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장 영화 파묘(破墓)와 해방신학
3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가 종종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들을 듣고자 하였고 아무에게서도 이런 말들은 들을 수 없었다. 너희가 나를 찾으나 발견하지 못 할 날들이 있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으나 발견하지 못 할 날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부분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망, 부활 그리고 승천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가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 있지 않을 때, 즉 그의 육체적 존재가 사라진 후에도 그의 가르침과 영적 지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 구절은 또한 신앙인들이 겪게 될 영적 시련과 고난, 그리고 때때로 믿음의 길에서 방향을 잃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수 있는 상황들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해석에서, 이 구절은 믿음의 여정이 단순히 물리적인 존재나 구체적인 증거에 기반하지 않으며, 때로는 의심과 불확실성을 겪으면서도 지속적인 신앙과 신뢰를 통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물리적 부재 중에도 그의 가르침을 붙잡고 신앙을 유지하도록 격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이 구절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믿음의 중요성과 신앙인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을 인정하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루살렘 성전파괴는 극단주의로 치닫은 유대인들이 무장 투쟁을 통해 로마군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장엄한 드라마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어 갈등하였고 마침내 반대파들을 잔인하게 숙청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같은 민족끼리 가치관이 달라 서로를 죽이는 과정은 비단 유대인 뿐만이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 역시 일본의 침략에 동조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나뉘어 암살하고 결국 민족의 내분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분열된 민족은 쉽게 외세에 지배당하고 말았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정치적 내분이 얼룩진 사회에서 백성들은 의지할 대가 없었습니다. 영화 ‘파묘’를 보면 기이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미국 LA, 거액의 의뢰를 받은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은 기이한 병이 대물림 되는 집안의 장손을 만납니다. 조상의 묫자리가 화근임을 알아챈 ‘화림’은 이장을 권하고, 돈 냄새를 맡은 최고의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이 합류합니다. “전부 잘 알 거야… 묘 하나 잘못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절대 사람이 묻힐 수 없는 악지에 자리한 기이한 묘. ‘상덕’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제안을 거절하지만, ‘화림’의 설득으로 결국 파묘가 시작됩니다.
친일파 자손의 몰락과 일본의 귀신인 ‘쇼군’이 영원히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묻어 놓은 인간 말뚝은 지금의 정치 현실과도 흡사합니다.’좌파’ 와 ‘우파’ 의 갈등이 아직도 계속되는 지금, 우파의 외교 정책인 ‘친일’이 우리나라 역사를 좀 먹고 그들의 자본주의와 사대주의를 지지해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최근 영화 배우 이선균씨의 억울한 죽음과 영화인들의 분노는 침묵속에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지만 영화라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관객들에게 그 한(限)을 전달합니다.
지금의 정권은 파멸의 길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정치 공학적으로 우파 정권의 미신과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은 민중을 분노케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정권이 무너져 영어의 몸이 되는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게다가 청와대를 개방하고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긴 것은 상위 1%의 대한민국 지도층이 풍수지리를 맹신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과거 한참 기수련을 할 때, 신불산으로 수련을 가자는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는 저는 질문했습니다.
’신불산에 도인이 있다는데 진짜인가요?’
그 당시 스승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사기꾼이다.’
그 사기꾼이라는 사람이 ‘천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김건희 여사와 윤석열에 붙어 국정을 그르치고 망조가 드는 걸 봅니다. 젊은 환자들도 점술이나 타로에 빠져 국어, 영어, 수학을 등한시하고 미신에 빠져 몸을 망치고 병원에 들어와 있는 걸 보면 실소가 납니다. 사이비와 진짜는 그 이익이 자신에게 향하는지, 아니면 타인과 사회로 환원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기꾼들이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밑바닥에서 있을 때는 알 수가 없습니다. 돈과 권력을 얻으면 바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무속이 무엇인가? 의문이 듭니다. 풍수를 보아 길흉화복을 미리 예측하여 좋은 운을 받게 도와준다는 말은 아주 좋게 들립니다.
‘흉한 것은 피하고 길한 것은 취한다(피흉취길(避凶取吉)’ 듣기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아는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피할수록 더욱 당하게 되고 그 피해는 점점 더 커집니다. 부적도 민속적 처방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행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영화 ‘파묘’에서는 무당과 풍수사가 자신들의 이익이나. 의뢰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화 ‘명당’에도 나옵니다.
영화 "명당"은 2018년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역사 드라마 영화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풍수지리설을 소재로 하여,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인물들 간의 갈등과 암투를 그리고 있습니다. 주요 등장 인물로는 조선 최고의 풍수지리가인 박재상과 그의 제자인 김재우, 그리고 조선의 왕족과 권력자들이 포함됩니다.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박재상(조승우 분)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풍수지리가로, 그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왕실의 무덤 위치를 조정하려는 권력자들 사이의 음모에 휘말리게 됩니다. 박재상은 이러한 권력 싸움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의 제자 김재우(지성 분)는 박재상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점차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풍수지리가 사람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지를 탐구합니다. "명당"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의 배경과 풍수지리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해 인간의 욕망, 권력에 대한 추구, 그리고 운명에 대한 물음을 드러냅니다.
영화는 권력의 중심에 서려는 인물들의 암투와 함께,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 충성과 배신, 사랑과 우정 등 인간관계의 복잡한 양상을 그립니다. "명당"은 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결국 인간의 욕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무당과 풍수사가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민족의 정기(正氣)를 세우기 위해 외세인 쇼군의 귀신(鬼神)과 맞서는 장면은 우리 민족의 고고한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기수련과도 같습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기치료를 하거나 금품을 요구하고 교육을 빙자로 돈을 갈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심(人心)은 귀신같이 알고 떠나갑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인간의 욕망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의 정체성과 제국주의 욕망이 뒤엉켜진 거대한 ‘아마겟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로마 전쟁의 일환으로,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전을 파괴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에 있어서 큰 충격이었으며, 유대인 사회와 종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경우,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당시에는 이미 별개의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의 파괴와 대재앙에 대해 예언한 것을 기억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예언 중 하나는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등), 이러한 예언을 믿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위험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펠라(Pella) 같은 지역으로 피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전의 파괴 후, 그리스도교는 더욱 독립적인 종교로 발전하며 유대교와의 구분이 명확 해졌고,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그리스도교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후 그리스도교는 다양한 문화와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후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부분에 대해,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피해 도망친 것은 그들이 민족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일종의 증거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유대교인들 사이의 분열을 가속화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고 독립적인 종교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점차 소외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후 수세기에 걸쳐 계속되었고,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면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경우, 일제 강점기 동안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의 적극적인 민족주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 내에서 정서적 인정을 받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민족 정체성과 독립 운동에 기여했다는 인식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그리스도교가 각기 다른 문화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다른 역할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인정받았는지 보여줍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의 입지가 좁아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기독교는 적극적인 민족주의적 태도를 통해 한국 사회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각 종교가 자리 잡고 있는 사회와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 역할과 인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너희가 종종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들을 듣고자 하였고
그러나 유대민족의 해방운동은 실패하였고, 그들의 성전은 파괴되고 공동체는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도 항상 맞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 깊은 반일 의식과 민족 수호의식은 기독교로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들의 문화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가야 할 유산인 것입니다.
성전 파괴의 날, 즉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예언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이 예언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한 것으로,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했을 때, 도시를 떠나라고 경고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경고를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강 동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들이 피신했다고 전해지는 주요 장소는 펠라(Pella)라는 도시입니다. 펠라는 현재의 요르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시에는 안전한 피난처로 여겨졌습니다.
이 이주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대인 반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예수의 예언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점차 분리되어 독립된 종교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예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따랐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나중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너희가 종종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들을 듣고자 하였고
마태복음 24:1-2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시다가 제자들이 그 성전 건물들을 보여 주려고 다가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않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겨두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구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괴를 예언하신 것으로, 로마군이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사건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예언은 나중에 현실이 되었고, 이 사건은 유대인 역사 뿐만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지내는 제사중심의 사두개파들도,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열심당에게도 예수님의 말씀은 ‘신성모독’이고 민족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성전 파괴의 날에 사두개파들은 학살당했고, 무장 투쟁을 주장하던 열심당원들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아무에게서도 이런 말들은 들을 수 없었다.
이미 유대교내에서 평화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고 그들은 성을 도망쳐 나와 학교를 세웁니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일제 강점기 동안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1897년에 태어나서 1944년에 순교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한국 기독교 장로교의 목사였으며,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38년 일제는 조선의 모든 학교와 기관에 신사참배를 강제하였습니다. 신사참배는 일본 신도(神道)의 일환으로, 일본의 신들과 천황을 숭배하는 행위였습니다. 일제는 이를 통해 조선인들의 정신을 일본화 하려 하였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며,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1944년에 투옥 중 건강이 악화되어 순교했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용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순교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그는 한국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많은 기독교 순교자들 중 한 명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기독교인들이 겪었던 신앙의 시련과 저항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집니다.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가톨릭 교회가 독립 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와 같은 개인이 자신의 신앙에 따라 독립운동에 기여한 사례는 중요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행동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과 별개로, 그의 개인적 신념과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으로, 신앙의 실천이 개인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나를 찾으나 발견하지 못할 날들이 있을 것이다.
저는 도마복음과는 의견을 달리합니다. 오직 ‘사랑과 지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과,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할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의미의 사랑이며,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자신의 안위가 아닌 하나님의 어린양들의 편에서 끝까지 함께하는 종교적 개인성 바로 ‘해방(解放)’인 것입니다.
정일우 신부는 대한민국의 가톨릭 신부이자 사회운동가로, 청계천 철거민들과 서민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청계천과 주변 지역의 빈민촌에서 생활하며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정일우 신부는 특히 1970년대 서울의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청계천 철거민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당시 정부의 재개발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저소득층 가구가 강제 이주 당하거나 주거지를 잃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일우 신부는 철거민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며, 그들의 주거 권 보장과 생활 안정을 위해 싸웠습니다.
정일우 신부는 빈민촌 주민들과 직접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목격했고, 이를 바탕으로 빈민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정책 변화를 촉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빈민촌을 방문하여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빈민촌 주민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일우 신부의 활동은 단순히 철거민들을 돕는 것을 넘어서,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폭넓은 사회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한국 사회의 빈민 문제와 사회 정의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으나 발견하지 못할 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약합니다. 그들은 성전 파괴의 처참한 현실을 겪고 나서야 비로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전은 파괴되고 로마인들과의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주장하고 승리를 장담하던 이들은 모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소수의 유대교 저항 세력들은 마사다 요새에 모여 전원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1907년 청일 전쟁이 끝나고 혼란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은 갈피를 못 잡고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무속도 풍수도 부적도 바람 앞에 등불 신세인 나라를 구하지 못했습니다.그러나 미신과 우상 숭배에 빠져 있던 우리 민족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그것은 지금의 북한땅 평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 1월 14일 저녁 평양에서 결정적인 저녁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이길함 목사의 인도 하에 성도들은 통성기도를 이어갔고, 15일 오전 2시까지 600명이 남아 철야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 날 길선주 장로는 1906년 세상을 떠난 친구가 임종 당시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 달라고 맡긴 100달러의 거금을 횡령하였던 죄를 600명이 넘는 회중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뒤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신의 아이를 죽인 여성, 불치병에 걸려 아파하는 아내에게 매일 술만 마시며 저주를 퍼부은 남성, 첩을 두 명이나 두고 가정을 외면했던 남성, 선교사의 돈을 14전이나 훔친 여성 등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기도회에 참석한 한 사람이 죄를 회개하며 울기 시작하자 이어서 모든 회중들이 울기 시작하였고 하나 둘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주저앉아 울며 마룻바닥을 두들기며 자신의 죄를 벗어 버리기 위해 비명에 가까운 통곡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평양시내 영문 부근에 방은덕이라는 순포(경찰관)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경회 기간 중 장대현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온갖 죄를 자백한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가면 범죄자도 많이 잡고 실적도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암행순찰하는 방식으로 그 날 장대현교회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설교 제목이 '지옥을 취하랴, 천당을 택하랴?'였습니다.
이 날 설교에서 길선주 목사는 "물질을 도둑한 사람은 잡을 수 있지만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다스릴 수 없습니다, 죄 있는 마음은 지옥이요, 죄를 회개한 마음은 천당입니다."라고 선포했는데 방은덕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마음이 찔리고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설교 도중 일어나 "선생님, 이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천당에 와서 죄인을 잡으려 했던 방순포 죄인입니다. 어찌하리이까?" 라며 대성통곡하였고 그 날로 방은덕은 순포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평안북도 맹산군으로 귀향하여 그 곳에서 맹산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이 회개를 목격한 선교사는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여는 것과 같았습니다. 살인, 강간 등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죄가 고백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으나 발견하지 못할 날들이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 후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임재 하십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그리스도교인들을 혐오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조선의 멸망속에서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져버리지 않았고, 지도자들은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민족정체성 수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참여하였고 그것은 3.1 운동으로 폭발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피하지 않았습니다.3.1운동의 33인의 대표들 중에 16명이 기독교 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신학적 흐름이었습니다.
아니 이미 출애굽에서 이집트인의 억압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납치와 매매, 살인,강간으로 얼룩진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신음과 비명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보내심 이었습니다.하나님은 오직 한 명의 사람을 선택하시어,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해방을 주셨습니다.현대에 와서 그 흐름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196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기독교 신학의 한 흐름입니다. 이 신학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중심 주제로 삼으며, 기독교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해방신학은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현대적 억압 상황에 적용하여, 가난과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는 실천적 기독교를 추구합니다.
해방신학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의 억압받는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신학적, 사회적 노력을 강조합니다.
비판적 사회 분석: 이 신학은 빈곤과 억압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분석 방법을 포함한 비판적 사회 과학의 도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회 정의와 해방의 신학: 해방신학은 기독교가 단순히 영적 구원을 넘어 사회적 구원과 정의 실현에도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선호적 옵션(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이는 신학적이고 윤리적 선택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해방신학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같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일정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해방신학이 과도한 정치적 관여와 마르크스주의 요소를 포함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왔습니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 여러 지역의 사회 정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형태의 억압에 대항하는 교회의 실천적인 활동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으나 발견하지 못할 날들이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유대인의 정죄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과 달라도 끝까지 그들 곁에서 함께 죽음을 택한 그리스도인들의 장송곡인 것입니다.
도마복음은 오직 ‘사랑과 지혜’만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민족정체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도덕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대승적(大乘) 사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