히 필자만 느낀 일일 뿐이다. 어쨌든 모든 시기의 개괄과 세부 진술은 물론 아동문학가와 주요 작품에 대한 기술 역시 지금의 그것으로 기술해 보인다. 글에 현장감을 높이고, 당시대가 맞부딪치며 부리는 교전(交戰)과 같은 설득력을 오늘의 현장에 재현해 보이고자 하는 의도일 뿐 별 다른 의미는 없다.
이제, 한국의 ‘현대 아동문학사’를 개관·서설하는 것으로부터 이어 각 시기별 아동문학가와 이에 대한 문헌적 정보, 나아가 주요 작품의 특징, 그리고 아동문화운동과 관련한 자료들을 살펴 ‘한국 아동문학사’에 대한 시고(試稿)를 펼쳐 보인다. 여기에서 ‘시고’란 정통한 ‘한국아동문학사’가 아닌 다소 실험적, 또는 시행착오가 어느 만큼은 드러나리라 예상하는 ‘시안(試案)의 원고’란 의미이다. 그래서 후일 통사 상 부주의나 빠뜨린 부분을 보정하여 좀더 ‘완전한 한국아동문학사’가 되도록 스스로를 환기해 가는 걸, 그리고 그 약속을 함의한다. 아울러 지난한 연구 집필 노정에 어떤 기댈 만한 한 작대기로도 활용하고자 한다.
1. 초창기(1900~1920)
초창기는 아동문학에 대한 기초를 다진 시기이다. 그 기초는 1884년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미국 감리교 목사인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에 의해 배재학당이 세워지면서(1885) 다져진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교육의 일환인 문화운동, 학교설립·운영 방침을 비롯한 아동·청소년에 대한 교육의지 등이 강해지고, 그것이 초창기 아동문학에 영향을 미친 정도가 크게 나타난다.
특히 1886년 여성 선교사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 1832~1909)이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이에 신교육 방법으로 신학문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문학운동이 시작된다. 성경의 번역 사업을 위한 한글의 보급과 교육은 아동의 글쓰기 학습에 한 촉진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특히 기독교의 찬송가 번역과 합창 구현은 우리의 ‘개화가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전래동요가 3·4조 또는 4·4조였으나, 이후, 일제의 가요형식인 7·5조나 8·5조가 끼어들어 형성되어간 개화가사는 ‘신시(新詩)’의 출현을 예고해 마지않는다. 조선의 근대화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부터 시작하여 들불처럼 번져나가지만 사실 이 개혁은 1896년 실패로 종결된다.
1900년에는 일본의 철도부설 정책, 광산 채굴사업, 방공호(防空壕) 공사, 저수지 준설사업 등 자원수탈과 전쟁 방패막이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에게 강제 징집과 노동이 자행된다. 아울러 일본의 정치·경제와 교육·문화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제도, 인륜까지 침범해 온다. 종내는 우리말과 글의 말살, 나아가 창씨개명과 같은 조선인 족보까지 파내버리는 암흑기가 도래한다.
1902년 최초 현대식 극장 ‘협률사(協律社)’가 일제에 의해 건립되고 1903년부터 일제의 계몽사관을 주입한 ‘개화시대’가 열린다. 이미 이전부터 풍미한 일본식 ‘창가(唱歌)’의 시기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창가는 일정한 풍조로 불려진다. 지식인이나 대중이 이 창가 유행에 빠져있을 때,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설립되고 일제의 착취는 농·해·공산물은 물론 인력(人力)의 징발에까지 이른다.
이 시대 문학은 1905년 이해조(李海朝, 1869~1927)의 『自由의 鍾』을 시작으로, 1906년 이인직(李仁稙, 1862~1916)의 『血의 淚』, 최찬식(崔瓚植, 1881~1951)의 『秋月色』, 『金剛門』 등 이른바 ‘신소설(新小說)’이 쏟아져 나온다. 1909년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역사서를 내면서 출판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출판물의원고검열및배일적출판물압수에관한출판법’(1909.2.)을 만들어 조선의 지식인과 문인 작품 발표를 제한하거나 몰수한다. 투옥된 문학인들은 저항하거나 풍자적 작품을 쓰지만 출판을 미루며 자각을 다진다.
1-1. 《소년》 창간
마침내 근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아동’을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으로 본다. 아동이란 인격체를 인정하고 의사와 자유를 존중하며 권리를 보장해 주는 아동관의 형성이 그것이다.
아동문학의 기초기에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은 《少年》이란 최초 잡지를 제작 배포한다. 최남선은 10세 이전에 한문을 깨우치고 12세(1901)에 「대한흥국책(大韓興國策)」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투고할 정도로 문필활동의 조기 기미를 보인다. 1904년 그는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가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지만 2개월 만에 중퇴하고 귀국한다. 1906년에 재차 도일(渡日), 와세다대학 고등사범 지리역사과에 입학한다. 그는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는 한편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한다. 그러나 입학 후 3개월 만에 ‘모의국회사건’으로 동맹휴학을 전개하며 이 대학을 중퇴한다. 1907년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인쇄기를 구입해와 자택에 차려놓고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설치한다. 그리고 1908년 이곳에서 《소년》을 출간한다. 이 글 앞부분에서 지적했듯 창간 이후 현재까지 《소년》은 아동문학의 싹을 발아시킨 잡지로 평가 받는다. 만일 아동문학사에서 이 점을 뺀다면 현대아동문학의 근저는 보다 내려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남선은 《소년》지에 발표한 시를 통해, 민족의 장래를 짊어진 청소년에게 용기를 북돋우고자 한다. 그는 소년들이 미래에 웅혼한 포부를 지니고 스스로 나아갈 바를 역설한다. 그게 「海에게서 少年에게」에 담긴 시적 담론이고 이념이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주장하고 부르짖기 위해 이 시에 남성 화자의 목소리를 사용한다. 이후 이 신체시(新體詩), 즉 신시(新詩)는 바로 소년을 위한 최초 ‘계몽적 교양시’로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이를 구태여 아동문학의 최초 동시 장르로 볼 수 있느냐 여부 문제가 따른다. 이에 대해서는 앞장 서설에서 논의한 바 있다.
이에 이재철(李在徹, 1931~2011)은 ‘새 시대의 주인공인 소년을 대상으로 구어체에 가까운 선구적인 정형동시이자 소년시(少年詩)’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더 나아가 신현득(申鉉得, 1933~)은 ‘신체시로 칭하기 전에 소년 찬양을 주제로 한 동시’라는 견해와 더불어 ‘한국 현대문학은 전적으로 아동문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까지 주장하는데 이른다. 그리고 이상현(李相鉉, 1940~)은 이 신체시는 ‘아동문학의 원천인 동심이 전체의 주조를 이루며’ 시적 대상 또는 독자를 ‘소년’으로 설정하고 있으므로 ‘동시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고 아전과 아첨 격 칭송일색으로 역설한바 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한국 최초의 동시’이므로 현대 아동문학에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한국 ‘최초 신체시’ 자리를 일반 국문학사에서 빼앗듯이 가져온다.
《소년》에 실린 작품은 대부분 번안물(飜案物)이거나, 주로 신구 대립 양상을 보이는 글이 수록된다. 육당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소년》 제1호)와 「우리 운동장」(동지 제2호), 그리고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어린 犧牲」(동지 제2호) 등은 번안이 아닌, 기명 작가(記名作家)의 작품으로 소년에게 주체적 삶을 지향해 가기를 설파한다. 최남선과 이광수, 즉 ‘이인문단시대(二人文壇時代)’에 이들의 시는 ‘신문학운동’의 일환이라는 점, ‘계몽운동’의 한 방법이란 점에서 하나의 의합성을 보인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들이 행하던 계몽운동 격 차원의 시를 장르상 ‘동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소년》을 과연 아동문학 잡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있으며, 필자 역시 이에 대한 견해를 논의한 바 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순문학운동’이라기보다는 국권 신장을 위한 ‘민족계몽운동’의 성격이라 보는 게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이 시기의 문학이 정치적 수단으로 작용된 동기로써 시대적 상황이 만든 한 수단일 뿐이다. 발표된 신체시에서 육당과 춘원이 내세운 건, 나라의 장래에 대한 기대감을 무릇 소년들에게 의지한다는 걸 알린 것뿐이다.
1-2. 동화시(童話詩)와 동화요(童話謠)
이 시기에 최남선은 ‘동화시’와 ‘동화요’를 발표한다. 그것은 내용이 동화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형식이 시와 동요 같은 그릇의 구조를 말한다. 즉 시와 노래의 형식에 동화적 스토리를 담아낸 운문의 하위 장르이다. 1910년대 최남선은 동요 작품에 자기주장의 산문적 문장을 입힌, 이와 같은 ‘동화시(童話詩)’와 ‘동화요(童話謠)’를 내놓는다. 사실 동시적인 것은 그의 ‘신체시’보다는 오히려 아동을 위한 작품인 ‘동화시’와 ‘동화요’에 더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동룡왕의이 속병이나서
가진약을다쓰되 효험업스니
걱정의검은구름 룡궁을덥고
우알이황황ᄒᆞ야 경황이업네
텬하에용ᄒᆞᆫ의원 널니차자서
지성으로살아날 방문구ᄒᆞ니
산토간이라야 나리라ᄂᆞᆫ
-최남선 「자라영감토원」 앞 부분
인ᄒᆞ야그아우를 뒤라와서
잠시간에물을 업새게ᄒᆞ야
가난이빌엉방이 만들어노코
내러지지 안햇다더라
남을물에너려면 저부터드니
저를앗기면엇지 남을다칠가
남잡이가저잡이 되ᄂᆞᆫ보람을
작은이이약이가 밝히보이네
-최남선 「남잡이가 저잡이」 윗부분
이 동화요의 표면에 드러난 걸 보면, 사실 우리의 전래 음보(音步)가 아니다. 앞서 말한바 우리 전통 민요는 3·4조, 4·3조 또는 4·4조인데, 이를 일본식 운율 7·5조에 맞추어 띄어쓰기를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남을 물에 너려면/저부터 드니’와 같이 속은 4·3/3·2로 우리의 전통 음보가 숨어있다. 겉으로는 일본식 음보와 음수를 따랐으나 속의 말은 어쩔 수 없이 고유의 음보나 음수율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말의 구조적 특질이자 외국어와 동화될 수 없는 유전적 자질이라 할 수 있다.
육당의 ‘동화요’는 전래동화나 전설을 노래로 엮은 것이 많은데, 이는 나중에 윤석중의 이솝이야기의 노래시 「사자와 쥐」(1956), 이상현의 동화시집 『메아리의 집』(1966)으로 이어지는 한 동기가 된다.
최남선은 1913년 순수 아동잡지인 《붉은 저고리》와 순 한글 잡지인 《아이들 보이》를 창간하고 편집한다. 여기에 최초의 ‘동화요’라 할 그의 작품을 《아이들 보이》에 발표한다. 그 작품이 「자라영감 토원」(1913년 1호, 9월), 「센둥이와 검둥이」(1913년 2호, 10월), 「흥부놀부」(1913년 3호, 11월), 「세 선비」(1913년 6~8호, 1914년 2~4호 분재), 「옷나거라 」(1914년 9호, 5월), 「나무군으로 神仙」(1914년 11호, 7월), 「남잡이와 저잡이」(1914년 12호, 8월) 등이다. 이 작품들을 계기로 그는 다음 기(期)의 동화문학 태동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1-3. 번안동화의 소개
최남선은 이후 동화 장르에도 관심을 가진다. 1908년 《소년》 창간호에 「이솝 이약」 세 편 발표가 그 시발점이다. 또 영국의 조나단 쉬프트(Jonathan Swift, 1667~1745)의 『갈리버 여행기』의 한 부분을 번안하여 「거인표류기(巨人漂流記)」로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명작의 ‘소인국(小人國)’ 편은 《소년》 창간 때 이미 그가 번안한 책으로 나온다. 그 내용을 《소년》 앞표지의 뒷면에 광고한다. 그는 이어서 영국의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로빈슨 쿠르소』를 「로빈손 무인절도표류기(無人絶島漂流記)」라는 제목으로 연재(《소년》 2권 2호~6호)한다. 광고문에서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冊은순국문으로『리버旅行記』의上卷을번역한것인데,우리의듀머니에도열아문ㅅ식딥어너흘만한알사람사난곳에드러가그닌군의사랑을밧고행세하던이약이라긔긔묘묘한온갓경력이만소
-최남선, 로빈손 「무인절도표류기」 광고문(《소년》 1권)
1925년 이후 육당은 정치적 활동으로 아동문학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데르센 탄신 50주기(1925.8.4.)를 맞이해서는 「童話와 文化 -안데르센을 懷함」(동아일보, 1925.8.12.)이란 칼럼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그의 동화를 보는 눈은 새롭게 변화된다.
안데르센은 要하건대 一個 童話作家이다. 말하자면 「콩쥐팥쥐」의 새 동무요 「銀방망이 金방망이」의 새 임자일 뿐 아니냐 하면, 그렇지, 아니 그런 것 아니다. 그러나 童話作家가 決코 작은 職司가 아니다. (중략) …어느 의미로 말하면 동화는 아동교육의 核心 내지 전부라 할 것이요 문화 鍾艈의 기본 내지 樞粈라 할 것이니, 사회의 장래를 중대히 아는 만큼 童話를 중대히 알아야 할 것이다.
-최남선, 「童話와 文化 -안데르센을 懷함」(동아일보, 1925.8.12.)
그는 이와 같이 동화관이 분명하므로 《소년》 이후에 창간된 《붉은 져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에서는 주로 동화 작품을 게재하는 편집이 이루어진다. 나아가 동화 발표의 장을 늘리는 한편, 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를 매개로 사회계몽 운동을 지속해 간다. 동화요(童話謠)는 동화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 초기 장르로 말하자면 동화의 미분화된 상태이다. 최남선은 《소년》에 「고담·사담(古談·史談)」이라는 기획으로 ‘온달(溫達)’, ‘정몽주(鄭夢周)’, ‘김시습(金時習)’ 등의 인물전을 엮는데, 이는 동화적 전기와도 같다. 또 우리나라 민화·신화·전설(民話·神話·傳說)을 아동 수준에 맞도록 개작하여 ‘개작동화(改作童話)’의 한 시발점을 놓는다. 충효나 도덕을 가르치는 기사로는 민화(民話) 중에 그 주제가 같은 것을 골라 싣는다.
강원도 안협(安峽) 상사람의 집에 한아가 잇서 열닐곱살 에 이천(伊川) 무서운 두메 농민의 집으로 싀집갓ᄉᆞᆸ다. (후략)…
-「범의 길잡이로 밤길에 싀어머니 차져간 안협 색시」 (《아이들 보이》 12호)
이 신화는 그가 효도를 가르치기 위한 예화로, 교육하는 주제를 강하게 내세운다. 긴 제목을 붙인 게 그런 의미인 듯도 하다. 또 과학 이야기는 대상을 의인화해서 동화적 방법으로 이해시키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 또한 ‘동화요’가 필요로 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가 여긴 바라 할 수 있다.
나는 리벌이란 놈이 올시다. 이번에는 더부살이 벌의 총로 말ᄉᆞᆷ을 하게 되엇ᄂᆞᆫ 먼져 제 말ᄉᆞᆷ부터 ᄒᆞ겟ᄉᆞᆸ니다. 저의 세네가지 잇ᄉᆞᆸᄂᆞᆫ 그 가운대 가장 리 긴 것은 몽둥이 길이가 예닐곱푼 되고 날개의 편 길이가 한치 세네푼 됨니다. (후략)…
-「리되ᄂᆞᆫ 버러지 이약이」 (《아이들 보이》 12호)
이 이야기는 ‘기생벌’의 자기소개인데 풍자적 표현이 특이하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실감도 난다. 그의 ‘개작동화’ 중에는 창작에 가까운 것도 있어 창작동화 발아의 동기를 예견해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센둥이 검둥이」(《아이들 보이》 12호)는 암흑 세계에서 온 검둥이와 달 세계에서 온 센둥이가 숲속의 당집에 켜 놓은 촛불 곁에서 서로 대화를 하는 내용으로 거의 픽션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구성이 다소 성기고 주제가 약하며 문장이 지루한 점이 있지만 문학적 환경에서의 특별한 묘사를 시도한 시례이다. 최남선의 동화는 창작에 가까운 것 보다는 대부분 명작을 번안 개작한 작품이 많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 창작동화의 바탕과 기틀을 마련해 준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춘원 이광수는 논설 「정육론(精育論)」(1908), 「자녀중심론(子女中心論)」(1918)을 통해 근대적 아동교육관을 역설한다. 그는 최초 현대적 서간체 소년소설인 「어린 벗에게」(《청춘》 1917. 7호), 「少年의 悲哀」(《청춘》 1917. 8호)를 발표하여, 그의 문학적 출발점이 곧 아동문학임을 보여준다. 그는 소파 방정환을 만나 ‘어린이도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감화를 받기도 한다. 그는 이때부터 평생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반말을 쓰지 않고 존댓말을 사용한다.
안국선은 한국 ‘최초 우화소설’인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1908.황성서적업조합 발행)을 어린이 수준에 맞게 번안 소개한다. 이 시기 대부분의 신소설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주제로 다룬 데 비해, 이 우화는 동물을 의인화하여 ‘상황비판(狀況批判)’을 하는 현장을 묘사하는 게 특징이다. 「금수회의록」은 정치를 풍자한 서적으로 지목되어 최초 ‘판매금지소설’로 찍힌다.
신채효(申采浩, 1880~1936)는 소년용 역사전기소설인 『李舜臣傳』(1908)을 펴낸다.
작가 미상인 최초의 추리한문소설 『神斷公案』(황성신문, 1906.5.19.~12.31. 총191회 연재)과 최초 추리한글소설인 이해조(李海朝, 1869~1927)의 『雙玉笛』(1908), 『九疑山』(1911) 등이 발표된다.
2. 성장기(1920~1930)
아동문학의 초창기 이후 그 성장기에는 아동문학에 대한 전문적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즉 아동문학에 대한 전문 아동문학가가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고 그 이론적 체계를 쌓아간 ‘실질적 시기’라 할 수 있다. 1926년은 영화 〈아리랑〉이 개봉되고, 한글날의 전신인 ‘가갸날’이 제정된다. 이 시기는 동요의 홍수로 이른바 ‘동요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만큼 동요가 아동문학의 근간을 이루어 가는 시기이다. 서두에 언급한 바, 우리는 예로부터 대대로 전래동요, 구전동요, 노동요, 사물요 등 많은 동요적 자질의 유전자를 지닌 민족이기에 이의 맥락적 발전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2-1. 방정환과 《어린이》
소파 방정환(小破 方定煥, 1899~1931)은 본격적인 아동문학의 성장기로 다가간 출발신호의 인물이다. 그가 1923년 창간·편집한 《어린이》는 우리 최초의 실질적인 아동문예잡지이다. 이 잡지는 ‘동요·동화의 황금시대’를 여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방정환은 이 시기 많은 동화와 소년소설들을 발표한 바, 대표작품으로는 「털보장자」(《개벽》, 1922년 10월), 「천사」(동아일보, 1923년 1월3일), 「눈 어둔 포수」(《어린이》, 1923년 4월), 「영길이의 설움」(同誌, 1923년 4월), 「선물 아닌 선물」(동지, 1924년 2월), 「작은이의 이름」(동지, 1924년 2월), 「참말의 시험」(《신소년》, 1924년 4월), 「자선」(《신소년》, 1924년 4월), 「귀먹은 쥐보리」(《어린이》, 1925년 5월), 「절영도 섬 넘어」(동지, 1925년 10월), 「77단의 비밀」(동지, 1926년 1월), 「설떡 술떡」(동지, 1926년 1월), 「호랑이 형님」(동지, 1926년 1월), 「시골 쥐의 서울 구경」(동지, 1926년 2월), 「벚꽃이야기」(동지, 1926년 4월), 「동무를 위하여」(동지, 1927년 2월), 「뒤에 숨은 힘」(동지, 1928년 2월), 「소년 사천왕」(동지, 1928년 2월), 「금시계」(동지, 1929년 2월), 동극 「노래 주머니」(동지, 1925~1926년 연재) 등을 게재한다.
나아가 방정환은 적은 수이긴 하지만 수 편의 동요도 발표한다. 그는 동요의 위상을 세우고 자신의 매체를 통해 발표의 장을 넓혀간다. 나아가 《어린이》 간행을 계기로 ‘어린이 문예잡지의 중흥시대’를 예막(豫幕)한다. 그는 작고할 때까지 아동문학의 한 개척자로써의 소임에 충실한다. 이 과정에 《어린이》의 간행이 재정난에 부딪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결호 없이 버텨간다. 한편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할 것을 주창함으로써 그의 ‘어린이운동’에도 한 전환점을 마련한다. 같은 해, 최초 세계명작동화집인 『사랑의 선물』을 번안·출판하고, 연이어 동요 작품들을 게재한다.
작품으로 「형제별」(《어린이》, 1권8호. 1923.7), 「나뭇잎 배」(동지, 2권6호, 1924.6), 「여름비」(동지, 4권7호, 1926.7), 「귀뚜리미 소리」(동지, 2권10호, 1924.10.), 「늙은 잠자리」(동지, 2권12호, 1924.12.), 「눈」(동지, 8권7호, 1930.8.), 「산길」(동지, 4권8~9합병호, 1926.8), 「가을밤」(동지, 2권6호, 1924.9), 그리고 번역동시로 「갈매기」, 「카나리아」 등을 발표한다.
방정환은 「동화작법 –동화짓는 이에게-」(동아일보, 1925년 1월1일, 목, 제1781호, 3면)를 통해 ‘동화가 가질 요건’을 첫째 ‘아동의 마음에 기쁨과 유쾌한 흥을 주는 것’이 생명이며, 약속한 동요에 대해서는 ‘쓰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작품과 평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의 동요 문학이 가지는 그 한계점은 시인 자신이 개성을 찾지 못하고 막연한 감상에 머무른 점, 신인 동요 작가를 발굴하는데 소극적인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건 당대의 정서가 그러하기에 애상적 동요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식민지 문학이 갖는 한계적 특징으로도 보아진다. 그 이유는 방정환이 어린이 본성의 활달하고 건강한 그 전래동요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일본적인 7·5조 율조의 정형률에 갇혀 애상적 노래를 표현한 점, 나아가 슬픈 자아의 환경을 넘어선 분방한 아이들의 본성에 다가가지 못한 점 등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귀뚜라미 귓도르르 가느단 소리
달님도 추워서 파랗습니다
울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 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귀뚜라미 귓도르르 가느단 소리
달밤에 오동닢 떨어집니다
-방정환 「귀뚜리미 소리」(《어린이》, 2권 10호, 1924.10.)
하늘에서 오는 눈은 어머님 편지
그리우든 사정이 한이 없어서
아빠 문안 누나 안부 눈물의 소식
길고 길고 한이 없이 길드랍니다
겨울밤에 오는 눈은 어머님 소식
혼자 누운 들창이 바삭바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자고 내다보면 눈물납니다
-방정환 「눈」(《어린이》, 8권 7호, 1930.9.)
방정환은 《어린이》 외에 청소년을 위한 《학생》(1929), 그리고 최초 영화잡지 《녹성》(1919.11.5.)을 창간하는 한편, 이화학당 출신들이 낸 《신여자》(1920) 창간도 지원하고, 이들 잡지에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한다. 그리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동요·동시·동화의 발표장을 넓히는 한편, 작가들의 작품 게재 등을 주선한다. 윤극영, 한정동, 윤석중 등의 지원이 그 대표적 예이다.
2-2. 윤극영과 〈다알리아회〉
윤극영(尹克榮, 1903~1988)은 동요작곡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의 동요집에는 『반달』(1926. 「반달」 창작은 1924.), 「설날」, 「제비 남매」, 「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까치까치 설날」, 「할미꽃」, 「꾀꼬리」, 「귀뚜라미」, 「두루미」, 「꼬부랑 할머니」, 「고드름」, 「흐르는 시내」, 「소금쟁이」, 「파랑새를 찾아서」 등 다수 동요가 수록된다. 작품의 대부분이 공동체적 정감을 따뜻한 정서로 담아낸다. 그는 최초 창작동요를 작곡하여 전파하고 동요보급 단체인 합창단 〈다알리아회〉를 설립(1924)하고 발족(1925)하는 등 동요 부르기의 일반화·대중화를 추진한다. 이처럼 그는 우리 정서에 터한 동요를 만들고 이를 〈다알리이회〉의 힘을 얻어 보급하는 등 작사·작곡·교육에 주력한다. 그가 이 단체에 들어가 맨 먼저 만든 게 「설날」이다. 매년 1월1일에 어린이들이 우리 노래가 없어 일본노래를 부르는 걸 안타까워 하여 설날에 행하는 일들을 이 동요에 담아낸다.
1924년 우리나라 최초 동요라 할 「반달」을 작사·작곡해 확산시킨 결과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 등까지 전파된다. 심지어 우리 노래를 탄압하던 일본인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1925년 〈다알리아회〉에서 「파랑새를 찾아서」라는 어린이 창가극을 공연하여 성공하는 걸 계기로 전국 순회 초청공연을 한다.
그는 이 무렵 1925년 간도로 넘어가 동흥중학교에서 교사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윤석중의 동시 「우산 셋이 나란히」에 곡을 붙여 발표한다. 또 동요 「고기잡이」를 그가 직접 작사·작곡하여 발표한다. 그는 광명여고에서 교사 활동을 하다 1935년 서울로 돌아와서 이듬해 1936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음악 생활을 한다. 이때 우연히 신문에서 「반달」 노래가 일본 방송국에서 애창되고 있는 것을 듣고 그는 도쿄중앙방송국을 찾아가 저작료를 받고 그것으로 생활해 간다.
푸른하날 은하수 하얀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기한마리
돗대도 아니달고 삿대도업시
가기도 잘도간다 서쪽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내선 어대로가나
멀니서 반짝반짝 빗최이는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차젓다
-윤극영 「반달」(《어린이》, 1925년 3월호) 전문
윤극영이 활동한 1926년 전후는 ‘동요의 황금시대’로 동요 무대는 더욱 확장된다. 또 앞서 방정환이 중심이 되어 동경에서 발족(1923. 3.16.)하여 창립(1923. 5.1.)한 〈색동회〉에 윤극영도 조재호·최진순·마해송 등과 함께 활동한다.
일반 문학계에서는 방정환의 〈색동회〉 활동과 윤극영의 〈다알리아회〉를 중심으로 한 동요 전개운동을 아동문화운동의 실질적 효시로 보기도 한다. 이는 아동문학의 본질 면에서 수긍할 만한 부분이다.
2-3. 한정동과 순수 동요
한정동(韓晶東, 1894~1976)은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에 다닐 때부터 창가 명창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의 실력자이다. 그는 1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3년간 농사를 짓다가 평양고보에 들어간다. 그해 가을에 ‘따오기’ 울음소리를 듣고 「따오기」 초고를 쓰게 된다. 1918년 평양고보를 졸업하면서 그는 여러 편의 동요를 써 1923년~1924년에 매일신문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응모하지만 실패한다. 그러다가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금쟁이」 등이 당선되며 등단한다. 대표작 「따오기」(《어린이》, 1925.3.)를 발표한 이후 1950년대까지 「어머니 생각」, 「고향 생각」 등을 동아일보와 《어린이》에 발표하여 ‘순수 동요 세계’를 구축한다는 평을 얻는다. 「따오기」는 윤극영이 작곡해 노래로 불러지게 되어 일약 더 유명해진다. 그의 대표 동요집 『갈닢피리』(1957)는 동요로써 간결미가 돋보이는 많은 애상적 동요가 수록된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당옥당옥 당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소리
어디이드뇨
내 어머님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당옥당옥 당옥 소리
구슬픈 소리
날아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드뇨
내 어머님 가신 나라
달 돋는 나라
약한 듯이 약한 듯이
또 연한 듯이
당옥당옥 당옥 소리
적막한 소리
흘러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드뇨
내 어머님 가신 나라
별 돋는 나라
너도나도 소리소리
너 같을진대
달 나라로 해 나라로
또 별나라로
훨훨 활활 떠다니며
꿈에만 보고
말 못하는 어머님의
귀나 울릴 걸
-한정동 「따오기」 전문(《어린이》, 1925년 3월호)
청산포 어귀
살구꽃 복숭아꽃 피는 동리에
오막살이 초가 한 채
고향집이 그리워요
서늘한 달밤
우거진 갈밭 사이 창포 못가에
어미 오리, 새끼 오리
머리 머리 마주 대고 꿈만 꾸지요
차알삭 찰삭
찰삭이는 물결에 반짝이나니
금가룬 듯, 은가룬 듯
오리 오리 머리들을 달이 비춰요
청산포 어귀
메찰벼 고개 숙인 황금벌판에
오막살이 초가 한 채
고향집이 그리워요
참 그리워요
-한정동 「고향 생각」 전문(《어린이》, 1925년 4월호)
한정동이 활동한 1920년대와 1930년대는 7·5조 중심의 동요문학이 꽃을 피운 시기이다. 당시에는 낡은 사상을 벗고 새 자각을 가다듬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고유 율조인 4·3조나 4·4조를 버리고 일제의 창가 형식을 따른 7·5조를 변용하여 값싼 감상적 화법을 사용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시기는 ‘동요의 황금기’를 이루어낸 돌올한 지점이다. 이렇게 동요가 꽃피우게 된 데는 피폐한 아동들에게 이를 부르게 함으로써 정서적 수탈을 당해 침울해진 식민지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아동문학가들의 끈기와 열정도 잠재한다. 나아가 독립운동의 실패를 겪은 민중들이 그 좌절감과 허무감을 달래는 노래의 효용에 젖어든 시기이다. 아동문학가들도 아동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려는 사명감에서 동요 창작에 전념을 한다. 이 때 동요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보다는 운율을 재미있게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비중을 둔다. 그래서 노래다운 동요가 세상을 누빈 것으로 보인다. 한정동은 한국아동문학사상 최초의 신춘문예 당선자로서, ‘창가-동요-시적 동요-동시’의 시대적 흐름을 거치면서 ‘시적 동요’를 최초 정착시킨 아동문학가이다. 그의 동요에서 두드러진 점은, 첫째 도덕적·교훈적 동요가 적다는 점, 둘째 시대적 아픔을 딛고 희망적 메시지를 구현한 점 등이다. 해서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동요황금시대’에 동요의 위상을 높인 개척자로 평가한다.
1925년을 전후하여 등단한 동시인들로는 한정동, 윤석중, 이원수, 서덕출, 윤복진 등이다. 이들은 동요의 문학적 지층을 높인 인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 윤석중(尹石重, 1911~2003)의 「오뚜기」, 「짝짜궁」, 이원수(李元壽, 1911~1981)의 「고향의 봄」, 서덕출(徐德出, 1906~1940)의 「봄 편지」, 류지영(柳志永, 1896~1947)의 「고드름」 등이다. 잘 알려진 건 아니나 신고송(申鼓頌, 1907~?)은 《어린이》에 동시 「우테통」(1925)으로 입선하여 작품 활동을 한다. 이후, 윤석중이 〈기쁨사〉(1927)를 만들며 펴낸 어린이 동인지 《굴렁쇠》에 다양한 동요·동시·동극 등을 발표한다.
한정동은 「소금쟁이」(동아일보, 1925), 강소천(姜小泉, 1915~1963)은 「민들레와 울 아기」(조선일보, 1930), 목일신(睦一新, 1913~1986)은 「참새」(동아일보, 1930), 박경종(朴京鍾, 1916~2006)은 「왜가리」(조선중앙일보, 1930), 박목월(朴木月, 1915~1978)은 「통짝짝 통딱딱」(《어린이》, 1933), 김영일(金英一, 1914~1984)은 「방울새」(《아이생활》, 1935) 등으로 각각 등단한다. 이로써 한국의 동요문단에 풍년을 여는 신호탄이 오른다.
이제, 앞에 열거한 아동문학가 중에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활동한 시인들의 동요 작품을 살핀다.
2-4. 최다 동요의 윤석중
윤석중은 아동문학가 중 가장 많은 동요가 작곡되어 교과서에 실린다. 1923년은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의 출간된 해로 명실상부 본격적인 아동문학이 시작된 해이다. 이때 윤석중의 대부분 창작동요는 이 잡지를 통해 알려진다. 이의 힘에 탄력을 잗아 윤석중은 이른바 ‘동요문학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는 1924년 《신소년》에 동요 「봄」과 1935년 《어린이》에 「오뚝이」가 입선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한국 최초 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1932년)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이후 1933년 『잃어버린 댕기』에서는 부제로 〈윤석중 동시 제1집〉이란 부제명을 붙여 ‘동시’라는 용어를 맨 처음 사용한다. 또 이 동시집을 출간하는 것을 계기로 동시가 정형에 의한 구속에서 나와 ‘자유시’에로 나아갈 길을 예견한다. 그는 한국현대아동문학의 ‘발흥기’와 ‘성장기’ 때부터 현재의 2000년대까지 약 80년 동안 많은 동요·동시를 창작하며, 1988년에 그의 문학을 총결산하는 『윤석중 전집』 30권을 내놓는다. 그가 발표한 동요·동시 작품은 어느 한편 허투루 쓴 작품이 없을 정도의 작품 밀도가 있다. 노래로 만든 동요 곡만도 무려 700여곡이나 된다. 그는 아동문학, 특히 동요를 통해 우리의 정서순화에 큰 공이 있음이 이로써 입증된다. 그의 동요 가운데 교과서에 실려 널리 불리어진 일부 작품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 「새 신」(새 신을 신고/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 「똑같아요」(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 「나란히 나란히」(나란히/나란히/나란히/밥상 위에 젓가락이/나란히 나란히 나란히/학교 길에 신발들이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 「달 따러 가자」(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장대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 「우산」(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파란 우산 노란 우산 찢어진 우산/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셋이서 마주보고 걸어갑니다…)
○ 「기찻길 옆」(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잘다/기적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 「고추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할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 댁에…)
-「윤석중 동요집」 및 음악교과서
찢어진 문구멍으로
찢어진 하늘이 보이네
동그란 유리구멍으로
동그란 하늘이 보이네
네모진 들창으로
네모진 하늘이 보이네
툭 터진 들로 나가니
툭 터진 하늘이 보이네
-윤석중 「하늘」 전문(『노래 동산』, 학문사, 1958. 33쪽)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우리 집
목소리만 듣고만 난줄 알고
얼른 나와 문을 열어주는 우리 집
쬐꾸만 들창으로
왼 하늘이 다 내다뵈는 우리 집
-윤석중 「우리 집」(『초생달』, 박문출판사, 1946. 48쪽)
윤석중은 동심지상주의 아동문학가이다. 그는 낙관주의적 의식과 안목으로 작품을 쓴 문인이다.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1920년대, 그리고 첫 창작 동요·동시집이 나온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도 그는 이 같은 태도를 견지하며 동요·동시를 쓰고 노래한다. 그의 활동이 왕성한 중기에는 6·25의 비극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늘 동심의 희망적 빛을 비쳐내 보인다. 물론 중기의 작품에 현실의식을 조금은 드러내긴 하나 그것은 전체 작품에서 그리 비중 있는 편은 아니다. 그의 이러한 창작 태도는 의도적인 것으로 비극적 시대의식을 배제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은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 때문임을 회고에서 밝힌다. 윤석중의 동요·동시 작품에 나타난 의식은, 첫째 밝은 동심 표현의 견지, 둘째 동심을 발견하는 기지의 발휘, 셋째는 대상에 대한 희화적 인식 등을 표출한다. 한편, 이러한 윤석중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연구는 단편적인 작가론과 작품 해설이 있을 뿐이며 본격적인 작품과 작가 전반에 대한 탐구적 연구는 사뭇 적은 편이다.
2-5. 이원수의 현실주의적 동시
이원수는 윤석중과 더불어 1920년대 《어린이》를 통해 문단에 나온다. 1920년대 아동문학 문단은 윤석중의 낙천적 동심주의와 대척되는 지점에 이원수의 현실적 동심주의가 자리한다. 이 시기 아동문학 작품은 대체로 민족의 아픈 정서와 현실의식이 구체화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즉 막연한 애상적·감상적 동요·동시로 사람들의 슬픔을 자극하는 관념주의의 감상에 갇히는 게 실정이다. 그 요인은 문학작품이란 도구로 직접적 저항이나 당면한 현실타개가 어렵기 때문이며, 또 한편에선 동요·동시가 동심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아동문학가의 순수성에서 빚어지는 현상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도 1926년 「고향의 봄」을 발표할 때는 막연한 그리움이나 슬픔을 노래하는 소극적인 정서에 머무른다. “마른 잎이 바수수 떨어지는 가을밤/파란 달도 가만히 한숨 집니다”라고 노래한 「가을밤」(1926)이나 “비누풍선을 고히고히 불어/달나라로 가라고/꿈나라로 가라고” 기원하는 「비누풍선」(1927)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그는 1930년을 기점으로 이 막연한 슬픔을 차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슬픔을 노래로 옮기게 된다.
수남아
순아야
잘 가거라
아빠 따라 북간도
가는 동무야
멀-리 가다 가다
돌아다 보고
‘잘 있거라-’ 손짓하며
가는 순아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눈물이 나서
아른아른 고갯길도 안 보이누나
뻐꾹새 슬피 우는
산길 넘어서
수남아
순아야
잘 가거라
-이원수 「잘 가거라」 전문(《어린이》, 1930년 8월호)
위 시에서 보듯 ‘떠나는 친구가 불쌍하고 슬프다’는 진술은 이전의 ‘막연한 슬픔’에 머무는 게 아니다. 그건 ‘북간도’라는 지명과 그곳 삶에 나타나는 곤궁한 지명에 붙어 있다. 떠나는 동무를 막연히 배웅하는 것 말고 식민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떠나가는 고통에 내몰린 친구에 대해 슬퍼한다. 이 같은 감정의 구체화는 1929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헌 모자」를 통해 더 진지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1930년을 전후로 이른바 ‘현실주의적 동시’에 첫발을 들여놓는다.
이원수는 이런 동시를 1930년 한 해 15편이 넘게 발표한바, 그중 일반에게 알려진 작품이 바로 「찔레꽃」(《신소년》, 1930년 4월호)이다.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배고픈 날 따 먹는
꽃이라오
광산에서 돌 깨는
언니 보려고
해가 저문 산 길에
나왔다가
찔레꽃 한잎 두잎
따 먹었다오
저녁 굶고 찔레꽃을
따 먹었다오
-이원수 「찔레꽃」 전문(《신소년》, 1930년 11월호)
「찔레꽃」의 화자는 광산에 나가 돌 깨는 언니를 둔 소년이다. 즉 언니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옛날을 회상을 하는 소년의 위치이겠다. 그건 흔히 일반 동시에서 보듯 어른이 제 어린 시절로 돌아가 흉내 내는 모습이 아니다. 이는 「찔레꽃」에서만의 현상이 아닌, 1930년대의 동시에서 보이는 그의 한 경향적 특징으로도 보인다. 사실 이원수가 ‘현실주의적 시 정신’이라는 불씨를 담던 1930년대 전후는 프롤레타리아 아동문학이 성행한다. 그의 동시에서도 이런 프롤레타리아적 성향을 지닌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게 「눈 오는 밤에」(《어린이》, 1931년)와 「벌 소제」(《어린이》, 1932년) 등이다.
2-6. 서덕출(徐德出, 1906~1940)과 윤석중
서덕출의 호는 ‘신월(晨月)’로 당시 ‘시대일보’ 기자이던 서형식(徐炯植)의 아들인 그는 5살 때 대청마루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후유증이 척추로 이어져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게 된다. 결국 그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대신 어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워 동요쓰기를 시작한다. 그 결과 「봄편지」를 《어린이》(1925.4.)에 발표하면서 큰 호평을 얻는다. 이후 방정환·윤석중·윤복진·신고송과 교류하며 「슯흔 밤」을 공동 창작했다. 하지만 생전에 동요집 한권을 내지 못한다. 1934년 혼인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신약방 ‘애생당’을 차리지만, 그는 오랜 세월 병상에 누워 지내다 1940년 서른넷의 나이로 울산시 북정동 자택에서 별세한다. 서른 다섯 해의 길지 않은 기간에 동시와 소년시, 산문을 비롯해 모두 112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작고한 10년이 지난 1949년에야 「눈꽃송이」 등 주로 《어린이》를 통해 발표한 작품 35편을 선정하여 김장호·윤석중과 그의 유가족의 도움으로 동요집 『봄 편지』(1949. 자유문화사)를 출판한다. 그는 1940년 울산 북정동 자택에서 사망할 때까지 동요창작에 심혈을 기울인 열정의 아동문학가이다. 매년 울산에서는 그를 기리는 ‘서덕출 창작동요제’가 열리고 있다.
련못 가에 새로핀 버들닙을 따서요.
우표 한장 붓쳐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도션 봄이 그리워 다시 차저 옵니다.
-서덕출 「봄 편지」 전문
송이송이 눈꽃송이 하얀꽃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꽃송이
나무에도 들판에도 동구밖에도
골고루 나브끼네 아름다워라.
송이송이 눈꽃송이 하얀꽃송이
하늘에서 피어오는 하얀꽃송이
크고 작은 오막집을 가리지않고
골고루 나브끼니 보기도좋네.
-서덕출 「눈꽃송이」 전문
가을이면 바람이 미치는개라
이리저리 함부로 막달겨들어
때어밀고 깔집어 치고갑니다
가을이면 바람이 무섭는개라
빨가숭이 뒷집애도 나오지안코
나무닢이 발발떨며 떠러집니다
-서덕출 「가을바람」 전문(《아동문예》 1936.)
위의 작품에 나타난바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 세상과 삶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연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후기에는 몸의 한계를 못 이겨하며 감상적·애상적 경향이 짙게 드러난다. 1968년 울산 학성공원에 동요비(童謠碑) 「봄 편지」가 세워진다. 주요 동요곡으로 「봄 편지」(윤극영 작곡) 외에 「눈꽃송이」 (박재훈 작곡), 「어머니의 매」 (유준호 작곡), 「엿장사」 (석광희 작곡), 「피리」, 「봉선화」 등이 노래로 만들어져 애창된다.
우리 문학사 중의 아동문학은 폄하와 홀대로 문학담론의 변두리로 밀려나기 일쑤이다. 서덕출의 이름도 그런 대접을 받아온다. 하지만 윤석중은 서덕출의 동요를 귀히 보아 그를 찾아 나서고 어린이 독서회 〈기쁨사〉의 동인으로 활동하도록 도와준다. 또 사후 그의 작품을 모아 유고동요집 『봄 편지』를 간행하는 등 서덕출의 인생을 지원해 주는 조력자로 그 미담이 가장 동심다운 울림을 준다.
그는 질곡의 역사 속에서 불우하게 살다간 아동문학가의 한 사람이다. 나라 잃은 시대에 문단으로 나와 장애의 설움을 겪으면서도 창작적 열정을 쏟은 시인이다. 개인적 아픔과 시대적 슬픔을 동시에 겪으면서도 아동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정신이 돌올한 위치에 있다.
2-7. 윤복진(1907~1991)의 동심주의 동요
윤복진은 필명으로 ‘김수향(金水鄕)’ 또는 ‘김귀환(金貴環)’으로 쓴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1924년 계성학교를 졸업한 뒤,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예술과를 거쳐 호세이(法政)대학 영문과를 졸업한다. 1925년 《어린이》에 동요 「별 러 가세」가 입선·등단한다. 이원수·윤석중과 함께 일제 강점기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특히 짤막한 동요·동시를 주로 쓴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 아동문학 분과위원의 초대 사무장을 맡는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대구로 낙향하여 그곳에 〈조선문화단체총연맹 경북지부〉 부위원장단의 한 사람이 되고 6·25 때 월북한다. 월북 후에 그는 남한에서 잊혀진 동요시인이 되지만, 북한에서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현역작가로 있으면서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91년 타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26년 《어린이》에 동요 「바닷가에서」로 추천 받아 창작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윤석중 중심의 〈기쁨사〉 회원이 되고, 〈카나리아회〉 회원으로도 참가하는 한편 순수 동심주의의 동요·동시를 발표한다. ‘한국 최초의 동요곡선집’인 『조선동요백곡집』(1929)에 그가 지은 「하모니카」, 「고향 하늘」, 「바닷가에서」 등이 홍난파 작곡으로 실린다. 한편 박태준(朴泰俊)과 함께 동요민요작곡집인 『중중 때때중』과 『양양 범버궁』을 펴낸다. 또 그는 1945년 조선일보에 평론 「아동문학의 당면과제 -민족문학 재건의 핵심」을 발표하기도 한다. 1946년 4월 창간된 아동문학잡지 《아동》에 동요·동시 부문을 맡아 집필한다. 천진한 동심의 세계와 토속적 해학으로 성공했던 일제 시대의 작품을 주로 골라 동요시집 『꽃초롱 별초롱』(1949)을 펴낸다. 월북 이후 「아름다운 우리나라」(1953), 「시내물」(1954) 등을 발표한다.
초롱초롱
아기 눈,
아기 눈은
꽃초롱, 꽃초롱, 꽃초롱,
엄마 마중 가알 때,
꽃초롱 켜지요,
꽃초롱 켜지요.
초롱초롱 아기 눈,
아기 눈은
별초롱, 별초롱, 별초롱,
아빠 마중 가알 때,
별초롱 켜지요,
별초롱 켜지요.
-윤복진「꽃초롱 별초롱」 전문
일제 강점기에 비극적 현실을 동심으로 미화했던 천사주의나 계급의식에 치우쳤던 아동문학 중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순수 동심주의의 문학적 태도를 견지해 온다. 그의 작품은 3·4조, 7·5조의 정형률을 기조로 자연친화적 경향을 띤다. 월북 이후의 경향은 북한 사회의 발전상을 생동감 있게 반영하려는 노력이 엿보이지만 수준이 일제 강점기의 작품보다 퇴보한다는 평가도 있다. 대표작에는 「기차가 달려오네」(1930), 「발자욱」(1935), 「아기참새」(1937), 「종달새가 종종종」(1940) 등이 있다. 동요시집으로 『꽃초롱 별초롱』(1949) 외에, 북한에서 간행된 『아름다운 우리나라』(1958), 『시내물』(1980) 등이 있다.
2-8.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시적 동시
정지용은 《학조》(1926.6)에 동요, 동시 「서쪽한울」, 「」, 「감나무」 등을 발표하는 것을 계기로 《신소년》에 「굴새」(1926.12), 「산 너머 저쪽」(1927.5) 등을 발표한다. 그는 1920~1930년대 즉 15년여 동안 1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한다. 그가 전생에 남긴 총 141편 중 90% 이상이 이에 해당한다. 이때 16편의 동요·동시 작품을 쓰는데 이를 발표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이면 다음과 같다.
① 「지는 해」 《학조(學潮)》 창간호(1926.6) : 발표당시 제목 「서쪽한울」 후에 개작
② 「」 《학조》 창간호(1926.6.)
③ 「홍시」 《학조》 창간호(1926.6.) : 발표당시 제목 「감나무」 후에 개작
④ 「병」 《학조》 창간호(1926.6.) : 발표당시 제목 「한울혼자보고」 후에 개작
⑤ 「산에서 온 새」 《어린이》 4권 10호(1926.11)
⑥ 「할아버지」 《신소년》 5권 5호(1927.5.)
⑦ 「산넘어 저쪽」 《신소년》 5권 5호(1927.7.)
⑧ 「해바라기씨」 《신소년》 5권 6호(1927.7.)
⑨ 「말 –마리·로-란산에게-」 《조선지광(朝鮮之光)》 69호(1927.7.)
⑩ 「별」 《학생》 2권 9호(1930.10.) : 《학조》 창간호(1926.6) ‘동요’이름으로 발표할 때 부기했던 산문형태 동시로 개작
⑪ 「무서운 시계」 《문예월간》 3호(1932.1.) : 발표당시 제목은 「옵바가시고」
⑫ 「三月삼짓날」 『정지용시집』(1935.10.) : 《학조》 창간호(1926.6.)에 발표한 「레와 아주머니」를 개작 「삼월삼짓날」과 「레」 두 편으로 만듦
⑬ 「레」 『정지용시집』(1935.10.)
⑭ 「산소」 『정지용시집』(1935.10.)
⑮ 「종달새」 『정지용시집』(1935.10.)
⑯ 「바람」 『정지용시집』(1935.10.)
위의 자료로 보면, 정지용의 첫 문학활동은 자유시보다는 동시가 그 중심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를 기반으로 하여 자유시 장르에로 점차 확산해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지용시집』의 2부에 수록된 39편의 시를 보면 시인 스스로가 끝에 창작 시기를 일일이 기록하고 있는바 그게 25편이다. 따라서 그의 시작(詩作)이 1922~1923년 사이라는 걸 읽게 된다. 이 가운데 「지는해」, 「산넘어저쪽」, 「홍시」, 「」, 「말」 등은 정지용이 중학시절에 쓴 바의 방증자료가 있다. 이처럼 동시가 그의 시적 출발점이 되는 점은 정지용 문학의 한 단서를 알려준다. 그는 동시에서 화자를 거의 ‘어린이’로 설정한다. 동시 16편 중 「별」을 예외로 한 나머지 작품에 보이듯 서정적 주체가 어린이이다.
새삼나무 싹이 튼 담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 모자 쓰고
눈에 아름 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의 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 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정지용 「산에서 온 새」 전문(『정지용시집』, 시문학사, 1935. 110쪽)
레와 작은 아주머니
앵도나무 미테서
쑥 뜨더다가
깨핏덕 만들어
호, 호, 잠들여 노코
냠, 냠, 잘도 먹엇다
중, 중, 때때중
우리 애기 상제로 사갑소
-정지용 「레와 아주머니」 전문(《학조》, 창간호, 1926.6.)
정지용의 동심은 단순한 유년기 향수에 대한 출구로 노래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여기 나타난 동심의 모습이란 성인이 아동기를 그리는 정신적 동경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적 동심으로서의 대상 곧 표상이다. 이 특성은 방정환·윤석중·한정동으로 포괄되는 이른바 1920년대의 ‘동요황금시대’에 나타난 감상적 동심과는 거리가 있다. 방정환의 「형제별」, 윤극영의 「반달」, 한정동의 「따오기」 등, 애창된 동요들은 어린이다운 동심에다 어른다운 동경이 혼융된 세계라고 본다. 이는 같은 시대를 사는 어른들까지도 동요를 즐기는 정서적 통로에서 그렇다. 이에 비해 정지용의 동시는 동심의 천진성과 순수성 그 자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동심지상주의를 표방한 시인이자 그가 모색해낸 동심의 기미임을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윤석중이나 한정동의 경우처럼 스스로 만년의 어린이가 되는 일, 그리고 시인의 경험적 자아를 순수로 통제하고 그에 수반되는 동심세계 만을 노래하려는 일, 그래서 순수한 동심으로 나아가는 일 등, 경험과 동심 사이의 이중 틀을 지닌다면 정지용은 그 반대편인 오롯 정지된 동심지상주의적 정서에 선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경험적 자아를 그 자리에 살려내려는 의도에서 작품을 쓴다. 이러한 특질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산에서 온 새」가 곧 그런 유형이겠다. 성인시를 동시로 바꾼다는 것, 성인의 정서를 동심의 정서로 변용시킨다는 것, 나아가 동심적 세계에 자아 개입을 차단하고 조정하는 것에는 오롯 절제된 자아를 요한다. 이런 절제력을 보인 정지용은 시와 유사한 동시에, 또는 동시와 유사한 시에, 자신의 동심을 침윤·적용·발화시킨 최초 시인이다.
2-9. 마해송(馬海松, 1905~1966)의 창작동화
마해송은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때부터 《여광(麗光)》의 동인이며, 일본 유학 중에는 〈일본유학생동우회극단〉의 일원으로 자신의 동화를 순회 공연한다. 1922년에 문학클럽 〈녹파회(綠波會)〉를 조직하여 공진항(孔鎭恒)·김영보(金泳俌)·고한승(高漢承)·진장섭(秦長燮)과 함께 활동함으로써 아동극 중심의 아동문화운동을 전개한다.
1923년 《새별》에 최초 탐미적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 「어머님의 선물」, 「복남이와 네 동무」 등을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본격화한다. 1924년 〈색동회〉에 가입하는 한편 《어린이》를 통해 창작동화를 발표한다. 그는 1935년까지 어린이문화운동과 동화창작, 그 외적 문화운동과 내적 작품심화를 병행한다. 광복 후 중·장편동화 창작에 힘써 「앙그리께」(1954), 「멍멍 나그네」(1959), 「모래알 고금」(1957∼1961) 등을 발표한다. 한편, 1940년대 후반까지 아동문화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기초하기도 한다. 작품으로 소년소설 「홍길동」(1927)과 동화집 『해송동화집』(1934), 『토끼와 원숭이』(1947), 『떡배 단배』(1953), 『모래알 고금』(1958), 『멍멍 나그네』(1961), 『마해송아동문학독본』(1962), 『비둘기가 돌아오면』(1962) 등이 있다.
그는 1920년대 초 ‘한국 최초 창작동화집’을 펴낸 작가이자 오늘의 ‘창작동화’ 장르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바위나라와 아기별」(1923), 「어머님의 선물」(1923), 그리고 가장 왕성한 시기에 쓴 장편동화 『토끼와 원숭이』, 중편동화 『떡배 단배』, 『모래알 고금』 등이 그를 창작동화의 개척자로 세운 장본의 동화물이다. 그가 1920년대에 개척한 창작동화는 당시는 물론, 1960년대에 이르러 더 많은 동화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평가와 조명을 받는다. 그의 동화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성을 표방한 ‘본격문학’으로 확장되는 의의를 지닌다. 그의 동화의 유형에는 성격상 전래동화·민담·설화 등을 창작동화로 꾸민 것, 현실을 풍자한 것, 그리고 어른들의 올바른 태도를 그린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그의 창작동화들의 시기별 위상에서 살핀 분류이겠다.
최초 창작동화 「바위 나라와 아기 별」은 ‘견우와 직녀’를 떠올리듯 전래동화에서 빌어온 동화이다. 그는 이를 통해 슬픈 우리의 역사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동화집 『사슴과 사냥개』에는 ‘엄마를 잃은 아이’, ‘꽃씨’, ‘새싹’ 등이 등장한다.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꽃씨나 새싹 또한 그런 탄생을 대리한다고 볼 수 있다. 장편동화 『모래알 고금』은 화자인 ‘고금’이 작은 모래알로 합해져 연탄이 되고 그게 탄 뒤에는 연탄재가 되면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버림받다가 마침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가령, ‘임의식’의 주머니에 들어가기도 하고 ‘재영’이의 바지 꿰맨 자리에서 떨어지기도 하며 ‘음성’이의 주머니에 휩쓸려가기도 한다. 연탄재는 이와 같이 세상 이곳저곳을 다니며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바 발상이 생태적이다.
조그만 하나의 모래알
새싹에게는 큰 맷돌만큼이나 무거운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나 고금을 발길로 걷어차서 옮겨 주었으면 고맙겠다.
나 같은 모래알 하나는 더러운 곳으로 떨어져도 좋으니 새로 나오는 새싹이 쭉쭉 쭉 뻗어 나오고 자라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72쪽).
‘고금’은 탄생에 대한 기록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래, 생명은 새 세상을 이끌어갈 것이기에 사랑받아야 할 어린 아이와 닮았음을 이렇게 피력한다.
「토끼와 원숭이」는 1915년에 완성된 동화이다. 1931년~1933년까지 3회에 걸쳐 《어린이》에 발표했으나 일제 검열에 걸려 중단되고 다시 1946년~1947년 〈자유신문〉에 연재된다. 내용은 1915년 당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토끼와, 일본을 상징하는 원숭이가 등장한다. 이 작품엔 독립 후 연재를 다시 재개하면서 미국과 구소련을 상징하는 ‘퉁쇠’와 ‘센이니’를 추가로 등장시킨다. 힘센 사람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토끼의 모습은 우리 민족의 나약한 바를 상징해 보인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자유신문’에 연재되었던 『떡배 단배』 역시 강대국에 휘둘리는 우리 민족사를 험로를 보여준다. ‘선 마라’ 사람들은 민족을, ‘떡배’는 미국, ‘단배’는 구소련을 상징한다. 머슴이던 갑돌이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자급자족하는 힘을 보인다. 이처럼 이 동화는 당대를 고발하는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이야기로 재미와 교훈을 함께 제공해 준다.
「사슴과 사냥개」는 1955년 동아일보 연재 동화로, 사냥개이던 ‘비호’가 주인에게 버림받고 ‘베쓰’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는 숲속 동물들에게 물어뜯기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이놈들아! 꿈쩍 말아! 우리 주인이 와서 너희들을 다 죽일 터이니!”
“이놈아! 주인이 어디 있어? 우리들을 못살게 구는 그것들의 앞잡이를 왜 서는 거야! 못난 놈 같으니.”(143쪽)
이 『사슴과 사냥개』는 일제하의 민족의 모습을 농밀하게 드러낸 동화이다. ‘비호’는 일본이 앞잡이 노릇을 하다 버림받은 사람이며, 그러한 ‘비호’를 돌보는 동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민중이다. ‘비호’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베쓰’라는 이름을 얻어 태어난다. 비록 짖지 않는 바보로 쓸모없는 개가 되지만 사람들로부터 온갖 구박을 견뎌낸다. 마지막 죽임을 당하는 순간 앞을 막아선 ‘베쓰’가 온몸으로 짖어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통해 베쓰의 진가를 나타내기도 한다. “베쓰는 똥개가 아니었어! 짖는 소리가 호랑이 소리만큼 굉장했다!”(165쪽)고 전한다. 이처럼 마해송의 동화는 끝 부분에 극적 장치가 돋보여 많은 독자를 확보하는 요인이 된다.
방정환으로 시작된 ‘어린이문학’의 태동기에는 일제의 세월이다. 그 역사 위에 쓰인 문학 작품은 독립의 의지와 희망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해송의 동화가 과연 지금도 그 시대의 재미와 감동에 버금갈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시대를 이겨내는 그의 문학의 힘은 더 유효할 것이다.
마해송 동화의 특징으로는, 첫째 대표작 「바위나라와 아기별」에서 보여주듯 탐미적 경향이 짙다. 반면, 봉건적 체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비평도 따른다.
둘째 인정의 세태와 시대상을 비판한 풍자가 담긴다. 「토끼와 원숭이」가 그 대표작으로 식민지 시대에 우리 얼의 말살정책, 강대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 등을 비판한다. 그 배경에는 작가의 강한 민족주의적 주체성이 자리해 있다.
셋째 어린이를 온전한 인간으로 존중하자는 사상을 견지한다. 그의 작품엔 부정한 어른과 이에 대응하는 아동,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는 아동, 광복 후 희망적 아동의 상 등을 제시한다. 이러한 특징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주인공 아동이 혼연일체가 되지 못한다. 작가가 아동을 가르치는 교시적 태도를 보인 점이 한계점으로 남는다.
2-10. 이주홍(李周洪, 1906~1987)의 계층갈등 동화
이주홍은 《신소년》에 의인동화 「배암새끼의 무도」(1928)를 발표한 후, 60여 년 동안 동화, 소년소설, 소설, 수필 등을 발표하여 장르의 지평을 넓힌다.
아동문학평론가 정춘자는 아동문학을 성인문학의 입문 문학으로 여기는 세류와는 달리 81세 작고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한 작가로규정한다. 아동문학연구자 손동인은 매너리즘에 빠진 동화문학에 금자탑을 이룩한 작가로평가한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은 서민의식에 투철한 작가로, 그리고 아동문학연구자 이재철은 해학·풍자·기지가 독특한 그래서 대중적 아동문학을 이룩한 작가로, 각각 이주홍의 아동문학사적 위치를 규정한다. 한편, 이주홍 연구자인 정춘자는 작품 전체를 그 특징에 의해 3기로 나눈다. 즉 초기는 1925년부터 1945년까지의 도전과 극복의 문학, 중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의 순수와 그리움의 문학, 후기는 1960년부터 작고 전인 1986년까지의 화해와 순응의 문학 등으로 특징을 잡는 게 그것이다.
이주홍의 소년소설과 동화 작품 중에서 1920년대부터 1930년까지 즉 아동문학 초기에 발표한 작품들을 살펴본다. 그는 1928년 「배암새끼의 무도」를 《신소년》에 발표한 후,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난과 사랑」이 입선된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와 《신소년》의 편집장이 되고부터 더욱 창작열을 올린다. 《신소년》(1923~1934)의 편집 방향은, 초기(1923~1925)는 계몽·교화적 경향이나, 중기(1926~1930)에는 〈색동회〉 등의 참여로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후기(1931~1934)에는 프로문학적 의식의 경향 등으로 변모해 간다. 이주홍이 편집한 때는 이 잡지가 후기에 접어든 시기이다.이러한 영향을 받아서 그도 1930년대에 활동한 프로아동문학가의 범주로 지칭된다.
「청어뼉다귀」(《신소년》, 1930.4.)와 「잉어와 윤첨지」(《신소년》, 1930.6.)는 당 시대의 정치상황이 바탕에 깔린 동화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자작농이 점차 줄고 소작농이 많아지게 되자 농촌엔 궁핍과 갈등이 심화된다. 그 대립 상에 영향을 입어 그의 동화에로 그대로 담긴다. 「청어뼉다귀」의 순덕이네는 하나뿐인 아들 종덕이가 태독(胎毒)을 앓다가 죽자 더 굶주림에 허덕인다. 게다가 상심한 어머니가 병마를 맞게 되고, 아버지 역시 노동의 의욕을 잃고 누워만 있다. 이때 지주인 김부자가 들어오는데 그 상황이 가시인 듯 보이는 묘사로 계층의 갈등 사이를 꿰뚫어 간다.
“네댓이나 나이적은 사람한테 이사람, 저사람 소리듯는 것도 분하거니와 그래도 자긔집안에서는 제일 어룬이고 제일 거룩해서 도저히 다른 것으로는 비할 수 없스리만한 높고도 위대한 자긔의 아버지가 그 김부자의 앞해서는 너머나 적어진 것이엇다.”(27~28쪽)
이러한 심리 상태가 결국 ‘청어뼉다귀를 씹어먹는’ 극한 상황까지 다다른다. 극심한 가난이 정상적 삶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갈등에 인물들의 반감들이 일으키는 울분 행위 등으로 나타난다. 이때 아픈 ‘순덕’에게 논을 떼인 ‘아버지’는 그 분노와 더불어 순덕이의 종기를 내리치게 된다. 방안에 가득 퍼진 피고름은 순덕과 아버지의 일그러진 분노가 합쳐 나타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부녀는 울음 끝에 본래의 애정을 회복한다.
「잉어와 윤첨지」는 장마 뒤에 방천을 쌓다가 잉어 두 마리를 잡은 ‘점식의 아버지’가 마침 산후로 앓아 누운 어머니에게 고아주려는 기대를 뒤로 하고, 지주인 ‘윤첨지’에게 가져가는 전형적인 지주와 소작인의 주종관계를 다룬다.
화끈화끈 뜨거운 눈물에 점식이는 그 자리가 화침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도리어 아버지의 마음을 상케 할까봐 그냥 눈을 감고 견뎠다. 그러나 모르는 사이에 주먹이 뽀드득하고 빠드득 떨렸다.(13쪽)
이주홍의 위 두 작품은 궁핍한 현실에서 계층의 갈등을 증표한 동화로 일제 강점기에 소외층이 겪은 비애, 그리고 소외된 아동이 피폐한 삶을 사는 과정을 담아 당대의 모순을 작품에 집약해 보인다.
이외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상황을 나타낸 「개구리와 두껍이」, 「호랑이와 벌」, 그리고 아동극인 「토끼눈알」 등도 이러한 가난에 의한 상심과 비극적 삶을 담아낸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첫째 계층 간 대립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준다는 점, 둘째 당시 일제의 감시와 독재체재 대결의 양상을 삽입해 경향적(傾向的)임을 보여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사회적 현실의 과제와 모순을 작품에 제시하려는 작가의 기질성에서 나온 바이다. 하지만 보다 고발적이고 선동적인 계급 타파의 출구에는 이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곧 그것은 작가에 대한 제재와 감시, 그리고 검열이라는 카테고리에 갇혀 작가 스스로도 극복해내지 못하는 식민지적 삶에 대한 열등의식이어서 내부에 쌓여둔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2-11. 진장섭의 재미 추구 동화
한편, 동화 「생명수」(《어린이》, 1920) 등을 발표한 진장섭(秦長燮,1904~?)은 필명을 ‘학포(學甫)’, ‘금성(金星)’으로 사용하며 작품을 발표한다. 그는 개성 출신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과 도쿄 고등사범 영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이때부터 그는 민족의식과 투철한 항일사상으로 무장한다. 3‧1운동 당시에는 최연소 학생대표로 참여할 만큼 열성적인 작가이다. 이후, 《여광》 동인(1920), 극예술협회 회원(1920), 녹파회 창립 동인(1922)으로 활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