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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성씨 이야기
~ 아래 내용은 거제도 유학자 김계윤씨의 "명계유고"의 내용과 본인의 조사 내용을 첨가하여 기록한 것이다. ~
거제도 대표 성씨는 윤씨, 옥씨
거제도가 본관인 성씨는 거제 반씨, 아주 신씨
한국의 성씨는 고려 이전에는 왕족, 귀족, 사족세력(士族勢力)일부는 신분 표시로 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성은
없고 이름만 있었다. 왕건도 성이 없어 건국이후 공신들에게 사성(賜姓)을 부여했다.
윤씨 |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1875∼1951) ☞ 차례 : 1) 거제도 칠원 윤씨 2) 거제도 의령 옥씨 3) 거제도 칠원 제씨 4) 하청면 사환(巳還), 한내(汗內) 5) 거제시 연초면 연사리 6) 거제 반씨(潘氏), 신(申)씨, 빈씨(賓氏) 7) 거제도 의성 김씨 1) 거제도 칠원 윤씨 이야기[世居說] 윤씨는 큰 고을의 큰 가문이다. 옛날 휘(諱)가 달(達)인 분이 진사(進士)로써 바다를 건너왔다고 전하며, 5세가 휘(諱) 윤승보(尹承輔)인데 임진난 당시 윤승보 두 아들 윤영상(尹榮祥) 윤흥량(尹興良) 모두, 당시 난(亂)에 공을 세워 녹권(錄券)을 받았다. 윤승보의 동생 휘(諱)가 개(玠)인데, 그 당시 족보를 손질하면서 보(輔) 자(字)를 더하여 윤개보(尹玠輔)가 되었고 윤승보의 동생은 형을 위해 연초면 다공리(茶貢里)에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전하는데 어느 해에 창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큰할아버지 은옹(隱翁) 부군(府君)은 임술년(1922년) 일기 중에 윤씨 사당을 건설했다고 전하며 자손들이 재물과 제문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년의 나이일 때 향원(鄕員)의 동아리에서 널리 의논하여 장차 유림이 제사를 봉사(奉祀)하고자 했는데 곁에 옥씨(玉氏)와 함께 권고하였다. 옥씨 또한 공경하고 주체할 수 없는 장수이니 선조(先祖)로서 헤아린 일이었다. 모든 마을에다 두루두루 따로 설치하자는 계안(契案)이 있었고 의연금(義捐金)을 받자고 했는데 몇 천여 금(幾千餘金)에 이르렀다. 혹은 토지로 바꾸고 혹은 재물을 불리어 이익(利益)을 늘리기도 했다. 윤씨 중에 한 사람이 맡아 있던 것을 승낙(承諾) 없이 마음대로 써버려 수천금(數千金)을 도둑맞았다. 이에 윤개보(尹玠輔)의 자손 또한 사당을 나누어야겠다는 뜻을 가지고 별도로 하청리에 세웠다. 그래서 윤개보(尹玠輔)의 위패를 옮겨서 받들게 되었다. ◯ 하청리 세거인 참봉(參奉) 윤도흠(尹道欽)씨가 그 서자(庶子)의 족속(族屬)을 기록한 내력을 보내와 나에게 청하였다. 재삼 보여주길 원하며 한번 왔다가면서 안부를 묻는 연고이다. 참봉이 말하길, 다공리에 창건한 사당의 일은 심히 불공평한 점이 많다. 이런 이유는 우리 종파가 받는 땅은 입향 선조 진사공(進士公)을 주(主)되는 지위(地位)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당시 임진난 선조의 배향하는 뜻은 종중(宗中)의 여론으로 정히 결정한 것이다. 그대가 가부(可否)를 논(論)하여 어찌하였건, 공의 마음을 말 한마디로 정해주기 바란다. 나는 묵묵히 오랫동안 좋게 말했다. 당초 수문장이었던 윤개보(尹玠輔)공은 가히 제사를 올리는 게 도리이지만, 진사공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은 이로부터 4~5세 선조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마땅히 제사를 지내는 도리라고 할 수 없으니 고로 제사를 올리지 않는 것은 틀린 것이다. 설사 오늘 나라를 위해 바친 공이 있다할지라도 위(上)의 조정으로부터 증질(贈秩)받고 시호를 하사 받아야하고 사림(士林)을 위하고, 공공의 대의(大義)를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서서, 거룩하게 여겨 떠받듦이 있어야한다. 하필 자손들의 사사로운 일이 많아 겨를이 없기도 하지만, 비등한 하나의 증명도 없고, 지난날에 받들어 섬기었던, 이미 정해진 직위에 올랐던 것, 사실은 감히 알지 못한다(그렇지 않다). 참봉이 말하길, 공이 말을 전해 듣기로 사물의 이치(理致)나 일의 도리(道理)가 매우 명백하다하니 대저 이러이러하여 의논을 마친다. ◯ 수일 후에 나는 죽전리를 지나가다가 도로 변에서 윤봉여(尹鳳汝)씨가 나를 맞아주었고 그 집에 들어갔다. 지금 나의 담배를 금하더니 맛좋은 담배 서너 개를 묶어 나에게 건네주며 말하길, “이것은 나의 동생 윤태여(尹泰汝)가 보내준 것이다.” 연이어 말하길, “지난번 규상(奎祥)이 그대에게 보낸 것인데 만나지 못해 가지고 있다가 되돌려주는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우리 집안에서 다공리에 사우(祠宇)를 중수했고 신주를 다른 곳에서 옮겨오면서 기문(記文)을 그대에게 맡겼었다.” 그런즉 큰 의논을 할 수 있었는데 모두가 말하길, “그대에게 물어서 결정했다”고 한다. 우리는 거제 선조 진사(進士)공이 처음 입도(入島)했고 5세에 이르러 첨정공(僉正公) 형제 영상(榮祥) 흥랑(興良)공이 떳떳하게 임진난을 임하여 윤승보(尹承輔) 위패와 더불어 다공리 사당에 모셔졌다. 그리하여 윤개보(尹玠輔, 윤승보의 동생)의 두 아들도 배향되었다. 윤개보는 지금 하청으로 옮겨 모시고 있으며 종중(宗中)의 사방 여론을 고려해 진사공(進士公)도 봉안(奉安)하기로 계획했다. “목패(木牌)를 몸소 만들어 그대의 뜻을 넣었으니 어떠한가?” 나는 처음에 대답하지 못했으나 봉장(鳳丈)과의 깊은 인연으로 전날 하청의 일을 이에 서술하며, 말을 해준 것을 또 말하면서 이러저러한 서술한 것들을 끝마친다. |
반씨 | 거제 반씨(巨濟 潘氏)는 경상남도 거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거제반씨, 기성반씨) 시조 반부(潘阜)는 남송 이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고려에 귀화하여 원종과 충렬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으며,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반씨의 비조는 주나라 시조(始祖)인 문왕 희창의 아들이자, 무왕 희발의 동생으로, 무왕 때 은나라 정벌 후 필나라 공작(畢公)에 봉해져 제후가 된 필나라 시조 희고(姬高)이다. 성왕과 강왕까지 삼대를 보필하며, 관직은 태사(太史)에 이르렀다. 희고의 아들 계손이 반(潘) 땅에 봉해진 이후 그 후손들이 반씨를 이루었다. 반씨는 춘추시대 이후 유학자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문으로 일컬어졌다. 거제 반씨(巨濟潘氏) 시조 반부(潘阜)는 남송 이종(理宗) 때 문과에 장원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이부상서를 지냈다. 그는 몽골 정벌을 간청하였으나,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몽골에 사신으로 보내 은밀히 죽이게 하였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문무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보고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그 무렵 고려 충렬왕이 세자로 몽골에 있었는데, 그의 충의를 높이 사 뒤를 따라나온 김방경에게 그를 고려로 데려가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뒤에 충렬왕비가 된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로 오게 되었다. 원종과 충렬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김방경을 따라 일본 정벌에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올랐으며,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에 봉해졌다.[1] 기성은 거제의 옛 지명이다. 반부는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기성으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시조 반부의 묘소는 경상남도 거제시 국토봉에 있다. 2세인 둘째 아들 반유항(潘有抗)은 예부 상서를 역임하였고, 3세 반영원(潘永源)은 충숙왕(忠肅王) 때 밀직 상서를 지냈다. 4세손 반익순(潘益淳)은 우왕 때 문하평리 우시중을 역임하고 충양공(忠襄公)에 봉하여졌다. 그 아들 반복해(潘福海)는 우왕의 수양 아들이 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추충양절익대좌명보리공신(推忠亮節翊戴佐命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6세손 반자건(潘自建)이 시중인 배극렴의 사위로써 고려 말·조선 초에 이조판서·예조판서·좌찬성 등을 역임하고, 영평군(永平君)에 봉해졌다. 9세손 반우형(潘佑亨)은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을 역임하며 중종반정에 참여해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권되었으며, 기성군(岐城君)에 봉해졌다. 반기문...유엔사무총장 -인구수 3,152가구 10,063명 -세거지: 충북음성, 전남장성, 전북진안, 경북청도, 전북김제, 경북칠곡 -거제 반씨 계파: 17본이 었으나 거제반씨대동보 편찬 시 합하였다. -입거제 묘소 반부 ...아주동 아주리 국사봉 임좌 |
아주신씨 | 아주신씨의 유래(鵝洲申氏) 아주신씨(鵝洲申氏)의 발상지(發祥地)는 한반도(韓半島)의 남단(南端)에 위치한 큰 섬 거제도(巨濟島)의 한 지역이다. 이 섬의 행정명칭(行政名稱)은 거제군(巨濟郡)이었다. 신라(新羅) 때부터 군(郡)으로 불러왔던 큰 고을이었고 여기에 아주현(鵝洲縣), 송변현(松邊縣), 명진현(溟珍縣)이라는 3개의 지역단위(地域單位)가 있었다. 이 지역단위에서 아주현에는 고려조(高麗朝)에 와서 성씨제도 (姓氏制度)가 등장하자 토호세력(土豪勢力)으로서 맨처음 성을 갖는 수장(首長)이 있었다. 그 수장은 신(申)의 성을 취(取)하였는바 후일 신영미(申英美)로 알려진 바로 아주신씨의 시조(始祖)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중앙집권(中央集權)이 여의치 않아 산재(散在)한 각 지역의 호족세력에게 현(縣)이나 군(郡)을 다스리게 하는 책임자를 두었다. 이 책임자에게는 호장(戶長)이라는 관직(官職)을 제수하였다. 이런 관직을 향직(鄕職)이라 하였는바 바로 지방관리(地方官吏) 즉 향리(鄕吏)였다. 이 향리의 사람들을 이족(吏族)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중앙에서 관직을 갖고 있는 벼슬아치들은 사족(士族)으로 불렀다. 이족의 자식들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벼슬을 할 수 있고 또한 사족으로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호장은 중앙에서 내려 보내는 관리보다 비록 지위는 아래이나 그 영향력은 컸다. 중앙관리(中央官吏)가 지역통치를 하는데 호장 에게 문의하고 또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장의 자식이 있으면 나라에서는 동정(同正)이란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런 벼슬을 음직(蔭職)이라 하는데 바로 부(父)나 조(祖)의 위상과 신분에 의해 벼슬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나라를 세우고 나서 중국의 고대국가 한(漢)나라가 실시했던 군현제(郡縣制)의 통치방법(統 治方法)을 도입(導入)했다. 앞서 언급하였듯 중앙집권화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중앙집권이란 것은 왕이 직접 지역을 관리하는 행정권을 말하는 것이다. 군(郡)이나 현(縣)에 중앙관리를 파견하여 왕 대신에 직접 다스리게 하는 위임행정을 펴는 것이 바로 군현제였던 것이다. 이런 제도하에서는 지방 토호세력의 영향이 컸다. 이 토호세력이 갖는 성을 두고 토착민의 성이라 하여 토성(土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고려태조 왕건은 자신도 한때 성이 없었던 신분이었음에 고려 이전에 성을 가진 사람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사족세력에만 국한되어 있어서 성이 바로 신분표시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고려 건국 이후 공신(功臣)에게 사성(賜姓)을 하는 일이 많았다. 사성은 임금이 직접 내려준 성을 말하는 것이다. 왕건의 사성이 많았음은 우리나라 역사서(歷史書)에도 기록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가 받은 게 사성이다. 평산신씨의 시조는 성을 갖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전라도 곡성(谷城)사람으로 능산(能山) 또는 삼능산(三能山)으로 불렀다. 이름만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왕건의 건국을 크게 도운 삼공신(三功臣)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을 하사(下賜)받기만한 것이 아니라 이름까지 받았던 것이다. 평산신씨의 시조가 신숭겸(申崇謙)이란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잘 안다. 평산신씨의 관향(貫鄕)이 된 곳은 황해도 평산인데 신숭겸이가 나라에서 사패지 (賜牌地)를 받은 곳이 바로 평산(平山)이었던 것이다. 본관제도가 나타나자 후손들이 그곳을 본관 즉 관향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주신씨의 본관은 그들 평산신씨의 본관 내력과는 다르다. 오로지 지역의 토호세력으로 성씨 등장이 있자 그 세력의 수장(首長) 이 먼저 성을 취하였던 것이다. 이후 본관제도가 나타나자 후손들 이 토호족세력의 지역을 본관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주신씨선대사적(鵝洲申氏先代事蹟)이란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高麗朝權知戶長三國之季人各以豪武覇於洲郡縣據有土地人民以輸貢賦於國因以爲所在戶長育子長孫遂爲本貫此我國鄕吏之始也고려조권지호장삼국지계인각이호무패어주군현거유토지인민이수공부어국인이위소재호장육자장손수위본관차아국향리지시야 이 글은 시조 신영미(申英美)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내용이다.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인 것이다.「고려에서 권지호장(權知戶長)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三國時代) 사람이었다. 패기가 있는 무인(武人)들의 호족세력으로 주(州), 군(郡), 현(縣)에 거주하며 토지(土地)를 가진 백성 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에 바치는 물자와 세금을 보내고 하였다. 이로 인해서 지역에 호장이란게 있었고 본관을 갖는 바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나라에서 향리(鄕吏)라는 관직(官職)이 시작된 것이다.」 권지(權知)는 관리시보(官吏試補)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임시로 어떤 공무(公務)를 관장한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호장직(戶長職)에 있으면 자손들이 과거시험에 나갈 수도 있고 중앙관서(中央官署)에 진출하여 사족(士族)이 되는 기회도 있었다. 시조의 증손(曾孫) 신윤유(申允濡)가 그 예의 인물이다. 아주신씨의 근원은 아주현의 호장 신영미(申英美)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문헌(文獻)이 있다. 이것은 조선조(朝鮮朝) 왕명(王命)에 의해서 인물(人物), 세헌(世獻) 등에 관해서 편찬을 한 국가적(國家的) 문헌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라는 책이다. 이 문헌비고는 조선 21대 영조 (英祖) 때 편찬된 것이다. 그리고 1924년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발행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라는 책도 있다. 문헌비고의 기록 뿐만 아니라 이 책에도 아주신씨의 시조는 신영미(申英美)라고 표기된 것을 본다. 국가에서 편찬되는 책자의 자료를 믿는 것이 일반적으로 신뢰를 하는데 오히려 국가의 것을 불신(不信)한다고 하면 그것은 실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는 것이다. 어느 종인(宗人)은 국가의 것이 되레 불신할 것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주신씨는 평산신씨로부터 분관(分貫)된 게 틀림없다는 식의 글을 보였다. 충남(忠南) 대전(大田)에 우거(寓居)한 다는 종인이었다. 사실 고려에서는 본관이 나타났지만 분관(分貫)이란 것이 별로 없었다. 왕이 하사(下賜)하는 본관 이외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분관 이 여기저기 나타난 것은 대개 조선조 중기 무렵이다. 특히 족보가 편찬될 무렵에 자의적(自意的)인 분관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족보로 등장한 것은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문화류씨(文化柳氏)임을 알면 그런 타성씨(他姓氏)에서 고려 때 분관 소리는 못하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조상을 빛내려는 의도에서 과장(誇張)하고 실제 계파(系派)가 아닌 것을 가지고 끼워 맞추듯 하여 족보에 올리고 한 성씨 등이 많았는데 우리 종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것이다. 조상이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어도 사실적인 조상을 받드는 것이 후손으로 큰 도리(道理) 임을 우리 뿐만 아니라 타성씨의 인사(人士)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시조: 申英美...고려시대 권지호장의 관직. 삼국시대 아주지역 호장(戶長) -거제도 집성촌: 명진리, 산방리, 연사리,하청리 ※ 토호세력의 수장을 호장(戶長) 또는 鄕職(鄕吏)라 한다 ※ 시조, 비조, 중시조: 시조(始祖)는 초대 조상을 말하며, 비조(鼻祖)는 시조 이전의 가장 높은 조상, 중시조(中始祖)는 시조 이후 쇠퇴하였던 가문을 다시 중흥시킨 조상을 말한다. ※아주 신씨의 시조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비조로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을 모시고 있다. 결론으로 말하면 거제 아주 신씨의 시조로 토호세력의 수장 이었던 신영미를 모시고 있는데 그 이전의 시조는 불분명하여 비조(鼻祖)로 신숭겸을 모시고 있다. |
옥씨 | 2) 거제도 의령 옥씨 이야기[世居說] 옥씨(玉氏) 사당이 죽토리(竹土里) 양지촌(陽地村)에 있는데 자신들도 어느 때 세운건지 알지 못했다. 죽토리에 건설한 옥씨들이 하는 말, 선대 옥찬헌(玉瓚獻 1694-1756)이 건설했다고 다른 사람이 말하기도 하고 중년(中年)에 계중(季重)씨가 건설했다고도 한다. 중년(中年)의 윤씨가 의연금을 내어 사당에 제사를 올린 이후에 옥씨 또한 다수의 땅을 매입했고 또한 더하여 한 분의 신위를 배향했다. 처음에는 유림(儒林)과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일을 의논했었다. 윤봉여씨가 말하길, 구타를 당하여 횡사한 사람이었는데 어찌 유림이 제사로 받들 수 있는가? 대략 옥씨 선조로서 휘(諱) 신변(信卞)은 당시 임진난 때 의령에서, 왜인을 따라 왜국으로 들어갔다가 절개를 지켰고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거제도에 도착해 죽토리(연초면)에 거주했다. 호(號)가 죽천(竹泉)이라 전한다. 그 자손들이 의심하여 사사로이 말하기를, 다른 집안의 문자(文字)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횡사(橫死)한 사람은 바로 옥삼헌씨였다. 옥씨 사당을 해마다 수리한 후에 죽천재(竹泉齋)에 현판을 높이 거는 것을 중단했다. 죽계(竹溪) 강당에 걸은 사람은 옥원로(玉元老)였고 또 옥계 강당을 정리한 사람은 옥세장(玉世章)씨였다. 어떤 사람이 말 하는 바, 죽계(竹溪)라는 것은 죽토(竹土) 옥씨 종파의 조상 옥찬헌(玉瓚獻)씨 호(號)라고도 하고 또한 스스로 지어낸 사당 이름이라 하기도 하며 이에 그 자손의 이야기일 뿐이라고도 한다. 심히 의아할 뿐이다. 당초에는 3위 신변(信卞) 찬헌(瓚獻) 삼헌(三獻)을 배향했는데 죽계공(竹溪公)이 사당을 스스로 만들고 생전에 제향했다. 지금은 무헌(武獻)씨가 추가로 향사되는 것을 배척했으나 온당치 않는 일이다. 혹시 다른 사람의 공통된 의견으로, “계중(季重)씨가 건설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 삼충사(三忠祠) 삼충사(三忠祠)는 임진난 때 윤영상(尹榮祥) 신응수(辛應壽) 김희진(金希璡) 3장군을 모신 곳이다. 임진란 때 공을 세웠다. 어떤 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 녹권(錄券)이 있다하여 지난 때에 삼충사(三忠祠)를 지었다. 무엇인지 몰라서 나라에서 금하였다. 사적인 감실(龕室)에 각각의 조상의 위패를 받들어 모시는 것을 금하였다. 동시에 김후석(金厚錫)은 고을을 지켰고 8년 동안 좌수(座首)였다고 전하는데 과연 그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고을 원과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직접 문자(文字)로써 정소(呈訴)하였다. ◯ 옥씨 한 종족이 둔덕으로 이거했고, 임진난 때 오비리(烏飛里)에는 옥계성(玉桂成)이 금군(禁軍)으로 있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벼슬을 하던 옥고(玉沽 1382∼1436)는 자(字)가 대가(待價, 待售), 호(號)가 응계(凝溪)인데 대구 판관(判官)으로써 안동 통판(通判)으로 옮겨 청백리로 기록되어 묵계정사(默溪精舍)에 배향되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 실기(實記) 중에, 옥사온(玉斯溫) 옥사미(玉斯美) 형제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한 가지가 분가되어 바다 섬에 흘러들어 왔다고 전한다. 오비 마을의 옥씨는 이에 그(옥계성) 자손이라 한다. 이때에 이르러 옥계성(玉桂成)이 망우당 곽재우를 도와 공훈을 세웠다고 전하며 오비리에 사당을 건립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었다한다. 시거지: 옥신변 1600년경 연초면 송정리 장좌동 |
제씨 | 3) 거제도 칠원 제씨 이야기[世居說] 제씨(諸氏)의 본관(籍)은 칠원이고 거제도에서 거주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임진난 때 칠원인(漆原人) 제말(諸沫 1552∼1593, 고성(固城) 출신)이 수문장(守門將)이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천거해 성주 군수에 올랐다가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 정조(正祖) 임금 때에 이르러 황단(皇壇)에서 태양을 향해 하늘의 뜻을 홀연히 느꼈는데 그 자손이 방문했었다. 그리고 관아(官衙) 사이에 조선 팔도로 공문(公文)을 보낸 것 중에, 고성군(固城郡)은 본디 제홍록(諸弘祿)이 당시 임진난 때 전사한 일이 있었는데 제말의 조카이니, 임금이 이를 듣고, 제말에게는 병조판서(兵判)을, 제홍록에게는 병조참판(兵參)을 추증하였다. 고성(固城) 제씨는 성주와 진주에서 인덕(仁德)을 갖춘 사실이 명백히 밝혀짐으로 인하여 그 땅에 비석을 세웠고, 성주충렬사(忠烈祠)에 제말이 주위(主位)로써 이사룡(李士龍)과 함께 배향되었다. 나라에서 중지하라고 한 후에도 거제도 제씨는 하청리에 사당을 세웠고 제말(諸沫)이 주위(主位)로 향배했고 제무상(諸武祥) 제홍록(諸弘祿)을 합하여, 제씨 옛 행적 3위를 살피게 되었다. 제홍록은 당시 임진난 때 여기 거제사람이 아니었다. 우연히 이름의 글자가 같을 뿐이다. 고성군의 제홍록은 충무공전서에 여러 차례 보인다. 여기(거제도) 홍록(弘祿)은 기해년(己亥年 1599년)에 태어났는데 임진난 때에는 더욱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
신씨, 빈씨 | 6) 거제 반씨(潘氏), 신(申)씨, 빈씨(賓氏) ◯ 이 고장에는 거제(巨濟)가 관향인 반씨(潘氏)의 오래된 집안이 있다. 고려의종이 방폐(放廢)되었을 때, 반(潘)씨 신(申)씨 빈(賓)씨 삼정승(三政承)이 따라왔다고 가요(歌謠)와 이언(俚諺)으로 대대로 전하고 있다. 그 근거는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틀림없다 한다. 국사봉(國士峯)에는 반시중의 묘가 있고 고려 중기에 세운 비(碑)에 시중(侍中)이라는 정승(政承)이라 적혀있다. 반우향(潘佑享) 반부(潘阜) 모두 거제 반씨 집안의 이름난 분들이다. 이와 같이 이름도 없는 다른 집안과 비할 바 아니니, 나라의 큰 공훈을 세운 뛰어난 집안의 부조묘(不祧廟) 사당을 세우길 논하였다. {거제도 문절사(文節祠) 건립} ◯ 신(申)씨는 아주(鵝洲)가 관향이다. 지금의 아주촌인데 민간의 구전으로 전한다. 신씨(申氏)의 묘가 있는데 비석이 뽑혀 있다. 다른 사람이 장사를 지냈던 연고이다. 신씨를 잘 알지 못해 누차 찾아보았다. 지금의 청송 의성 등지를 두루 다녔다. 신씨는 과거에 합격해서 끊임없이 성대하게 살았던 가문이다.(거제도에는 아주 신씨 집안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일찍이 의성(아주 신씨 세거지)에 갔을 때 신씨를 만났다. 그리고 그 사실을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또한 모른다고 말하며, 어찌 관향에 대해 뚜렷한 증거도 없이 구전으로 말할 수 있겠느냐 했다. ◯ 빈씨(賓氏)는 (유적이나 후손)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여러해 전에 지석리(사등면)에 빈씨 한 분이 살고 있었다고 전하나 그 진위를 알 수가 없다.[此賓氏無聞而年前支石里有賓氏一人云者亦未知其眞也] (현재 2017년 거제도에 몇 집이 거주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 칠천도 대곡리에 최씨가 살고 있다. 그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여하간에 살림 형편이 넉넉하다. (그의 선조는) 임진년 계사년(임진왜란 1592~1593년) 사이에 하동군(河東郡)에서 최고운(崔孤雲)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일이 있었다. 이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내려왔을 때 거제로 이주했고, 이종란의 유서(遺書)로 대곡리로 향해 와서, 최영제는 부자로 명성을 이루었다. 면암(勉庵)의 문하생 최영제는 자(字)가 성유(性攸)이다. 면암(勉庵 최익현)을 찾아가 뵙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면암의 문인(門人)이 된 것이다. 처음 만나 서로 허물없이 친하게 되었고 배움이 더 진전되었다. 어찌 경사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호(號)가 방당(方塘)인, 그 아들 용기(容基)는 갑오식(甲午式) 갑술과(甲戌科)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었다. 세자와 동연배 진사였다고 한다. |
의성김씨 | 7) 거제도 의성 김씨 ◯ 저의 문소(聞韶, 경북 의성)씨 김류락(金流落)은 거제에서 또한 오래된 집안이다. 일운면 망치 와현에 거주하는 친족이 두 군데 있다고 의심된다. 나의 8대 조부는 공주(公州)로부터 집안의 재앙으로 인해 잇달아 옮겨와 거제에 이르렀다. 혹은 이르기를, 이씨(李氏) 할머니 무덤을 고령(高靈)으로부터 옮겨 왔다고 전하나 알 수 없다. 어남 부군(御南府君)은 13세 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이다. 망치에서 글방을 열어 붙어살다가 모두 죽었다. 그래서 계모 아래에서 견디지 못하여 명동리로 옮겨왔다. 고씨(高氏) 집에서 처가살이하며 살아갔다. 그런즉 계모 슬하의 아우들은 망치 등지에 있을꺼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가경4년(1799년) 망치에 김취방(金就芳) 집이 제법 살림이 넉넉했는데, 어린아이들을 족보에 올리지 못하다가 그 후에 호적에 올리고자 와서 빌었다. 나는 종증손(從曾孫) 대부(大父) 휘(諱) 김윤중(金允重)씨를 김취방(金就芳)과 함께 그 족보를 빌려와서 올려주기로 허락하였다. 서울에 있던 각 영문(營門)에서 임금의 전교를 받아낸 연유로 수교()의 초두(初頭)에 김윤중(金允重)씨가 대표가 되었다. 덕포(德浦) 망치(望峙) 와현(臥峴)의 친척들은 그 전에는 없었던 족보에 비로소 올리게 되었다. 별도로 만든 족보를 의논해서 만들었고 한 책 중에 나의 7대조 휘(諱) 김함의(金銜依)가 그 집의 호적이 되었다. 또한 그 전에 나를 붙들어 머물게 하던 중에, 혹은 유숙하던 중에, 망치 와현 사람들이, 한손(漢孫) 한발(漢發) 집안이 아니었나 생각했다고 한다. 행여나 여기 한발(漢發)이 어남공(御南公)의 아우였다 하더라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에 족보를 고칠 때 빛나는 집안으로, 앞서 김우서(金禹瑞)를 별도의 족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에 성씨에 형통하여 전과같이 시행했고 어남공의 아들이 기특하게 밝혔다. 망치 와현은 조상의 한 갈래였다. 나는 일찍이 어남공(御南公)이 응한 여기 생자(生子)가 의심스러워, 망치에 거주하는 종친에게 보낸 일은 귀에 익숙한 삼종현(三從兄) 김사안(金士安)씨가 처리했다. 이씨 손씨가 강행을 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묘를 서로 판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러 대에 걸쳐 의아해하면서 산소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다가, 여러 친족이 억지로 제사를 지낸 연유로 인해 부득이하게도 단표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논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마땅히 옳다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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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거제도에 이런 성씨도 많습니다
공씨(외포), 진씨(학동),
옥씨(옥포), 반씨(덕포),
윤씨(연초),
제씨(둔덕), 이런 많이 살고 있습니다^
신씨(아주)현재 아주동 몇가옥가 살고있습니다,
반갑습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씨족사회로
한 마을에 부모님, 조부모님, 삼촌 5촌 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 삶의 맛이 있었으나
1990년대부터 산업화 됨으로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향촌의 맛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쉽죠...
아, 어린 시절이 그립기만 합니다.
즐거운 나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