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신자의 창조적 삶(101P)
♥ 제69차 성령 컨퍼런스(conference) 및 <총회서울부흥전도단> 제1회 정기 부흥성회 안내 2021.5.3.월.오후2시-5.수.오후1시(2박 3일) ♥
*이번 <성령 컨퍼런스>는 <총회서울부흥전도단> 제1회 정기 부흥성회를 겸하여, 배종부 지도목사의 주 강의 외에, <총회서울부흥전도단>의 박민 목사님, 심재선 목사님, 정도출 목사님, 이상각 목사님, 김성기 목사님 등 총 5분의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이 함께 부흥강사로 인도하십니다.
<총회서울부흥전도단>의 부흥강사 목사님들께서는 이번 기회에 <성령 컨퍼런스>에도 참석하시고, 단원으로서 부흥성회에도 동참하셔서, 큰 은혜와 동역을 이루시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3일 간의 대성회는 너무나 좋은 것인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오지 못합니다.
오시는 분들은 성령이 깊은 만지심으로 인하여,
그 신앙과 삶이 획기적으로 변합니다.
육적, 육신적인 신자가 아니라,
성령에 기초한 진정한 영적 신앙인으로 거듭 납니다.
성령과 은사에 정통하고, 靈界(영계)를 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삶과 은사의 맥을 관통해 줍니다.
특히 목사님들과
부흥강사의 길을 걷는 분은 필수 코스로 훈련 받을 기회입니다.
성회 진행 문의:강한나 부목사 010-2443-1272
장소:서울 노원구 노원로 26가길(상계동) 25
코롱A 상가 3층,
새성교회당
*네비로 ‘새성교회’ 치시면, 바로 나옵니다.
강사:배종부 지도목사
참가비:5만원
(성령의군대 배종부 농협 3560393-047263)
사전 등록자(통보자) 만 참석할 수 있습니다.
<성령 컨퍼런스>에 3일 간 전심으로 성령 훈련을 받을 사람만 들어 올 수 있습니다. 2박 3일 간의 계속되는 일정 도중에,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아래는 성령 컨퍼런스(conference)의 기본 성령 주제 강의와 워크숍 목차입니다.
강의안은 성령에 대한 깊고 주옥 같은 말씀들로, 일체 외부로 유출하지 않습니다.
*배종부 지도목사의 강의 중간 중간에 지부장급 이상 장군들의 5분 찬양과 10분 단상과 5분 통성기도 인도가 있습니다.
제1일:
1강.월 오후 2:00- 3:00 배종부 목사-성령 서론(聖靈 序論):
오후 3:00- 4:00 박민 목사(총무, 고양 시티라이트교회-제1회 부흥성회 인도)
2강.월 오후 4:00- 6:00 배종부 목사-신유(神癒):
저녁 7:00- 8:00 심재선 목사(전 단장, 희락교회 제2회 부흥성회 인도)
3강.월 저녁 8:00- 9:00 배종부 목사-특강
4강.월 저녁 9:00-10:00 배종부 목사-예언(豫言):
제2일:
5강.화 오전 9:00-10:00 배종부 목사-영분별(靈分別):
6강.화 오전 12:00-13:00 배종부 목사-축사(逐邪):
7강.화 오후 2:00- 3:00 배종부 목사-영안(靈眼):
오후 3:00- 4:00 정도출 목사(전 단장, 조은교회 제3회 부흥성회 인도)
8강.화 오후 5:00- 6:00 배종부 목사-방언과 방언 통역(方言 通譯):
저녁 7:00- 8:00 이상각 목사(부총무, 선사교회 제4회 부흥성회 인도)
9강.화 저녁 8:00- 9:00 특강
10강.화 저녁 9:00-10:00 배종부 목사-성령의 기름 부음:
제3일:
11강.수 오전 9:00-10:00 특강 배종부 목사
12강.수 오전 10:00-11:00 배종부 목사-생수(生水)의 강(江):
오전 11:00-12:00 김성기 목사(총무, 구리영락교회 제5회 부흥성회 인도)
13강.수 오후 12:00-13:00 배종부 목사-100배 축복(祝福)의 원리:
시작하는 날 월 오후 1시 30분 - 2시까지,
서울 지하철 4호선 노원역 1번 출구에서,
3447 흰색 승용 차량으로 픽업합니다.
차량 담당자 이사라 권사에게
필히 전화하세요.
010-4209-5869
2시 이후에는 택시를 이용하여 코롱A로 오시거나,
1132번, 1154번 버스를 타시고,
두 정거장 지나 ‘상계중학교’ 에서 내리셔서 길을 건너 오시면,
코롱A 상가 3층에 새성교회가 보입니다.
차량을 갖고 오시는 분은 반드시 코롱A 지하 2층에 주차하시고,
'새성교회' 라고 메모하셔서, 차 안에 보이게 두셔야 합니다.
다른 장소는 스티커를 부착합니다.
宿食(숙식)은 ‘건영 스파벨리’ 사우나 티켓을 매일 개인당 드리며,
화, 수 아침은 禁食(금식)입니다.
새성교회당에서 여자 분들은 숙박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 문제로, 이번에 한하여 새성교회당(여)과 호텔(남, 4-5만, 개인 부담, ‘창동 론스타’ 로 안내해 드림) 에 각각 주무셔야 합니다.)
뜨거운 찬양,
불 붙는 기도,
명쾌하고 폭발적인 성령과 悔心(회심)의 말씀 강의,
3일 간의 지속적인 성령에의 젖음,
은사와 능력의 폭발,
눈물의 통회,
생수의 강,
영적 새출발의 결단이 일어납니다.
성령 받고,
은혜 받은 종들 개개인에게,
각자 영권, 인권, 물권의 100배 축복이 넘치도록 부어집니다.
♥ 제69차 <성령 컨퍼런스> 개회에 즈음하여... ♥
여기 <성령의군대>가 ‘제69차 성령 컨퍼런스’ 로 대행진합니다.
성령을 받으십시다.
은사를 훈련하십시다.
능력을 받으십시다.
성령으로 떨치고 일어 서서 새출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 하십시다.
3일 간의 성령의 대축제가 여러분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이 힘든 위기의 시간들을 승리로 장식케 해 드릴 것입니다.
뜨거운 痛悔(통회)의 눈물이 살아 나고, 강력한 祈禱(기도)가 회복되고, 恩賜(은사)가 터지고, 성령의 能力(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성령의 영권, 인권, 물권이 회복되어, 이 고통의 시간들을 승리로 장식케 될 것입니다. 능히 성령의 비전으로, 앞으로 달려 갈 영적 底力(저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 같이 오셔서 함께 성령 받고, 은사 받고, 능력 받아, 능히 떨치고 이기고 승리하십시다.
환영합 니다. 어서 오십시오.
♥ <성령 컨퍼런스>의 10가지 이상의 선물 ♥
<성령 컨퍼런스>에 오시면, 아래 10가지 이상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1.靈界(영계)를 돌파하는 성령 신앙의 마지막 봉우리가 점령됩니다.
2.성령 신앙과 은사와 능력의 세계 전반이 체계적으로 정리됩니다.
3.강한 영권이 주어져, 말씀과 기도의 권능이 강력해집니다.
4.幻想(환상)과 靈眼(영안), 각종 恩賜(은사)가 열립니다.
5.삶과 재정의 ‘100배 축복권’ 이 주어집니다.
6.성령 동행의 삶으로, 죄가 끊어지고, 인격이 변화됩니다.
7.영 혼 육이 그야말로 충만하게 행복해집니다.
8.말로만 듣던 ‘기적’ 과 ‘능력’ 이 실제로 기도 응답으로 주어집니다.
9.그냥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고, 내 몸으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체험합니다.
10.심령의 뿌리까지 깨어지는 폭발적인 ‘悔心(회심)의말씀’ 과 강의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군대> 지도목사
서울 새성교회 담임목사
배종부 드림
♥ 2021년 <성령의군대> 정기집회 안내 ♥
담임 배종부 목 사 010-2940-1717
안내 강한나 부목사 010-2443-1272
사무 이사라 권 사 010-4209-5869
1.매주 월, 화, 수 오후 2시, 저녁 7시 <기적 기도대성회> 6회
*연중 중단 없이 언제나 상시적으로 개회
주소:서울 노원구 노원로 26가길 25, 코롱A 상가, 새성교회
매주 고정강사 새성교회 배종부 목사 3회 설교
매주 3명의 <성령의군대> 지부장 중심 부흥강사 교대 집회 인도
2.매월 첫주 월, 화, 수 <성령 컨퍼런스>
새성교회당,
2박 3일 숙식하며 연속 진행,
월 오후 2시 개회, 수 오후 1시 폐회
3.목요 산상기도교회
매주 배종부 지도목사 개인 전국 1,000m 고지 이상 순회 <산상기도교회> 운영
월 1회, 제 3주 목 오전 10시 <연합산상기도교회> 운영
4.토요 <성령사관학교>
새성교회당
매주 토 오전 10:00-오후 4:00
상시 등록 가능
♥ ‘殉命의사람’ 배종부 목사 13대 특별기도 ♥
사전 예약하는 분에 한하여,
1>.축복기도, 2>.신유(神癒)기도, 3>.예언기도, 4>.영분별기도, 5>.축사(逐邪)기도, 6>.방언통역기도, 7>.영적무장기도, 8>.십자가확인기도, 9>.문제해결기도, 10>.은사전이(轉移)기도, 11>.사명기도. 12>.사랑하는 사람의 중보기도 13).내적치유 기도 등등...
모든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두고, 충분히 개인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독 신자의 창조적 삶
목면교회 부흥성회>
주제:기독신자의 창조적 삶
강사:새성교회 배종부 목사
시간:새벽 5시-기도 주제설교(3회),
오전 10시-직분자 세미나(1회),
전도 세미나 및 실습(2회),
저녁 7시-심령부흥성회(4회)
부흥회 설교1. 고백하는 인생-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5 P
부흥회 설교2. 슬기로운 인생-슬기 있는 자.....24 P
부흥회 설교3. 선택하는 인생-생명과 복,사망과 저주.....37 P
부흥회 설교4. 길을 찾는 인생-길을 찾는 인생.....53 P
부흥회 설교5. 전진하는 인생-하나님과 함께 전진하라.....70 P
직분자 세미나, 전도 세미나 자료 - 107 P
목면교회 부흥회 총 10회 집회
1.<10일 연속 축복성회>로 준비 - 낮10:30분, 30분 찬송, 1시간 설교
2.부흥성회에 보내 주시니, 감사합니다.
3.약한 교회는 사례나 교통비 일체를 받지 않겠습니다.
4.부유한 교회는 사례를 받아, 교회에 헌금 하겠습니다.
5.한 달에 두 번 이상 부흥회 나가지 않겠습니다.
6.10회에 걸친 찬송과 말씀을 늘 주옵소서.
7.목이 쉬지 않도록, 성대를 지켜 주옵소서.
8.기도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예비케 하소서.
9.성령의 영감과 은혜가 넘치는 성회가 되게 하소서.
10.전도를 가르치게 하소서.
11.해당교회가 주변 교회 목사들에게 참석을 종용하여, 부흥회 광고를 해 주옵소서.
11.부흥회 진행 일정:
새벽 5시 - 기도 주제설교 (3회)
낮 10시 – 직분자 세미나 (1회), 전도 세미나 (2회)
* 자료 복사, 전도지 준비, 전도 실습
저녁 7시 - 심령 부흥성회 (4회)
마16:13-20절
1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1.고백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니다.
2.고백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3.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4.고백자는 축복권이 있다.
5.말씀의 능력과 치료,
6.성령의 말씀,
7.은혜와 감동의 말씀,
8.성령의 떨리게 만드는 역사,
9.은밀하게 치료,
10.위로의 영 임재,
11.문제 해결
주신 말씀에는, 주님을 분명히 만난 사람,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애매한 대답이 대조되어 나타 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신앙과 불신앙의 분기점이 시작된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초보신앙과 성숙한 신앙의 차이가 난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성숙한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따르는가가 신앙의 성숙도이다.
하나의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멀리 멀리 가고 나면, 돌아 올 수 없는 머나 먼 간격이 생기듯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예수님을 누구라 하는가, 이 조그마한 관점의 차이가 한 인생이 마감되고 결산 되었을 때엔, 천국과 지옥이란 엄청난 격차를 만들어 낸다.
예수님이 누군가?
이 자리에 계신 사랑하는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 부르는가?
단순히 그 옛날 유대 지방에 태어 났던 한 유대인인가?
뛰어난 종교가 중의 한 사람인가?
위대한 성인 중의 한 분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인가?
제자들이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14절)
주님이 다시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 예수를 누구라 부르는가?
이 대답은 너무나도 중요한 대답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부지런히 가느라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멋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 종류의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이목, 다른 사람의 말, 다른 사람의 그릇된 비판,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 쓰느라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눈치꾼 인생이 있다.
사람들이 주님을 누구라 부르는가, 어떻게 부르는가에 신경 쓰는 사람은 눈치꾼 인생이다. 그럴 필요 없다. 이러한 쓸 데 없는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은 제대로 신앙생활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이 사람이 이 말 하면 솔깃하고, 저 사람이 저 말 하면 솔깃한다. 신앙생활은 남의 눈치 보며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지금,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하나님,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지금 나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와 나의 관계는 과연 무엇이냐?”,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이냐?”, “나는 너의 삶 속에서 몇 번 순위에 서 있느냐?” 이것을 묻고 계신다.
우리는 이 예리하고, 가장 중요한 주님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남의 의견을 무작정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내가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바로 이 내가, 나의 삶 속에서 깊은 사랑과 은혜로 다가 오시는 참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 하나님 체험이 중요하다.
이 하나님 인식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배우고, 경험한 것만 알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 배우고 경험한 것 속에는 편견과 오류와 아집 등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신앙 속에는 이러한 요소가 많다. 이 쓸 데 없는 잡동사니와 지푸라기 들을 올바른 신앙의 잣대로 가려 내야 한다. 신앙의 골격이 바로 서 있어야, 비로소 그 신앙이 삶을 변화시킨다. 여기에 올바른 신앙고백이 필요한 것이다.
은혜를 사모하되 올바른 은혜를 사모해야 하고, 신앙을 고백하되 정확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자기 편견과 독단 속에 자리 잡은 신앙, 아집으로 뭉쳐진 신앙, 무조건 감정으로 흐르는 신앙! 이러한 신앙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져야 한다. 삶의 열매를 보고 신앙을 평가하라.
오래 전에, 어느 기도원에 갔는데, 강사 목사가 욕을 참 잘 했다. 그런데 이 욕쟁이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지랄하네” 하니까, 그 소리를 들은 어떤 여자가 “아멘” 했다. 저는 속으로 그 여자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지....”
여러분! 주님을 올바로 믿어야겠다. 올바른 신앙 만을 고백해야 하겠다. 이 사람의 이 말, 저 사람의 저 말을 따라 가는 신앙생활을 이제는 그만 청산하시기 바란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주 예수를 체험하는 신앙의 자리로 나아 가야 하겠다.
신앙에는 뿌리와 지조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누구라 하든 간에 상관 없다. 나는 성경 말씀을 따라, 내가 발견한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영생의 길을 가면 된다.
오늘 14절을 보니,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지어 낸다. 사람의 숫자 만큼 하나님의 숫자도 많다.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 각자 그리고 있는 하나님 상은 수 만 가지이다. 이건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본문 성경을 보니, 어떤 사람은 주님을 세례 요한으로 믿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인가?
세례 요한의 표상은 한 마디로 정의의 표상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목숨을 던져 정의를 수호하는 정의의 대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다. 오늘날 주님을 이러한 시대의 예언자로, 사회 개혁가로, 정의의 투사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피가 끓는 젊은이들에게 정의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다.
예전에 군에 있을 때 군종실 벽에 액자가 하나 붙어 있었다.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제목 하에 이런 설명들이 붙어 있었다.
Jesus is?
- Revolutionary, Saviour, Teacher, Doctor!(예수? - 혁명가, 구세주, 선생, 의사!)
그렇다. 우리 주님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불의를 자행하면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무서운 저주를 퍼부은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그러나 주님은 사회 혁명가가 아니다.
주님에게는 불의를 용납하지 아니하는 기백이 있었다. 두려움 없이 사회를 향하여, 불의를 향하여, 정치가, 종교가들의 잘못을 향하여 무섭게 질타하셨다. 그 모습은 이미 죽은 세례 요한의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주님은 세례 요한이 아니었다. 우리는 주님의 한 단면 만을 보면 안된다. 주님을 혁명가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기독교는 정의의 차원을 넘어 가는 종교이다. 복음은 정의 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
우리는 주님 전체를 보는 눈을 끊임없이 길러야 한다. 주님은 정의 만을 외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무조건 사랑만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무조건 ‘오냐, 오냐!’ 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무조건 축복만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세례 요한의 모습이 주님에게 있었지만 주님이 곧 세례 요한은 아니었다.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주님을 엘리야로 이해했다.(14절)
엘리야는 ‘불의 사자’ 로 상징된다. 불은 성령을 상징하는 대명사이다. 성령은 사도행전에서 불길같이 다락방 신자들에게 영적으로 타 올랐다. 엘리야는 성령의 대변자이다.
엘리야가 주는 이미지는 뜨거운 불로 대적을 가차 없이 쳐부수어 나가는 질풍노도와 같은 모습이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인격적인 삶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가 맺혀 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뭔가 영웅적이고, 군대적이고, 급하고, 말할 수 없이 격렬하고, 뜨거운 이미지가 엘리야가 주는 이미지이다.
우리의 신앙은 뭔가 뜨거움이 있어야 한다. 냉냉함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화끈함과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뜨거움 속에 강렬한 생명력이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주님의 사랑을 사모하고, 충성을 위해 몸을 불사르는 뜨거움이 항상 불타고 있어야 한다. 신령한 뜨거움이 있어야 한다.
찬송할 때 뜨거운 가슴으로 찬양하지 못하는 분은 아직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분이다. 부흥회 때에도 뜨겁게 찬송 한번 불러 볼 수 없는 믿음의 용기라면 좀 곤란하다.
그러나, 이 좋은 신앙의 뜨거움도 자제가 필요하다. 불신자 앞에서 지나치게 뜨거우면 광신자라고 말한다.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가슴은 한없이 뜨거워야 하지만, 이 뜨거움이 감정 일변도로 흘러 가서는 아니된다. 뜨거움은 내적으로 잘 갈무리 되어야 한다.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영혼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뜨겁다. 이제는 이 뜨거움을 사회적 차원으로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사회를 책임지고, 사회를 개조하는 이지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역사를 책임지는 신앙상이 이제 한국교회에는 필요하다.
한 때 1,200만명의 성도가 살고 있다는 이 한국 사회가 점점 더 타락해 가고 있다. 믿는 사람들에게서 빛과 소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 같다. 이렇게 되고 만 이유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너무 감정 일변도의 개인주의 신앙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참 신앙의 모습을 깊이 조명해 보노라면, 두 가지의 맥이 구비치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다. 사도행전적인 뜨겁고, 신비적이고, 폭발적인 어떤 모습이 있다.
반면에 고난의 가시밭 길, 소외의 외로운 길, 희생과 이타의 길, 인류 구원과 사회 구원을 위하여 말없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 가는 사도 바울적인 모습이 있다. 이 두 가지 신앙의 흐름 가운데 주류는 사도 바울의 신앙 모습이다.
주님의 삶을 살펴 보아도, 대중적인 영웅의 모습은 초기 사역에 잠간 비치다 사라지고, 그 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온유, 은거, 고난, 희생, 사랑, 이타, 죽음... 등의 이미지 들이다.
참 신자의 길은 자기 혼자 만의 축복과 안일을 찾아 들어 가는 신앙이 아니다. 이 시대와 사회의 아픔을 함께 양 어깨에 짊어지고, 내가 사랑을 베풀고, 봉사하고, 희생할 이웃을 찾아 가는 헌신과 이타의 모습 속에 참 신자의 길이 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모두의 신앙이 이러한 성숙한 차원으로 나아 가기를 바란다.
나는 기도를 뜨겁게 하고, 0전도회 회장을 하고, 교회 일에 언제나 앞장 서는 교인을 원치 않는다. 언제나 말 없고, 언제나 숨어 있고, 언제나 보이지 않게 일하고, 말 없이 목사를 깊이 사랑하고, 아파하며, 기도하는 그런 숨은 성도를 원한다. 주님도 그럴 것이다.
신앙생활을 자칫 잘못하면 화려한 외형적 포장 외에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이해했다.(14절)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이다. 그는 멸망해 가는 조국을 바라 보면서, 그 멸망의 와중 한가운데 서서, 피 눈물로 민족의 회개를 외치고, 자기의 몸으로 영적 국경을 지킨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예레미야 만큼 민족적인 지도자의 상을 가진 애국자는 찾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주님은 단순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지난 날 한국역사 속에서 교회는 민족사에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걸어 왔다. 3.1 운동 등에서 보여 준 민족을 위한 교회의 선구자적인 모습은 너무나도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한결같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하나님 나라 사업이다. 순수 복음 선포 사업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사회를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망각해서는 아니된다.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 라 했다.(14절)
성경에는 수 많은 선지자, 위인들이 나온다. 사람들은 주님을 그들 중의 한 탁월한 사람으로 본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한 위대한 성인으로 본다. 뛰어난 종교가의 한 사람으로 본다.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12명의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친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주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해야 하는가? 15절에 주님의 질문이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 인간 배종부여!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의 이 부르시는 음성에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 만이 아십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이라 말씀 하시는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은 우리들에게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슬픔 가운데서 울고 있을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물으신다.
“슬퍼 우는 그대여! 너는 나를 누구라 부르느냐?”
우리가 낙심하여 앉아 있을 때, 절망 속에서 괴로워 할 때, 고난과 고통의 현장 속에서 몸부림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 그리고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주님의 부르시는 이 음성에 우리는 대답을 해야 한다.
여러분! 무엇이라 대답하실 것인가?
이해인 수녀의 시 가운데, “또 다시 당신 앞에...” 라는 아름다운 시가 있다.
살아 있는 거울 앞에 서듯
당신 앞에 서면
얼룩진 얼굴의 내가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나의 말도
어느 새 낡은 구두 뒷축처럼 닳고 닳아
자꾸 되풀이 할 염치도 없지만,
아직도 이 말 없이는
당신께 나아 갈 수 없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소서. 이 죄인!
여전히 믿음이 부족했고,
다급할 때만 당신을 불렀음을...
여전히 게으르고, 냉담했고,
기분에 따라 행동했음을...
여전히 나에겐 관대했고,
이웃에겐 인색했음을...
여전히 불평과 편견이 심했고,
쉽게 남을 속단하고 미워했음을...
여전히 참을성 없이 행동했고,
절제 없이 살았음을...
여전히 말만 앞세운 이상론자였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였음을...
용서하소서. 주여!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인 이 나의 모습!
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지 아니 하고서는 결코 내 인생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는 이 연약한 나의 모습!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이라 고백할 것인가?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오늘 마 16:16절에서,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내 인생의 주장자, 주인, 전부이십니다.”
“주님 만이 나의 유일한 주장자이십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내게는 주님 보다 더 소중할 수 없습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베드로는 일생에 3번의 고백을 주님께 드렸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회개의 고백을 드렸다.
두 번째 고백은 3년 동안 주님을 배운 후에, 드린 본문의 신앙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번째 고백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드린 사명의 고백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 앞에 우리는 이 3번의 신앙고백이 필요하다.
회개의 고백, 신앙의 고백, 사명의 고백!
이 베드로의 고백이 여러분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바란다. 이 위대한 신앙고백 위에 여러분의 인생의 집을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흔들리지 아니하는 반석 위에 영원한 삶의 집을 지으시기 바란다.
우리의 고백을 받으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복이 있도다.”
그렇다. 진실로 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다. 너무나도 복된 심령이다. 주님의 질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고백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고백이 완벽할 때, 주님도 전폭적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주님을 참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사람 만이 참 생명을 얻는다. 주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고백하는 사람 만이 영육의 구원과 축복을 얻는다. 주님 만이 나의 생사화복을 주장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 만이 그 삶을 주님께 맡길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참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영위할 수 있다.
베드로는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 위에 우리의 교회가 서 있다.
“주”란 “주인”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야”를 말한다.
“기름 부음 받으신 분”이란 뜻이다.
“구세주”란 뜻이다.
“구세주”란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신 분”, “나를 죽을 죄에서 건져 내신 분”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왕”을 뜻한다.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왕과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히 구별했다. 주님을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주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요 나의 구주요 나의 왕이란 뜻이다.
구원을 얻으려면 주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인 것을 고백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나의 주인이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구원을 얻으려면 주 예수님이 나를 죄로부터,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굴레로부터 구원해 내신 구주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삶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위탁해야 한다.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 주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 왕께 기꺼이 복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완전한 구원의 삶을 얻는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구주로 인정하고, 내 삶의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
아멘. 됐다!
이 고백하는 인생이 참으로 복된 인생이다. 이 위대한 신앙고백을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육 간의 풍성한 복을 허락하신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지 모른다. 구원 받는 것은 너무 간단하고 쉽다. 진리는 항상 평범한 곳에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 혹시나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거든 이제는 다 믿으시고, 이 간단한 신앙고백을 주님께 드림으로 구원 받으시기 바란다.
구원 받는 것이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다. 구원 받은 자로서 주님을 잘 믿고, 말씀대로 따라 섬기며, 그대로 지켜 사는 일이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일평생을 애쓰고 노력하며, 이 신앙의 길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 힘들지라도, 우리의 가는 이 길이 소망이 있는 것은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이 언제나 내 곁에 서서 나를 붙드시고 도우신다.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서, 시련의 와중에서 주님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신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 가는 자에게는 주님이 힘을 주시며, 용기를 주시며, 길을 열어 주신다. 어렵고 힘들지라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 가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란다.
288장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 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함은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오늘 말씀 17절에서, 주님은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하신다.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시간 이 위대한 신앙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고, 주님의 약속하신 축복이 바로 나의 축복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확고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그러면 어떠한 복을 주시는가?
1.구원의 복을 주신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 - 복종 선언,
나의 구주 - 영혼 맡김,
나의 왕 - 나의 주장자, 인도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롬10: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의 확신 가운데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저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가족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하라.
미국 남부도시에서, 장성한 4아들을 둔 어머니가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들들이 침대에 둘러 선 것을 본 어머니는 3 아들에게 “굿 나잇 키스를 해 다오.” 부탁했다. 3 아들은 작별의 키스를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막내 아들 앤디에게는 “얘야! 너는 굿바이 키스를 해 다오.” 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어머니의 임종 석상에서 주님을 영접했다.
어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 그런데 한 할머니는 틈틈히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다. 자세히 보니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할머니! 성경을 왜 그렇게 읽으세요?”
“아! 이제 곧 하나님 앞에 갈 텐데 성경은 다 읽어서 뭐 합니까? 이 사람들은 천당 가면 다 만날 텐데 준비해야지요.”
할머니는 구원의 확신과 소망이 넘쳐 나고 있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해드가 눈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할머니를 한 사람 구해 주었다.
“아유! 고맙기도 해라. 예수님을 믿는가 보지요?”
“아니요.”
“아니 뭐요? 다 늙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나처럼 갑자기 죽으면 어쩔려고 그래요.”
이 위대한 노교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교회 갔더니 목사님이 대환영을 하면서, 철학적 설교를 시작했다.
“목사님! 철학 얘기는 그만 하시고, 그 할머니가 가졌던 신앙을 말씀해 주세요.”
2.영혼의 복을 주신다.
신앙고백이 확실한 자에게 주님은 영혼이 잘 되는 축복을 주신다. 영혼이란 우리의 영과 혼, 마음, 정신을 말한다. 주를 잘 믿고, 확실한 신앙고백 위에 선 사람은 그 영혼이 축복을 받는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 3서 2절의 사도 요한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한 사람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다.
인생의 모든 행복의 근원은 영혼에게 달려 있다. 행복이란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내 영혼이 얼마나 기쁜가? 평안한가? 즐거운가? 감사하는가가 바로 행복의 관건이다.
내가 어떠한 정신으로, 어떠한 마음을 먹는가에 따라서 내 인생이 결정된다. 이 영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잘 되는 것처럼 복된 인생이 없다.
예레미야는 말씀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17:7절)
시편 기자는 말씀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1-2절)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하다.” 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했다.
얼마 전에 J.F.K (죤 에프 케네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에서 케네디를 암살한 주범은 죤슨 미국 대통령이라 했다. 케빈 코스터너는 설득력 있게 이 사실을 규명해 나간다. 그런데 죤슨 미국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 사람이 나를 부러워 할 것이다. 영웅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다.”
영화를 보고 죤슨의 말을 생각하니, 정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서 출세한다고, 형통하다고,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 영혼의 상태에 달려 있다.
행복은 저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내일 나에게 다가 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나의 마음 속에 있다.
여러분! 행복하신가?
아마 행복하지 못하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때때로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면 참 은혜가 될 때가 많다.
“항상 기뻐하라.”
반대로 하면 뭔가?
“항상 슬퍼하라.”
어느 게 좋은가?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 좋은 것을 마다 하고 항상 찌푸리고 산다.
“범사에 감사하라.”
반대는 뭔가?
“범사에 화를 내며 살아라.”,
“범사에 신경질을 팍팍 내며 살아라.”,
“범사에 욕하며 살아라.”,
“범사에 성난 표정으로 살아라.”,
“매사에 팔자타령만 하고 살아라.”,
“범사에 불평만 하고 살아라.”
감사하지 않고 사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알겠는가?
인간의 본래 모습이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 불만하며 사는 것은 잘못된 모습이다.
다시 물어 보자.
여러분! 행복하신가?
행복하신가? 아멘.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사셔야 한다.
주를 고백하며 사는 우리에게 불행한 게 뭐 있는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탐욕 때문이다. 진실로 믿음의 마음으로 세상을 한번 바라 보라.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희망 찬 우리의 인생인가?
어느 예쁜 여학생이 목사님을 찾아 왔다. 그녀는 부모가 가난하여 대학에 갈 수가 없어서 절망하고 있었다.
“이제 저는 아무 가진 것이 없어요.”
목사님이 종이 한 장을 주면서 말했다.
“아직도 학생에게 남아 있는 것을 써 보세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녀는 “건강”이라고 썼다. 이어서 “음식에 굶주리지 않음”, “어머니는 인자하심,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심”... 그러다가 “지금은 큰 실망 중이심” 이라고 썼다. 갑자기 글을 쓰다 말고, 소녀는 벌떡 일어 섰다.
“실망하시는 아빠를 위로해 드려야 해요. 저는 약간 바보였나 봐요.”
자세가 중요하다. 마음 가짐이 중요하다. 이것을 두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자세는 사실 보다 중요하다.”
부도로 고생하던 한 자매가 예수님을 만나 기도하고, 마음의 평안을 회복했다.
실제로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에 뛰어 드는 사람의 자세가 어떠냐에 따라서 일의 성패가 달려 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나를 도와 주신다.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신다. 이러한 강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확신과 믿음의 자세가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
왜 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불행해야 하는가?
왜 머뭇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왜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행복하다.
주님이 내 곁에 계시기 때문에 행복하다.
성공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실패했을 때에는?
더욱 더 감사해야 한다.
건강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러면 질병에 걸렸을 때는?
두 말 없이 더욱 더 감사해야 한다.
이 밤에 여러분의 고민되는 문제, 직장의 문제, 사업의 문제, 사람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문제, 가정의 문제, 장래의 문제, 질병의 문제 모두를 기도 속에서 주님께 감사함으로 믿고 맡길 때 다 해결됨을 믿으시기를 바란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구주 예수님을 고백함으로 영혼과 삶이 행복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3.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마음의 평안의 축복이 있다.
어떠한 두려움이 엄습해 와도 놀라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질이 다르다. 이 놀라운 평안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다. 어려움과 고통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더욱 더 활활 불타 오르는 평안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14:27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신곡>으로 유명한 시인 단테가 어느 날 어떤 수도원의 대문 앞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문을 지키던 신부가 세 번이나 물었다.
“누굴 찾소?”
한 참 후에 단테가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난 평안을 찾고 있소.”
한 부자가 누구든지 참 만족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으면 백만불을 주겠다고 광고를 냈다. 구름 같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당신은 무엇이 행복하오.”,
“좋은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
“좋은 가정이 있습니다.”,
“당신은?”,
“나는 많은 학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왔소? 지극히 만족하고 산다면 백만불이 무슨 필요가 있소?”
그렇다. 우리는 허상을 좇고 있다. 우리는 일시적인 평안에 우리의 몸과 마음, 온 영혼을 다 쏟아 붓고 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 진실로 주님 안에서,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평안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아아! 내 맘 속에 참된 평화 있네.
주 예수님 주신 평화!
시험 닥쳐 와도 흔들리지 않아,
아 귀하다 이 평안함.
주가 항상 계셔 내 맘 속에
주가 항상 계셔 아! 기쁘다.
주 나의 맘에 계셔 위로하시네.
어찌 내가 주를 떠나 살까? <473장 찬송>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하여, 죽어도 주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4.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가정의 축복을 받는다.
칼빈은 가정을 교회 안의 교회라 했다.
방관덕 목사의 설교 가운데 아름다운 가정의 8가지 모습을 말씀한 대목이 있다.
1.부담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가정,
2.부부 간의 위로와 자녀의 응석이 있는 가정,
3.부드러운 격려로 용기를 주는 가정,
4.조용히 반성할 기회를 주는 가정,
5.따뜻한 사랑으로 미소가 넘치는 가정,
6.정다운 대화와 노래가 있는 가정,
7.하나님과 항상 의논하는 가정,
8.주일이면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가는 가정.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가정은 어떠한가?
이 8가지가 구비된 가정이라면 참으로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이러한 아름다운 가정의 축복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주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나아 갈 때 오는 것이다.
한 여성도가 목사님께 상담을 하러 왔다.
“목사님! 저는 제 남편을 죽이고 싶습니다. 글쎄! 이 ( )같은 놈이 이중생활을 하지 뭡니까? 당장 때려 죽였으면 좋겠어요.”
목사님이 그 여성도의 얼굴을 보니, 이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성도의 얼굴이 아니라 악귀나찰의 얼굴이었다. 거의 다 죽게 된 얼굴이었다.
“자매님! 제가 보기에는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당신이 먼저 죽게 생겼어요. 우선 당신이 살아야 할 것 아니요? 남편은 놔 두고 당신 자신부터 살리시오.”
“어떻게요?”
“자! 우리 하나 하나 풀어 가 봅시다. 우선 내 마음을 먼저 다스립시다. 그리고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 보세요. 용서해 보세요. 더욱 더 가능하다면 남편을 축복해 보세요.”
목사님은 자매를 위하여 함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 자매는 목사님의 충고에 순종했다. 애쓰고, 울면서,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사이엔가 남편을 용서하게 되었고, 그 영혼이 너무 너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엉엉 울면서 남편을 용서했다.
그리고 남편을 축복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첩도 진심으로 축복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집에 남편이 들어 오면 정성이 지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첩의 안부와 건강을 물으면서, 잘 살기 바란다고 축복해 주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목사님! 뭐요? 축복이요? 나 같으면 당장 두 연놈을 잡아 죽여 버리지! 쓸개도 없어요?”
아! 이 자매의 정성과 기도가 응답되기 시작했다. 남편이 집에 자주 들어 오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첩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더니, 그만 이 불륜의 관계를 청산해 버렸다. 가정이 행복의 보금자리로 다시 바뀌었다.
지금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신 분, 가정에 어려움이 많으신 분, 남편이 바람 피우는 분, 아내가 집을 나간 분, 자녀가 애 먹이는 분, 아직도 주를 믿지 않는 가족들이 계신 분들이 이 자리에 계시거든, 내가 먼저 주님 앞에 회개하시기 바란다.
내가 주님을 똑바로 섬기지 않고, 내가 똑바로 신앙생활 하지 않고, 내가 기도하지 않고, 내가 주를 믿는 성도의 증거를 나타 내지 못했기 때문에 내 가정이 이렇게 된 것이다.
이 밤에 눈물로 회개하고 가정을 재건하시기 바란다. 남편을 위하여, 아내를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아니 불쌍한 나 자신을 위하여 간절히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시기 바란다.
5.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물질의 축복이 받는다.
신명기 28:2절 이하에는 이런 축복의 말씀이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1>.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2>.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3>.네 몸의 소생과, 4>.네 토지의 소산과, 5>.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6>.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7>.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8>.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학개 선지자는 말씀한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
신명기 8:18절은 말씀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주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주를 잘 섬기며 사는 성도를 주님은 결코 외면치 않으신다. 절대 의식주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죤 웨슬레가 돈에 관하여 설교를 했다.
“돈을 열심히 모아야 합니다.” 하니까, 제일 앞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아멘” 했다.
“둘째로 돈을 열심히 저축해야 합니다.” 하니까, 또 “아멘”했다.
“셋째로, 우리의 돈을 이웃을 위해 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니까, 그만 벌떡 일어 나서는 나가 버렸다.
부동산을 하던 복부인인 한 여전도회장이 사회하면서 “우리 다 같이 찬송가 105동을 부릅시다.” 했다고 한다.
어느 신실한 장로님이 입신을 했다. 천사를 따라 천국 가는 길을 가고 있는데, 두 갈래의 길이 나타 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 쪽 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 가벼운 차림에 맨 손으로 가는데, 다른 한 쪽 길로 가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등에 무엇인가를 잔뜩 지고 있었다.
“저기 저 사람들은 무엇을 저렇게 지고 저 길을 갑니까?”
“저 길은 바로 지옥 가는 길일쎄. 어디! 저 자루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한번 볼 텐가?”
천사가 자루를 여는데, 그 속에는 돈, 금, 은, 보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지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돈 주머니를 짊어지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생각 하시는가?
우리는 주를 믿으면서 반드시 명심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탐욕을 버리는 일이다. 욕심을 부린다고, 염려한다고 주님이 물질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주를 잘 섬기면 물질을 구하지 않아도 주님이 알아서 채워 주신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주님께 물질의 축복을 받고 싶은 분은 이웃에게 날마다 베푸는 삶을 사시기 바란다. 주님께 풍성히 바치는 삶을 사시기 바란다. 탐욕을 버리고 사시기 바란다.
“새성교회 장로는 죽을 때,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해야 한다.”
이것은 담임목사인 나의 장로관의 첫째 조건이다.
잠언 11:24절에 이렇게 말씀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전도서 11:1 절은 말씀한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1.흘러 가는 물 위에 - 인생의 과정 과정에
2.던지라 - 대상을 가리지 말고, 뿌리라.
3.자꾸 심으라.
내가 먹을 양식을 남을 위해 나누어 주는 것은 하늘 창고에 곡식을 저장하는 것이다. 이 양식들은 반드시 여러 날 후에 찾게 된다.
이웃을 위해, 주를 위해 풍성한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 땅 위에 살면서, 물질의 풍성한 축복을 다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6.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불행이 없다.
언제나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의 행복은 상태에 있지 않고, 자세에 있기 때문이다.
주를 잘 믿으면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18절)“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성도의 모임이다.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선 성도의 삶 속에는 질병, 사망, 슬픔, 저주, 악독, 죄악, 불행... 등의 음부의 권세가 감히 침범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의 검을 들고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7.주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축복권이 있다.
마귀의 권세를, 사람의 운명을, 나의 운명을 풀 수도, 묶을 수도 있다.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천국 열쇠”- 복음 선포권, 축복권, 사람을 좌우하는 권세, 사물을 다스리는 권세...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귀한 은혜의 밤에 사랑하는 온 성도님들의 가슴 속에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으시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내가 주를 잘못 믿어 온 것이 있다면 회개하자. 지금까지 내가 주를 향한 신앙고백에서 부족함이 있었다면 이 시간 정리하자.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시간 강권적으로 역사해서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 들어 가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란다.
다 함께 눈을 감으라. 통성기도 하라.
나의 신앙을 돌아 보자.
나의 신앙고백을 회고해 보자.
탐욕에 찌들려 살고, 정욕에 부대껴 살고, 주님과 세상에 두 다리를 걸치고 살아 온 지난 날의 생활을 회개하자.
내 가정을 두고 회개하자. 내 죄악을 두고 회개하자.
염려하며, 걱정하며, 고민하며, 하나님을 불신하며 살아 온 지난 날을 회개하자.
내가 주님을 똑바로 섬기지 않았고, 내가 똑바로 신앙생활 하지 않았고, 내가 기도하지 않았고, 내가 주를 믿는 증거를 나타 내지 않았던 죄악들을 모두 회개하자.
용서하지 못한 죄악을 회개하자. 주 앞에 온전하게 서지 못한 죄악들을 다 회개하자.
주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눈을 감은 채로 주님 영접과 결단토록 할 것)
1.주 예수님을 진정한 내 삶의 주인으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구주로, 나를 인도하시는 왕으로 모시고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가?
2.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내 삶의 주인으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구주로, 나를 인도하시는 왕으로 모시고 살기로 결심하는가?
3.탐욕을 버리고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헌신하며, 지금 현 상태대로 감사하며, 기뻐하며, 복음 전도자로, 충성된 일꾼으로 살아 가기로 결심하는가?